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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4)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 

의리와 ‘외강내유’의 사나이… ‘다이너마이트 김’의 화약보국 

“형사처벌은 물론 사재 털어서라도 보상”…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김종희가 전한 ‘진심’
생필품 수입으로 사업전환 권한 미군에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탓에 김종희는 상덕리 집에서 경기상고까지 통학했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 / 사진:(주)한화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1922~1981)는 충남 천안에서 빈농 김재민의 6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재민은 30대에 빈촌인 부대리로 거처를 옮겼다. 천수답 약 1000평을 소작한 탓에 고단한 삶을 살았다. 아들 김종희는 두뇌가 명석한데다 형제들 중 덩치가 제일 컸다. 유머감각도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김종희는 부대리의 북일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 학교는 1912년 부대리 성공회가 설립한 4년제 신명학교다. 교실 2개, 재학생 40~50명인 소규모 학교였으나 김종희가 성공회의 독실한 신자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김종희는 돌연 북일사립학교를 중퇴했다. 부친의 쌀 장사가 어려워져 상덕리로 이사한 탓에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한 것이다. 1931년에는 상덕리 집에서 떨어진 직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직산보통학교는 교실 15개에 학생수가 700명이 넘는 충남 지역 최고 명문학교였다.

이 무렵 김종희의 부친은 사촌동생이자 광산업자인 김봉서의 도움으로 상덕리 사금광을 운영, 농토 5000평을 마련했다. 집안 형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김종희는 성환공립심상학교 고등과 1년을 수료하고, 1937년에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경기상고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국내 최고의 실업계 학교였다. 일본인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조선학생’의 경기상고 입학은 당시 ‘하늘의 별따기’로 회자됐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탓에 김종희는 상덕리 집에서 경기상고까지 통학했다. 매일 새벽 5시30분에 집을 나서 6시 정각에 천안역에서 출발하는 통근열차를 타면 8시30분쯤 서울역에 겨우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효자동까지는 전차로 15분, 효자동 전차종점에서 도상까지는 도보로 10분 이상이 소요됐다. 통근열차가 자주 연착하는 바람에 김종희는 거의 매일 전차종점에서 학교까지 달려야 했다. 뛰는 날은 한겨울에도 교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지각생으로 기합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만, 김종희는 1~2학년 내내 결석 한 번 없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김종희는 1940년 11월 경기상고 4학년을 중퇴한 직후 함남 원산의 원산공립상업학교로 전학갔다. 어느 날 하굣길에 효자동 길을 지나다가 같은 학교의 조선인 학생 3명과 일본인 학생 4명 간의 패싸움 현장을 목격한 김종희는 조선인 학생들이 밀리자 이들을 돕기 위해 싸움에 가담했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김종희는 원산경찰서 서장인 고이케 쓰루이치 경부(警部)의 주선으로 원산상고 4학년에 편입했다. 김종희는 원산 고이케 서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당숙 김봉서가 상덕리 사금광을 운영할 당시 천안경찰서 서장이던 고이케 경부와 가까이 지낸 덕분이었다.

김종희, 화약에 애정을 갖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은 1942년 당시 신설 기업인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젊은 시절 김종희 창업회장. / 사진:(주)한화
원산상고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김종희가 서울에 사는 거물급 친일파의 아들로 오해 받기도 했다. 고이케 경부는 근엄하면서도 자상한 편이었다. 김종희는 1941년 12월에 원산상고를 졸업하고 또다시 고이케의 도움으로 1942년 1월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조선화약공판은 1941년 12월 1일에 설립된 신설기업이었다.

당시(1942년) 일제는 ‘기업 정비령’을 발동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질소화약(함북 흥남)과 조선화약제조(해주 벽성), 조선유지(인천), 조선아사노카리트(해주 봉산) 등 4대 화약공장을 통폐합했다. 조선질소화약판매와 제국화약 계열의 조선화약총포판매 등 2개 화약유통업체들을 통합해서 조선화약공판으로 재발족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화약판매 업체였다. 국내의 각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약류를 일괄 인수해서 각 수요처에 납품할 뿐 아니라, 각화약 공장에 대한 생산량 할당 및 원재료 공급까지 독점했다.

조선화약공판이 취급하던 화약류는 대부분 혼합 화학류였다. 1943년 기준 다이너마이트 80t, 과염소산폭탄 10t, 흑색화약 6t 초안폭탄 3t 등 총 99t을 생산했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에는 50명 이상의 관리직 사원들이 근무했다. 한국인으로는 조선총포화약 출신의 김봉수(金鳳秀) 총무부 계장 등 4명이 있었다. 이 밖에도 20여 명의 노무직은 전부 한국인이었다. 김종희는 조선화약공판 설립 이래 최초로 입사한 한국인 관리직 사원이었다.

구매부서에 배속된 김종희는 당시 초임 50원을 받았다. 이는 당시 월급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 조선식산은행의 초임 45원보다도 많았다. 화약계통이 위험물을 취급하는 특수직종이라는 점에서 대우가 좋았던 것이다. 김종희는 23세인 1944년 1월 생산부 다이너마이트 계장으로 승진했다.

화약 국산화에 앞장서다


▎한국화약은 미국 유니온 오일과 합작해 경인에너지를 설립했다. / 사진:(주)한화
1945년 9월 22일 김종희는 조선화약공판(주)의 지배인으로 선임됐다. 조선화약공판 경영권을 일임한 것이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은 38선 이남에 산재한 31개 화약고를 거느린 남한 유일의 화약취급기관이었다.

1945년 9월 24일부터 ‘지배인 김종희’의 조선화약공판(주) 체제가 출범했다. 다음날인 25일, 미군은 국내의 일본인 재산을 적산으로 접수하기 위해 일본 항복일인 8월 9일 이후 성립된 일본인 재산에 대한 매매행위를 무효화한다는 내용의 군정법령 제2호를 공포했다.

김종희는 일본인 임직원들의 일괄퇴진에 따른 회사의 동요를 막기 위해 공석 중인 서울, 부산, 대구, 제천, 전주, 군산 등지의 영업소장 및 생산과 구매, 총무부서의 관리자들을 새로 임명했다. 순항하던 가운데 문제가 발생했다. 사원들의 급료 지급이 김종희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화약공판 월급날인 매월 25일, 회사에 현금이 바닥난 터에 일부 직원들이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빼돌려 착복한 탓에 재원 마련도 어려웠다.

서울 홍제동과 녹번동 화약고에 보관 중이던 다이너마이트 3.7t, 흑색화약 0.4t, 도화선 49㎞ 등을 매각하면 엄청난 돈이 되는데 문제는 판로가 막힌 것이다. 김종희는 용산 주한미군사령부를 찾아 왕년에 배운 영어 단어를 총동원하고 부족한 부분은 손짓과 발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그해 11월부터 사원들의 급료를 미군 측에서 조달하게 됐다. 대신 화약공판은 폭발물 취급기관이라는 이유로 미군사령부의 감독을 받았다.

김종희는 1952년 6월 12일 귀속재산 불하에 참여, 23억4568만원에 조선화약공판을 불하 받았다. 미8군 화약관리 용역사업을 통해 벌어놓은 1만3000달러와 농지증권을 헐값으로 구입해서 불하대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공정 환율은 6000대 1이었으나, 시장 환율은 1만1000대 1이었다. 1만3000달러는 1억430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귀속재산 불하대금은 농지개혁법에 의해 발행된 농지증권으로도 납부가 가능했기 때문에 계약금 2억3457만원을 납부하고 나머지 잔금은 15년 분할 상환하기로 했다.

김종희는 1952년 10월 9일 조선화약공판을 모체로 자본금 5억원의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발기인으로는 김종희, 종철 형제와 종철의 처삼촌인 유삼렬 및 화약공판에서 동고동락한 김덕성, 민영만, 홍용기, 권혁중 등이었다. 액면가 5만원의 1만주 중 김종희는 5200주를 가져갔다.

이 무렵 전쟁 복구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민수용 화약 수요가 빠르게 증가했다. 한국화약은 설립 초부터 화약 수입에 필요한 달러화 확보에 착수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당시 수입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달러화는 주로 중석불과 종교불, 시중불 등이었다. 신설업체인 한국화약엔 언감생심이었다.

한국화약은 달러화 확보를 위해 1952년 11월에 천안군 직산면에 있는 모나자이트(monazite)광인 덕령광산을 매입했다. 모나자이트는 세륨, 토륨, 이트륨, 지르코늄 등을 포함하고 있는 원광으로 수출전망이 밝았다. 김종철은 1953년 1월 일본을 방문해서 일본굴지의 화약중개상인 오카니시상사와 연결, 모나자이트 전량 일본 수출 및 다이너마이트의 수입루트를 확보했다.

한국화약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화약 창업 첫해인 1953년 매출액이 8493만7000환에서 1954년에는 1억9811만8000환을 기록했다. 1년 만에 233% 증가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한 것이다. 매출액의 90% 이상이 수입화약 판매대금이었다. 고율의 인플레를 감안해도 선방한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


▎지난 1950년대 한국화약 인천공장 모습. / 사진:(주)한화
김종희는 1955년 남한 유일의 화약생산업체인 조선유지 인천공장과 인연이 닿았다. 인천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건설에 착수, 조선화약공판이 설립된 1941년부터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했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인 50명과 조선인 350명이 근무했다. 당시 상공부는 인천화약공장을 1953년 11월 실수요자인 대한광업협회에 임대하면서 향후 2년 내에 공장시설을 완전히 복구할 경우 대한광업협회에 공장을 불하해 주기로 했으나 2년이 지났음에도 복구공사는커녕 그대로 방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공부에 조속히 새로운 실수요자를 물색할 것을 주문했다. 김종희와 연이 닿게 된 계기다.162만 평의 광활한 공장부지 대부분은 갈대가 무성하게 우거진 개펄이었다. 주요 공장 건물들은 폭발로 대부분 파괴돼 사용가능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다. 김종희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겨우 인천화약공장 설계도의 복사본을 확보했다. 설계도상의 인천화약공장 부지면적은 약 48만8435평이었으며, 공장건물은 관리사무실과 기숙사, 공실 및 창고 등 28개 동에 토제 등의 구축물 8점 등이었다. 토제(earth mound)란 화약고의 주위에 두껍게 쌓아두는 방폭을 위한 흙더미다. 박원희 서울대 화학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인천공장 복구공사에 착수했다.

1차 복구기간은 1955년 9월 15일부터 1956년 1월 30일까지 135일간 진행됐다. 소요경비는 5158만환이었다. 1955년 10월 산업은행에서 1차 복구비 전액을 대출받은 한편 16일에는 관재청과 인천공장 매수계약을 체결했다. 수의계약이었으며 매수총액은 7500만환으로, 15년 분할상환이었다.

1차 복구공사는 예정보다 한 달 앞당긴 1955년 12월 24일에 완료했다. 관건은 기술자 확보였다. 인천공장은 다이너마이트만 생산해온 터여서 초안폭약 기술자는 한 명도 없어 해방 전에 조선질소화약(흥남)에서 근무하다 남한으로 피란 온 기술자 3명을 확보해 생산에 착수했다. 1956년 2월부터는 2차 복구공사에도 착수했다. 4월에는 국산 뇌관과 도화선을 국내에 공급했으며 5월부터는 일제 초산암모늄으로 제조한 초안폭약이 ‘세이프티 마이트(Safety-mite)’란 상표로 전국 탄광으로 팔려나갔다.

1957년에는 국내 최초로 니트로글리세린(NG) 시험생산에 성공,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도전했다. 1957년 10월 젤라틴 다이너마이트 시제품을 생산한 이후 1958년 6월부터 석탄공사의 채탄용 폭약 전량을 대체했다. 이후 국내 화약 수요의 대부분을 국산으로 충당하게 되면서 정부는 산업용 관급 화약 수입을 중지했다.

김종희의 숙원이던 화약 국산화로 한국화약의 매출이 급증했다. 1956년 3억8811만환이던 매출액이 1958년에는 무려 8억4707만환으로 급증했다. 한국화약은 전후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1970년 4월부터는 화약의 해외수출을 개시했다.

한화그룹 형성에는 김종희의 친형인 김종철(1920∼1986)의 도움이 컸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1942년에 일본 메이지대학 상학과를 졸업했다. 한국화약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 그는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됐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퇴진했으나 1967년 천안·천원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재입성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국회의원을 지내며 한국화약을 후견했다.

오로지 화약에만 전념하던 김종희가 화약 이외의 업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다. 화약은 반드시 감독당국의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만 판매해야 하는 한계 탓에 화약 회사가 자유롭게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기업 성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기업 성장 위해 사업다각화


▎평소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종희 창업회장은 1973년 고교야구 명문인 북일고등학교를 세웠다. 북일고등학교 개교식 모습. / 사진:(주)한화
김종희는 1961년 8월 본사에 기획실을 설치하고 유능한 중견사원들을 특채했다. 연관사업 진출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이후 그는 1962년 7월 선진국 화공업계 견학 목적으로 일본,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스웨덴, 스위스, 터키 등을 방문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 한국화약의 롤모델(role model)을 찾았다.

프랑스 귀족출신의 듀폰 드 느무르가 지난 1802년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화약공장을 건설, 세계 최대의 석유화학 메이커인 듀폰(Dupont)사로 키운 것을 롤모델로 삼았다. 듀폰은 화약제조에서 출발해서 각종 화학약품과 염료, 질소, 메탄올, 고급 알코올, 합성고무 등으로 다각화하며 ‘꿈의 섬유’로 격찬 받던 나일론을 개발했다. 김종희는 석유화학 진출을 결심하고 1962년 12월 귀국과 동시에 한국화약 최초로 1963년 대학졸업 예정자 40여 명을 공채했다.

한국화약의 첫 번째 다각화는 1964년에 신한베어링을 인수, 한국베어링(한화기계)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귀속기업인 한국베어링은 1953년 신한베어링(주)으로 설립돼 국내 베어링시장을 독점했으나 기술부족 등으로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매물로 나왔다. 1971년에는 일본정공과 합작해 한국정공을 설립했으며, 1973년에는 상장에 성공했다.

1965년 한국화성공업(현 한화솔루션), 1966년 7월에는 태평물산(한화 무역사업부)을 각각 설립했다. 1968년에는 경남 진해에 연산 1만5000t의 PVC 공장 및 PVC 가공공장도 세웠다. PVC 제품은 국내 피혁, 철강재, 건축재료로 사용됐다. 특히 비닐하우스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68년 9월에는 제일화재해상보험㈜을 인수했다. 제일화재는 정부수립 이후 민간 실업가들이 세운 최초의 보험회사다. 1949년 3월 22일에 설립된 이 회사는 이후 1955년 해상보험업 인가를 획득했다. 상호도 제일화재로 변경했다.

1969년 11월에는 4대 석유메이저 중 하나인 미국 유니온오일(코노코필립스)과 5대 5 합작투자로 경인에너지(현대오일뱅크에 통합)를 설립했다. 경인지역은 일제강점기 이래 국내 최대의 공업벨트이자 최대의 석유소비지역이었다. 1971년 9월에는 제삼석유판매를 설립하고, 1972년 4월에는 경인에너지 정유공장과 발전소를 각각 준공했다. 경인에너지는 이후 한화에너지로 상호를 변경하고 전국에 1100개 이상의 주유소를 거느린 과점업체로 성장했으나, 외환위기 직후(1999년) 현대정유에 매각됐다.

1973년 2월에는 대일유업(현 빙그레)을 인수했다. 1967년 9월 13일 대일양행으로 설립된 뒤 1973년 우유처리 가공 허가를 얻어 대일유업으로 상호를 변경, 이후 한국화약에 인수됐다. 1976년에 미국 퍼머스트와 기술제휴를 맺고 상호를 대일퍼머스트유업으로 변경했으나 정부의 국산상표 사용 권장에 따라 상표를 ‘빙그레’로, 상호도 ‘대일유업’으로 환원했다. “먹는 장사는 안 한다”는 김종희의 신념과 어긋난 사례인데, 당시 남양주 일대의 수많은 영세낙농가를 살리려는 정부의 요청으로 대일유업이 한국화약 계열사가 된 것이다. 1973년 9월에는 동원공업을 인수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개발을 설립했다. 1974년 5월과 9월에는 김포요업과 유니온포리마를 각각 설립했으며 1975년 12월에는 성운물산을 설립하고 1976년 5월에는 성도증권을 인수했다. 성도증권은 1962년 설립 이래 성장을 지속한 우량 증권회사였다. 1977년 11월에 상호를 한화증권으로 변경한 이후 1986년 11월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5년 10월에는 서울 플라자호텔을 서울시청 광장 맞은편에 개관했다. 관광업 진출 신호탄이었다. 지하 3층, 지상 22층으로 구성된 본관과 지하 8층, 지상 18층 규모의 별관으로 구성된 특급호텔이다. 1976년 12월에는 고려시스템산업을 설립하고 1977년 7월에는 한국베어링공업(신한베어링) 창원공장을 준공했으며, 1978년 8월에는 태평양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한국화약 여수공장을 준공했다. 1979년 5월에는 물류업체인 삼희통운을 설립하고, 1980년 2월에는 한국플라스틱공업의 경영권을 재인수했다. 이후 1981년 2월에는 대일유업(빙그레) 김해공장을 기공하는 등 활발한 다각화작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재계서열 10위의 한화그룹이 완성됐다. 1973년 3월에는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에 고교야구 명문인 북일고등학교도 개교했다.

대형 참사 딛고 한화의 기틀을 닦다

한화그룹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익산)역 대폭발 사고가 발생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 전용 제1605호 화물열차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이 가득한 상태에서 폭발한 것이다. 한국화약 호송직원인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켜 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화근이었다. 열차의 단선 교행 시 철도청은 폭탄 등의 화물화차를 여객열차보다 우선순위로 통과시켜야 하고 위험물질은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무시한 결과였다.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이재민 약 1만 명 등 80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시 전체 가구의 70%가 파손되는 등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인재 사고였다. 한국화약은 위험물을 취급하는 기업의 허술한 안전의식이 대재앙을 초래했다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신현기 사장 등 간부직원 6명과 철도청 직원 4명이 구속됐다.

한국화약 창업 이래 최대 위기였다. 김종희는 주요 일간지에 사과문을 발표하고 최규하 당시 총리를 찾아 형사책임은 물론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한국화약에 피해보상금 90억원을 매년 30억원씩, 3년 분할로 납부하도록 했다.

김종희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yes’와 ‘no’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란 별명을 얻은 이유다. 1961년 11월경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종희를 독대한 자리에서 그의 별명을 거론한 적도 있다. 박 의장이 미국에서 유엔군 사령관이던 매그루더 대장(1900∼1988)을 만났을 당시 장군은 박 의장에게 ‘다이너마이트 김’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박정희는 “김 사장을 만나보니 사장 체구에서 풍기는 다이내믹한 멋도 있고… 아주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라고 칭찬했다. (전범성, [김종희의 기업가정신])

그에게 화약은 ‘모든 것’이었다. 1950년 6·25직후 피란지 부산에서 영업을 재개했을 때 미8군 전담직원이 김종희에게 화약장사해서 언제 돈을 버느냐며 설탕이나 비료 등 생필품수입으로 사업전환을 강권했다. 전국의 산업시설이 파괴돼 아무 물건이나 생활에 필요한 것만 수입해오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종희는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요.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와요.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 거요”라고 말했다. 의리와 외강내유의 사나이 ‘다이너마이트 김’은 당뇨병과 신부전증으로 1981년 7월 23일에 향년 59세로 타계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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