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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12)] 시안(西安)의 봄을 거닐다 

영원한 중원(中原)의 수도… 실크로드의 출발지 

중국 역사가 살아 숨 쉬는 13개 왕조 도읍지… 현재는 1100만 인구의 ‘일대일로’ 중심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갱, 당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 스토리 등 도시 자체가 문화 유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진시황 병마용.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드넓은 중국 대륙 한가운데 자리한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시안(西安). 옛 이름 장안으로 더 익숙한 시안은 유구한 중국 문화와 선조들의 유물이 도시 전역에 장중하게 펼쳐져 있는 역사의 보고(寶庫)다. 올봄 3월, 시안국제공항 착륙 직전, 저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 창문으로 보이는 시안시의 빼곡한 고층 아파트, 현대식 공항의 첨단 시설과 넘치는 차량은 옛 도읍지의 빠른 변화를 절감케 했다.

중국 6대 중심도시 중 하나인 시안은 3000여 년 중국 역사 가운데 주(周)·진(秦)·한(漢)·수(隋)·당(唐) 등 5개 대제국을 포함한 고대 13개 왕조의 도읍지였다. 고색창연하고 위풍당당한 유적들이 당시의 영화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시안은 험준한 산맥과 사막을 헤치고 빚어낸 비단길,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머나먼 서역 국가들과 왕성하게 교류하며 ‘세계 제1의 국제도시’로 이름을 떨친 중국 선조들의 기백이 도처에 서려 있는 곳이다.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 국가주석 부부의 고향이기도 한 시안은 유서 깊은 고대의 멋과 운치에 현대의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공존하며 젊은이들이 살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시진핑이 2013년 중국 국가주석에 오른 이후 지난 10년간 이곳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0년 약 850만 명이었던 인구는 현재 1100만 명을 넘어섰다. 새로운 번영을 견인하려는 중국 정부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추진하며 거점 도시 중 하나인 시안이 주목받고 있다. ‘집값 비싼 도시’로 변신 중인 시안 시민 주거지의 약 70%가 이제 아파트로 채워졌다니 상전벽해다.

왜 그들 선조는 그 넓은 땅덩어리 중 하필 당시 장안을 도읍지로 정했을까. 장안은 험준한 산봉우리가 즐비한 화산(華山)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 공격과 방어가 용이했다. 게다가 근처에 황하(黃河)가 흐르고 그 지류인 위수(渭水)가 가로질러 수상교통도 편리했다. 또 기름진 관중 지방 평원이 주변에 펼쳐져 있어 먹거리 생산·유통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고대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秦)나라 이후 각국의 수도가 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이유다.

시안을 거쳐 간 여러 왕조의 문화유산 중 국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진과 당의 유적지, 유물들이다. 우선 중국 고대 최초로 한(韓)·위(魏)·초(楚)·연(燕) 등 여러 군소 왕국들을 평정, 기원전 이미 중원을 통일한 진(기원전 221~206년)의 유물들은 당시 중국 지배층들의 배포가 얼마나 두둑한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믿기지 않는 생동감의 지하군단

천하를 통일한 영정(嬴政)왕은 자신을 ‘시(始)황제’라 부르도록 명령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거머쥐고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거대한 궁전과 만리장성을 지었고, 불로영생을 꿈꿨다. 자신의 무덤인 황릉과 군부 집합체인 지하 ‘병마용갱(兵馬俑坑)’ 설치가 그 좋은 예다.

시안 도심에서 30㎞ 떨어진 곳에서 1974년 발견된 직후 전 세계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진시황릉과 그 근처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갱이다. 이 용갱은 2000여 년 전, 죽어서도 영생을 꿈꾸는 진시황을 옹위하는 군단이 자리하고 있다. 진흙을 구워 만든 테라코타 인형들은 실물 크기의 지휘관·군졸들과 그들이 타는 말들로 구성돼 있다. 유사시 당장 뛰어나갈 것 같은 전투태세를 갖춘 병정들이 6000구나 질서정연하게 묻혀 있다. 현재까지 발굴한 병마용은 2000여 구로 지금도 현장에서 쉼 없이 발굴과 보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파헤친 발굴터는 지붕과 벽을 덧씌운 3~4층 높이의 실내 건축물 같다. 병마용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과 갑옷들을 보여주고 있어 이 유물들이 대충 숫자와 형식만 갖출 요량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수염·머리 모양·갑옷의 견장이나 무늬 등이 제각각 직급마다 다른데다 그들 손등과 얼굴 등에 힘줄 모양까지 새겨져 있다. 그 정교함에 마치 살아 있는 병사와 말들이 5m 깊이에 생매장당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고 50년째 발굴이 이어져 현재는 4호 갱까지 갖춰져 있다. 병마용 1호 갱의 경우, 길이 230m, 폭 62m로 축구장 1.5배 크기다.

진시황의 실제 시신이 있다는 황릉은 병마용갱에서 1.5㎞ 떨어진 여산(郘山)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이 능묘와 용갱을 착공하기 위해 70만 명의 인력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11년간 왕위에 머물다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대 기술로도 개방 못하는 진시황릉


▎실크로드의 첫 출발지임을 알리는 거대한 조각상들. / 사진:고혜련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하며 전 세계적 뉴스가 됐던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크기의 야산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론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 규모의 능이 그 산 안에 조성돼 자리하고 있다. 묘실 벽에는 산천지형도 등이 그려져 있고 궁전과 누각·집무실이 들어 있는 공간에는 값진 보물과 집기, 그릇들로 채워져 있다고 전해진다. 무덤 가장자리 주변에는 수은을 부어 강과 하천을 만들어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문화재 당국은 섣불리 황릉을 개봉할 경우, 그 안의 유물들이 외부 햇빛·산소 접촉 등에 의해 순식간에 부식, 파손될 것을 우려해 최첨단 발굴·보존 기술이 도입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시안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실크로드’(Silk Road)다. 이 ‘비단길’은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를 이어준 교역로를 통칭한다. 시안이 출발점이 됐다. 연이어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지른 후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운데 두고 톈산산맥과 쿤룬산맥 위·아래에 세 갈래 길들을 낸 것이다. 이어 서쪽의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까지 이르는 길이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시기는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25년) 때다. 전한의 제7대 황제였던 한무제(漢武帝)는 이웃 작은 세력들과 연합해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 즉 비단길을 기원전 60년에 확보했다. 이후 중국의 값진 비단 상품은 본격적으로 로마제국까지 팔려나가 자연스레 국제 통로인 실크로드에 걸맞은 역할을 하게 된다.

비단과 함께 도자기·칠기·화약 및 제지 기술 등도 서역으로 건너갔다. 특히 종이 제조 기술은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쳐 결국 중세 유럽의 학문과 민도를 높이는 데 한몫하게 됐다. 또한 인도의 경전들도 승려들과 함께 유입돼 중국에 불교가 터를 잡는 데 주요한 기능을 했다. 고대 중국과 서역의 무역을 이어준 6400㎞ 실크로드를 통한 상업·문화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당나라 때(618~907년)다. 그 중심이 도읍지 시안이었다. 이즈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676년)했다. 이때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한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년)는 국내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서역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704~787년) 역시 이 비단길을 따라 경전 공부와 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시안 시(市) 정부는 동·서아시아 및 유럽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실크로드 출발 지점에 당시 낙타를 타고 이동했던 대상(隊商)들의 모습을 담은 ‘시안 역사건축’ 조각공원을 설치해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고도(古都)의 위용을 뽐내는 시안을 거닐고 차로 달리면서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벽이다. 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두 세상이 공존한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는 성벽 안은 옛날 황제와 신하들이 거주하는 궁성과 정부 관청인 황성, 귀족들의 집터 등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개발이 제한돼 나지막하지만 웅장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다. 그 높은 성벽 밖에는 6~8차선 도로에 자동차들의 행렬이 가득하고, 세계 어느 대도시 못지않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서 전혀 다른 신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시안 성벽의 둘레 길이는 무려 36.7㎞다. 장방형 성곽은 동서의 길이가 9.7㎞, 남북의 길이가 8.6㎞, 면적은 84㎢ 규모에 이른다. 성벽 꼭대기 위에 설치된 3차선 너비의 길은 시민들의 산책로이면서 연인들이 2인용 자전거로 쌩쌩 달려보는 놀이터다. 웬만한 4층 건물 높이의 성문 누각과 연결된 이 성벽에는 야외 판매상들과 화장실 등도 있어 평지의 도로변을 연상시킨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안 성벽


▎화칭츠 내부에 당나라 시대 양귀비가 사용했던 욕탕이 있다. / 사진:고혜련
당나라 바로 이전의 수나라는 이곳에 성과 성곽을 짓는 등 도시 기본 체계를 형성했다. 이후 당나라가 들어서며 장안성(長安城)으로 이름 짓고 당시 100만 명이 살 수 있도록 성곽을 넓게 쌓았다. 4개의 성문은 각기 일정 거리의 폭을 두고 이중 문으로 돼 있다. 4개 성문의 용도는 제각각이다. 13세기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언급된 성벽 일부는 확장되고 꾸준히 보수돼 중국 안에서는 가장 보존이 잘된 옛 성벽으로 사랑받고 있다. 새벽 어스름한 운무가 드리워진 시안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성벽 위를 걸으면 마치 아득한 세월을 건너뛰어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감상에 젖게 된다. 다른 한쪽으로는 첨단을 지향하는 현대식 시설과 빌딩, 요란한 광고판들이 발전 속도전에 몰두 중인 ‘인구 1000만 대도시’ 시안의 한가운데 와 있음을 일깨워준다. 특히 야경은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 실루엣을 선사한다.

시안 하면 외국인들에게도 거의 자동적으로 연동되는 기억이 있다. 당의 6대 황제인 현종(재위 712~756년)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를 맘껏 풀어놓은 곳이 시안의 동쪽 여산(驪山) 기슭에 자리 잡은 화칭츠(華淸池)다. 이곳은 그야말로 ‘경국지색’ 미인이었던 양귀비(楊貴妃)가 당시 황제 현종을 눈멀게 해 결국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그들 역시 죽음으로 몰아갔던 장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 욕탕이 탄성을 자아내는 이곳은 역대 중국 황제들이 온천욕을 즐긴 장소였다.

안록산의 난부터 시안사변까지 격동


▎시안시 대당불야성에 당나라 전통복장 차림의 중국인이 가득하다.
화칭츠 한쪽에는 국력이 절정에 이른 때를 지배했던 현종과 양귀비가 시녀들을 거느리며 함께 거니는 장면이 여러 개의 청동 조각들로 그려져 있다. 연못 부용호(芙龍湖)에 자리한 누각 장생전(長生殿)은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했던 곳이고, 겨울에 침전으로 사용했던 비상전(飛霜殿)도 있다. 황제가 목욕한 어탕(御湯) 등 여러 개의 목욕탕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반라의 양귀비 상도 서 있다. 갓 목욕을 하고 나온 양귀비의 풍만하고 아름다운 몸매와 얼굴을 드러냈다.

그들의 치명적인 사랑이 특히 ‘장안의 화제’가 된 이유 중 하나는 ‘불륜’이었기 때문이다. 현종과 양귀비는 당초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였다. 58세의 현종이 자신의 아들인 수왕의 아내, 22세의 양옥환(楊玉環)을 탐내 둘의 관계를 끊어놓은 것이다. 당시 현종은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사망,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이 일부러 마련한 연회 자리에 나타나 춤을 추던 양옥환에게 반해 자신의 후궁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결국 강압으로 아들 수왕을 새로 장가보내고 양귀비와 여생을 즐기게 된다. 현종은 국정을 뒤로했고, 많은 실권을 넘겼던 최측근 신하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안을 떠나 쓰촨으로 피신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양귀비는 자결한다.

1936년 12월, 벼랑 끝에 섰던 중국 공산당에 기사회생 전환점을 안겨줘 결국 중국 현대사와 국민의 삶을 바꿔놓은 ‘시안사변’도 화칭츠의 뒤뜰 오간청(五間廳)에서 일어났다. 당시 중화민국 주석이자 사령관이던 장제스(蔣介石)가 공산군 토벌을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다 반란군에 체포돼 이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다.

시안을 빛내는 또 하나의 국보급 명소는 대안탑(大雁塔)과 광장이다. 7~8세기에 건립된 7층 높이의 대안탑은 실크로드를 여행한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가 인도로부터 들여온 경전이 보관돼 있는 곳이다. 황제가 성문을 열고 경전을 가져온 그를 친견하러 나갈 정도였다. 대안탑 부근엔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한 그의 동상이 서 있다. 10여 년 전부터 아시아 최대라는 분수광장이 주변에 조성돼 빛·물·소리의 레이저 쇼를 밤마다 펼쳐 보이는 곳이 됐다.

시안 성벽의 중심부 사거리에는 종이 들어 있는 누각인 종루(鐘樓)와 북이 담긴 고루(鼓樓)가 있어 아침·저녁 종과 북소리를 들려준다. 이 울림은 새삼 모든 이들이 아스라한 고도의 품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곤 한다. 명나라 시대 장인들이 청 벽돌로 쌓아올린 종루는 3중 처마에 4각 천장을 한 후 진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어 조명을 받은 모습이 아름답다.

종루에서 울리는 경운종의 진품은 근처 비림(碑林) 박물관에 소장돼 최고의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이 종은 높이 2.47m, 직경 1.65m, 무게가 6t인 청동종으로 ‘천하제일 종’으로 여겨진다. 종의 몸체에는 용과 학, 봉황 등의 섬세한 조각과 당 예종 황제가 종소리를 찬미하기 위해 쓴 292자의 명필도 새겨져 있다.

이런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와 유물들은 현대의 중국 정부와 예술인들을 통해 무대 위에서 다시 재연되고 부각된다. 시안에는 당나라 시대의 번영을 무대에서 호화찬란하게 보여주는 ‘실크로드 쇼’ 전용 공연장이 따로 마련돼 있어 연중 공연 중이다. 한 시간 분량인 이 쇼의 내용은 대당(大唐) 시대의 화려했던 문물과 빛나는 전통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는 느낌을 준다. 3000명의 관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은 360도로 회전하는 거대한 무대와 조명 장치를 갖추는 등 최신 연출 기법을 총동원했다. 수많은 출연자와 함께 수시로 등장하는 진짜 낙타 20여 마리와 늑대 30여 마리가 잘 훈련된 연기를 선보이고, 20t의 물이 한꺼번에 무대와 일부 좌석에까지 쏟아져 내렸다가 졸지에 사라지는 놀라움과 재미를 안겨준다.

중국의 미래 산업 품은 고도(古都)

또 대안탑 건너 시내 번화가에는 찬연했던 당나라의 전성기를 보여주려 조성한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 구역이 매일 밤 번득인다. 주위가 어둑해지자 시작되는 거창한 불꽃 쇼, 요란한 춤과 기예 공연, 국운을 융성시킨 황제, 이태백·백거이 등 전설적인 예술·종교인들의 대형 조각과 동상들이 넘쳐난다. 강한 조명을 내뿜는 나무들과 수백 개의 상점도 줄지어 당나라의 위세를 찬양하고 선전하는 인상을 준다. 마치 “우리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대외용 경고인 양 느껴진다.

다음 날 아침, 2000m급 깎아지른 절벽 봉우리들이 도열한 시안 동쪽의 험준한 화산(華山)을 케이블카와 도보를 이용해 간신히 기어오르다 보면 천하를 제압할 듯한 그 장엄한 절경에 경외감이 솟구친다.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화(華)란 글자도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도 귀에 꽂힌다. 가는 곳마다 유난스럽게 여권 제시와 스캔을 당해야 하는 절차가 매우 신경 쓰이는 이 도시의 주요 산업은 어느덧 항공과 우주, 정보통신과 장비제조가 됐다. 요동치는 중국 그리고 시안이 과연 어디까지 변해갈지 자못 궁금하다.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 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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