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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5)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 

수송 외길, ‘낚싯대 경영론’으로 일군 물류강국 

운수업 위주 수직적 다각화 추진해 국내 최대 종합수송 기업집단으로
조중훈 “눈앞의 이익보다 국익 위해 기업이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부친의 사업 부도로 조중훈은 휘문고보 1학년 재학 당시 중퇴했다. 생전의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 / 사진:(주)대한항공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趙重勳)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2월 11일 경성부 죽첨정(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양주 조씨 문강공파 18대손인 조명희(趙命熙)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한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상상력을 지닌 영리한 학생이었다. 승부 근성도 강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조중훈은 보통학교 졸업 후 4년제 휘문고보(종로구 원서동)에 진학했으나, 1학년 재학 당시 부친의 사업 부도로 중퇴했다. 이후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 기관과에 진학했다. 조중훈은 해원양성소도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7세이던 1937년 고베의 후지무라(藤村) 조선회사에 취직했다. 후지무라는 잠수함, 구축함 등을 만드는 조선회사였다. 조중훈은 성실히 근무해 3년 만에 일본 운수성의 2등기관사 자격을 획득했다. 이후 화물선 기관사가 되어 천진, 상해, 홍콩, 마카오, 필리핀 등을 두루 섭렵했다.

“나는 천성이 직장생활과는 인연이 먼 것 같았다. 우수한 엔지니어로 인정받고 두둑한 봉급을 받았지만 항상 무언가 허전한 감이 느껴졌다. 광활한 중국 대륙을 돌아본 나는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김교식, [한진그룹 조중훈])

트럭 1대로 한진상사 설립

조중훈은 24세이던 1942년 여름 서울 종로구 효제동 한 모퉁이에 보링 기계 1대를 설치하고 자동차 엔진 수리업체인 이연(理硏)공업사를 차렸다. 이 무렵 국내에 운행 중인 대부분의 자동차는 숯을 연료로 사용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들어서며 일제가 석유류를 군사용으로만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목탄차는 숯이나 카바이드(탄화칼슘) 등을 태워 발생하는 가스를 이용해 기동하는 차다. 저효율은 물론 엔진 고장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연공업사는 밀려드는 일거리로 승승장구했으나 1943년 8월에 일본 방위사업체인 마루베니(丸紅)사에 강제 흡수됐다. 1942년 조선총독부가 태평양 전쟁에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해 ‘기업정비령’을 발동, 전국의 중소기업들을 관련 대기업에 강제로 편입시킨 것이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도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의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공포 직후 조선인 800만 명은 일본 본토는 물론 사할린,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에서 혹사당했다. 조선인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징집된 가운데 조중훈은 기관사 자격증을 지닌 덕분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철도차량을 보수하는 용산공작창에서 근무했다.

25세의 청년 조중훈은 해방 이전에 운영하던 보링공장의 정리자금과 저축한 돈으로 1945년 11월 인천시 해안동(항동) 4가 3번지에 합자회사 한진상사(韓進商事)를 설립했다. 사무실과 트럭 1대가 전부였다. 조중훈은 무한책임사원을, 친형 조중열과 조중훈의 둘째 처남 김건배는 유한책임사원을 맡았다. 상호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을 의미했다. 한진상사가 조국 발전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 2000만 동포의 여망인 ‘나라사랑’을 담은 상호였다.

조중훈은 업종을 무역업으로 정했다. 그는 화물선 선원 시절 중국 상해에서 8개월간 머물던 당시 유대인과 중국 상인들의 상술을 터득했다. 한진상사 창업 무렵에는 국내의 모든 생산기능이 마비돼 실, 설탕, 비누, 성냥, 심지어 라이터돌까지 귀했다. 이에 해외에서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오면 종류를 불문하고 초과이윤이 보장됐다. 한진이 인천에서 사업에 착수한 것도 수도 서울이 인접한 데다, 중국과 무역을 함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무역상 시도는 불발됐다. 미군정이 한진상사 창업 한 달 전인 10월부터 해외여행·무역업에 대한 군정청의 허가를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대외무역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통제무역은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 지속됐다.

조중훈은 운수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해방 이후 인천항에는 갈수록 화물량이 늘어났지만 수송 수단이 절대 부족한 데서 착안했다. 해방 당시 남북한 자동차는 8000여 대에 불과했다. 조중훈은 운수업이 초기투자가 큰 데다 위험성도 높아 수익다변화 차원에서 카바이드(탄화칼슘)와 인견사 유통을 겸했다. 당시 남한에는 전력 부족이 심해 대체품인 카바이드 수요가 컸다. 그는 강원도 삼척에서 카바이드를 구매해 도매상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 생긴 돈으로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인견사를 구입, 강화도의 소규모 방직공장에 공급했다. 23년 동안 박리다매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조중훈은 신용을 철저히 지켰을 뿐 아니라 고객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 그는 트럭을 구입할 당시 보유하고 있는 트럭 엔진과 같은 엔진을 장착한 차만 구입하기도 했다. 문제 발생 시 즉각 대처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한진상사는 창업 2년 만인 1947년 10여 대의 트럭을 보유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수송사업면허’를 획득했다. 당시 화물운수업체들은 규모가 영세한 무허가업체가 대부분으로 사세 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부터 조중훈은 중고 지프차를 직접 몰고 현장을 누비며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창업 5년이 되는 해인 1950년에는 종업원 40여 명, 트럭 30대를 보유한 중견 화물운송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6·25전쟁(1950~1953)은 조중훈의 사업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6·25전쟁 와중에 한진상사의 차량과 장비들이 군용으로 징발된 것이다. 그는 나머지 장비들을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에게 헐값에 처분하고 부산으로 피란 갔다.

주한미군 용달사업으로 도약


▎25세의 청년 조중훈은 1945년 11월 인천시 해안동(항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지난 1950년대 인천 소재 한진상사 창고 모습. / 사진:(주)대한항공
조중훈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3년 봄 무렵 잿더미로 변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남은 것은 쑥대밭으로 변한 한진상사 건물 부지와 은행 부채뿐이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웠다. 가건물에는 한진상사 간판을 걸고 사업을 재개했다. 사업자금 융통이 조중훈의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다행히 전쟁 전의 신용을 인정받아 무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한진상사는 1955년, 6·25전쟁 이전의 규모로 사업을 회복했다. 당시 경인지역에는 한진상사와 엇비슷한 규모의 운수업체가 50여 곳 있었다. 이들은 인천항의 전재(戰災) 복구 물자 하역으로 호황을 누렸다. 조중훈은 인천항에 하역되는 막대한 분량의 주한미군 군수물자 수송에 주목했다. 그러나 미군 물자가 수송과정에서 도난당하는 사례가 빈번한 탓에 미군은 한국인 운수업자들을 불신했다. 이 탓에 조중훈도 미군과 직접 만나 협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육감이랄까, 예감 같은 것이 왔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김교식, [내가 걸어온 길])

1956년 10월 조중훈은 각고의 노력 끝에 미8군 수송담당관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군 측에 ‘책임제 수송계약’을 제의했다. 책임제 수송계약은 운송 도중 발생하는 일체의 사고에 대해선 이유를 불문하고 한진상사가 전부 변상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사업이다. 나는 스스로 용기를 북돋웠다.”(김교식, [내가 걸어온 길])

미군 측은 조중훈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한진상사는 1956년 11월 1일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당시 한진상사가 담당하는 업무는 미군용 캔맥주를 납품업체에서 부평역 인근 미군부대까지 수송하는 것이었다. 계약기간은 1956년 11월 1일부터 1957년 4월 30일까지 6개월이었다. 용역대금은 7만 달러였으며, 화물 운반에 드는 유류비는 미군이 별도로 현물 형태로 지급하기로 했다.

조중훈은 밤을 새워가며 영어 공부를 했다. 미군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사업이 순항하던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트럭회사에서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용 파카를 차떼기로 남대문시장에 팔아넘긴 것이다. 용역사업 초기여서 제대로 이익을 내기도 전인 데다가 어렵사리 미군들의 신용을 얻어가고 있던 때라 참으로 난감했다. 어찌된 셈인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수령처로부터 물건을 받았다는 담당관 사인까지 받아왔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본다면 굳이 변상을 안 해도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직원 한 명을 남대문시장에 상주시켜 놓고 물건이 나도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5일쯤 지나자 분실된 물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장물을 취득한 상인에게 이문(利文)까지 보태 파카 1300벌을 전부 되사서 미군 수령처에 인계했다. 금전적으로 큰 손실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 확실한 신용을 얻었다”(김교식, [내가 걸어온 길])

덕분에 1957년에는 용역대금 10만 달러의 재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1월에는 자본금 1000만환의 한진상사주식회사로 재발족, 5월에 본사를 서울 을지로1가의 반도호텔로 이전했다. 인천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당시 반도호텔은 주한미국대사관이 위치해 있는 한국정치의 ‘중심지’였다. 1958년의 주한미군 용역사업 수주액이 전년도의 3배인 30만 달러로 뛰었다. 1959년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동생 조중건이 경영에 참여했다.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 실력과 유연한 대인관계로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미군사업 수주액도 1959년과 1960년 각각 100만 달러, 220만 달러로 뛰었다. 220만 달러는 1960년 우리나라 총수출액(3280만 달러)의 6.7%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베트남 진출로 재계 전면에 급부상


▎한진그룹이 재계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대한항공공사(KAL) 인수였다. 지난 1972년 4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노선 첫 취항 당시 KAL 모습. / 사진:(주)대한항공
1965년 베트남전이 확대되자 미국은 막대한 전비(戰費)를 투입했다.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부총리는 조중훈에게 파월(派越) 미군 및 한국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제의했다. 한국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은 미국의 요청으로 성사됐다. 그 결과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32만여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 1965년 8월 15일 조중훈은 아우 조중건과 미국에서 미 국방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물자 수송계약 교섭에 착수했다. 조중훈은 친분을 쌓았던 미8군 출신 고위 장교들의 도움을 받았다. 1965년 12월 조중훈은 파월 한국군 맹호부대 주둔지 인근 항구인 퀴논항을 사업장으로 정했다.

조중훈은 1966년 1월 계약을 위한 협상에 착수했다. 미 국방부는 계약조건으로 쌍방보증금 300만 달러 예치 및 미측이 요구하는 모든 수송장비의 완비를 요구했다. 조중훈은 장기영 부총리에게 협조를 부탁, 600만 달러의 정부 지불보증을 받았다. 트럭 180대, 바지선, 예인선, 지게차 등 300점이 넘는 장비는 당시 일본 최대의 군납업체였던 국제흥업의 사사키 사장에게 부탁해 구비했다.

1966년 3월 10일에 미 군수품 수송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기간은 1966년 5월 25일부터 1년으로 했다. 용역대금은 725만 달러로, 당시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수주한 금액 중 최고액이었다. 한진이 담당한 업무는 베트남 중부지역에 산재한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 미군사단 등 5만 병력의 전략물자와 식료품을 퀴논항에서 하역, 각 부대로 운송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론 항만 하역, 항만 터미널 운영, 육상운송, 내륙장치장 운영, 장비 정비 및 도선업무였다.

베트남 용달사업은 1966년 4월 27일부터 개시됐다. 한진의 수송단은 월맹군의 표적이 되어 위험이 상존했다. 당시 조중훈은 군수물자 수송트럭에 직접 탑승해 겁에 질린 한국인 근로자들을 진두지휘했다. 조중훈은 휴일도 없이 수송업무를 강행해 미군수송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결과 1차 용역계약이 끝날 무렵인 1967년 5월에는 3400만 달러의 재계약을, 1968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진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베트남에서 1억5000만 달러를 벌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총액이 수천만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베트남 진출은 한진이 재계의 전면에 급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KAL 인수하고 한진해운 설립


▎1970년 제4회 수출의 날 군납최고표창을 수상한 조중훈(오른쪽) 한진그룹 창업회장. / 사진:(주)대한항공
한진의 첫 번째 사업다각화는 버스여객 운송업이었다. 한진상사는 1961년 미전략공군사령부의 버스 80대를 할부로 불하받아 3년 뒤인 1964년 대한운수를 설립했다. 1968년 12월 31일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 개통과 함께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던 고속버스 운행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덕분에 사업 3년 만에 투자금을 전액 회수했다. 이후 고속도로가 전국으로 확대된 1970년대 한진은 국내 최대 고속버스회사로 발돋움했다.

1968년 4월 포항제철 설립과 함께 한진은 포항제철소 건설자재 운송을 사실상 독점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물류업체인 대한종합운수도 인수했다. 한진상사는 1972년 4월 (주)한진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4년 인천항 컨테이너 터미널 운영 개시 및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6년 9월에는 부산항 제3 부두에 30t급 갠트리 크레인을 설치하고 운영을 개시했다. 1977년에는 중동의 항만 하역사업에 진출하면서 육상 및 해상물류의 지평을 넓혔다.

한진이 재계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독점업체인 대한항공공사(KAL) 인수였다. 이 회사는 1962년 4월 30일 공칭자본 5억원, 불입자본 2억5000만원의 국영기업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항공수송 수요 부진과 자본불입 지연 등의 이유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1968년 6월 민영화에 착수했다. 1968년 12월 기준 수권자본금 35억원, 납입 자본금 15억47만8000원인 KAL의 부채(금융부채 3억2958만원·차관부채 15억180만3875원)는 총 23억4000만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한진은 1968년 12월 KAL을 14억5300만원에 인수했다. KAL의 부채 23억4000만원을 한진이 전액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조중훈은 KAL 인수에서 멈추지 않았다. 육·해·공 종합수송기업집단을 완성하기 위해 1974년 5월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78년에는 한국과 중동 간 풀컨테이너선을 취항했으며, 1979년에는 4척의 풀컨테이너선으로 극동~북미항로를 개설했다. 1987년 12월에는 국내 최고(最古)의 대한상선을 합병했다. 대한상선은 1949년 12월에 반관반민 형태로 설립된 대한해운공사다. 1950년 2월 한·일 항로 개설 등 원양 항로를 잇달아 개척하며 외항 화물 수송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결과 한진해운은 풀컨테이너선 24척, 벌크선 14척이 전 세계 5개 항로를 누비는 국내 최대 컨테이너선 수송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진은 1989년 6월 국영기업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 한진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대한조선공사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중공업(주)으로 설립됐다.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로 상호를 변경한 후 국내 최초로 철강선을 건조하고, 공작기계인 선반 및 철도차량 등을 제작했다. 1968년 민영화 이후 객차·화차 및 발전차, 지하철 전동차 제작뿐 아니라 코크스 플랜트 및 발전설비 등 국내외 각종 기계, 플랜트 공사를 수행했다. 이를 통해 1970~1980년대 국가 중화학공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세계 해운경기의 침체에 따른 경영 악화로 1989년 5월 부산 내항의 8만여 평 부지의 영도조선소와 기계플랜트 및 철도차량을 제작하는 5만 평 규모의 다대포제작소, 7만여 평 규모의 울산조선소 등 4개 계열사와 함께 한진그룹에 편입됐다.

건설업, 목축, 광업, 금융업 진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은 이익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3년 프랑스에서 취미인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조 창업회장. / 사진:주)대한항공
한진은 본격적으로 건설업으로 지평을 넓혔다. 1968년 8월 한진그룹 본사 건물인 26층의 해운센터빌딩을 건설하면서 자본금 1000만원의 ‘한일개발’을 설립한 것이다. 이후 한일개발은 그룹 내 각종 건물공사를 전담하는 것은 물론 해외건설에도 주력했다. 1987년 4월 한진은 국영 대한준설공사를 인수, 한진종합건설을 발족(1990년)했다. 대한준설공사는 1967년 8월 전국의 항만과 항로 준설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1978년 1월에는 조중훈의 아호를 딴 정석기업도 설립했다. 한진그룹 본사인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118의 해운센터 빌딩 임대 및 종합관리, 주차운영 등이 목적이었는데, 1990년에는 해운센터 빌딩 신관, 부산정석빌딩, 인천정석빌딩 및 해외현지법인 형태로 하와이 와이키키 리조트호텔까지 운영하며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했다.

한진은 목축 및 광업 경영을 목적으로 1972년 3월에는 제동흥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한라산 동쪽 중산간 유휴지 451만1000평을 확보, 제동목장을 개설한 것이다. 광대한 면적에 최신장비와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한우 및 육우(앵거스, 샤로레) 300여 마리를 사육했다. 1984년부터는 프랑스 에비앙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남제주 표선면에서 생수를 생산해 KAL에 납품했다. 경북 동해안 후포와 강원도 지역에서는 양질의 석회석 광구를 확보해 1976년까지 포항제철에 석회석 1100만t을 공급하기도 했다. 1987년 5월에는 광양제철소 제2기가 준공되자 같은 해 7월에는 제2 분쇄공장을 준공했다. 제2 분쇄공장은 연산 120만t의 생산능력을 갖춘 거대 공장이었다.

한진은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1967년 7월 동양화재보험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의 중계로 5억7000만원에 인수했다. 동사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 12월에 조선식산은행과 일본인들에 의해 500만원(圓)의 조선화재해상보험으로 설립된 기업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한진이 화재해상보험을 설립한 이유는 앞서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현금의 활용 및 물류사업에서의 보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1973년 4월에는 자본금 5억원의 한일증권(메리츠증권)을 설립, 1992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한국 운수업 발전 선도한 개척자

조중훈은 1968년 인천의 대표 명문사학인 인하대학교를 인수했으며, 1979년에는 국내 유일의 민간 항공인력 양성기관인 한국항공대학을 인수했다. 한국항공대학은 대한항공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진의 다각화는 1960년대 말부터 본격화됐다.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현금이 시드머니였다. 한진그룹은 1972년 8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부상해 삼성과 LG그룹에 이어 재벌순위 3위에 위치했다. 한진은 운수업 위주의 수직적 다각화를 추진해 육·해·공을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수송 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2002년 11월 17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평소에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듯이,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은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며 기업가도 예술가처럼 신념과 노력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낚싯대 경영론’도 돋보인다. “낚싯대를 열 개, 스무 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싯대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이 그의 낚싯대 경영론이다. 조중훈은 사업 확장 과정에서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오로지 수송 외길을 걸어왔다.

또한 조중훈은 기업이란 반드시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대한선주와 같은 공기업을 인수한 이유다. 이처럼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輸送報國)’ 일념으로 국가의 대동맥인 한국의 운수업 발전을 선도한 개척자였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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