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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부산 엑스포 유치 A to Z(7)] 새만금 잼버리가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 주는 교훈 

다른 의도 섞지 말고 오직 엑스포의 정신에 몰입해야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졸속 잼버리 여파 부산에 미치지 않을 것, 그보다는 유치 탈락도시 표 흡수할 전략 짜야
군국주의 일본의 엑스포 포기와 패전 후 오사카박람회 성공의 결정적 차이는 ‘개최 목적’


▎부산시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부산 엑스포 홍보 버스킹 무대를 열었다. 소프트파워는 부산이 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해 내세우는 요소다. / 사진:부산시
2023년 8월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서해안 매립지인 전라북도 새만금에서 지난 8월 1일 한국스카우트협회 주최로 개막해 12일 폐막한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이하 잼버리)의 여파 때문이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World EXPO 2030 BUSAN, KOREA)’ 유치전을 벌이고 있는 한국 입장에선 잼버리의 진행 상황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는 열이틀간의 대장정이었다. 158개국에서 약 4만3000명이 참가한 이번 행사가 무더위와 시설·운영 문제 등으로 파행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온으로 쓰러진 참가자들이 병원에 실려 갈 때마다 가슴을 졸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 참가자들이 대도시로 철수할 때는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태풍 카눈의 한반도 진입으로 참가 인원이 새만금을 떠나 전국으로 분산되는 과정에선 ‘과연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안전하게 이동하는 게 가능할까’ 반신반의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주최 측은 물론 중앙정부와 전국 지자체의 행정 인력, 그리고 군과 대학 등이 나서서 혼신의 힘을 다한 덕분에 어느 정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잼버리는 1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3 세계스카우트잼버리 K-POP 슈퍼 라이브’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한 뒤 그 다음 날 막을 내렸다.

날씨는 오히려 부산에 플러스 요인

새만금 잼버리는 2030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에 숱한 교훈을 남겼다. 2030 세계박람회 개최지는 오는 11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173차 세계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표결로 결정된다. BIE 179개 회원국의 3분의 2가 참석해 최종적으로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개최지로 결정된다.

일부에선 BIE 총회를 불과 3개월여 남기고 벌어진 잼버리의 일부 파행이 부산의 유치전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유치전이 개최 도시의 적합성과 시민 의지는 물론 개최 국가의 대외 이미지, 외교력과 행정력, 문화력과 위기 대처능력 등 총체적인 국력 대결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잼버리가 보여준 여러 문제점이 세계박람회 유치전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앞날을 위한 거름’이자 ‘예방 백신’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선 2030 세계박람회 유치전에 뛰어든 부산의 경쟁 상대가 어딘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산과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도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다. 더위를 비롯한 기후 부문에선 부산이 경쟁도시와 비교해 오히려 우위에 서 있다.

IBM이 운영하는 웨더채널의 일기예보에 따르면 리야드의 8월 15~22일 낮 최고기온은 섭씨 42~44도이고 아침 최저기온이 29~30도다. 리야드의 여름은 낮 최고기온 40도 이상이 예사다. 같은 기간 로마는 낮 최고기온은 32~37도이고 아침 최저기온이 모두 22도다. 부산은 낮 최고기온이 28~31도, 아침 최저기온이 24~26도다.

사실 올해 새만금 잼버리에서 가장 문제가 된 더위는 쉼터와 물, 앰뷸런스, 의료기관 이송 대책 등을 더욱 촘촘하게 마련했으면 어느 정도 충격을 줄일 수 있는 과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올여름 지구 북반구를 휩쓴 이상 고온현상이다. 8월 15~22일 부산과 로마의 최고 기온도 같은 이유로 평년보다 높은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더욱 객관적일 수 있는 해당 도시들의 월별 평균기온을 살펴보자. 기상서비스 업체인 홀리데이닷컴에 따르면 리야드는 가장 온도가 높은 5~9월 5개월 동안 평균기온이 32~36도로 모두 30도를 넘는다. 12~2월만 15~17도로 10도대이고, 나머지 3~4월과 10~11월이 20도대다. 로마는 가장 더운 5~9월 평균기온이 21~26도로 20도대다. 1~2월이 8~9도이며, 나머지는 10~14도 수준이다. 부산은 5~10월이 22~29도로 20도대이며, 1월의 8도를 제외한 나머지 달은 10~18도로 10도대의 온화한 날씨다. 부산이 더위나 이상기후 측면에선 경쟁도시에 그리 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새만금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 유치전에서 부산에 등을 돌릴 회원국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물론 세계박람회 행사는 주로 야외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잼버리와는 방식이 다르다. 실내는 에어컨으로, 실외는 미스트 살포기와 촘촘한 이동수단 등으로 어느 정도 더위와 불편을 조절할 순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칫 세계박람회 행사가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탄산가스를 과도하게 배출해 기후변화와 지구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상하이 박람회가 ‘대박’ 친 이유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원들이 캠프지였던 전북 부안군 새만금 현장에서 조기 철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이 새만금 잼버리에서 배워야 하는 또 다른 교훈은 행사 개최를 위한 인프라 등에 대한 철저한 사전준비다. 2010년 세계박람회를 치렀던 중국 상하이는 사전 준비, 특히 철저한 인프라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다.

중국 최대 경제도시 상하이는 행사 준비를 이미 상당히 해둔 상태에서 유치전에 임했다. 개최지를 결정하는 2002년의 BIE 모나코 총회가 열리기 전인 1999년 10월 신공항인 ‘상하이 푸둥(浦東) 국제공항’을 완공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이 신공항은 상당수 국제노선을 옮겨 받으며 기존 ‘상하이 훙차오(虹橋) 국제공항’을 대체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공항이나 상하이 구시가지 등에서 행사 예정지인 상하이의 신흥개발지 푸둥지구로 연결되는 지하철 등 교통편도 BIE 총회 전에 이미 줄줄이 연결되거나 공사에 들어갔다. 상하이 지하철 중 4·6·7·8·9·13호선이 푸둥 지구로 연결된다. 푸둥의 상하이 국제박람회센터로 연결되는 지하철 7호선은 행사 전인 2009년 12월 여유 있게 완공됐다. 세계박람회를 위한 상하이의 교통 인프라 구축은 행사 전 끝날 수 있었다.

이 밖에 상업·교통 센터는 2009년 초, 세계주제관은 2009년 9월 28일, 전시·컨벤션 시설인 박람회센터는 2009년 12월 25일, 중국관은 2010년 2월 각각 여유 있게 완공됐다. 현재 메르세데스 벤츠 센터로 이름을 바꾼 1만8000석 규모의 세계박람회 문화센터는 2010년 4월 30일 개막일에 맞춰 문을 열고 개막식을 치렀다. 중국 최대 규모의 실내 공연장이다.

이처럼 사회간접자본(SOC)을 포함한 행사 사전 준비가 중요한 것은 유치전은 물론 원활하고 매끄러운 진행을 통한 행사 성공에도 필수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가 192개국 참가에 7308만5000명의 입장객이라는 역대 세계박람회 최대 기록을 세운 것도 이러한 철저한 준비 때문으로 평가된다.

물론 상하이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 경제도시 중 하나이고, 2010년 세계박람회가 열린 푸둥지구는 팽창하는 상하이에 대한 경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어차피 대대적으로 개발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긴 했다. 결국 상하이 세계박람회와 푸둥지구 개발이 서로 시너지를 내며 윈-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박람회가 푸둥지구 개발에 기름을 부었으며, 장기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진행되는 푸둥지구 개발이 세계박람회의 유치와 개최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사전 준비나 투자 하나만으로 개최지를 손쉽게 따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개최지 선정은 표 대결로 이뤄지기 때문에 다양한 국제정치적 변수를 따질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여수가 2010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를 결정하는 2002년의 BIE 총회 표 대결에서 상하이를 상대로 상당히 선전했다는 점을 반추할 필요가 있다.

투표는 국제정치적·지정학적으로 이뤄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더위는 친환경 엑스포 유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사진:연합뉴스
여수는 2002년 12월 3일 모나코 BIE 총회에서 2010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놓고 최종 표결까지 갔다가 안타깝게 상하이에 밀렸다. 결국 여수는 인간과 관련한 모든 주제를 다루는 2010년의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 대신 2012년 제한된 주제를 앞세워 진행하는 ‘인정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전문박람회라고도 함)’를 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여수가 개최지로 결정됐으면 한국 최초의 등록박람회를 열 수 있었다.

등록박람회든 인정박람회든 모두 인류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초대형 국제행사이긴 매한가지다. 환경 등 인류의 공통 과제와 과학, 미래학을 비롯한 그 해결책을 대중에게 알리고 함께 생각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등록박람회와 인증박람회는 격이 다르고 규모, 그리고 주제의 폭이 다르다. 한국이 이번에 제2의 도시인 부산을 앞세워 등록박람회 유치에 도전하는 이유다.

당시 여수는 상하이 외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멕시코 중부 도시 케레타로, 폴란드 남서부의 고풍스러운 도시 브로츠와프와 치열한 유치전을 펼쳤다. 여수와 상하이는 1차 투표에서 28대 36으로, 2차 투표에선 34대 38로, 3차 투표에선 32대 42로 각각 2위와 1위를 차지하다 마지막 4차 투표에 이르렀다. 1차 투표에선 브로츠와프가, 2차 투표에선 케레타로가, 3차 투표에선 모스크바가 각각 탈락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1차에서 브로츠와프를 지지했던 표는 2차에서 한국으로 몰렸을 가능성이, 케레타로를 밀었던 회원국은 상당수가 중국으로 갔을 가능성이 각각 있다. 여수는 4차 최종 투표에서 34대 54로 밀렸다. 모스크바를 지지했던 표가 한국과 중국으로 각각 2대 10의 비율로 분산된 것으로 보인다. 표결이 지정학적·국제정치적 진영 싸움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번 11월의 파리 BIE 총회에서 부산·리야드·로마 중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표를 확보해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치 지형을 고려하면 표는 어차피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1차 투표 탈락이 유력한 로마의 표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가 최종 투표의 판세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수 있다. 모든 상대 도시를 경쟁국으로 보지 말고 최종전에서 누구와 협력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 유치전을 펼 필요가 있는 이유다. 결국 상하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전 준비와 함께 국제정치 감각이다.

부산이 힘을 줘야 할 지점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당시 건립된 중국관. / 사진:중국 인민망
유치전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엑스포를 세계박람회 정신으로만 유치해야지, 다른 잡다한 의도가 뒤섞이면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부산시는 고령화하고 있는 도시를 되살리고 부산을 동북아시아는 물론 글로벌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돋움시키는 계기로 삼고 싶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세계박람회 유치를 앞세워 신공항을 건설하고 초대형 크루즈 터미널, 요트 정박장, 동서남북을 직선으로 이을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추가 건설 등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박람회나 여름·겨울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행사는 행사 준비와 진행, 그리고 해당 행사의 정신과 이념 구현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본질이 아닌 정치적·경제적 의도를 앞세우면 설혹 유치했다고 해도 본행사를 진행하면서 일이 꼬일 수 있다.

이는 세계박람회나 여름·겨울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행사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1940년 일본이 도쿄에 유치한 세계박람회와 여름 올림픽, 그리고 삿포로에 유치했던 겨울 올림픽이다. 당시 일본은 1940년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을 맞아 대대적인 축하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도쿄에서 만국박람회(세계박람회의 일본식, 또는 당시 명칭)와 여름·겨울 올림픽을 열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국제행사 유치가 국제행사 본연의 세계 평화·화합·미래 논의 등이 아니라 일본의 부국강병을 세계에 선전하면서 군국주의 세력의 천황 숭배와 충성·희생·인내 강요라는 불순한 의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 황기 2600주년 기념이라는 유치 명분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황기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바탕으로 첫 일왕(天皇, 덴노)인 진무(神武)가 즉위했다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일본의 신도에선 태양의 여신인 아미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御神)의 명령을 받은 손자 니나기노 미코토(邇邇芸命)가 일본을 세웠으며, 그 후손인 초대 덴노 진무가 일본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야마토 조정을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신뢰도가 떨어지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침략전쟁을 주도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신의 나라이며 덴노는 신성불가침이라는 주장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천황 숭배 사상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제정을 주도해 1889~1947년 일본이 사용한 대일본제국헌법을 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헌법 제1조부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로 돼 있다. 제3조 ‘덴노는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4조 ‘덴노는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등의 조문도 천황 숭배 사상을 잘 보여준다. 제국주의 시절 사용한 헌법에 덴노의 절대성과 신성불가침을 아예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군국주의 시절 신도의 신들을 모신 신사참배 강요나 군의 자살특공대 운영 등은 이런 규정과 천황 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뒤, 미국에 점령됐을 때인 1947년 제정한 ‘일본국 헌법’에서 덴노를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끝났다.

황기 2600주년 행사의 이면에는 천황 숭배는 물론 이와 연결된 군국주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념할 1940년 도쿄 세계박람회는 1929년 민간이 제안했다. 1934년엔 일본만국박람회협회가 결성됐으며, 행사를 유치했다. 협회는 입장객 4500만 명을 목표로 도쿄에서 1940년 3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행사를 열기로 했다. 행사장은 도쿄만의 매립지인 도요쓰(豊島)로 잡았다. 도요쓰는 2018년 쓰키지(築地)에 있던 도쿄의 수산물 도매시장이 옮겨온 곳이다.

엑스포 유치 대신 전쟁 택한 군국주의 일본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일본의 군국주의는 엑스포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 사진:중국 인민망
일본이 황기 2600주년을 맞아 도쿄에서 세계박람회와 여름 올림픽을,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겨울 올림픽도 각각 유치한 배경은 이처럼 불순했다. 평화와 화합의 인류 제전인 세계박람회와 올림픽을 자국 통치체제인 천황제를 돋보이게 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일 1940년 도쿄 세계박람회와 올림픽 행사가 열렸다면,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박람회와 올림픽이 될 뻔했다.

하지만 군국주의자들의 사심 가득한 도쿄 세계박람회와 올림픽은 결국 열리지 못했다. 이유는 일본이 1937년 시작한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1945년 9월 2일) 때문이다.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도쿄를 찾기가 힘들었으며, 특히 일본 군부는 군수물자 확보가 우선이라며 국제 행사에 반대했다. 결국 일본 각의는 올림픽과 세계박람회 개최권 반납을 결정했다. 자국이 일으킨 침략 전쟁을 핑계로 국제 행사를 포기하고 반납한 사례는 도쿄가 처음이자 유일하다.

일본이 세계박람회와 올림픽을 포기하고 벌인 중일전쟁은 고스란히 인류사의 비극이 됐다. 숱한 인명을 잃었으며 인프라가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 중화민국 행정원 배상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군인 365만405명, 민간인 913만4569명이 숨졌다. 1995년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산하 군역사연구부에서 출간한 [중국항일전쟁사]는 항일전쟁 기간 중 3500만 명의 중국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기록했다.

오사카엑스포로 ‘경제대국 일본’을 과시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 때 가져온 월석은 오사카엑스포의 명물로 주목 받았다. / 사진:NASA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44만6500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종전 뒤 소련군에 잡힌 60만 명의 일본군 포로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 연행돼 강제노동을 했다. 이 가운에 6만 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다.

일본 군국주의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까지 죽음으일본은 중일전쟁에서 44만6500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종전 뒤 소련군에 잡힌 60만 명의 일본군 포로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 연행돼 강제노동을 했다. 이 가운에 6만 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다.

도쿄는 1964년에야 여름 올림픽을 유치해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을 열 수 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이 전후 복구에 성공하고 경제성장과 민주국가로의 발전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 때문에 원래 개최 예정 시기에서 1년이 지난 2021년에야 열린 2020 도쿄올림픽은 인류가 과학과 협력으로 팬데믹을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로벌 행사가 됐다.

1940년 세계박람회 개최권을 확보하고도 침략전쟁으로 행사를 열지 못했던 일본은 1970년 오사카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1970년 3월 15일~9월 13일 183일간 열린 오사카 세계박람회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엑스포로 기록된다. 종전 25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개최권을 확보한 이 행사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人類の進歩と調和·Progress and Harmony for Mankind)’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규격 대량생산성 근대사회’를 콘셉트로 잡았다.

77개국과 4개 국제기구가 참가했으며, 6개 주와 3개 시, 1개 정부기관이 별도의 전시관을 꾸렸다. 1970년 오사카 세계박람회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국력을 이룬 경제대국 일본의 성취를 전 세계에 자랑한 행사로 기록된다.

재단법인 일본만국박람회협회가 주최하고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남인 아키히토(明仁)가 명예총재를,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가 명예회장을 맡았으니 일본 전체가 동원된 행사나 진배없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성공에 고무된 일본에선 수많은 기업이 비용을 부담하고 건축가와 예술가, 엔지니어가 행사에 참가했다. 이 때문에 고도성장의 일본, 기술의 일본, 디자인의 일본을 보여주는 행사로 평가 받았다.

일본 정부는 오사카와 주변에 예산을 아낌없이 쏟아 도로·철도·지하철을 건설하는 등 대대적인 개발·정비 사업을 벌였다. 이에 병행해 역대 최대 규모로 문화예술인을 동원해 문화행사도 열었다. 그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놓고 대학생들이 벌인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대규모 행사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지적도 받았다. 일본 내에서는 행사를 지나치게 초대형으로 벌인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오사카 세계박람회 행사는 입장객 숫자에서 당시로선 세계박람회 역대 기록을 세웠다. 외국인 약 170만 명을 포함해 6421만8770명의 입장객이 행사장을 찾았다.

주최 측은 목표 입장객을 처음에는 2000만 명으로 잡았다가 그 뒤 5000만 명으로 상향 조정했는데 이마저도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오사카 세계박람회에 명물로 등장한 모노레일을 타본 입장객만 약 335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성대하고 미래지향적인 행사를 계기로 오사카는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대성황과 알뜰한 운영으로 세계박람회 사상 첫 흑자를 이룬 행사로도 기록된다.

오사카 세계박람회는 53년 전인 1970년에 움직이는 모노레일, 전기자동차, 전기자전거, 영상전화기, 휴대전화 등 지금은 일상화된 기술 제품·서비스가 처음으로 대중과 만난 행사였다. 게다가 패밀리 레스토랑과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등 패스트푸드가 일본의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행사이기도 했다. 오사카 세계박람회는 ‘미리 보는 21세기 현대사회의 전시 행사’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미래 글로벌 모델 지향

또한 오사카 세계박람회에는 당시 동서 냉전 중인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나란히 참가해 국력 경쟁을 펼쳤다.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 20일 달 착륙 당시 가져온 월석이 행사장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반대로 경쟁국 소련은 미국의 달 탐사 프로젝트 앞에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지구 저궤도에 올리고,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에 유리 가가린을 실어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한 소련의 초기 성공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여유가 되는 사람, 기술 분야 전문가 등이 오사카 세계박람회를 보기 위해 숱하게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해외 출국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정보기관의 보안교육을 받아야 했다. 오사카로 가는 사람들은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선 검고 흰 한복이나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여성과는 아예 접촉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이라는 이유에서다.

2030년 부산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리면 이런 과거를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방문객은 과학기술과 인간을 위한 최첨단 서비스와 함께 환경과 인권,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동시에 지향하는 민주화된 세계의 모범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전 세계인이 함께 만나 새롭게 추구할 인간적인 미래 글로벌 사회의 모델이기도 하다.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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