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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70% 인플레이션 시달리는 터키의 비명 

에르도안의 역주행으로 망가져가는 경제… 물가 관리 절실한 한국, 반면교사 삼아야 

이승훈 월간중앙 기자
터키, 美 연준의 금융 긴축 역행하는 금리 4%p 인하… 21년 초에 비해 달러-리라 환율 2배 이상 폭등
달걀·빵 등 밥상물가 60~100% 상승… 부동산·가스료·전기료 급등에 젊은 층의 反에르도안 정서 심화
지정학적 갈등에 경제적 이득 없이 개입하는 행위 잦아… 해외 투자자들 ‘에르도아노믹스’ 외면 야기


▎2022년 2월 9일 터키 앙카라에서 시민들이 가스·전기료 폭등에 항의하며 집회 시위를 열었다. 시위 중 시민들이 고지서를 불태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인플레이션이 도래한 시대를 알고 싶다고? 바로 터키의 현실을 보면 된다. 2022년 5월 기준, 터키는 자국 화폐인 리라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온 국민이 7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이처럼 악화한 배경에는 레제프타이이프 에르도안(68) 터키 대통령의 일방적 정치 행보와 저금리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부동산·전기료·가스료 급등으로 터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신음은 깊어가지만 에르도안 대통령과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은 2023년 6월 열릴 대통령 선거와 대국민의회(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저금리 정책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터키 국민이 살인적인 고물가의 고통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셈이다. 지금 터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스탄불 등 현지인과 교민을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해 터키 경제의 실상을 청취했다.

2021년 12월 22일 자 터키 현지신문 [예니챠(yeniçağ)]에 한 불가리아인이 겪은 놀랄 만한 사례가 소개됐다. “어느 불가리아인이 아침에 터키 에디른(불가리아 접경 지역)에 도착해 1000달러를 1만7000터키 리라로 환전했다. 그는 먹고 마시고 한참을 즐겼지만 겨우 3000리라를 사용했다. 불가리아인은 그날 저녁 불가리아로 돌아가 남은 돈 1만4000리라를 환전했는데, 아침에 환전했던 1000달러를 그대로 돌려받았다. 과연 누가 그에게 3000리라를 빌려준 걸까?”

이 기막힌 이야기는 지난해 12월 셋째 주 발생한 터키 환율 파동의 웃지 못할 현실을 담고 있다. 2021년 초만 하더라도 달러 대비 환율 7.4리라를 유지해오던 화폐 가치는 12월 중순경 일시적으로 17.94리라까지 떨어지며 대폭락했다. 터키 정부가 긴급 방어에 나서며 환율은 한 자릿수까지 회복됐지만 최근에 다시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차츰 떨어져 15리라대에 머물고 있다. 미 연준(Fed)의 꾸준한 긴축 예고에도 터키가 2021년 9월부터 11월까지 3차례에 걸쳐 금리를 15%로 4%p 인하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긴축 정책과 엇박자를 내는 터키의 저금리 통화 정책은 리라화 가치 폭락이라는 참사를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물가가 오르면 금리를 인상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를 거둬들인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도리어 “높은 금리가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리를 내려 화폐 가치를 낮추면 수입 물가가 오르게 돼 수입이 줄고, 수출품 가격은 낮아져 수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이 늘어나 경제가 회복되면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증가하고, 이는 곧 국내 고용 창출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편다. 에르도안은 지속적인 금리 인하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반발하는 관료는 주저 없이 경질했다. 그는 2019년 이후로 3년여 동안 중앙은행 총재를 3번 교체했다.

“5년 전 장바구니 물가 50리라… 지금은 200리라”


▎에르도안 대통령은 철권통치를 고수하며 터키 경제를 수렁으로 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창한 ‘경제성장 모델’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터키 통계청에서 발표한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69.97% 상승했다. 이스탄불 상공회의소는 “지난 4월 이스탄불 내 물가상승률이 80%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밥상물가의 대표적 지표인 달걀 1판(10개) 값이 4월 26일 기준 27.90리라로, 1년 전(5월 14일) 16.45리라에 비해 60%가량 올랐다. 수도 앙카라에 거주하는 전업주부 레만 두만(55)씨는 “늘 아침에 차리던 카흐발트(아침 식사)에 들어가는 재료값마저 너무 많이 올랐다”며 “장 보러 갈 때마다 너무 무섭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2017년)만 해도 50리라면 거뜬하던 장보기가 지금은 200리라까지 나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주식인 빵값도 2배나 상승했다. 터키인들은 빵을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와 시에서 빵값의 급격한 상승을 제어하고 빵 품질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기구를 별도로 두고 있다. 이러한 공공성 빵 판매장(Halk Ekmek uygulaması)에서 판매하는 일반 빵값이 최근 앙카라 기준 1리라에서 2리라로 2배 올랐다. 물가에 둔감한 관영 빵집조차 가격 인상이 불가피할 만큼 인플레이션 충격파가 컸다.

부동산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부동산 공인중개업자로 일하는 터키 거주 17년 차 교민 정관우(33)씨는 “경제 상황이 여느 때보다 엄혹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터키 제1 도시인 이스탄불 내 부동산 거래가 상승률이 60~100%에 달한다. 이스탄불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유럽 사이드와 아시아 사이드로 나뉜다. 주요 대기업 본사, 금융기관, 공항 등 기간 시설이 몰려 있는 유럽 사이드가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시아 사이드와 유럽 사이드의 가격 차이가 없을 만큼 아시아 사이드도 부동산 상승 폭이 크다”고 했다.

스타벅스 바리스타도 생활비 부족해 구걸


▎밥상물가의 대표적 지표인 달걀의 경우 1판(10개) 값이 4월 26일 기준 27.90리라로 1년 전 16.45리라에 비해 60%가량 올랐다. / 사진:연합뉴스
정씨는 본인이 겪은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백화점 주차장에서 멀쩡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애가 둘인데 전기난로를 켤 돈이 없다’고 돈을 구걸하더라”며 “그 남자는 자신을 베식타시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라고 소개했다. 일하는 사람조차도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게 지금의 물가 수준”이라고 말했다.

터키 정부는 지난 1월부터 에너지 수입 가격 상승 등을 이유로 전기요금을 인상했다. 그 결과 각 가정에 부과된 전기요금은 전 달에 비해 평균 50%가량 올랐다. 기업과 일부 고전력 소비 가정의 전기요금은 전달보다 127%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정부는 2021년 12월에 최저임금 50% 인상을 결정했는데, 현재 인상된 금액으로 추산한 한 달 월급은 4250리라(36만원)다.

그는 “전기료나 가스료 인상도 그렇고 이스탄불에서 맞벌이 부부가 살아가려면 적어도 한 달에 1만5000리라 정도는 벌어야 유지가 된다”며 “제아무리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됐다지만 인플레이션이 70%대인 상황에서는 실질임금의 가치가 도리어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나 2010년 그리스 국가부도 때도 터키 경제가 타격을 입었지만, 현재는 그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밥상물가를 비롯해 각종 인상된 고지서가 날아오면서 성난 민심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지난 2월 주요 도심 곳곳에서는 가스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민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층과 고학력층을 중심으로 반(反)에르도안 정서가 커져가는 상황이다.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도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2019년 열렸던 지방선거에서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은 이스탄불시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서 패배했다. 2023년 선거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에르도안이 저금리 정책을 펴는 것은 내년 대선 전까지 GDP 성장률을 견인해 경제 성과와 지표를 중심으로 선거를 끌어가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인플레 탈출할 기미가 안 보인다


▎2021년 12월 20일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일시적으로 17.94리라까지 떨어지며 사상 최저 환율을 기록했다. 문제는 터키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 사진:연합뉴스
자국 경제가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지만 에르도안은 소아시아-중동 권역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갈등에 개입하며 국제적 위상만 높이려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터키는 그동안 분쟁의 당사자 국가로서, 한편으로는 권역의 중재자로서 군사 개입을 선택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2019년 10월 시리아 북부 내 쿠르드 민병대를 몰아내는 ‘평화의 샘’ 작전을 벌인 것이다. 2020년 2월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군과 반군 간의 교전에 반군 지원세력으로서 개입하기도 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내전에 참전해 아제르바이잔에 드론 등 무기를 지원했다. 에르도안은 이러한 군사적 행동을 통해 인접 국가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하고 있다. 심지어 현재 국제적 이슈가 되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국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중재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정학적 불안 요소에 따른 변동성은 터키 경제에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다. ‘에르도아노믹스’의 골자가 해외 자본 유치인 만큼 이러한 대외적 정치 행보가 경제 정책과 상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로브샨 이브라히모프 한국외대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외래교수는 “지정학적 갈등에 지속해서 개입하는 것은 터키의 경제 상황에도 도움이 안 될뿐더러 인플레이션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군사적 행동을 하면서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적인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조양현 한국외대 LT학부 특임교수는 “에르도안이 정책 수정을 하지 않는 한 거시적으로 인플레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현실을 무시한 정치 지도자의 정책 독주로 살인적인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는 터키의 현실은 고물가에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우리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승훈 월간중앙 기자 lee.seunghoon1@joongang.co.kr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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