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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부산엑스포 유치 A to Z(5)] 부산의 역사와 엑스포의 정신은 닮았다 

전 세계 개도국에 퍼뜨리는 상생과 공존의 밀알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교역과 문화 교류를 주도한 항구도시의 개방적 풍토는 부산의 매력
폐허에서 국제협력 선진국으로 거듭난 부산의 경험 전파 부각해야


▎2023년 5월 27일 부산 북항 일대에서 엑스포 개최를 희망하는 드론 라이트 쇼가 거행됐다. 부산의 발전과 다양성을 선보였다.
오는 11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세계박람회기구(BIE)’ 정기총회에서 171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표를 모으려면 부산이라는 도시의 매력을 다각도로 각인해야 한다. 특히 현실적으로 1개국이 1표를 행사하는 만큼 숫자가 많은 개발도상국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 급선무다. 아프리카연합(AU)을 중심으로 하는 55개 아프리카 국가, 아랍연맹(AL)을 구성한 22개 중동·아프리카 국가, 태평양제도포럼(PIF)을 구성한 11개 남태평양 도서 국가,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로 느슨하게 연결된 33개 중남미 국가가 대상이다. 이들을 감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특단의 무기가 필요하다.

우선 부산의 매력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다양한 자연 생태계를 동시에 갖춘 대도시라는 점에 있다. 지리적으로 하나의 대도시 안에 자연 해안과 인공 항만으로 이뤄진 바다, 낙동강 하구라는 강, 그리고 태백산맥 끝자락이라는 산까지 골고루 갖춘 드문 입지를 자랑한다.

부산의 해양은 한반도 내에서도 독특하다. 깊은 동해와 오밀조밀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뤄진 남해를 동시에 접한 부산의 수많은 해수욕장과 해변, 해안 산책로는 도시의 매력을 더한다. 거대한 습지와 동식물 서식지를 끼고 있는 낙동강 삼각주와 철새가 떼 지어 날아다니는 을숙도는 거대 도시 주변에선 보기 힘든 장관이다. 태백산맥 남쪽 끝에 있는 고즈넉한 범어사와 동래산성 등산로는 산의 매력을 보여준다.

교역과 문화 교류를 주도해온 항구도시로서 개방적 풍토도 부산의 자산이자 매력이다. 부산은 1592~1598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1601년부터 쓰시마(對馬島) 등에서 건너온 왜인들이 거주하며 무역을 했던 왜관이 운영된 전통의 교역 도시다. 초량동에 1만 평 규모의 두모포 왜관이 있다가 나중에 현재 광복동의 10만 평 규모 신왜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신 왜관으로 옮겨간 뒤 두모포 왜관은 고관(古館)으로 불렸다. 지금도 부산에선 이 지역을 ‘고관 입구’라는 지명으로 부른다. 현재 일본의 부산 총영사관이 있는 지역이다. 부산은 임진왜란 뒤 1607~1811년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모두 12회에 걸쳐 조선통신사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오갔던 외교·교역 사절의 도시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선정 영화 도시 부산

부산역 건너편 초량에는 화교거리·러시아거리·텍사스거리에다 중앙동·영주동·부평동·보수동 등에 일부 남은 20세기 초 일본식 근대 주택과 건물은 물론, 금정구 남산동의 알파타 마스지드(이슬람 사원) 등 오랫동안 전 세계와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알파타 마스지드는 한국과 건설 등으로 인연이 깊은 리비아에서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알파타는 쿠란에 99개가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는 사람’, ‘승리를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부산은 특히 영화로 이름이 높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의 창의도시 네트워크(Creative Cities Network·UCCN)의 영화부문 도시로 2014년 지정됐다. UCCN은 영화·문학·음악·공예 및 민속예술·디자인·미식·미디어아트 등 7개 창조산업 분야에 걸쳐 90여 개 나라에서 거의 300개 도시가 지정됐다. 한국에선 영화 외에도 문학에서 경기도 부천과 강원도 원주가, 공예 및 민속예술에선 경기도 이천과 경남 진주와 김해가, 디자인에선 서울특별시가, 미식에선 전북 전주가, 미디어아트에선 광주광역시가 각각 해당 분야에서 특색 있는 도시로 지정됐다.

부산은 인도주의 지원과 개발원조(ODA)의 세계적인 성공 사례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선진국을 의미하는 ‘글로벌 노스’와 신흥국·개도국을 뜻하는 ‘글로벌 사우스’의 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이로 인한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부산이 지닌 이런 역사는 BIE의 다수를 차지하는 글로벌 사우스 회원국을 설득할 ‘서희 장군의 혀’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덕수 총리가 지난 2022년 11월 프랑스 파리 BIE 총회에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부산 이니셔티브’를 선언한 것은 의미가 크다. 한 총리는 “2030 세계박람회는 인류가 직면한 공통의 문제 해결에 세계인의 지혜를 모으는 장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원조 받는 나라에서 베푸는 나라로


▎부산 국제영화제는 부산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 사진:연합뉴스
부산 이니셔티브는 한국의 독특한 성장 경험을 회원국과 공유하며 디지털 격차, 기후변화, 보건 위기, 식량 문제 등 구체적 협력을 추진하는 프로젝트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단순 원조를 넘어 빈곤 퇴치와 경제진흥 등 구체적 개발 목표를 달성하고 기후변화 억제 등 인류 공통의 과제 달성을 위한 국제협력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다. 부산 세계박람회를 일회성 행사가 아닌, 인류 공동의 지속가능한 솔루션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한 대한민국의 노력을 시작한 셈이다.

이는 6·25전쟁 이래 오랫동안 원조를 받아왔던 한국이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뀐 것은 물론, 개발원조(ODA)의 질적 진화를 이끄는 21세기 국제협력 주도국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2030 국제엑스포 유치 희망지인 부산은 새로운 국제협력을 주도할 역사성이 있는 도시다. 부산은 우선 6·25전쟁 당시 국제사회에서 제공한 원조물자가 도착한 하역항이었다.

부산은 전란으로 인해 수많은 피란민이 몰린 난민의 도시이기도 했다. 부산 영도에는 피란민을 수용할 거대한 가설 주거단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 철수 당시 마지막 배(미러디스 빅토리호로 추정)를 타고 1950년 성탄절 날 거제도에 도착했다. 부산 영도의 피란민용 가설 주거단지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는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적인 기억의 시작일 것이다.

당시 부산항에는 참전국의 병력과 군수물자, 의료 등 지원인력 외에 피란민을 먹여 살릴 밀과 옥수수 등이 대량으로 도착해 풀렸다. 부산은 미국에서 지원한 원조 밀가루를 이용한 국수 제조지로 명성을 쌓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에선 골목마다 국수 공장에서 뽑은 국수를 걸어놓고 바람에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산의 국수산업은 지금도 ‘구포 국수’ 등 지리적 상표명으로 일부 남아 있다. 부산 중구 부평동 시장 등에서 최근까지 별미로 명맥을 유지해온 ‘찐 옥수수빵’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역사는 올해 5월 기준 1억10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전 세계 강제 이주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례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 세계 강제 이주민은 지난해 5월 처음으로 1억 명을 넘었으며 지난해 말까지 1억840만 명으로 추정됐다. 2021년과 비교해 1900만 명이 늘어나 역대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3530만 명은 국경을 넘은 난민이고, 6250만 명은 분쟁·폭력·박해 등으로 자국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났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지난해 말 570만 명에 이른 우크라이나 난민과 탈레반 장악으로 증가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그리고 사실상 국가 파탄 상태에서 늘어나고 있는 베네수엘라 난민, 최근 군벌 간의 내전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수단 난민 등이 이주민 증가의 주요 원인이다. 내전·쿠데타 등으로 혼란스러운 말리·부르키나파소·니제르·차드·수단·남수단 등 사헬 지대(사하라 사막 남쪽의 경계지대)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기근에 시달리는 동아프리카 등도 강제 이주민이 발생하는 주요 지역이다.

강제 이주민은 인류사의 거대한 비극이자 글로벌 사회의 도덕적·외교적·정치적·경제적 부담으로 남아 있다. 이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국제사업이 개발원조다. 한국이 원조를 받으며 생존을 유지하다 경제 발전을 거쳐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발돋움한 사례는 전 세계 수많은 개도국 주민과 난민, 국내 실향민을 비롯한 강제 이주민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리적인 중심지가 원조물자 하역을 맡았던 부산이다. 2030 부산엑스포 개최 예정지가 바로 원조물자가 하역되던 부산 북항으로 새롭게 개발되는 지역이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내려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그 역사적인 지점인 북항과 영도가 한눈에 보이는 사진 촬영 포인트가 자리한다. 지리적으로 항구와 바다, 그리고 영도의 봉래산(해발 394.7m)이 한눈에 보일 뿐 아니라 부산과 한국의 역동적인 근대사를 떠올릴 수 있는 자리다.

국제개발원조 ‘부산 이니셔티브’의 탄생지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였던 부산의 상황을 재연한 피란학교 천막교실.
부산은 단순히 6·25전쟁으로 인한 피란민과 원조의 현장만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빈곤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극복하는 노력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산은 2011년 국제개발원조 총회를 유치해 이런 문제를 논의했던 곳이다.

부산에서 국제개발원조 총회가 열렸던 배경을 알아보자. 냉전 시기(1947~1991)에는 진영 내의 동맹국 중심으로 경제와 무기 원조가 주를 이뤘지만 옛 소련이 무너지고 탈냉전 시대가 열리면서 빈곤퇴치와 개발진흥을 위한 공적원조 형식으로 개념이 진화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자금만 투입하는 원조형태는 원하는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원조효과성(Aid Effectiveness)에 주목하게 됐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개발원조를 주도해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가 원조효과성 회의를 열게 됐다.

우선 2003년 멕시코 몬테레이 DAC에서 개발 자금을 확충하는 ‘몬테레이 합의’를 이뤘다. 이어 2005년 프랑스 파리에서 원조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파리 선언’이 나왔고, 2008년에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열린 고위급 포럼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아크라 행동계획’을 마련했다.

2011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개발원조의 효과와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국제사회의 이행성과를 점검하고 새로운 개발협력 의제를 이끌어내기 위한 ‘제4차 원조효과성에 관한 고위급회담(HLF-4)’이 부산에서 열렸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성장한 한국에서, 그것도 원조물자 하역항이던 부산에서 국제원조 회의가 열렸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뜻깊다.

물고기도 주고, 잡는 법도 가르쳐준다


▎2022년 11월 한덕수 국무총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BIE 총회를 찾아 ‘부산 이니셔티브’를 소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개발 협력의 혁신과 진화를 위한 ‘부산 이니셔티브’는 당시 부산에서 열렸던 HLF-4에서 처음 나왔다. 태평양 도서국가와 아프리카 내륙국가의 기아 해결과 의료지원 방안 및 방식이 ‘부산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으로 제안됐다. 그 핵심은 원조를 단순히 자금지원이 아닌 개발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아울러 새로운 글로벌 개발 파트너십, 지속가능한 성장과 개발, 포괄적 경제성장, 인권과 성 평등 증진과 부패 감소, 그리고 기후변화 억제를 위한 사업 등 다양한 주제를 개발협력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BIE 총회에서 한덕수 총리의 제안은 이런 맥을 잇고 대한민국정부가 실천을 주도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개발원조의 핵심이 인간의 생존과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보건의료와 식량 확보, 그리고 교육이라면 한국, 특히 부산은 살아 숨 쉬는 성공 사례다. 보건의료 분야 협력의 가장 구체적 사례는 각각 태평양 섬과 아프리카 내륙의 개발도상국 현장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던 한국인 의사 두 사람이 제시한다. 1981년부터 2년간 사모아섬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봤던 이종욱(1945~2006)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과 2001년부터 7년간 남수단의 오지 톤즈에서 주민들을 보살폈던 이태석(1962~2010) 신부다.

한국인으론 처음 유엔기구 수장에 올랐던 이종욱 사무총장이 WHO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남태평양에서의 현장 활동이었다. 이 총장은 한국에서 한센병 퇴치 활동을 벌이다 1983년 남태평양 피지의 한센병 자문관으로 WHO에 들어갔다. 그는 23년간 현장에서 일하면서 결핵·소아마비 등을 예방하는 백신 접종 사업까지 펼쳐 성과를 거뒀다. 현장 경험이 그를 국제보건행정 전문가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뒤 WHO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개도국에 대한 백신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다 2006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을 딴 ‘이종욱-서울 프로젝트’가 그의 모교인 서울대 의대에서 진행됐다. 개도국 의대 교수들을 데려와 최신 의료기술을 전수하고 의료장비와 교육기재도 나누는 글로벌 의학교육 협력 사업이다. 한국 의료진이 직접 현지에 가서 일정 기간 봉사 진료를 하는 것이 물고기를 나눠줘 허기를 달래는 것이라면,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는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자립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는 1955~1961년 미국 국무부가 진행했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선진 의료기술과 시스템을 전수받았던 서울대 의대가 이제는 개도국을 상대로 나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서울대 의대 교직원 77명이 4개월~4년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연수했고, 미네소타대 교수 114명이 서울대에 자문으로 파견돼 의학을 가르쳤다. 미국에 파견됐던 77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한 73명이 귀국해 후진을 양성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에서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로


▎이종욱 WHO 사무총장은 일생에 걸친 진심을 인정받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미국이 단순 의료원조를 넘어 의학지식을 나눈 효시다. 한국은 해외 의료원조 사례 중 최고 사례로 통한다. 현재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의 의료 수준이 이를 말해준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UCSF)가 인도네시아, 인디애나대가 파키스탄, 일리노이대가 태국에서 각각 미국으로 파견된 의료진을 맡았으나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의료진은 귀국하는 대신 미국에 정착하는 바람에 애초 의도했던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것과 비교된다. 게다가 한국은 이렇게 전수받아서 키운 의료 역량을 개도국에 다시 나눔으로써 당시 받았던 개발원조 혜택을 갚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는 한국이 앞으로 개발원조 분야에서 국제사회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칠지를 잘 보여준다.

부산 출신인 이태석 신부의 짧은 삶은 그 자체로 한국이 개발원조를 주고받은 역사를 잘 말해준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10월 17일 부산 서구 남부민동의 17평짜리 주택에서 태어났다. 1961년 부산교구 부주교이자 중앙성당 주임이었던 장병화 신부가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부인회의 도움으로 지은 주택 단지다.

이 천주교 주택은 1956~1964년 독일 뮌스터대에 유학하며 인근 국가인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부인회와 인연을 맺었던 김수환 신부(1922~2009, 1969년 추기경 서임)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루디(한국명 서기호) 신부가 손잡고 추진한 피란민 주택사업으로 지어졌다. 이태석의 부모인 이봉하·신명남 부부는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이었다.

1960년 3월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서 난민 주택 건립을 위해 7만 달러(현재 100만 달러 이상에 상당)를 모금해 송금했다. 장금화 신부는 이 돈으로 땅값이 비싸지 않은 남부민동에 부지를 매입해 이듬해 50채의 함석지붕 주택을 완공했다. 판잣집이나 천막집에 살던 성당 주민 중 제비뽑기에 당첨된 사람들이 입주했다. 1962년 2월 초 이태석 신부의 부모와 8남매는 남부민동 천주교 주택 26호에 정착했다. 바로 그해 9월 19일(음력) 이태석은 그 천주교 주택 26호에서 부모님의 아홉째 아이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 용두산 아래에서 중앙성당을 운영하던 가톨릭 부산교구는 천주교 주택 언덕 위에 1961년 12월 25일 남부민 성당을 새로 지었다. 이듬해 송도 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송도 성당에는 그해 7월 알로이시오 슈워츠 신부(1930~1992)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한국명 소재건(蘇再建)으로 ‘소(蘇) 알로이시오 신부’로 불렸다.

어린 이태석은 1962년 성탄절인 12월 25일 송도성당에서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본명은 세례자 요한으로 지었다. 요한은 영어로 존이기 때문에 나중에 수단에서 존리를 현지발음화한 ‘쫄리’ 신부로 불렸다.

천주교 주택 26호에 살던 이봉하·신명남 부부 가족은 꼰벤뚜알 프란시스코 수도회 사제인 이태영 신부(1960~2019)와 살레시오회 선교 사제인 이태석 신부를 배출했다. 35호에서 태어난 오창일·오창열 형제는 부산교구의 형제 신부가 됐다. 50호 출신의 김해걸은 평신도로서 30년간 가톨릭 봉사단체인 레지오 미라에 부산 레지도 단장을 맡아 교회와 부산의 빈민들에게 봉사를 계속한 공로로 1981년 교황 십자훈장을 받았다.

이태석 신부가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인 톤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고 이태석 신부.
이태석은 집 근처의 남부민초등학교에 다녔다. 그에게 유아세례를 준 알로이시오 신부는 계속 부산에 근무하면서 부산 암남동에서 ‘소년의 집’도 운영했다. ‘소년의 집’ 소년들은 초기에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깨끗한 교복도 입지 못하고 도시락도 싸지 못했다. 원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지만 어린 이태석은 주일학교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과 같다”(마태오 복음 25장 40절)는 성경 말씀을 들은 뒤로 원생에게 다가가 친구가 됐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태석은 처음으로 알로이시오 신부와 같이 힘든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이태석에게 유아세례를 준 알로이시오 신부는 원조의 역사를 웅변하는 인물이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한국을 거쳐 필리핀에서 선교사업을 하다가 루게릭병으로 선종한 인물이다. 교황청은 1990년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몬시뇰 칭호를 내렸다. 몬시뇰은 가톨릭 교회에서 주교품을 받지 않은 덕망 높은 본당 사제나 교회에 큰 공을 세운 원로 사제에게 부여하는 명예 칭호다. ‘교황의 명예 전속 사제’에서 유래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 대청동에 메리놀 병원을 세운 미국 가톨릭 조직인 메리놀회 소속이었다. 메리놀 수도회는 부산과 인연이 깊다. 1945년 4월 15일 중구 대청동 산동네에 무료진료소를 설치하고 5월 1일 메리놀 의원을 정식 개원하면서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부산 최초의 가톨릭 의료기관으로 지금도 수많은 환자를 돌보고 있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을 진료하고 전쟁고아를 보살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군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병원을 지어 지금에 이르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47년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입회했고, 1948~52년 일리노이 주 글렌 엘렌에 있는 메리놀회 신학교에서 학부 과정을 마쳤다. 그 뒤 가난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벨기에의 프레데리크뱅상 레브(Frédéric-Vincent Lebbe, 중국명 雷鳴遠, 1877~1940) 신부가 설립한 선교협조자회(Société des Auxiliaires des Missions: SAM)에 입회하고 벨기에 루벵 가톨릭대에 유학했다. 레브 신부는 중국 선교를 하며 중국으로 귀화해 외국인이 누리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현지인 사이에 들어간 사제다. 교황청에 의해 최초의 중국 국적의 중국 주교로 임명된 인물이다. 1940년 중국 공산당에 체포돼 이듬해 선종했다.

레브 신부에 감화돼 1954년 벨기에로 유학을 떠난 알로이시오 신부는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던 장 요셉 신부(1919~1990)로부터 한국전쟁과 전후 피폐한 한국 사정에 대해 듣게 됐다. 그 뒤 1957년 6월 29일 워싱턴 DC의 세인트 마틴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해 한국으로 떠났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1년 워싱턴 DC에서 민간 원조기관인 한국자선회를 세우고 여기서 모금한 자금으로 한국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1962~1964년 부산교구 송도 본당의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이태석에게 유아세례를 했다. 1963~1969년 부산에서 2000명의 가정주부에게 손수건에 수놓는 일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펼쳤다. 가난한 가정주부들에게는 일감을 제공하고, 완성된 자수 손수건은 교회에서 모금용으로 사용했다.

1964년 보육원을, 1966년 아미동에 첫 진료소를 세웠다. 1967년 암남동과 보수동에 각 1개의 진료소를 신설했다. 1968년 아미동에 아미 고등공민학교를 세웠으며, 1969년 장림동에 행려병자 구호소를 세웠다. 미혼모에게 2년간 자활기회를 주는 사업도 펼쳤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4년 부산에 마리아수녀회를 설립했으며, 1969년에는 노숙자 200명을 보호하는 마리아 수도회 구호소를 세워 운영했다. 1981년에는 그리스도 수도회를 설립하고 서울에서 노숙자 2000명을 보살피는 그리스도 수도회 ‘은평의 마을’을 운영했다.

인도주의 헌신자의 도시, 부산

부산 서구 암남동에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알로이시오 기념병원과 2018년 폐교한 감천동의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공고(1975년 개교한 부산 소년의 집 기계공고에서 개명)도 세웠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필리핀과 멕시코 등에서도 소년의 집과 소녀의 집을 세우고 어린이 청소년을 보살피는 의료, 교육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89년 근육이 위축되고 굳어지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휠체어를 타고 계속 활동을 펼치다 1992년 3월 16일 마닐라의 사제관에서 선종했다. 교황청은 2015년 1월 22일 알로이시오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으며, 복자와 성인으로 모시는 시복·시성 절차도 밟고 있다.

부산은 외국인에 의한 이런 인도주의 지원과 협력의 전통으로 넘치는 도시다. 이런 역사를 이어받은 부산은 전 세계 개도국과의 협력 사업을 통해 돌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용도를 넘어선다. 전란에 시달리던 나라에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모범을 이룬 대한민국, 그리고 피란민의 도시에서 경제적·문화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도시로 거듭난 부산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준 것이 부산 이니셔티브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개도국과 상생·공존을 추구하는 한국과 부산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가장 감성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고난과 극복의 역사를 전 세계와 나누고 공유하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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