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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8)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下 

대한민국 근대화 견인한 유상(儒商)으로 남다 

금성사 설립 후 라디오·TV 보급, 삼성과 합작해 방송 사업에도 진출
락희화학·금성사·호남정유 성공하며 ‘한국자본주의’ 모범 사례로


▎1947년 창업한 LG는 2023년 6월 4세 경영자인 구광모 회장 취임 5주년을 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LG그룹의 자산총액은 171조2440억원에 달한다. / 사진:연합뉴스
락희화학이 국내 정상급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8년 10월 부산시 연지동에 금성사를 설립한 것이다. 1956년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컸을 뿐 아니라 전자기기 관련 간행물을 자주 읽었기 때문에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했다. 이 무렵 일본 통산성의 백서가 발표됐다. 그 백서에는 석유화학 또는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구 사장은 아직 국산 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하면서 윤 부장에게 사업성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럭키40년사])

1958년 4월에 윤욱현 주도로 라디오, 플라스틱 잡화, 전기기기 부품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 도입비로 8만5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 출신의 라디오기술자 헨케(H. W. 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공고 및 공대 졸업자들을 모집해서 생산체제를 갖췄다. 1958년 10월에는 주식회사 금성사를 설립하고 6월에는 국내 최초의 라디오 모델 설계를 김해수 주임에게 맡겼다. 공대 출신 김해수는 한때 하동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6·25전쟁 때 부산에서 전기상을 경영하면서 외제 라디오 조립과 수리 경험이 있었다.

김해수 주임은 기능공 2명과 함께 라디오 설계에 착수해 그해 11월 일제 산요 라디오를 모방한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을 생산했다. ‘A-501’ 80대를 만들어 1959년 11월 15일 서울 도심의 미도파백화점 쇼윈도에도 전시했다. ‘A-501’ 가격은 사양이 비슷한 외제 라디오보다 30~40% 저렴한 2만 환이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창고에는 ‘A-501’ 재고 3000대가 쌓였다. 이후 값도 저렴하고 소형인 ‘A-401’ 250대를 출시했으나 제품이 불안정하고 인기도 없어 전량 반품됐다. 1960년 3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품 선풍기(D-301)와 전화기를 생산하는 등 제품 다변화에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판매 부진에다 1960년 4·19혁명에 따른 정국혼란까지 겹쳐 금성사의 존립은 극히 불투명해졌다.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기사회생


▎LG전자 가전 신화의 모태였던 금성사 연지공장. / 사진:LG그룹
직원 중에는 “돈을 은행에 맡겨놓고 다달이 이자나 챙기는 게 더 이익 아니냐” 혹은 “엽전이 양코와 왜놈 상대로 기술 경쟁해서 본전이나 찾겠나”하는 불평들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구인회는 요지부동이었다. 전 사원이 모인 자리에서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뿜는다는 교훈처럼 고생 안 하고 얻어지는 보물이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는 전자공업이라는 길 없는 밀림 속을 헤쳐나가는 개척자다. 앞으로 1년,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내 손으로 문 닫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빈사지경의 금성사에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반전의 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회의 부회장이 예고도 없이 금성사 연지동 공장을 방문해서 라디오 생산현장을 시찰했다. 안내역을 맡은 김해수 업무과장은 밀수품 단속이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박 부의장에게 호소했다.”([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박정희 부의장이 금성사 공장을 다녀간 후 효과가 즉각 나타났다. 군사정부는 강력한 밀수금지 조치와 함께 밀수품 단속령을 내렸다.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금성사 라디오 수요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또 한 차례 행운이 찾아왔다. 어느 날 구인회 사장이 혁명정부의 공보부 장관을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공보부 장관은 대학교수 출신의 이원우였다. 그는 구평회 상무의 서울대 동창이어서 구 사장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이 장관은 “(혁명정부의 외제품 배격사업을)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알려야 하는데 전달이 안 돼 죽을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구인회 사장은 “우리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만든다. 정부에서 그거 좀 사서 보내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맞받았다.

문 닫는 시기를 내달로 정하느냐 그다음 달로 정하느냐로 고민하던 때에 ‘농촌 라디오 보내기운동’이 벌어졌다. 7월 14일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트랜지스터라디오 3대를 공보부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물론 금성사의 라디오였다. 이를 계기로 라디오 보내기운동 성금이 속속 모이고 라디오 주문은 쏟아졌다.”([재벌이력서])

전국의 라디오 보급대수는 1961년 9월 89만3000대에서 1962년 134만대로 증가했다. 라디오를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금성사 연지동 공장은 한꺼번에 밀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주야로 4교대 작업을 강행해야 했다.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 13만7000대를 팔아 4억31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1964년부터는 동남아, 중남미에 수출하는 등 급신장했다.

4·19 이후 시련기… 자립경제 기수로


▎한국케이블 안양공장 준공식에서 구인회 (왼쪽 안경 쓴 이) 회장이 박정희(왼쪽) 대통령 앞에서 생산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LG그룹
이 무렵부터 금성사는 TV 생산에 착수했다. 1961년 12월 31일 자로 국영 KBS가 국내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한 것이다. 1964년 8월에는 민영 TBC가 개국됐다. 정부는 1966년 12월 전자제품 국산화를 통해 전자공업을 장차 수출 주력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내용의 전자공업 진흥계획을 발표했다.

금성사는 1963년부터 TV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1965년 9월에는 일본 히타치 제작소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 1966년 8월 국내 최초로 19인치 흑백 TV 수상기를 생산해 빅히트를 쳤다. 이때부터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됐다.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가 되며 럭키그룹은 점차 재계의 전면에 부상했다.

구인회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시련기를 맞이한다.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등으로 부정축재한 기업가들에 대한 국민의 처벌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삼성), 정재호(삼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이양구(동양), 남궁련(극동), 최태섭(한국유리) 등 유명 기업인 24명이 연루됐다. 구인회는 탈세액을 자진 신고했다.

구인회는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것이 기업의 바람직한 길이요, 그것이 곧 사회에 봉사하며 돈을 버는 길이다.” “어느 누구건 부정하게 축재를 했다면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역설했었다. 영남 일대의 유림이 우러러보는 구(具) 교리(校理)의 장손으로서 견리사의(見利思義)를 중히 여기는 한국판 유상(儒商)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구인회는 군사정부의 120명 조사대상자에 포함됐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들어 있는 태평로 정부청사와 지척의 거리인 사직동 친지 집으로 피해 사태를 관망했다. 11월 2일 락희화학을 대표해서 서울사무소의 구평회 상무가 ‘반혁명행위 혐의’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구 상무는 1962년 2월 15일 구금된 지 6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 와중에서 상황이 반전돼 부정축재자들은 처벌 대신 그들이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이 몰수됐다. 대표적 기업가 14명은 비료, 화섬, 전선공장 등 5대 기간사업체를 건설해서 국가에 헌납할 것을 명령받았다. 혁명정부가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응징의 대상에서 혁명의 동반자로, 자립경제 구현을 위한 선도자로 대접한 것이다.

구인회는 화학섬유 공장과 종합 전기기기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1962년 2월 서독 함부르크와 이탈리아 등을 순방해서 1800만 달러의 차관 교섭을 마무리하던 중인 4월 7일 최고회의가 갑자기 구인회에게 화학섬유 공장과 전기기기 공장 대신 송배전선 공장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난감한 일이나 도리가 없었다. 구인회는 다시 함부르크로 가서 송배전 및 통신용 전선제조기 도입을 위한 295만 달러 차관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5월 5일 자본금 10억환의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다. 이 차관 도입 계약은 정부나 한국은행의 지불보증 없이 금성사의 신용만으로 성사시킨 국내 제1호 민간차관이었다. 그해 10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전선공장을 착공해서 4년여 만인 1966년 4월 완공했다.

구인회와 이병철의 방송사업 ‘담판’


▎국제신보 이사회를 주재하는 구인회 회장. / 사진:LG그룹
1960년대까지 국내 방송사는 국영인 중앙방송과 기독교방송뿐이었다. 어느 날 어린 시절 지수초등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이병철 회장이 구인회 회장을 찾아와 방송사업 공동운영을 제의했다. 구 회장의 3남 자학(滋學)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 숙희(淑熙)가 혼인함으로써 이 회장과는 사돈을 맺은 지도 5년이 흐른 후였다. 구 회장 자신도 언론 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무렵 금성사는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전 수상기 생산도 계획 중이어서 방송사에 더욱 구미가 당겼다.

삼성그룹과 럭키그룹 사이에 50대 50 비율로 공동출자를 약속하고 1964년 5월 9일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물 맞은편 안국화재보험 빌딩에서 라디오서울(RCB)의 첫 전파가 발사됐다.

그러나 이후부터 양측의 파견 직원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이 생겨났다. 갈등 끝에 흑자인 ‘라디오서울’은 삼성이, 적자투성이인 텔레비전방송은 럭키가 맡기로 합의했으나 전혀 진척이 없었다. 삼성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럭키가 라디오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사업에서도 손을 떼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구 회장은 당시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인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TV국을 넘겨주기로 약속했으면 그 청산차액을 빨리 인수해줘야 되지 않겠나. 양가의 불화설이 온 장안에 퍼지고 있으니 창피해 죽겠네. 양가에서 태어난 우리 손자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네.”

그러자 이병철 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대로 같이 해보지.”

실망을 느낀 구 회장이 말했다. “다시 같이하자는 제안은 거절하겠네. 원한다면 호암(이병철의 아호)이 양쪽을 다 맡아서 혼자 하게.”

말을 마치자 이 회장은 현관까지 따라 나오며 “그렇게 결정해 줘 고맙네”라고 말했다.

럭키그룹은 1964년 5월에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했다. 6·25전쟁 중에는 중앙의 일간지들을 따돌릴 정도로 활성화됐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급격하게 사세가 기울어 럭키그룹에 인수됐다. 당시 부산의 자존심이었던 [국제신보]를 살리자는 부산 유지들의 강권 때문이었다. 초대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서정귀를 임명했다.

1960년대에는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점차 경제 규모가 확대됐다. 이에 따라 전기, 석탄, 석유 등의 에너지 소비도 점증해서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종래 석탄 중심에서 열효율이 높은 석유 중심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유시설 확충에 공을 들였다. 정부는 1962년 10월 국영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가동했는데, 1965년 한 해 동안에 20억원의 초과이윤을 누렸다.

정부는 제2정유공장 건설을 구상했다. 이 공장은 처음부터 민간 주도로 추진했다.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기업들은 럭키, 롯데, 한국화약 등이었다. 럭키는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받기 위해 1965년 가을에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을 설립하고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계획서에는 정유사업은 물론 납사분해, 폴리에틸렌 생산공장을 비롯한 석유화학공장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연 매출 30억원에 불과한 락희화학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으며 정부에 의하여 거부됐다.”([럭키40년사])

호남정유(현 GS칼텍스)를 손에 넣다


▎1967년 2월 거행된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에서 구인회 (오른쪽에서 둘째)LG회장과 박정희(가운데) 대통령이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 사진:LG그룹
럭키는 재차 사업권을 얻기 위해 기존 사업계획서를 변경, 정유사업으로 사업 범위를 한정하고 경영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1966년 2월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3000만 달러 차관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별도로 미국 Mobil사와 원유공급 및 운영자금 500만 달러의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1966년 5월 정부는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한 결과 럭키그룹의 호남정유를 비롯한 롯데그룹의 동방석유, 판본방직의 삼남석유, 한국화약의 삼양개발, 한양대 재단의 한양석유 등 6개 기업이 응모했다. 이 기업들은 공히 ‘해외 석유메이저들과 연결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안을 제출했다.

호남정유(현 GS칼텍스)는 럭키그룹이 국제신보를 인수하면서 사장으로 영입한 서정귀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상대로 설득전을 전개했다. 서정귀는 대구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4, 5대 민의원을 역임하고 재무부 및 정무차관을 거친 인물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러나 실수요자 선정이 임박할 무렵 호남정유의 합작선인 미쓰이물산이 삼성그룹의 한비(韓肥) 밀수사건에 연루돼 국내 여론이 좋지 않자, 호남정유는 합작선을 미국의 칼텍스로 전환했다. 1966년 11월 17일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치열한 각축전도 종료됐다. 1967년 5월 15일 미국 칼텍스와 50대 50의 비율로 합작,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럭키그룹은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한편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로 비누를 만들면 자동으로 글리세린이 생산됐다. 당시 비누의 원료인 우지(牛脂)는 소맥, 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된 탓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누렸으나 글리세린 독점공급업체인 애경유지의 생산량이 수요에 크게 못 미쳐서 원료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서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 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원의 락희비닐공업을 설립했다. 향후 비닐제품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해서 부산 연지공장의 비닐 부문을 분리하여 설립한 것이다.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가 50대 50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하고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락희화학 동래공장으로부터 비닐 시트를 조달받아 풍선 장난감들을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3월 21일에는 미국 Continental Carbon Co.와 50대 50의 비율로 합작해 한국콘티넨탈카본(자본금 2700만원)을 설립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던 것이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 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으나 당시에는 충주 비료공장의 매연 추출시설인 연돌(煙突, chimney)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장 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 관계에 있던 미국 컨티넨탈카본사가 합작을 제의하자 설립한 것이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부평구 갈산동의 1만1000여 평 부지에 공장 건설에 착수해서 1969년 9월 연산 7500t 규모의 공장을 완공했다.

인화(人和)로 그룹 일군 한국의 유상(儒商)


▎구인회 회장은 1969년의 마지막 날 별세했다. 그의 사후 럭키금성은 글로벌 LG로 성장했다. / 사진:LG그룹
구인회 LG그룹 창업자는 1969년 12월 31일 0시 15분에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향년 63세에 투병 중이던 뇌종양으로 타계했다. 럭키그룹은 1983년부터 럭키금성그룹으로 불리다가 1995년 이후 LG그룹으로 변경했다.

창업주 구인회 타계 당시 럭키그룹은 화학, 정유, 전기, 전자, 무역, 언론 등 총 11개 기업군을 거느려 차후의 대도약을 위한 제반 준비를 완료했는데, 구인회 창업주는 품질경영에 공을 들였다. 1968년 여름 어느 날 구자경 전무가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락희화학과 금성사 제품들의 우수성을 다룬 조간신문 기사를 부친에게 소개하자 구 회장은 “그런 기사 보고 자기도취하면 안 된다. 한번 도취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발전이 중단된다. 뿌리가 허약한 나무가 바람을 못 견디고 쓰러지는 것 안 봤나. 더 발전시킨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전력투구하는 사람만이 선두를 달릴 수 있다”고 일갈했다.

또한 구인회 창업주는 1931년 구인회상점을 운영할 때부터 ‘정도경영’을 강조했다. 그는 1961년 5·16 이후 부정축재자 처벌 때도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요. 그것이 곧 사회에 봉사하면서 돈을 버는 길이다. (군사정부에서) 부정축재 기업을 조사한다지만 밑이 구리지 않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며 의연하게 임했다.

구인회 창업주가 특히 강조한 것은 인화(人和)경영이었다. 그는 락희화학을 설립한 이래 일관되게 모든 구성원 사이에 존경과 사랑, 포용과 신뢰, 더 나아가서는 일체감과 화합정신을 특히 강조했다. 인화야말로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으로 연구개발, 개척정신과 함께 ‘LG정신’을 형성한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의 두웨이밍(枓維明) 교수는 가족주의와 혈연 기반의 높은 교육열,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공동체의식, 도덕과 윤리를 중시하는 사회의식, 유교 문화의 동질감 등이 동아시아 산업화의 성공 요체라며 유교자본주의를 강조했다. 구인회는 유교 윤리를 사업에 접목해서 한국의 근대화를 견인한 대표적 유상(儒商)이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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