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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취재] ‘SKY’ 마다하고 ‘의대 낭인’ 택하는 n수생의 속사정 

“의대 입시도 마약 같아… 수능만 7번 봤다”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전문직 중 전문직’ 의사 부각되며 의대 전문 재수학원 문전성시
해외 의대 원정 유학 인기… 기초과학·산업 인재 공백 우려 커져


▎서울대병원 본관에 들어서는 의료진. 의사를 선망하는 인재들이 급증하면서 ‘의대 블랙홀’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삼수생(대학 입시를 위해 수능을 세 번 보는 사람)이 제일 많은 것 같다. 저도 세 번째로 도전하는 건데 올해엔 꼭 가려고요.” 김성준(가명·22)씨는 경기도에 있는 재수 기숙학원에서 공부 중이다. 김씨가 다니는 학원은 일주일 내내 학원 관계자와 선생님들의 밀착 관리를 받으며 공부한다. 평일엔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평균 14시간 정도, 주말엔 12시간 정도 공부를 하도록 일과표가 짜여 있다. 김씨는 입소 후 5개월 만에 체중이 약 12㎏ 빠졌다.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생겨났고, 살이 급격하게 빠지는 바람에 입고 있는 옷이 헐렁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의대(의과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굳이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기숙학원에 들어온 것도 그만큼 의대에 가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안정적인 직업이 전문직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또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 직업은 의사잖아요.” 그의 말대로 의사라는 직업의 안정성과 사회적 대우는 가히 독보적이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2020년 기준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70만원이었다. 같은 해 근로자 평균 연봉이 3828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일반 노동자 대비 6배 이상 높다. 높은 수입과 사회적 지위 등은 의사를 젊은 남녀가 청춘을 모두 바쳐서라도 얻고 싶은 직업으로 만들었다.

서울대 신입 휴학생 4년 만에 3배 늘어


▎유명입시 학원이 진행하는 의대 입시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김씨가 다니는 기숙학원 관계자는 “기숙학원에 오는 최상위권 친구들은 거의 다 의대를 목표로 들어 온다”며 “원래 성적으로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통칭해 부르는 말)를 갈 수 있는 학생들이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6~7월엔 대학교에 다니다가 입시를 다시 치려는 반수생들의 상담 요청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작년 여름에만 의대 목표 반수생이 30명 정도 추가 입소했는데 올해엔 더 많을 거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세간의 의대 열풍을 보여주듯 기숙학원 정문에는 의대 합격자 명단이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K 재수학원은 아예 의대반이 따로 있다. 한 달 수업료만 약 200만원이다. 학원에 등록하려면 선발 시험을 통과하거나 학원에서 요구하는 자격요건을 갖춰야 한다. 자격요건은 대개 직전 수능 국어, 수학, 영어, 과학 탐구 중 3개 과목 등급 합 5등급 이내다. 애초에 상위권 성적이 아니면 의대 전문 재수학원 등록조차 어렵다. 재원생 박용재(25)씨 역시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휴학 후 재수학원에 들어왔다. 박씨는 “한 강의실에 보통 15명 정도 있는데 명문대 아닌 학생을 찾기가 더 어렵다”며 “우리 반만 해도 6명이 SKY 출신이다”고 말했다. 박씨는 “집은 서울이지만 의대만 갈 수 있으면 지방 어디든 가려고 한다. 의대가 아니면 SKY 자연계열이라 해도 갈 생각이 없다”고도 했다.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의대에 쏠리면서 박씨처럼 ‘명문대학도 거르는’ 풍조도 만연해 있다. 서울대조차 매년 휴학생과 자퇴생이 증가하는 추세다.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서울대 신입생 3606명 중 225명이 1학기에 휴학했다. 신입생의 6.2%가 첫 학기도 마치지 않고 휴학한 셈이다. 2019년에 70명이던 신입 휴학생이 불과 4년 만에 3배가 됐다. 서울대 입학처 관계자는 이를 두고 “다수는 새내기도 등록 휴학이 가능한 자교 규정을 이용해 우선 등록만 하고 반수나 재수를 목표로 휴학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증가하는 휴학생 수와 비례해 신입생 중 자퇴하는 서울대생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9년 97명에서 작년 238명으로 4년 만에 약 2.5배가 됐다. 작년 신입생 3484명 중 무려 7%가 자퇴한 것이다.

대학알리미 공시 기준, 2022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자퇴생은 1874명이다. 이 중 76%에 해당하는 1421명이 자연 계열, 즉 이과 학생인 게 눈에 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자퇴생 중 다수는) 반수 또는 재수를 통해 의치한(의대·치과대·한의대) 진학으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8년째 제자리인 의대 정원도 경쟁을 심화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전국 의대 신입생 정원은 3058명으로 18년째 동결돼 있다. 여기에 의대 쏠림 현상이 더해져 의대 합격 커트라인은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종로학원이 분석한 지난해 의대 최종 등록자들의 국어·수학·탐구영역 백분위 평균 70% 합격선(합격자 100명 중 70등의 점수)은 98.2점이었다. 대학들이 합격생의 백분위 점수를 공개한 2020학년도 이래 가장 높은 점수다. 반면 SKY 자연 계열 2022학년도 평균 합격선은 94.4점으로 지방 의대보다 낮은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를 반영하듯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의 성적 상위 20개 학과가 모두 의치한 대학이었다. 성적 30위권으로 넓혀봐도 30위인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빼고 다 의학계열이다.

정시 상위 30위 학과 중 29개가 ‘의치한’


▎지난해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의사들의 모임’의 회원이 해외 의대와 관련해 1인 시위를 벌였다. 입학 문턱이 낮은 해외의대를 졸업 후, 우리나라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의대생과 젊은의사 사이서 확산되는 분위기다. / 사진:커뮤니티 제공
점점 높아지는 의대 합격 커트라인은 수많은 n수생들을 양산하고 있다. 김승주(23)씨는 4수 끝에 동국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가 동기들을 만났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의대 신입생 중 3분의 2가 n수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현역(고3 때 본 수능 성적으로 대학에 간 사람)보다 n수생이 많은 과는 보지 못했다. 의대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동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32살로 직장에 다니다 퇴사하고 5수 끝에 의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김씨처럼 다소 늦더라도 목표한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의대 준비생 사이에선 성공한 케이스로 불린다. 최상위권 학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수능 고득점을 받고도 의대 합격 컷 앞에서 수년째 고배를 마시는 입시생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대 낭인’이라고 소개한 오근우(가명·29)씨는 자신의 20대 전부를 의대에 바쳤지만 남은 건 입대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오씨는 “의대 입시도 다른 전문직 시험처럼 마약같다”며 “자꾸 합격권 근처에서 떨어지니 계속 재도 전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수능만 7번 보게 됐다”고 했다. 오씨는 연세대 자연계열 14학번으로 2학년까진 만족하며 다니다 주위의 권유로 의대 입시에 발을 들였다. 명문대를 정시로 갔었던 만큼 의대 입시도 1, 2년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갈 수 있겠다는 심산이었다. “의대만 가면 모든 게 보장된다는 주변 말에 혹했던 게 원인이었다. 과거로 돌아가면 그냥 평범하게 대학 졸업 후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오씨의 표정에선 씁쓸함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전문가들은 오씨와 같은 ‘의대 낭인’이 양산되는 현실이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손해로도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정동근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두 ‘의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서 반도체로 대표되는 첨단 산업과 기초과학의 근간인 자연계열에선 인재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게 올해 연세대 입시 결과다.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졸업과 동시에 삼성전자 입사가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인데도 의대 열풍을 피해 가지 못했다. 올해 이 학과 충원율은 130%로 집계됐다. 최초 모집인원 10명이 모두 등록을 포기해 예비번호 13번까지 추가 합격했다는 뜻이다. 이공계 인재들의 비(非) 의료계열 기피 현상은 재학생들도 체감하고 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에 재학 중인 이도윤(28)씨는 “요즘은 이과에서 상위권인데 의대 안 가면 바보 취급받는다”고 달라진 세태를 전했다.

경쟁 피해 해외 의대로 가는 新루트 유행

의대 입시 경쟁이 과열되자 우회로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입학하기가 쉬운 외국 의대를 경유하는 방법이다. 우즈베키스탄·헝가리 등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 의대 진학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대안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영어 외에 제3 외국어까지 능숙해야 하는 언어장벽 때문에 이내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한 유학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헝가리의 경우 학부생 때부터 현지 병원에서 일하며 직접 환자를 진찰하는 등 임상 수업을 들어야 해 현지 언어에 서툰 한국 유학생이 졸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최근엔 우리나라와 정서가 비슷하고 의학 용어를 한자로 쓰는 일본 의대가 주목받고 있다. 또 영어권 나라들도 의대 유학지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서울 강남에 있는 M 해외 의대 컨설팅 유학원 담당자는 “우리나라에선 절대 의대에 가지 못할 성적으로도 해외 국립 의대에 충분히 진학할 수 있어 상담을 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의대에 가려면 수능 성적 기준 상위 1% 내외에 들어야 하는데 외국의 경우엔 상위 20% 성적이면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해외 의대 진학 세미나를 여는데 적게는 40명에서 많으면 70명까지도 온다”고 전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송아름(가명·44)씨도 자녀 유학을 알아보려고 M 컨설팅 유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송씨는 “아들이 올해 특목고 입시를 보는데 만약 특목고에 진학하지 못하면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며 “정시로 의대에 가려면 기본 3수는 해야 한다는데 n수 비용이나 유학 비용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그래서 의대에 빨리 갈 수 있는 외국대학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인정한 해외 의대 졸업생은 ‘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이 주관하는 예비시험을 통과하면 국내 의대 졸업생과 동일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는다. 국가고시만 통과하면 유학생도 우리나라 의사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20년까지 17년간 국내 의사·치과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외국 대학 졸업자는 365명이다.

일각에선 의대 유학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입학하기 쉬운 해외 의대 졸업자를 치열한 경쟁을 거친 국내 의대 졸업자와 똑같이 대하는 게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재수 끝에 정시로 수도권 의대에 입학한 박모(26)씨는 “의대 준비생들 사이에선 유학생을 ‘도피 의대생’이라고 말한다”며 “사실상 부모의 재력으로 의사 면허증을 사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말했다. 국내와 해외 의대 간 입학 난이도 격차만큼 n수생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었다.

-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shinetosky@naver.com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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