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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법과 제도로 보호받는 ‘불편한 진실’ 

집값 폭등은 왜 정의롭지 못한가 

구조적 부정의(不正義)에 대한 진단과 대안 찾기
각계 지성 12인, 20개월간 토론·공부의 기록


아시타비(我是他非) -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한자 버전이다. 전국 대학 교수 900여 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아시타비’는 경합했던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제치고 사자성어 1위에 올랐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허물어진 2020년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변한다.

생존 본위의 서바이벌리즘에 압도된 한국 사회에서 ‘정의(正義)’는 생존 가능할까? 도대체 ‘정의’란 가치가 현실에서 쓸모가 있기는 한가? [합법적 불공정 사회]의 저자들은 생존에 없어선 안되지만 돈 주고 사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흡사 공기와도 같은 ‘정의’가 처한 위기적 현실을 다각도로 추적했다. (‘불의(不義)’가 아닌) ‘부정의(不正義)’가 통용되는 사례를 규명해 ‘정의’가 위협받는 실상을 드러낸다. 즉 ‘불공정’ ‘불평등’ ‘차별’ ‘배제’ 등 정의롭지 않은 현실을 부각함으로써 ‘정의’의 존재 이유를 되새기는 방식이다. 이 책은 “정의가 아닌 부정의가 일상화된 현실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마치 그것이 정상인양 아무렇지 않게 지속된다”고 경고한다.

부정의를 부추기는 대표적 예의 하나인 ‘갑을 문화’를 보자.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에서 국민이 끝내 승리했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약자로 남아있고 그 과정에서 갑의 구조만 견고해졌다. 민주화가 을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커졌는데 그 과실이 소수에게 돌아간 탓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장애인·지방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혐오 또한 한국인의 정상적인 삶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자리하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다.

최근 부동산 급등은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한 신(新)신분제 사회의 도래를 부추기는 악재로 인식된다. 자산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교육 불평등, 취업 불평등을 낳는다. 한국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녀의 교육 기회와 사회적 능력이 결정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출생 시의 사회적 신분, 가족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부동산과 같은 사회적 재화와 기회, 직위가 배분되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가? [합법적 불공정 사회]는 “부동산 불로소득은 정의의 대원칙에 위배된다”고 단언한다.

곤혹스러운 점은 이 같은 부정의가 현실에서는 ‘합법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 소유는 합리적이고, 그에 따른 소득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리다. 사회적 부정의의 강화와 고착에 법과 제도가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합법적 불공정 사회’라는 이 책의 제목도 이런 모순적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합법적 불공정 사회]는 대안적 차원에서 시민사회와 기업의 역할에 눈길을 준다.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감수성 강화는 부정의를 뒷받침하던 법원의 판례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 기업이 사회적 공공성을 강화할 경우 사회 문제 해결 주체로 나설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빈곤 계층을 가난에서 탈출하도록 자본주의적 시스템과 가치체계를 재정비한다면 정의가 숨 쉬는 공간은 더 넓어지리라는 게 이 책의 시사점이다.

이 책은 국내 지성인 12명이 ‘우리사회정의’라는 포럼을 만들어 20개월에 걸쳐 ‘정의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공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정치 상황만 떼놓고 보면 한국 사회가 ‘반(反)지성적’ 혹은 ‘몰(沒)지성적’ 사회로 후퇴하던 때와 겹친다. 포럼에 참가한 성직자·유학자·철학자·환경학자·문학평론가·언론인·의학자·변호사, 사회단체 관계자 등 각계 전문가의 토론이 불을 뿜었을 법하다.

대표 집필자인 양선희 대기자는 “본질을 쿨하게 인정하면 문제를 직시하기도 쉬워지고 대안을 내기도 수월하다”고 말한다. 부정의 한 힘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구조적인 차별이 제도로 굳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서 있는 좌표를 명확히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주문이다.

- 박성현 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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