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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3)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下 

박태준의 제철보국 신념, 세계 3위 철강기업 탄생시키다 

“포철의 사전에는 부실공사 없다”… 첫 삽 뜬 지 10년 10개월 만에 속도전으로 ‘영일만 신화’ 완성
중국에 제철소 지어달라는 덩샤오핑에게 일본 기업인이 던진 한마디 “중국엔 박태준이 없지 않소”


▎1978년 12월 8일 포항 3기(제3고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박태준(오른쪽) 명예회장. / 사진:포스코홀딩스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제철소 건설이 시작됐다. 요란한 폭발음과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시작한 이 건설은 공장부지 232만7000평에 주택단지와 연관단지 부지 포함 총 389만 평에 달하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건설공사였다. 1973년 7월 말 완공을 목표로 한 ‘포항 1기 사업’은 연산 조강(粗鋼) 103만t에 열연코일 18만3000t, 열연 박판(薄板) 22만t, 대강(帶鋼) 18만t, 빌릿 14만1000t, 중후판 10만5000t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포항제철(포철)은 오스트리아 제철설비업체인 푀스트에서 외자 2500만 달러를 도입, 조선용 중후판을 생산하는 압연공장 건설부터 시작했다. 보통 제철소는 철광석 등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장, 제강공장, 압연공장 순으로 건설한다. 그러나 포철은 압연공장부터 건설했다. 이는 압연공장에서 생산한 중후판을 시판해 공사자금을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압연공장은 열연(熱延)공장과 냉연(冷延)공장으로 나뉜다.

제철소 건설에 매진하던 당시 포철은 외풍에 직면했다. 1970년 5월 2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1898~1976)가 대외무역 4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4원칙은 중국이 한국·대만과 경제거래를 하거나, 미국과 합작기업을 하는 외국 기업들과의 무역을 단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경악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스미토모화학과 미쓰비스중공업, 신일본제철이 흔들렸다. 신일본제철의 기술지원이 끊기면 포철의 미래도 가늠키 어려웠다. 다행히 박태준은 야스오카와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협조를 구해 신일본제철의 기술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 3시간만 자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그러던 중 1971년 7월 박태준은 제철소 건설 차질 문제를 겪는다. 1970년 10월 1일 착공, 1972년 10월 완공할 계획이었던 열연공장 건설이 문제였다. 열연설비 공급업체인 미쓰비시상사는 약 3개월간의 지연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박태준은 좌절하지 않고 원료구매계약에 나섰다. 연간 100만t의 쇳물을 생산하기 위해선 철강 170만t, 코크스용 유연탄 70만t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량 해외에서 수입해야 한다. 박태준은 영일만 모래벌판에 세운 공장 간판들 사진만 들고 호주로 가서 3주 만에 철광석·유연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호주에서 공장 간판 사진만으로 기적을 성사시킨 것이다.

박태준은 귀국 직후 직원들에게 특단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명령은 ‘공기단축을 위해 9월에는 무조건 하루 700㎥를 타설하라’였다. 당시 1일 최대 타설량은 300㎥였다. 박태준은 건설현장에 조명탑을 세워 대낮처럼 밝게 하고, 조를 편성해 하루 24시간 내내 일하도록 했다. 박태준 자신도 하루 3시간만 자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살았다. 그 결과 2개월 만에 5개월 분량의 콘크리트 타설을 완료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700고로(高爐) 출선구에서 굉음과 함께 쇳물이 흘러나왔다. 첫 출선에 현장의 관계자들은 ‘만세’를 외쳤다. 6월 19일에는 제선, 제강, 압연, 지원 등 총 22개 공장과 부대설비로 구성된 일관공정을 전부 완성했다. 한국현대사의 새 지평이 열린 순간이었다.

1972년 6월 정부와 산업은행, 포철은 연산 260만t의 2기 설비 기본계획을 세웠다. 2기 공사에 투입될 설비 예정금액은 3억5000만 달러였다. 이후 1973년 12월 2기 157만t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1기 설비가 본격 가동된 덕분에 포철은 1974년부터 조업과 건설을 병행할 수 있었다. 1976년에는 2기 설비 전체 공정의 85%를 완성, 그해 5월 31일에는 제2 고로의 화입식을 거행했다. 2기 설비공사는 예정보다 30일 앞당겨 준공됐다. 포철은 내자의 상당부분을 1기 설비 가동으로 얻은 순이익으로 충당했다. 250억원 상당의 설비를 국산화하는 성과도 올렸다.

2기 건설 완공 직후인 1976년 6월부터는 연산 550만t의 ‘3기 확장사업’에 착수했다. 외자 7억6630만 달러와 내자 4억8907만 달러 등 총 12억5537만 달러(약 6290억원)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포철은 내자조달 총액 2570억원의 42%인 1070억원을 자체 경영이익금과 사내 유보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3기 확장사업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최대 역점사업으로 지정됐다. 3기 설비는 1976년 8월 2일 종합착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고로인 작업용적 3759의 제3고로를 위해 공사절정기에는 하루 1만4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세계 최고의 제철소 건설 능력 입증


▎1977년 8월 2일 발전송풍설비 불량 콘크리트 구조물 폭파 현장 모습. / 사진:포스코홀딩스
한편 포철은 4기 설비 규모를 300만t으로 확정, 총생산능력을 연산 조강 850만t으로 늘리기로 했다. 포철은 고로를 비롯한 24개 설비에 대한 기본기술 계획서를 5개월 만에 완성했다. 1~3기의 경험과 지식이 뒷받침된 것이다. 일본 기술단도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포철이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4기 건설에는 외자 6억7000만 달러, 내자 3459억원이 책정됐다. 내자의 65%는 포철의 영업이익과 사내유보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1977년 여름 포철은 1·2기 설비의 정상가동과 3기 설비의 공기 단축, 4기 건설공사 등 큰 과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현장을 중시한 박태준은 8월 1일 건설 중이던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을 찾았다.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이 80%가량 진척돼 70m 굴뚝도 세워진 현장이었다. 그런 가운데 불량시공 흔적이 박태준의 눈에 띄었다. 큰 하자는 아니었지만 박태준은 이튿날 모든 건설현장의 책임자와 간부, 외국인 기술감독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80%나 진척된 공사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버렸다. ‘포철의 사전에는 부실공사가 없다’라는 전통이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1977년 가을에는 포철 4기 건설을 위한 외자 도입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 측이 전체 설비 공급액의 15%를 착수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들이 요구한 착수금을 먼저 내자에서 조달하고자 1978년 새해 예산에 긴급히 포함시켰으나 국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박태준은 여당인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내지 않아 보복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신 포철은 자력으로 홍콩 소재 미국 씨티은행의 계열사 ‘APCO’에서 차관 1억 달러를 얻어 문제를 해결했다.

1978년 12월 8일에는 3고로 주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상공부장관, 건설부장관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산 조강 550만t의 ‘포철 3기 설비 종합준공식’을 개최했다. 3기 설비 완공 이후부터 포철의 길라잡이를 했던 일본 기술단은 철수했다. 포철이 선진국들의 도움 없이도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순간이었다.

박정희 타계에도 제2제철소 건설 총력


▎박태준 명예회장은 하루 700㎥ 의 콘크리트 타설을 지시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자필 지시문. / 사진:포스코홀딩스
1978년 박태준은 포항 4기 설비의 조기착공과 조기 준공을 지시했다. 제4고로, 제2연속주조, 제2열연공장 등 7개 공장 신설과 제2 제강공장 등 6개 공장 확장, 항만, 하역, 철도 등 11개 부대시설 증설 등을 포철의 자체 기술력으로 완성했다. 1979년 2월 1일에는 연산 조강 850만t의 4기 확장공사 종합착공식을 거행, 1981년에 준공했다. 1970년 첫 삽을 뜬 지 10년 10개월 만에 ‘영일만 신화’는 성공리에 완성됐다.

신생기업 포항제철이 세계적인 제철기업으로 웅비하려던 무렵, 포철의 든든한 울타리가 사라졌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35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절명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65년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이 포철 건설의 대임(大任)을 맡은 이래 15년 동안 한결같이 박태준과 포철을 지켰다.

시기적으로는 제2제철소 건설을 앞둔 시점이었다. 건설부와 포철이 이견을 보이던 때이기도 했다. 발단은 포항제철 103만t 제1기 설비준공식이 거행된 지 3개월 후인 1973년 7월 3일 정부가 포철과는 별도의 ‘민영 제2제철’ 설립을 공식화한 것이다. 포철과의 경쟁을 통해 한국 제철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같은 해 11월 9일 자본금 4억원의 한국제철(주)을 설립하고 내·외자 10억4000만 달러로 1976년에 착공, 4년 내에 낙동강 하구에 연산 조강 500만t, 2차로 1000만t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제철은 합작파트너인 미국 US스틸이 ‘투자수익 20% 보장’ 등을 고집한 탓에 1975년 4월 포철에 흡수됐다.

덕분에 포항제철은 제2제철소 건설권을 획득했다. 한국제철 좌초 후 현대중공업, 현대양행, 대우중공업 등에서 제2제철소 실수요자 선정을 위해 경쟁하던 1978년 10월 중순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 이후 포철은 제2제철의 실수요자로 최종 결정됐다. 정부와 포철은 제2제철소 부지로 충남 아산만과 가로림만, 전남 광양, 경북 영해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79년 7월 14일 아산을 최종 후보지로 결정했다. 그 시점에 박 대통령이 타계한 것이다.

1980년 가을, 제11대 대통령이자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이 박태준에 전화로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서울 용산구 안가에서 만났다. 박태준이 1954년 육군 대령 시절 전두환은 육사 4학년 생도였다. 1950년대 후반 박태준이 25사단 참모장 재직 당시 전두환 대위는 예하부대의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박태준에게 포철 경영과 입법회의 경제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 국보위에서는 국내 잘나가는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을 내밀히 조사했다. 박태준은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 ‘영일만의 황제’였다. 박태준은 “이제부터 제2제철 건설을 마칠 때까지 내가 포철의 울타리가 돼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그해 10월 29일 박태준은 입법회의 제1경제위원장에 취임했다.

박태준, 일본 철강업계를 무릎 꿇리다


▎포철 3기(제3고로) 설비 공사는 건국 이후 최대 공사였던 만큼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 사진:포스코홀딩스
1981년 3월 박태준은 포철 최고경영자 외에도 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 제11대 국회의원, 한·일 의원연맹 회장, 한·일 경제협회 회장 등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동안 포철은 광양만의 입지조건이 건설부가 주장하는 아산만보다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포철은 그해 11월 4일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제2제철소 입지로 광양만을 낙점받는 데 성공했다. 포철은 1983년 5월 25일에 완공, 최종 910만t 체제를 완비했다. 이후 박태준은 연산 조강 1000만t의 21세기형 최신예 광양제철소 건설에 올인 했다.

광양제철소 건설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1981년 6월 10일 서울에서 개최한 한·일 민간합동위원회에서 박태준이 일본기업들에 첨단기술의 한국 이전과 무역장벽을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신일본제철의 사이토 사장은 “일본기업의 기술을 전수받은 한국기업은 싼 임금으로 같은 제품을 생산해 일본시장에서 일본기업들과 경쟁한다.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과의 경쟁에서 패하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반격했다. 특히 포철이 제2제철 실수요자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철강업계는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1982년 5월에는 신일본제철이 ‘광양 1기설비 기본기술계획 초안’에 대한 검토용역을 거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에 박태준은 “일본 협력 없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제2 공장을 반드시 건설합시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으로 뭉칩시다”라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박태준]). 1983년 1월 28일에는 세계적 철강업체인 독일 티센 측에 ‘광양 1기 기본기술계획’ 검토를 의뢰하는 한편, 그해 5월 3일에는 박태준이 직접 설비 구매와 기술 도입을 위해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태준은 5월 말에는 친구인 푀스트의 아팔터 회장과 오스트리아 국영은행 하세 총재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국영은행과 연리 6.75%의 차관계약을 성사시켰다. 미국의 우대금리(10.5%)나 영국의 리보(Libor) 금리(10.75%)보다 월등하게 좋은 조건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의 가와사키중공업, IHI, 미쓰비시중공업 등 제철설비 제작업체들은 일본철강업계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철강 불황으로 일거리가 줄어 23억 달러의 광양제철 설비물량이 모두 유럽 업체들에 넘어갈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신일본제철에 포철과의 협력을 강권했다. 그 결과 1983년 8월, 일본 철강업계는 광양제철 건설에 기술협력을 하기로 했다. 일본 도움 없이는 제2제철 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서 오만을 부렸던 일본 철강업계가 박태준의 허를 찌르는 전략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포철은 1982년 2월 9일 광양제철소 연산 조강 270만t의 1기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소요자금은 내자 13억5800만 달러와 외자 8억1400만 달러로 책정됐다. 1985년 착공, 1988년 3월 완공하기로 했다. 박태준은 극비리에 획기적인 구상을 했다. 광양 1~4기의 제선, 제강, 열연공장 등을 같은 사양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1기 도면을 2~4기 설비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별도의 추가설계가 불필요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밖에 예비품 준비, 기술 및 조업훈련도 동일했다. 획기적인 구상이자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광양제철소 준공으로 세계 3위 철강기업으로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과업 달성을 보고했다. / 사진:포스코홀딩스
이후 포철은 1982년 7월, 바다를 매립하는 광양만 1단계 부지조성공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총연장 13.6㎞의 거대한 제방을 쌓는 호안축조공사를 완료했다. 공장부지 170만 평과 지원시설 및 주택단지로 사용할 금호도 60만 평 등 총 230만 평을 매립, 1984년 11월 말에 완료했다. 광양 3·4기 예정지역은 1985년 4월 말, 업무단지는 9월 20일에 완공했다.

3800의 대형 고로와 제강, 연속주조, 열연공장 등 10개의 공장설비와 배수처리 등 14개 부대설비로 구성된 광양 1기 건설공사는 1985년 3월 5일 착수했다. 1987년 5월 7일에는 광양제철소 제1기 종합준공식을 개최했다([영일만에서 광양만까지-포항제철 25년사]). 총투자액 1조6991억원의 70%에 해당하는 소요 내자 전액은 포철 스스로 부담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포항 910만t, 광양 270만t, 총 1180만t의 세계 9위 제철기업으로 도약했다.

순항하던 포철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87년 3월 25일 청와대 경제장관회의 이후 재무부가 ‘금융산업 개편과 주식시장 안정화 방침’을 발표한 것이다. 재무부는 과열된 증시 안정을 위해 우량주식 공급이 필요해 시중은행이 보유한 포철 주식을 새로 개설되는 장외시장에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포철의 대주주가 정부에서 민간기업으로 바뀔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박태준을 비롯한 포철 임직원들은 경악했다. 정부에 항의했다간 무슨 화가 미칠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포철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 재무부 조치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홍보팀에서는 주요 언론사들에 포철주의 민영화 반대를 호소했다. 그 결과 재무부는 공기업 민영화 일환으로 추진한 포철, 한전, 통신공사의 정부보유 주식 매각을 1988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1992년 10월 2일에는 광양 4기 설비 종합준공식을 거행함으로써 연산 조강 2100만t의 대역사를 완료했다. 이로써 포철은 일본의 신일본제철, 프랑스의 우지노 세실로에 이어 세계 3위의 철강기업이 됐다.

“박정희 연출, 박태준 감독·주연의 완벽한 작품”


▎박태준 명예회장은 제1고로를 착공한 지 10년 10개월 만인 1981년 2월 18일 제4고로 건설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 사진:포스코홀딩스
그해 10월 3일 박태준은 서울 국립묘지의 박정희 묘역을 찾았다. 아내 장옥자, 고인의 아들 박지만과 딸 근영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그는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박태준]).

박정희 사후 박태준은 포스코의 든든한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 포철 주식 장외매각 음모 저지뿐 아니라 광양제철소도 완성했다. 이후 박태준은 10월 5일 오전 11시에 개최된 포항제철 이사회에 참석, 회장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자유인’이 됐다.

중국을 번영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1904~1997)은 중국 최고 통치자로 등극한 첫해인 1978년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포항제철소와 같은 제철소를 중국에도 건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나야마 회장은 “제철소는 얼마든지 지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공에는 한 가지가 없기 때문에 안 됩니다. 중공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기술과 자본이 있다 해서 제철회사가 쉽게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포철 건설로 완성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의 의기투합이 만들어낸 ‘영일만의 신화’는 박정희 연출, 박태준 감독 및 주연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박태준의 인간 됨됨이를 꿰뚫어 보고 끝까지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박정희의 혜안과 의지가 대단하다. 동시에 주군의 명령을 끝까지 완수한 박태준의 제철보국 신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태준은 한국의 산업화를 앞당긴 거인이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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