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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7)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上 

한국의 락희(樂喜), 세계의 LG가 되다 

집안 반대 뿌리치고 동생과 구인회상점 열어, 실패 딛고 許씨와 동업경영 성공
락희화학 화장품과 플라스틱으로 전국 석권, 1955년에 이미 ‘4대기업’ 반열에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은 큰 잡음 없이 형제경영, 동업경영으로 회사를 키웠다. LG의 인화(人和) 정신은 이때부터 배양돼 있었다. / 사진:LG그룹
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 1907~1969)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쇠하던 1907년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에서 300석의 중농(中農) 구재서(具再書)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경기도 양주와 파주에 뿌리를 내린 문인 집안이었으나 8대조 때 진주로 옮겼다.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具然鎬)는 1883년 문과에 급제해서 춘추관 기주관, 훙문관 시독,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 등을 역임하고 1893년 귀향했다.

구인회가 태어난 진양군은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할 때까지 경상도 남부의 상공업 중심지였다. 지수면은 진주시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구인회는 어릴 때 조부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당교육을 받았다. 13세였던 1920년 4월 이웃의 천석군 허만식(許萬寔)의 딸과 결혼했다. 1921년에는 마을에 지수(智水)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학교 2학년에 편입해서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과 한동안 같이 공부했다. 1924년에는 처가의 도움으로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으나 1926년 3월에 중앙고보 2학년을 중퇴하고 돌아왔다.

청년 구인회는 1926년부터 협동조합을 설립해서 마을의 공익사업에 몰두했다. 그는 진주·마산·부산 등지에서 석유, 잡화, 광목, 비단 등을 구입해서 저렴한 가격에 마을 주민들에게 판매하면서 점차 사업 원리를 터득했다.

5년 동안의 협동조합 활동을 정리한 후 24세 때인 1931년 7월 진주 식산은행 건너편에 광목과 비단을 취급하는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까지 뼈대 있는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한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구인회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사업자금은 부친이 어렵게 마련해준 2000원(圓)에다 큰집에 양자로 들어간 첫째 아우 철회(哲會)가 동업자로 참여하며 1800원을 보탰다.

‘장마 진 해에는 풍년이 든다’


▎주식회사 구인상회의 주권. 해방 이전부터 구인회 LG 창업회장은 자본주의에 눈을 떴다. / 사진:LG그룹
구인회 형제는 성심을 다했으나 점포 개설 1년여 만인 1933년 3월 무려 500원의 결손이 났다. 쌀 100가마어치의 큰 손실을 봤다. 운영자금이 부족했던 구인회는 집안의 토지를 담보로 동양척식회사 진주지점에서 8000원을 융자받았다.

구인회가 자칫 사업에 실패하면, 집안 식구 모두가 거리에 나앉을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그의 부친은 “초반에 일이 잘 안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결판이 나지 않겠느냐. 조급하게 생각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나가도록 해보라”며 인회 형제의 용기를 북돋아줬다.

구인회는 대출받은 8000원으로 포목을 대거 구입해서 다양한 구색을 갖추고 사업을 재개했다. 그는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에 절대로 자(尺)를 속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5년 3월에는 다섯째 아들인 자일(滋日)이 출생하고 1936년에는 장녀 양세(楊世)를 시집보내는 등 안정적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36년 7월 대홍수로 남강이 범람하며 진주읍 전역이 물바다가 됐다. 어느 날 밤 남강 둑이 터져 구인회상점이 침수되면서 상점 곳곳에 쌓아뒀던 포목들이 전부 흙탕물 범벅이 됐다. 형제는 한 필이라도 건지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재기를 위해 골똘하던 어느 날, 구인회의 뇌리에 ‘장마 진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옛말을 떠올리고 원창약방 주인 원준옥한테서 신용을 담보로 빌린 거금 1만원으로 진주 인근에서 포목을 대량으로 매집했다. 구인회는 대인관계가 원만한 데다 매사에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기회를 포착하는 과단성이 있었다.

그해 농사는 대풍이었고 9~10월 결혼시즌을 맞아 구인회상점의 포목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또한 구인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인한 물자 부족을 예견, 광목 2만 필을 한꺼번에 사들였다가 적당한 시기에 되파는 수법으로 8만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렇게 30대 초반의 구인회는 진주 상공업계의 유지로 부상했다.

1940년 6월 구인회상점은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전환됐다. 1941년 7월 둘째 아우인 정회(貞會)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경영시대를 맞이한다. 정회는 1939년 3월에 도쿄 전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근무했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상회를 접고, 그해 11월에 부산 서대신동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하였으나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일본군이 사용하던 것을 불하받은 중고차는 고장이 잦았다. 손해가 점증하자 구인회는 화물차 30대를 운전자들에게 무상으로 넘기고 운송업에서 손을 뗐다.

구(具)씨와 허(許)씨의 동업경영


▎1962년 락희화학 부산 공장에 모인 구인회(왼쪽부터) LG 창업회장,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회장. / 사진:E1
이후 그는 숯 판매를 시도했다. 당시 부산에는 숯을 난방 및 취사용 에너지로 사용하는 일본식 주택이 많았다. 목탄이 일본 쓰시마에서 많이 생산된다는 소문을 듣고 배를 타고 가다 태풍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후쿠오카 근처에 표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숯장사도 신통치 못했다.

조선흥업사의 사업이 지지부진하던 어느 날 둘째 아우 정회가 부산 흥아화학공업사 생산직 사원인 김준환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부산 서대신동의 구인회 자택 근처에 있는 흥아화학공업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해방과 함께 종업원이던 박성수에게 인수됐고 화장용 크림, 분(粉), 머릿기름 등을 제조했다. 구인회 형제는 흥아화학에서 생산한 여성용 기초화장품인 ‘아마쓰크림’ 판매를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조선흥업사는 구(具)씨와 허(許)씨 사이의 동업경영이 시작됐다. 계기는 구인회의 셋째 아우 태회(泰會)와 함께 허준구(許準九)가 경영에 참여한 것이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장인인 허만식의 6촌 허만정(許萬正)의 셋째 아들이자 철회의 사위로 당시 24세였다. 허만정은 일제강점기에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진주의 일신여고(진주여고 전신)를 설립한 지수면 승산리의 만석꾼이었다. 그는 조선흥업사에 거액을 투자했고, 자신의 3남까지 구인회에게 맡긴 것이다. 허준구는 일본 도쿄(東京)의 관동중학을 졸업하고 1943년 귀국해 고향에서 면서기로 근무하다 조선흥업사에 입사해서 영업을 담당했다.

구인회 등은 흥아화학이 장악한 부산·영남 일대를 피해 서울에서 판매를 개시했는데,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서울의 여성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아마쓰크림’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문제는 조선흥업이 밀려드는 주문을 다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판매마진 30%라는 사업성을 확인한 구인회는 화장품 제조에 착수했다. 흥아화학 박성수 사장과 기술자인 김준환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발단이었다. 박 사장과 김준환은 처남 매부 사이였는데 “김준환이 조선흥업을 특별대우한다”고 박 사장이 불평하자 김준환은 퇴사했다. 김준환은 독자적으로 화장품 제조에 착수했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부산 영도의 데지마셋겡(出島石鹼) 공장에 있는 피마자기름과 약간의 스테아린산, 글리세린과 향료 300만원(圓)어치를 확보했으나 매입자금이 부족하자 구정회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구인회와 정회 형제는 상의 끝에 화장품 제조를 결심하고, 경남 고성의 300석지기 토지와 진주의 구인상회를 50만원에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1947년 1월 5일 락희(樂喜)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41세의 구인회는 사업 투신 16년 만에 상인에서 공장주로 변신한 것이다. 구인회가 사장, 정회는 섭외, 허준구는 판매와 수금, 김준환이 생산을 담당하고 서대신동 구인회의 집에 공장을 마련했다. 생산 직원은 20명 내외였다.

‘럭키(lucky)’라는 상표는 구정회의 아이디어였다. “화장품이란 대개 서양 것을 쳐주는 경향이 있으니 우리도 서양 냄새를 한번 풍겨 보면 어떨꼬. 예쁜 서양 여배우의 사진을 모델로 쓰고 상품 이름도 영어에서 따오는 기라.”([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화장품 라벨의 주인공은 미국 여배우 ‘디아나다빈’으로, 상표명은 간결하고 의미도 좋은 ‘럭키(lucky)’로 정했다. 회사의 상호 ‘락희(樂喜)’가 이렇게 탄생했다.

온 가족이 밤낮으로 재단기와 가위로 라벨을 자르고 풀을 발라 크림 통에 붙였다. ‘럭키크림’은 처음부터 소비자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경쟁 상품들은 한 상자(12개)에 500원 정도였는데 ‘럭키크림’은 한 상자의 정가가 1000원이었음에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아들 구자경도 사업에 참여


▎허준구(왼쪽) GS건설 명예회장과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LG 그룹 성장사의 주역이었다.
구인회는 1949년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장남 자경(慈暻. 1925~2019)을 끌어들여 허준구의 친형 허학구(許鶴九. 허만정의 2남)와 함께 24시간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장 내의 청소와 정리, 야간경비 등을 맡겼다. 1925년 진양에서 출생한 구자경은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밤에도 비좁은 다다미방에서 군용 슬리핑백 하나로 새우잠을 자야 했고 새벽 5시면 무조건 기상해야 하는 등, 매우 고단했지만 자경은 불평 한 마디 없이 부친의 명령에 순종했다. 겸손하면서도 성실했던 구인회 스스로 매일 아침 공장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청소, 정리는 물론 일손이 부족할 때는 잡일까지 담당했다. 또한 그는 항상 미군 겨울용 파커를 입고 다녔는데 “소매가 닳고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묻을” 정도로 근검했다.

한편에서는 ‘럭키크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투명크림을 개발하는 등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제품 개발은 셋째 아우 태회에 맡겼다. 두뇌가 명석한 데다 성실한 태회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태회는 바로 아래 동생이자 서울대 문리대 재학생인 평회(平會)와 함께 태회의 장충동 집에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1950년 3월 투명크림 제조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락희화장품연구소’란 명칭도 사용했다.

없어서 못 파는 락희 제품들


▎LG그룹의 기원이라 할 락희화학은 성장을 거듭하며 주식 공개까지 이르렀다. / 사진:LG그룹
6·25전쟁 중에는 외국산 화장품 범람에다 과잉경쟁으로 국내 화장품 메이커들이 고전했다.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무려 50%나 저렴한 일제 향료를 어렵게 수입해서 제품을 만든 결과, ‘럭키’크림이 전국을 석권했다. 당시는 일본과의 국교 단절로 한·일 간의 경제거래도 중단됐는데, 럭키가 어렵게 일본에서 정식 수입루트를 확보한 것이다.

이 무렵 락희화학은 새로 플라스틱 성형사업을 시작했는데, 동기는 잘 파손되지 않는 화장품 용기의 뚜껑 개발 때문이었다. 당시 국산 화장품 용기의 뚜껑 소재가 쉽게 파손되자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품 개발은 1950년 5월 전무로 입사한 셋째 아우 태회가 전담했다. 태회는 1951년 일본에 출장 가는 조홍제(趙洪濟. 효성그룹 창업자)에게 부탁해 합성수지총서(6권)를 입수해서 독학으로 기술을 습득했다. 조홍제는 구인회가 지수보통학교 시절 축구를 통해 알고 지내던 동향 인사로 부산 광복동에서 이병철과 삼성물산을 경영하고 있었다.

1951년 1·4후퇴 때여서 부산마저 함락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시기였으나 구인회는 “지금 피란가면 어디까지 가겠다는 말이고, 남이 안할 때 시작해 보자”며 신제품 개발을 독려했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 5명과 슬하의 자녀 6남4녀를 건사해야 하는 등 책임이 막중했지만 인화를 우선시하는 부드러운 리더였다. 또한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만큼 신중했으나 일단 결심을 하면 신속하게 처리하는 과단성도 겸비했다.

구인회는 화장품 판매로 벌어들인 전 재산 3억환(圜)으로 1952년 9월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부산 범일동 884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생산직원 17명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1952년 11월 최초의 국산품인 빨간색의 곱고 앙증맞은 플라스틱 빗을 생산했다. 빗의 허리에는 ‘Oriental’이란 상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2개가 쌍으로 되어 있는 금형에서 플라스틱 빗이 45초 간격으로 쏟아져 나와 하루 생산량은 350개 정도였다.

이 빗들은 시험적으로 부산 국제시장에 출하했는데 상상 외의 큰 인기를 끌었다. 대나무나 목재를 가공해서 만든 투박한 재래식 빗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내구성이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가벼운 신소재 빗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미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외국산 빗은 12개 한 상자에 150~200원에 거래되었으나 국산 ‘오리엔탈’ 빗은 가격이 200원임에도 없어서 못 팔았다.

이후부터 플라스틱제 비누 상자와 식기 등도 생산했는데, 소비자 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 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미국 칼슨 툴 앤드 머신(Carlson Tool & Machine Co.)의 자동식 모기 1대를 도입해서 칫솔도 생산했다. 당시 마카오에서 밀수입된 칫솔과 대나무에 돼지털을 심어 만든 국산 칫솔이 유통됐으나 돼지털 칫솔은 몇 번 쓰면 털이 빠지는 불량품이라 럭키칫솔은 출시와 함께 수요가 급증했다.

1953년 10월에는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당시 락희화학의 화장품 시장 점유율은 50% 이상이었으나 화장품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지는 데다 외상매출금 회수기간도 길어지면서 채산성이 떨어진 것이다. 반면에 플라스틱은 재질이 가볍고 색상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생산원가 또한 저렴해서 회사의 역량을 플라스틱 성형사업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치약 제조에 뛰어들다


▎대한민국 신성장동력으로 꼽히는 2차전지 산업을 주도하는 LG에너지솔루션은 락희화학에서 잉태됐다. / 사진:LG에너지솔루션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LG상사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53년 원료의 수입, 기계설비 도입, 통관, 해외정보 입수 등을 맡았다. 1954년에는 사무실을 반도호텔로 이전하고 1956년 6월 상호를 반도상사주식회사로 변경했다.

1953년부터 락희화학은 치약 제조에도 뛰어들었다. 칫솔을 만드니 치약도 만들어보자는 구인회 사장의 제안이 관철됐다. 당시 국내에는 주로 미군부대를 통해 불법으로 유출된 미제 콜게이트 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카키 치약이 있었지만 콜게이트 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대다수 국민은 왕소금이나 잿물 등으로 양치질했다.

1954년 10월 구평회 지배인이 미국 콜게이트 치약을 방문해 자료수집 및 기술제휴 등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치약의 자체 개발에 착수했다. 숱한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1954년 5월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1대, 독일 Schweb Hall에서 충전기와 튜브제조기 1대를 부산 연지공장(제2공장)에 설치하고, 1955년 추석 직전 ‘럭키치약’을 처음 출시했다. 부산 부전동 공장이 협소해서 치약 생산을 계기로 1954년 7월 연지동 일대 부지에 연지공장을 건설했다.

소비자들이 낯선 국산 치약을 외면하자 락희에서는 3개월 후에 대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상점에 진열케 하고, 허준구 상무 등 직원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각 상점을 순회했다. 그 결과 3개월 후에 매출이 절반가량 회수됐으며 새로운 주문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5년 12월에는 계림화학보다 50g 치약 1개 당 2환이 낮은 88환씩 군납도 개시했다. 생산 개시 6개월 후부터는 생산능력을 풀가동할 정도로 럭키 치약이 제자리를 잡았다.

이후부터 락희화학의 사업은 수지제품 제조와 치약 생산으로 이원화됐다. 수지제품의 경우 1954년 비닐시트와 필름, 1956년 국내 최초의 PVC파이프, 1957년 1월에는 시판 중이던 리놀륨 꽃장판보다 우수한 비닐장판과 폴리에틸렌필름을 선보였다. 1959년 6월에는 치약과 스폰지 레저를 개발했다.

1950년대 이미 재벌 반열에

온상(溫床) 및 포장 용도의 폴리에틸렌 필름은 한국 농촌의 영농혁명을 초래했다. 눈이 쌓이는 겨울철에도 화초와 채소를 키워낼 온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이 필름은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설치하고 사용 후에는 간단히 철거할 수 있어 농가소득 제고에 획기적이었다. 덕분에 도시민들도 한겨울에 싱싱한 채소와 딸기 등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품질이 매우 우수했던 요소수지, 멜라민수지(식기류), 폴리에스텔(가구류), 스폰지 비닐(제화용), 사랑사(어망) 등 무려 800여 종의 각종 제품이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다. 비닐 타일은 건축자재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합성피혁인 우레탄 레더는 천연가죽보다 저렴해 의류, 실크, 모자, 여행구, 장판 등에 활용됐다.

폴리에틸렌 양동이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함석을 두드려서 만든 양동이는 색상이나 모양새가 단조로울 뿐 아니라 녹이 슬고 밑창이 빠지기도 해서 불결하고 불편했는데 폴리에틸렌 양동이는 이런 불편을 일거에 없애준 것이다. 가볍고 깨지지 않으며 값도 저렴한 각종 플라스틱 식기류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락희화학은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 기업 중 4위에 랭크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회사는 “구(具)·허(許)씨 가족들이 회사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1954년 초부터 조직적인 경영체계가 잡혀갔다.”([럭키40년사]) 그 와중에 상표 ‘럭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 점차 커져갔다.

락희화학은 1950년대 후반 재벌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완료했다. 설립 10여년 만에 기틀을 형성할 수 있었던 비결로 첫째, 해방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물자 부족이 극심했다는 점과 둘째, 대부분의 공장들이 서울·인천·안양 등 수도권에 위치했던 탓에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나 락희의 생산 기반은 부산에 위치해 전쟁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점과 셋째, 해외원조로 제공된 신소재(플라스틱)를 가공해서 값싸고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난 생활 필수품들을 생산한 것을 꼽을 수 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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