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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KAIST에 766억원 내놓은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의 人生 

“유럽 출장서 느낀 열등감이 기부 이끌었다” 

직업 네 번 바꾸면서 일군 재산 환원 “과학기술 발전만이 국력 키워”
사업 위기, 조폭 위협도 버텨내… 신장암 이어 간암 투병 “걱정 말라”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일면식도 없었던 서남표 당시 KAIST 총장의 인터뷰를 보고 기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매년 10월이면 세계의 이목은 스웨덴 한림원으로 쏠린다.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노벨상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901년 제1회 시상식이 열린 이래, 800여 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지만 한국은 평화상 분야를 제외하고 전무한 상황이다. 수상이 불발되면 매번 자성과 노력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아직 결실은 없다.

이런 가운데 노벨상에 도전장을 낸 인물이 있다. 이수영(83)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이 회장은 과학자가 아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 기업가다. 그런 그가 무슨 노벨상인가. 그는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을 염원하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에 거액을 기부했다. 올 7월, 이 회장은 KAIST에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쾌척하는 자리에서 “KAIST에서 우리나라 최초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와야 한다”며 기부 취지를 밝혔다. 노벨상 수상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발판이자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평소의 신념을 거듭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과업을 수행할 적임자가 과학기술 전문 교육기관인 KAIST였고 거의 10년에 걸쳐 기부행렬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2012년 80억원, 2016년 1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유증기부(유언에 의한 유산 기부)한 바 있다. 모두 합치면 총 기부액이 766억원으로 KAIST 개교 이래 최대 규모다.

입이 떡 벌어지는 기부 액수만큼 삶의 이력도 대단하다. 1936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30년대 생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살아왔다. 기자, 목축업자, 모래 판매업자에 이어 부동산 사업가까지 그의 삶은 쉼 없는 변화와 도전의 여정이었다. “야전군 사령관처럼 살았다”는 그의 말에서 80여 생애의 고투(苦鬪)가 오롯이 와닿는다. 치열하게 일군 재산을 기부한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너무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월간중앙은 9월 5일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로에 있는 맨하탄빌딩 이 회장 사무실에서 그의 인생 여정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미래 얘기를 들었다.

신군부 탄압으로 접게 된 17년 기자생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가운데)이 기자 시절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왼쪽 둘째), 정주영 현대 회장(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찍은 사진. 특히 이병철 회장은 이 회장에게 어깨동무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대했다.
팔색조 인생을 살아온 이 회장은 그래야 이해가 잘 된다는 듯 출생과 성장, 학업, 사회생활 과정을 시대별로 따라가면서 설명했다. 특히 기자생활이 오늘의 이수영을 있게한 변곡점이었다는 인상을 짙게 내뿜었다. 서울의 유복한 집안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수영 회장은 사법시험에도 도전했으나 낙방하고 “두 번 하다간 죽겠다 싶더라”며 진로를 틀었다. 물리적 학습량이 승부를 결정하는 사법시험을 감당할 체력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영어학원 게시판에서 우연히 본 언론사 모집 공고가 그의 초기 사회 여정을 결정했다. 그는 [서울신문] 견습 기자를 거쳐 [한국경제신문]의 전신인 [현대경제일보]에서 본격적으로 언론인의 길을 걷다 [서울경제신문]에서 언론사 생활 마감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신문사의 재무부·경제기획원·건설교통부 등 주요 경제 부서 출입처는 대부분 남성 기자의 몫”이라며 “그래서 문화부에 발령 받았는데 전화위복이라고 재벌 총수 만날 기회는 문화부가 더 많았다”고 기억했다. 출입처가 아니어서 취재원을 더 편하고 부담없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총수를 만났을 텐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나?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서울경제신문]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편집부국장이 ‘이병철 회장이 귀한 골동품을 갖고 있다는데 한번 접근해봐’라고 하더라. 대상이 이병철 회장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의례적인 취재 지시였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승부욕을 자극했다. ‘다른 차장급 기자도 시도했는데 접근도 못했어.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속으로 ‘당신들은 못했어도 내가 한다’고 다짐하며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접촉했나?

“처음엔 비서실을 통해 연락을 취해봤으나 번번이 완곡한 거절을 당했다. 하는 수 없이 우회로를 선택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출입 당시 나를 많이 아꼈던 홍재선 전경련 회장의 힘을 빌렸다. 우여곡절 끝에 이 회장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분위기는 어땠나?

“인사를 나눈 뒤 차를 마시는데 마치 맹수가 노려보듯 매섭게 살피는 이 회장의 눈길이 느껴졌다. 진짜 골동품 취재를 하러 왔는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몇 번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는 파악이 다 되었는지 ‘아빠 미소’로 나를 쳐다보더라. 그 덕에 취재를 잘 마치고 이후에도 인연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

이수영 회장은 기업인 이병철을 이렇게 기억했다. “보통 재벌 총수들은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회장은 달랐다. 외부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 이수영 기자’라고 이름을 똑똑히 불러주곤 했다.” 이병철 회장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어느 날 이 회장이 500만 평 땅을 사서 농원을 만든다고 하더라. 그의 책상 위에 농업 관련 국내외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가축은 물론 식재, 산림녹화 등 폭넓었다. 이 회장은 심지어 언제, 어떤 나무를 솎아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직접 공부하면서 부하 직원들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용인 자연농원이었다.”

이수영 회장은 동양 창업주인 이양구 회장이 사업 위기로 두문불출할 때 단독 인터뷰를 따내 ‘언론인 특별취재상’을 받는 등 소위 잘나가는 기자였다. 하지만 1980년을 끝으로 기자 생활을 접었다.

원래 그때쯤 그만 둘 생각이었나?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신군부의 언론탄압이 시작됐다. 그 당시 해직 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여러 얘기가 돌았지만 왜 해직 기자로 분류됐는지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1980년 창간한 [한국경제신문]에서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무산됐다. 해직 기자 명단에 올랐다는 건 중앙정보부 리스트에도 올랐다는 거니까. 미련이나 회한이 왜 없었겠나. 그러나 기자 아니면 길이 없겠나 하는 생각으로 이내 마음을 접었다.”

우유 급식, 내 아이디어로 시작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과거 광원목장을 운영할 당시 모습. / 사진:KAIST 발전재단
기자인 동시에 목장주이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던 ‘농공병진(農工竝進) 정책’에 공감했지만, 공업보다 농업의 발전 속도가 더뎠다. 제품은 공장에서 뚝딱 찍어내는데 농업은 몇 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이 비료공장을 만든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아무튼 황폐해지는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소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불같이 일었고 나 역시도 동의했다. 그러던 차에 목장을 운영하던 [주간한국] 국장으로부터 돼지 두 마리를 선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안양에 땅을 사 주말농장처럼 목축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키우다 보니 퇴근 후에는 온종일 농장에만 붙어있게 되더라.”

그렇게 돼지 두 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소 15마리, 돼지 1000여 마리 규모까지 커졌다. “낮에는 취재하고 기사 쓰고 돌아와 외양간을 살피는 게 일과였다”는 이 회장은 특히 밤을 새우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새끼는 주로 밤에 낳는데 내 손으로 받아내야 했다. 새끼 돼지가 태어나면 젖 물 때 어미 유두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송곳니도 자르고, 송아지가 뒷다리부터 나오면 자궁에 직접 손을 넣어 머리를 돌려놓기도 했다.” 수의사 역할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당시 돈 3만원이었던 왕진비를 아끼려 어깨너머로 기억해 놨다가 항생제는 물론 혈관 주사까지 놓기도 했다.

수완도 좋았다고 들었다.

“1979년 돼지 파동으로 돼짓값이 폭락했을 때 운 좋게 지인의 주선으로 군에 납품할 기회를 잡았다. 마리당 3만 원도 받지 못할 돼지를 5만 원에 팔았다. 돼지 파동이 한창일 때 80마리 돼지를 팔아 당시 돈으로 400만원을 손에 쥐었다. 밀린 사룟값 내고, 월급이랑 떡값 주고, 축협에 빌린 돈을 갚으니 숨통이 트였다.”

이 회장이 우유 급식의 시초라고 하던데.

“돼지 파동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우유 파동이 났다. 젖소가 너무 많이 보급돼 우유가 넘쳐나게 된 것이었다. 하다못해 어떤 농가에서 납품 못 한 우유를 개천에 내다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중랑천이 우유로 하얗게 뒤덮일 정도였다. 이대로 가다간 망하겠다 싶었지. 버려지는 우유도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 우유 무료 급식이었다. 되기만 한다면 농가, 우유 회사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마침 당시 농림부 장관이 아는 사이였다. 앞뒤 안 가리고 전화했다. 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졌고 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 평균 신장이 올라가고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도 따는 데는 내 공도 없지 않다고 주변에 자랑한다.(웃음)”

모래 채취 사업도 했다.

“목장 부지 대부분이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으로 수용되면서 목축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됐다. 그러던 차에 남은 목장 부지 옆 하천의 모래가 눈에 들어오더라. 그 시절은 주민들이 집을 짓는 데도 밤에 몰래 모래를 가져가곤 했다. 모든 건축의 기본적인 자재가 모래 아닌가. 이거다 싶었다. 모래 채취 사업도 쉽지 않았다. 새벽같이 나가 온종일 흙먼지 마셔가며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도 때마침 전국에 건설 붐이 일 때라 돈 모으는 재미는 쏠쏠했다.”

조폭 위협에도 굳건했지만…


▎2012년 9월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대전 KAIST 회의실에서 열린 발전기금 약정식에서 서남표 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업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목장과 함께 모래 채취 사업을 병행하던 시절 혼자서 회계 업무까지 하기에는 벅찼다. 그때 은행 지점장이던 대학 동기가 도움을 줬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동기를 위해 CD(양도성예금증서)를 하나 해줬던 것에 대한 배려였다. 은행 입장에서도 돈이 꾸준히 예금되니 나쁘지 않았다. 그랬던 동기가 본점으로 이동해 압류된 부동산을 경매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하루는 지나가는 말로 ‘좋은 물건이 있는데 용도변경을 못해서 팔리지 않는다’고 그러더라. 여의도백화점(현 맨하탄빌딩) 5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보아하니 여의도 한복판이라 입지도 좋고 사무실이나 오피스텔 등으로 용도변경만 한다면 활용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 생각됐다. 판단이 서자 소 팔고 모래 팔아 계약금을 마련하고 인수하게 됐다. 알고 있는 인맥과 지식을 총동원해 용도변경에도 성공했다. 기자에서 목축업자, 모래 판매업자에 이어 부동산 업자가 된 것이다. 언론사를 그만둔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이 회장은 특유의 자신감과 추진력으로 위기를 헤쳐나왔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도움을 받을 때는 서울대 법대 인맥의 역할이 컸다. 이에 대해 “사업은 운이다.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더라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던 어떤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나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주변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늘 행복하거나 순탄할 수 없는 법이다. 이 회장은 맨하탄빌딩을 인수하면서 1988년 부동산 전문회사 광원산업을 창업했다. 아파트에 입주자대표회의가 있듯이 맨하탄 빌딩과 같은 건물에도 관리 책임을 맡는 집합건물관리단이라는 게 있다. 이 관리단의 대표를 이 회장이 맡았다. 그런데 몇몇 이해관계자들이 조직폭력배들과 손을 잡고 관리단 계좌는 물론 건물관리권까지 뺏으려 들었다고 한다.

조폭 등살에 한때 지방으로 피신까지 했다고 하던데.

“1998년이었다. 나를 몰아내려고 조폭 100명이 건물로 들이닥쳤다. 다행히 사무실에 있지 않았다. 후에도 영등포세무서를 사칭하며 사무실로 유인하기도 하고 집으로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위협의 강도가 날로 심해지자 결국 지인이 있던 대전으로 한 달 동안 몸을 숨기게 됐다. 조폭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입주자들에게는 내가 수억 원의 돈을 들고 도망갔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결국 10년의 소송 끝에 그들을 쫓아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횡령했던 돈까지 받아냈다. 그 돈으로 창문, 화장실 등 그간 미비했던 부분들을 싹 고쳤다. 불경기에 코로나까지 겹쳐 여의도 빌딩에 공실이 많은데 맨하탄빌딩은 꽉 차 있다.”

자서전에는 ‘건물을 지킨 대신 건강을 지키지 못했다’고 나온다.

“그렇게 10년 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니 몸이 먼저 반응을 하더라. 신장암이었다. 결국 7시간 대수술을 받고 왼쪽 신장을 잘라냈다. 다행히 재발은 없었다. 그러다 2~3년 전에 간암 판정을 받았다.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다. 요즘은 되도록 무리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2007년 외환 자유화 확대 조치에 따라 투자 목적의 해외 부동산 취득 한도가 10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확대됐다. “그 소식을 들으며 눈이 번쩍 뜨였다”는 이 회장은 기회의 땅인 미국에 투자한다. 특유의 눈썰미로 미 연방정부 사회보장국이 입주해 있던 LA의 한 건물에 투자했고, 수익을 냈다. 동시에 해외 부동산 투자는 기부의 첫걸음이었다.

유럽 출장서 느낀 열등감, 기부 의지 일깨워


▎2020년 7월,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KAIST에 쾌척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대전 KAIST에서 열린 발전기금 기부 약정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기부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미국에서 부동산 계약을 할 때였다. 변호사가 ‘계약서에 상속자를 누구로 적을까요’라고 묻는 말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등기를 하기 위해선 상속자를 기재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결혼하기 전이었다. 또 막연하게 대학에 기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이 KAIST였다.”

기부를 결정한 KAIST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어 보인다.

“조폭들 때문에 대전으로 피신 가면서 지나친 KAIST의 모습은 정문에 기둥 두 개만 서 있을 뿐 허허벌판에 초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당시 서남표 총장이 취임하고 나서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서 총장과는 일면식도 없던 상태였다. 그러다 우연히 TV에 나온 서 총장 인터뷰를 보게 됐다.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KAIST의 역할과 임무가 왜 막중한지 얘기하더라. 과학기술 인재를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진심이 느껴지더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KAIST 기부를 결정했다.”

모교(서울대)는 고려하지 않았나?

“1971년 모교인 서울대 법대 동창회 장학재단인 낙산 장학회 이사로 42억원 모금에 참여했다. 2010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KAIST에 기부하고 나서 동문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국가를 생각했을 때 과학기술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오래된 생각이었다.”

과학기술에 집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1976년 유럽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시간이 남아 로마 시내를 관광하려고 한껏 멋을 내고 일본에서 산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도 목에 탁 걸고 나갔다. 그때 뒤에서 일본인 관광객 한 무리가 지나가더라. 순간 재킷으로 카메라를 확 가려버렸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일제 카메라를 산 게 부끄럽고 열등감이 있었나 보다. 뒤이어 오는 미국 관광객은 일본 제품 캐논을 어깨에 걸치고 오더라. 지금은 어떤가. 사업차 미국을 자주 오간다. 어느 공항을 가도 삼성 TV 광고든 실물이든 첨탑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때부터 열등감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게 국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지금도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이 안 팔린다고 하면 필요 없어도 산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은 300조원이 넘고 국내 GDP(국내총생산)의 16%를 차지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석·박사 연구인력 25%가 KAIST 출신이라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KAIST가 자리하고 있다. KAIST에 더욱 투자해야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덧붙이자면 지금 대통령이 밥 먹여 살리나.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먹여 살리고 있다. 프랑스 혁명 구호는 자유가 아닌 ‘빵을 달라’였다. 누구든지 국민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다.”

KAIST는 이 회장의 이번 기부를 받아 설립되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에서 ‘KAIST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를 육성할 계획이다. ‘KAIST 싱귤래러티 교수’ 제도는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지원하는 제도다.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KAIST 연구진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 회장은 ‘이수영 과학교육재단’ 운영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그는 “KAIST 교수들은 대부분 과학자라 경영 경험이 많지 않다”며 “기부금이 좀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도록 직접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못 자고 못 쉬고 번 돈, 허투루 쓰여선 안 돼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기부금이 좀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도록 재단 운영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좋은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고 마는 다른 기부자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다.

“장학재단 업무를 수십 년 동안 해오고 주변 사례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이른바 ‘주인이 없는 돈’, ‘눈먼 돈’이라고 헤프게 쓴다는 점이다. 목적과 다르게 쓰이는 모습들도 봤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유롭게 휴가도 못 가면서 번 돈이다. 다른 기부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 알뜰하게 관리하고 기부자들의 뜻에 맞게 써야 한다. 허투루 쓰이게 할 순 없다. 이런 이유로 싱귤래러티 교수 선발 심사 과정에도 직접 참여할 생각이다. 의지가 강하고 간절한 사람에게 지원할 것이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10년간의 임용 기간 연구비를 지원받고,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 실적 평가가 유예된다. 임용기간 종료 시 연구 진행과정 및 특이점 기술 역량 확보 등 평가에 따라 지원 기간을 추가로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총 20년 동안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연구재단이 펴낸 ‘노벨과학상 종합분석 보고서’에는 최근 11년간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의 논문 성과를 분석한 결과가 나온다. 이들은 평균 37.7세에 노벨상 수상에 기여한 핵심연구를 시작해 53.2세에 논문을 완성했다. 구체적 연구 성과가 나오기까지 평균적으로 약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KAIST 싱귤래러티 교수’ 사업이 최장 20년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이 회장은 2년 전 서울대 법대 동창이자 고검 부장검사를 지낸 김창홍 변호사(82)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짝꿍(classmate)이라 부르는 김 변호사와 뒤늦은 결혼을 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서로가 불쌍해서 했지”라고 웃어 보인 이 회장은 이내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했다.

“늙으면 친구밖에 더 있나. 그래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내가 기자 생활하고 사업하느라 골프가 서툴다. 그때마다 캐디 역할을 해주더라. 골프장 갈 때도 그 사람 차를 타고 가면서 친밀해졌지. 죽는 날까지 종노릇하겠다고 해서 했는데, 결혼하니까 달라지더라(웃음). 티격태격하면서 살고 있다.”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를 걸어온 어른이기도 하다. 후대에 하고픈 말이 있다면?

“사람들이 너무 정직하지 못하고 할 말 못하는 사회가 됐다. 그러면 부패한 사회가 된다. 할 얘기는 해야지. 기자 생활할 때 오늘 그만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소신껏 기사를 썼다.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양심껏 살아야 한다.”

남은 인생의 목표가 있는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죽어서도 누가 나를 원망하지 않도록 내가 그간 해놓은 것들을 잘 여미고 갔으면 한다. 그뿐이다.”

인터뷰는 약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고령임에도, 좋지 않은 건강에도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발음은 정확했고, 기억은 또렷했다. 그는 오는 10월에 고주파 온열 항암 치료에 다시 들어간다. 건강을 염려하는 기자의 말에 이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나라 의료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요즘은 간암을 병으로 치지도 않아. 걱정 마.”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온 여장부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 글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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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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