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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국보해운 회장 

정치인을 꿈꿨던 젊은이 해운업계 산증인 되다 

최영진 포브스 차장 사진 오상민 기자
세계적인 해운업 불황 속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중견 해운사 국보해운이 주목받고 있다. 설립 초기부터 글로벌화를 지향한 덕분이다.

▎박희준 회장은 설립 초기부터 글로벌화를 지향하면서 국보해운을 성장시켰다.
2007년 5월 21일,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화물선 강성호가 부산 감천항에 들어왔다. 2005년 8월 체결된 남북 해운 합의서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1800t급 강성호는 빈 컨테이너 60개를 싣고 감천항을 출발해 북한 나진항으로 출발했다. 강성호는 나진항에서 감천항에 들어올 때 건새우·건표고버섯·건고사리 등의 농수산물과 한약재나 내의 등을 싣고 왔다. 감천항에 입항하면 섬유원단, 폐타이어나 폐비닐, 음료수 등을 싣고 당일 나진항으로 출발했다. 강성호를 시작으로 비파호, 단결봉호, 사향산호 등의 북측 화물선은 부산과 나진을 오가면서 남북 물자를 운송했다. 해운업계에서 강성호는 남북교류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젠 드물다.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건의 후속 조치로 이명박 정부는 대북 제재를 위해 ‘5·24 조치’를 발표했다. ‘북한 선박의 남측 해역 운항 전면 불허’ 항목이 들어가 있었다. 2010년 5월 24일 남북 교류 화물선은 운행을 중단했다. 이후 부산-나진 간 화물선 운행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 기록을 끄집어낸 것은 강성호의 남측 대리점을 대기업이 아닌 중견 해운사가 맡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당시 이 사업을 맡기 위해 한국의 많은 기업이 뛰어들었다. 경쟁을 이겨내고 승자가 된 기업은 뜻밖에도 국보해운이었다. 박희준(68) 국보해운 회장은 “대기업과 경쟁해서 우리가 그 사업을 따냈다.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은 네트워크(인맥)가 있어서 가능했다”며 웃었다.

남북 교류의 상징 사업 맡아

국보해운은 이 사업에서 북측의 컨테이너 선 대리점을 맡았다. 일반 컨테이너와 냉동 컨테이너를 각각 300대, 30대를 북측 화물선에 공급했다. 북측 화물선은 2007년부터 2010년 5월까지 부산-나진 구간을 90회 운항했다. 보통 북에서 싣고 오는 화물은 컨테이너 80~90개 물량이지만, 명절에는 120~130개까지 늘었다고 한다. 교류 물량이 많아지면서 국보해운의 수입도 늘어났다. “당시 수익은 무척 좋았다”고 회고했다. 사업이 순항하자 박 회장은 깜짝 이벤트도 만들었다. 북측 선원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부산을 관광시켜준 것.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선원들이 땅에 내리지는 못했지만, 눈으로라도 부산을 둘러본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고 회고했다. 많은 정부기관의 협조를 얻어낸 후에야 이 이벤트는 가능했다.

박 회장은 여전히 이 사업에 애정이 많다. “이 사업이 재개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빠르면 올해 말에 다시 배가 오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답변을 했다. “남북화해 모드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성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사업이 필요하다. 부산-나진 화물선 운항은 남북에 모두 좋은 일이다. 다시 시작될 것이다.”

국보해운은 ‘작지만 강한’ 중견 해운사다. 국보물류, CTSI로지스틱스코리아(홍콩 상장회사인 루엔타이텍스타일의 자회사인 CTSI와의 한국합작투자 법인)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신기하게도 1991년 창업 이래 적자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지난해에도 수백억원의 매출을(정확한 매출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올렸다.

해운업계는 지난해부터 긴 불황의 터널에 빠져 있다. 중국의 경기 둔화와 유럽 경제의 회복세가 더디면서 세계 무역 성장률은 뚝 떨어졌다. 화물 운송량도 줄었다. “대기업 해운사가 부도 위기”라는 소문까지 도는 이유다. 이 상황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는 국보해운을 업계가 부러워하는 이유다. 박 회장은 국보해운이 좋은 성과를 올린 이유를 “해운업을 하려면 세계 경제 흐름을 항상 체크하고, 리스크에 대해 미리 대비해야 한다. 이런 선제적 대응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국보해운이 포트폴리오를 잘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선제적으로 사업 다각화를 펼친 것이 국보해운의 동력이 된 것이다. 국보해운은 처음 선박·항공 포워딩 업무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해외 선사의 대리점 업무, 컨테이너 임대, 위험물 운송 서비스 등으로 사업을 넓혀나갔다. 포워딩 업무는 쉽게 말해 화물주가 물건을 배나 비행기로 운송하고자 할 때 운송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선제적으로 사업 다각화를 진행하지 않았다면, 국보해운도 여느 포워더(포워딩 업무를 하는 해운사)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질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국내 대기업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해운사 네트워크 직접 추진

해운업의 불황으로 물류관련 사업을 펼치는 대기업도 포워딩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화물선 운영이나 화물 운송만으로 이익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보해운의 국내 경쟁사는 현대상선, 한진해운, CJ대한통운, 범한핀토스 등 대기업이다. 대기업이 국보해운의 고객사를 빼내가는 경우도 발생했다. 박 회장은 “그쪽(대기업에서)이 우리에게 하청을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우리의 노하우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한다”며 웃었다.

대기업과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국보해운의 주요 고객사는 대기업이 많다. 롯데케미칼, SK 글로벌, 다우코닝, LG화학, 한솔, 태광, OCI, OCI상사, 한세실업 등이 주요 고객사다. 물류운송 계열사를 두고 있는 대기업들도 국보해운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박 회장은 이를 “신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OCI나 한세 등은 국보해운 설립 초창기부터 관계를 맺어왔다. 고객사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약속을 지키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케미칼 업계에서 국보해운은 전문 해운사로 꼽힌다. 화학제품을 운송할 때 사용하는 화학물질 저장 탱크도 OEM으로 생산 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췄다. “화학물질 운송은 위험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가장 중요하다. 자격증을 딴 직원도 많다”고 자랑했다. 주요 고객사 중에 케미칼 기업이 많은 이유다.

박 회장이 국보해운을 한국의 ‘톱 10’ 기업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글로벌’ 진출이다. 국보해운은 전 세계 대륙을 오가는 화물을 처리할 수 있다. 세계 유명 해운사들이 국보해운과 한국 대리점 업무 계약을 맺었다. 네덜란드의 해운사 Niledutsch, 말레이시아의 Harbour Links, 프랑스의 Touax 등 6개 해운사의 한국 대리점을 맡고 있다. 해외 유명 해운사들이 국보해운을 인정한 것은 1995년 박 회장의 주도로 만든 글로벌 해운사 네트워크인 CTN(Certified Transportation Network) 덕분이다. 현재 66개 해운사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다. “좁은 국내에서만 경쟁하는 게 싫었다. 세계적인 해운사 네트워크를 만들어 물량을 공유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이 모임을 추진했다”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

고객사와 약속지켜 신뢰 얻어

1995년 당시 중국에 지사를 설립한 것도 해운업계에서 국보해운이 처음이었다. 현재 국보해운은 중국과 싱가포르 등 7곳에 해외 지사를 설립하고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인도에 지사를 설립하는 게 남은 숙제”라고 말했다. “우리의 매출은 외국 회사와 거래에서 많이 나온다. 매출의 변동이 작다는 것이 국보해운의 장점이다.”

박 회장은 해운업계의 산증인으로 인정 받고 있지만, 원래 꿈은 직업 정치인이었다. 부산에서 유명했던 제일서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책에 빠져 살았다. 공부도 잘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서울대 장달중 명예교수 등이 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늘 데모가 있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느라 공부한 날이 별로 없다.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정치인의 꿈을 접고 LG(당시 금성사)에 들어갔다”고 박 회장은 회고했다. 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에 부산 집은 난리가 났다. “정치 할 놈이 무슨 취직이냐. 어서 내려와라”는 성화에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내려와 가만히 있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부산항에 정박한 화물선은 대부분 해외 선사 배였다. 외국인 선원에게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에 한국해운에 입사했다. “잠깐 일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젊은이가 해운업계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국해운에서 일하던 박 회장에게 지인은 “흥아해운으로 와서 잠깐만 일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그냥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흥아해운으로 옮겼다. 그런데 거기서 발목이 잡혔다”며 웃었다. 일 습득 능력도 뛰어나고, 영어도 잘하는 젊은 청년을 흥아해운은 눈여겨 봤다.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월급도 남들보다 많았고, 승진도 빨랐다. 30대에 부장으로 승진하고, 골프도 쳤다. 흥아해운 규모가 커지면서 1982년 일본에 사무소를 개설했고, 박 회장은 주재원으로 일본에 나갔다. “8~9년 정도 일본에서 생활했다. 동경사무소장을 지내면서 많은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 큰 재산이 됐다”고 회고했다. 1991년 박 회장은 독립을 결심했다. 국보해운이 포워딩 서비스 시작을 한 것은 1992년 일본 기업 농비와 계약을 맺으면서다. 일본 네트워크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30여 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국보해운은 2015년 현재 170여 명의 임직원이 일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약속은 지킨다는 책임감과 일에 대한 철저함이다.

국보해운 사무실이 있는 빌딩 주변에서 박 회장은 ‘무서운 할아버지’라는 소문이나 있다. 어느 날 오전 9시 30분, 박 회장은 건물에 입주한 여러 회사 직원들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됐다. 박 회장이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이렇게 출근이 늦으면 언제 일하나?”라고 말했고, 이 말에 직장인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박 회장은 건강과 나이 때문에 일본에서 일하던 딸을 불러들여 일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일은 자신이 챙긴다. 서류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여전히 꼼꼼하게 챙기며 호통을 치는 박 회장을 보면서 임직원들은 혀를 내두른다. 박 회장은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지 않는 임직원에게 화를 낸다. 국보해운이 고객사에게 인정을 받는 이유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 임직원들도 그런 자세를 가지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나는 원래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며 웃었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201510호 (20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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