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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 랜더스 연구 | 쓱 스토리(최종회)] ‘청라돔’으로 구현되는 정용진의 라이프 워크 

“쇼핑몰과 야구장 결합해 고객의 시간을 점유”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지속가능한 강팀 지위 누리기 위해 데이터 기반 R&D 육성 시스템 확립
구단주가 선수단 지원의 전면에 나서는 스킨십 경영으로 팀 응집력 강화


▎신세계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청라돔을 설계했다. 야구 콘텐트와 쇼핑, 문화시설, 호텔, 인피니티 풀을 결합한 것이다. / 사진:신세계그룹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은 무언가에 심취하면 깊이 파고드는 성격으로 각인돼 있다. 2006년 한국 최초의 ‘우주인 선발 대회’에 정 명예회장이 당시 69세 나이로 참가한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꽂히면 직진하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성향도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 명예회장은 구단주인 정 부회장 못지않은 SSG 랜더스의 열렬한 팬이다. 그런데 그가 팀을 응원하는 방식이 다소 독특하다. 민경삼 랜더스 대표는 “정 명예회장께서 이따금 이메일을 보내올 때가 있다. 생체 역학에 관한 해외 원서 자료를 보내주신다”고 들려줬다. 바이오메카닉을 ‘실험’ 중인 인천 강화도의 랜더스 퓨처스팀 산하 R&D 센터를 위한 나름의 조력인 셈이다.

R&D(연구·개발)는 글로벌 기업의 언어다. 기업이 R&D를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하듯, 야구팀도 선수 육성에 끊임없이 투자해야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2군을 팜(farm) 혹은 퓨처스(futures)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이런 관점이 묻어 있다. 갈수록 FA 몸값이 치솟고, 전력평준화 명목으로 샐러리캡이 시행되는 환경에서 유망주를 발굴, 육성하려는 필연성은 증대된다.

야구팀이 쓴 ‘반성문’

2021년 11월 10일 랜더스는 ‘선수 육성시스템 전면 개편’이라는 제목의 무미건조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아닌지라 당시 언론의 이목을 거의 끌지 못했다. 하지만 랜더스 프런트 내부에서는 이 보도자료를 “반성문”이라고 불렀다. A4 용지 2페이지 분량에는 ‘1군 주전 선수들의 고령화, 유망주들의 성장 정체, 선수단 연봉 상승’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적시했다.

실제 랜더스는 전신인 SK 와이번스 시절을 포함해 신인왕을 딱 1명(2000년 이승호, 현 랜더스 불펜코치) 배출했을 뿐이다. 특히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2007~2012년)이 단절된 2013년부터 신인 농사는 극히 저조했다. 2017년 박성한, 2020년 오원석과 최지훈 정도를 제외하면 존재감이 희미했다. 이 중 1차지명 성공은 오원석이 유일했다. 2020년 10월, 4년 만에 프런트 수장으로 복귀한 민 대표는 “매년 10명 이상의 신인 선수를 뽑는데 1명도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은 비정상에 가깝다”며 자아비판을 가했다.

반성문 발표 이후 랜더스는 ‘팜(farm)’을 ‘랩(lab)’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미국이 선도하는 스포츠사이언스에 입각한 바이오메카닉을 도입하며 이에 걸맞은 트레이닝·컨디셔닝 시스템 개편에 중점을 뒀다. 개혁이 기존 구성원의 저항 없이 추진되려면 마인드셋(mindset)부터 달라져야 했다. 이를 위해 민 대표는 육성팀의 명칭을 R&D 센터로 바꿨다. 야구단에 R&D란 개념을 탑재하겠다는 최초의 시도였다. “R&D 팀보다 R&D 센터가 더 격상된 어감이라고 생각했다. SSG 랜더스에 ‘센터’는 R&D센터와 데이터 센터 두 개뿐이다. 팀이 어떤 방향성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랜더스는 새 시대의 야구에 적합한 신인류를 원했다. 모종의 경로를 통해 정용진 구단주는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야구인 한 명을 추천받았다. 정 부회장은 그를 초빙해 ‘면담’했고, 랜더스 초대 R&D 센터장으로 전격 채용했다.

김성용 전 R&D 센터장(2022년 12월 랜더스 단장으로 승격)은 불과 29살 나이에 야탑고 감독이 됐다. 그 후 같은 학교에서 24년 동안 일했다. 오랫동안 학생 선수들을 관찰하면서 언젠가부터 본질적 의문이 생겼다. “훈련을 많이 시키는 게 선수를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왜 열심히 할수록 남는 건 선수의 부상밖에 없지?”

해답을 얻기 위해 체육과학연구원(현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나 생체 역학 전문 트레이너를 찾아다녔다. 미국과 일본 사이트에서 관련 논문을 뒤졌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했다. 방황하는 노력 끝에 김 단장은 “훈련의 효과는 지도자가 불안해서 많이 시켰을 때가 아니라 선수의 의지가 간절할 때 컸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선수를 희생하는 팀 승리보다 개별 선수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는 ‘동기부여 지도법’을 현장에 적용했더니 김하성(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박효준(메이저리그 애틀랜타 산하 트리플A) 같은 선수가 배출됐다.

창단 2년째를 맞아 랜더스는 R&D 센터장의 영향력을 키워주기 위해 퓨처스 파트별 메인 코치를 전원 외국인으로 교체했다. 혹시 모를 국내 야구인의 기득권 내지 텃세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심지어 퓨처스 감독직도 폐지(외국인 총괄코치가 역할 대행)했다. 이후 랜더스는 2023시즌 퓨처스 코치진을 국내 야구인으로 다시 바꿨다. 미국 시애틀의 야구 아카데미인 ‘드라이브라인(Driveline)’을 경험한 김동호 잔류군 투수코치도 김 단장의 권유로 이 시기에 합류했다.

R&D 센터의 작업을 요약하면, 정보를 선점하는 것과 그 정보를 현장이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것, 큰 틀에서 두 줄기다. 전자가 통찰(인사이트)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다. 김 단장은 “예컨대 A 코치와 B 코치 사이의 교습법에 혼선이 있으면 선수가 힘들어진다. R&D 센터는 (코치의 주관적 성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특정 선수가 좋았을 때와 안 좋았을 때의 데이터를 가지고 선수와 직접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 정보를 코치진과 공유해서 (지도법을) 일원화하려 했다”고 센터장 시절을 회고했다.

희망을 공유하는 ‘재생공장’


▎SSG 랜더스 팜에서 키워낸 중견수 최지훈(왼쪽)과 유격수 박성한은 2022시즌 우승 주역이자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도 선발됐다. / 사진:SSG 랜더스
빅데이터 시대의 야구 선수는 포뮬러 원(F1) 레이스에 참가하는 수퍼카와 흡사하다. 차가 트랙을 질주하는 내내 첨단 기기로 체크되고 맞춤 정비를 받듯, 선수의 일거수일투족도 추적·관찰된다.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선수의 결점을 장점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랜더스 좌완 불펜투수 정성곤은 2022년 KT에서 트레이드됐다. 김 코치는 “처음 봤을 때 패스트볼 구속이 시속 130㎞ 초중반대에 불과했다”고 떠올렸다. 당연히 스프링캠프에서 전력감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2023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 코치는 정성곤에게 ‘드라이브라인 프로그램’을 해볼 것을 설득했다. 8주에 걸친 프로그램은 트레이닝 파트와 협업해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몸을 만들고(3주), 최적 투구폼으로 교정하는 과정과 훈련(5주)으로 구성됐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마운드로 돌아온 정성곤이 2군 실전에서 던진 첫 번째 공은 시속 151㎞가 찍혔다. 이후 정성곤은 7월 4일 랜더스 1군으로 콜업됐다.

랜더스와 바이오메카닉을 협업하는 벡터바이오의 변경석 대표는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생체 역학을 지원한 기술분석 연구원 출신이다. 변 대표는 “KBO리그에서 자체적으로 스포츠 사이언스 전담 부서를 둔 팀은 SSG(R&D 센터)와 롯데(피칭랩)뿐으로 알고 있다”며 “예전에는 시속 150㎞를 던지면 ‘타고났다’고 말했지만, 이제 시속 150㎞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전제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래비스 소칙과 벤 린드버그의 공저 [MVP 머신]은 메이저리그에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선수 육성 시스템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유의미한 통계에 기반해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한다는 ‘머니볼’ 철학보다 더 진보한 발상이다. 이에 근거하면 ‘천부적 재능이라는 은총을 입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선수일지라도 빅데이터(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야구를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로 귀결된다. 랜더스 퓨처스팀은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재생공장’이다.

강남구 청담동 모처에 ‘용지니어스 키친’이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개인 공간이라 그룹 내부에서도 자세한 정보는 모른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80만 명 이상을 거느린 ‘셀럽’ 정 부회장에게 이곳은 일종의 친목 장소다.

2022년 1월 11일, 정 부회장은 김택진 NC소프트 대표를 ‘용지니어스 키친’에 초대한 인스타그램을 공개했다. 그는 NC 다이노스 구단주인 김 대표와 어깨동무하며 “한국시리즈에서 만나자고 서로 다짐했다”는 글을 올렸다. 김 대표는 2020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NC소프트 [리니지]의 게임 속 아이템 ‘집행검’을 현실의 우승 세리머니와 연결시켜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이런 구단주는 없었다


▎SSG 랜더스 퓨처스팀은 선수의 자율성을 존재하는 문화를 관철한다. 이곳에서 코치의 역할은 훈육자가 아니라 조력자다. / 사진:SSG 랜더스
이밖에도 정 부회장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홍정욱 전 국회의원, 전 미국 메이저리거 박찬호, 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연예인 이승기·노홍철, 평론가 진중권 등 직종과 이념을 불문하고 ‘용지니어스 키친’에서 교류한다.

정 구단주의 요리는 SSG 랜더스 선수들에게도 생경하지 않은 경험이다. 김광현, 추신수, 김강민, 최정 등 클럽하우스 리더들은 물론이고 노경은, 고효준, 문승원, 박종훈, 서진용, 오원석, 최민준, 이재원, 김성현, 김민식 등이 방문했다. 2022년 6월 6일에는 김원형 감독 등 1군 코칭스태프도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곳에서 정 구단주와 선수들 사이에 ‘비즈니스’가 암묵적으로 성사되곤 한다. 박종훈과 문승원의 비FA 5년 장기계약, 추신수와 김강민의 현역 연장도 사실상 여기서 합의됐다. 랜더스 대표나 단장도 꺼내기 힘든 민감한 협상도 ‘용지니어스 키친’에선 성사된다. 일례로 박종훈은 이후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랜더스가 계약을 제의하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남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랜더스 관계자는 “야구 선수들은 고액 연봉자이지만, 의외로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 신세계는 이런 심리를 잘 아는 것 같다”고 증언한다. 가령 창단 첫해인 2021년부터 스타벅스는 랜더스 선수단에 커피를 무상공급 중이고, 이마트 등 계열사 할인 혜택도 신세계 직원과 똑같이 제공하고 있다. 언론은 “롯데 자이언츠에는 없는 복지를 갓 창단한 신세계가 먼저 했다”고 보도했다.

구단주 정용진의 특이점은 ‘선수들과 직접 소통하나 현장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로 압축된다. LG트윈스, SK 와이번스 프런트를 거친 류선규 랜더스 전 단장은 “여러 구단주를 모셔봤지만 이렇게 현장에 자주 나타나면서도, 현장에 대해 별 주문이 없는 구단주는 처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 구단주는 ‘랜더스가 10연승을 해내면 시구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적이 있다. 실제 2022년 랜더스가 개막 10연승을 달성하자 4월 16일, 정 구단주는 랜더스필드 마운드에 올랐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정 구단주가 착용한 글러브는 투수 박종훈이 선물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TV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박종훈에게는 ‘J.H.PARK50’이라는 이니셜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50번은 그의 백넘버다. 구단주는 강화도 퓨처스팀에서 재활 중인 박종훈을 향해 ‘너를 잊지 않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로열티를 부르는 스킨십 경영


▎목발을 짚고 야구장으로 돌아온 캡틴 한유섬(오른쪽)에게 가장 먼저 달려간 이는 정용진 SSG 랜더스 구단주였다. / 사진:연합뉴스
2021년 11월 18일 정용진 구단주의 인스타그램은 대선 정국에서 미묘한 이슈를 일으켰다. 그는 추신수에게 선물 받은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과 글러브 실착 사진을 올렸다. 추신수가 2018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때 착용했던 물건이었다.

이때 정 구단주는 ‘나는 콩이 싫어요’라는 글을 한 줄 남겼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공산당이 싫다’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을 가했다. 이 무렵 정 구단주는 자신의 SNS에서 ‘멸공’이라는 어휘를 ‘밈(meme)’처럼 반복 활용했다. 실제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이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쇼핑하는 장면을 연출한 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스타벅스 불매운동 운운하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하지만 정작 온라인에서 젊은 세대는 ‘콩’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이들에게 ‘콩’은 2등(전직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별칭에서 유래)을 상징하는 은어로 익숙했다. 즉 ‘정용진 구단주는 2등이 아니라 랜더스의 우승을 열망한다’는 함의를 전파한 것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2022년 4월 28일, 랜더스 투수 노경은은 롯데전 도중 오른손 검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타자의 타구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1년 전 롯데에서 방출됐던 38살 투수는 2021년 12월 1일 테스트 끝에 랜더스에서 기회를 얻었다. 상당수 전문가와 팬들은 그의 재기를 반신반의했지만, ‘드라이브라인 훈련법’을 유튜브로 독학하며 몸을 다시 만든 노경은은 예상을 뒤엎고 랜더스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했다. 그리고 시즌 첫 3경기에서 3승(평균자책점 1.13)을 거뒀다.

패스트볼 구속을 시속 148㎞까지 끌어올렸고, 슬라이더·커브·포크볼·체인지업 심지어 너클볼까지 장착하며 ‘투구 디자인’을 극대화한 성과였다. 한창 잘 나가던 차에 치명적 부상을 당해 낙심한 그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정 구단주였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노경은은 랜더스와 계약 이상의 관계임을 실감했다.

돌아온 노경은은 2022시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41경기(79.2이닝)에 등판해 12승 5패 1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3.05를 기록했다. 2013년(10승) 이후 9시즌만의 두 자릿수 승리였다. 랜더스의 페넌트레이스 우승 세리머니가 열린 10월 5일, 잠실구장에 등장한 정 구단주는 노경은을 보더니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며 포옹했다.

선수들의 감화를 끌어내는 정 구단주의 ‘스킨십’은 랜더스가 비원의 우승에 닿았던 2022년 11월 8일 랜더스필드에서도 발휘했다. 우승 세리머니가 한창일 때, 랜더스 주장 한유섬이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그는 이날 경기에서 주루 플레이 도중 햄스트링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응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랜더스가 우승을 확정짓자 야구장으로 가겠다고 고집한 것이다. 목발을 짚고 나타난 한유섬을 보고 정 구단주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더니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우승 메달을 한유섬에게 걸어줬다.

언젠가 야구 커뮤니티 엠팍에서 ‘10개 구단을 떠올릴 때 누가 가장 먼저 연상되나?’라는 글이 떠돈 적이 있었다. 랜더스에서는 정용진 구단주라는 답이 나왔고, 댓글에서도 이의가 거의 없었다. 정 구단주의 ‘스킨십’이 객관적 전력상 최강과 거리가 먼 랜더스를 원팀으로 응집시키고, 로열티를 발하도록 유도하는 요인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일각에서는 구단주와 선수의 직접 소통이 ‘프런트의 역량을 축소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과(過)보다 공(功)이 크다는 평가가 주류다.

정용진 부회장이 ‘캐슬’에 간 까닭은


▎스타필드 청라와 연계한 돔구장 건설에 정용진(오른쪽) 부회장과 유정복(가운데) 인천시장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다. / 사진:신세계그룹
2021년 5월 21일, 정용진 SSG 랜더스 구단주는 충남 천안 소재의 ‘캐슬’을 방문했다. ‘캐슬’은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프로배구단의 복합베이스캠프를 지칭한다. 정 구단주는 ‘캐슬’에서 키우는 시베리안 허스키 ‘네바’와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다수 언론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당시 배구단 구단주였던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만남’을 받아썼지만, 정작 둘이 이곳에 왜 모였는지에 관해선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현대캐피탈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용진 구단주는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었다. 가이드 겸 강사는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이었다. “다리에 경련이 올 정도”의 긴장감을 안고 약 3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PT)에 임한 최 감독은 캐슬에 부착된 초고속 영상 카메라, 데이터 기반 선수 관리 시스템 ‘SW21’ 등에 관해 소개했다. 그는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가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알고 있다. 배구에서는 세터가 그렇다. 클러치 상황일수록 세터들의 습성이 나온다.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를 추출해 작전을 정하고 선수들은 수행한다”며 팀 운영 방식을 설명했다.

우리는 특별한 것의 일부이고 싶어 한다

견학을 마친 뒤 정용진 구단주는 “여기, 좋네요”라는 짧지만 굵직한 평만 남기고 떠났다. 황두진 건축가가 설계한 ‘캐슬’에서 정 구단주가 얼마나 감화됐는지는 이후 랜더스의 행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22년 8월 24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인천시청에서 유정복 인천시장과 함께 “2027년까지 청라국제도시에 2만석 규모의 돔구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인천 서구 청라 소재 16만5000㎡ 부지에 1조3000억원을 투입해 쇼핑과 호텔,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갖춘 복합문화 공간을 짓겠다는 것이다. 스타필드청라 안에 돔구장이 들어가도록 설계한 조감도가 공개됐다.

현행법상, 체육시설은 민간이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신세계는 ‘민간이 소유한 부지에, 민간이 자본을 조달하고,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대한민국 야구장 역사상 전례 없는 모델을 기획했다. 체육시설이 아니라 ‘복합문화시설’로 스타필드청라에 속한 청라돔의 법적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프리미엄 아울렛 1세대에 해당하는 경기도 스타필드하남이 ‘쇼핑’에 집중한 반면, 2세대에 해당하는 인천 스타필드청라는 “쇼핑몰과 야구장(공연장 겸용)을 수평적으로 결합해 고객의 시간을 점유하겠다”는 발상을 품고 있다. 이는 비즈니스 컨설턴트 해리 벡위드가 [언씽킹]에서 통찰한 인간의 본성과 부합한다. ‘우리(인간)는 하루 종일 놀고 싶다. 우리는 놀라움을 갈망한다. 우리는 진짜 이야기를 원한다. 우리는 루저를 사랑한다. 우리는 눈에 띄고 싶어 한다. 우리는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 우리는 눈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한 것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디자인 때문에 바뀐다.’

청라돔 시대의 키워드, ‘인스타그래머블’


▎2023년 7월 리뉴얼한 이마트 킨텍스점은 ‘고객의 시간을 점유하겠다’는 새로운 개념의 쇼핑을 제시하고 있다. / 사진:이마트
2022년 1월 3일, 정 부회장은 그룹 신년사에서 “우리의 목표는 제2의 월마트, 제2의 아마존이 아닌 제1의 신세계”라며 “오프라인 역량을 굳건한 하나의 축으로 삼되, 디지털 기반의 또 다른 축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혈경쟁을 감내하더라도 경쟁자를 고사시켜 e커머스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겠다’는 쿠팡(쿠팡의 대주주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비전펀드)의 ‘몰빵 전략’과 차별화된다. 오프라인 유통을 놓지 않고, 온·오프 밸런스를 맞춰가겠다는 정 부회장의 방향성이 암시돼 있다.

현대 기업에서 ‘좋은 터’를 알아보는 안목은 업(業)의 본질에 해당한다. 정 부회장은 오프라인도 ‘좋은 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랜더스 야구장을 만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자문하며 “온·오프 구별 없이 고객이 우리의 공간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2023년 연쇄적으로 공개된 이마트 인천 연수점, 일산 킨텍스점의 리뉴얼도 ‘머물고 싶은 공간’에 방점을 찍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SSG 랜더스는 신세계그룹 안에서 허브(hub)와 같은 입지를 확보한다. 온라인에선 후발주자 SSG닷컴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산하고, 오프라인에선 청라돔이라는 공간과 야구라는 국내 인기 1위 스포츠 콘텐트를 결합해 청라스타필드의 락인(lock-in) 전략을 조력할 수 있다.

2022년 9월 15일, KBO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랜더스는 대구고 투수 이로운을 선택한 이유로 “청라돔 시대를 대비한 미래 선발 자원”이라고 밝혔다. 2028년에서 역산(逆算)해 팀 플랜을 짜겠다는 구상을 그 시점부터 내비친 셈이다.

김재웅 랜더스 마케팅팀장은 “랜더스필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이라는 컨셉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인스타그래머블’을 풀어쓰면, “팬들이 인스타그램에 사진 찍어서 자랑할 만한 공간으로 랜더스필드를 혁신하자”는 의미다. 이런 방식은 당연히 청라돔 시대에도 유효하다.

청라돔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이형천 신세계프라퍼티 개발본부 본부장은 “고객은 공간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더욱 그럴 것”이라며 “청라돔은 365일 야구만 하는 곳이 아닌지라 K팝 공연 등을 아우르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음향·진동·관중석 배치 등) 세부 설계를 고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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