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비바생명 인수 첫 해에 흑자 전환 이뤄DGB금융이 ‘늦깎이’라는 불안한 시선에도 소위 ‘박 회장표 뚝심’을 발휘하는 이유가 있었다. 은행원 출신치고 그는 입사가 늦다. 대구상고를 졸업해서 대구은행에 바로 온 동기들보다 8년이나 늦게 들어왔다. 과수원 집 아들로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던 박 회장은 상고 졸업 후 재수해서 영남대학교에 입학했다. ROTC(학군단)를 마치고 군 생활을 3년 한 뒤 은행에 입사했으니 그의 고교동기가 한순간에 직속 상사가 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은 당연했다. “1년 재수, 대학 4년, 군생활 3년. 동기와 시차가 8년이었다. 처음에 방황하다가 은행을 떠나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대구은행의 귀신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마음을 다잡은 게 입행 후 2년이 지나서였다”며 박 회장은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부터 퇴근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업무를 찾아서 일했다. 지점에서 인사도 크게 하고, 고객을 만나러 현장에 발이 닳도록 다녔다. 오죽하면 부대장이 지점을 방문해서 재입대를 제안했겠나?(웃음)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더니 기회가 오더라”고 말했다.그 같은 노력이 쌓이고 쌓여 박 회장은 지난 2014년 제2대 DGB금융지주 회장 겸 제11대 DGB대구은행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박인규 회장이 DGB금융지주 조직의 정점에 서기까지는 또 한 번의 위기가 있었다. 박 회장은 은행 내에서 소위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온 임원이었다. 서울분실장, 전략금융본부 부행장보에 이어 대구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마케팅그룹장 겸 공공금융본부장을 거쳐 지원그룹장(부행장)을 역임했다. 모두가 말하는 차기 회장이자 행장감이었지만, 2012년 별안간 그룹내 인력관리 자회사인 대경TMS 대표이사로 발령을 받게 된다. 다른 시중은행과 달리 DGB금융은 금융지주 역사가 짧아 자회사 임원이 지주은행으로 돌아온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고별인사’로 보는 시선이 컸다. “주변에서 다들 ‘박인규는 이제 끝났구나’라는 말이 내 귀에 들릴 정도였다. 친구들마저 위로주를 사주겠다고 하더라.(웃음) 하지만 나는 ‘끝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은행도 8년이나 늦게 들어왔는데 뭐. 더 돌아가도 괜찮았다.(웃음) 오히려 사람들을 더 만나고 더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사실은, 하춘수 전 DGB행장이 일부러 한 조치였다고 한다. 내심 마음에 뒀던 후임자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웃으며 더 열심히 일하는 박 회장을 본 하 전 행장은 임기 만료 1년을 앞두고 자진용퇴를 결정했다. 박 회장은 내친김에 자산운용사 인수 건도 같은 맥락에서 봐주길 원했다. “먼저 하지 않았다고 해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절하했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없었다.”직원 사기 중요시, 자율·소통·격려로 이끌어이어 그는 “회사 인수에 큰돈을 쓰는 일인데 ‘신중함’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다. ‘고객 돈을 지키겠다는 의지’라는 말도 거듭 강조했다. 인수 이슈보다 지금 ‘잘’하는 사업을 더 봐달라는 얘기였다. 대구은행에서 DGB금융으로 이름을 바꾼 후 순항하고 있지만, 박 회장은 “지역민과 직원의 애행심(愛行心) 때문에 탄탄한 자본력과 기본기를 갖출 수 있었다”며 공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수합병이슈와 무관하게 DGB금융만의 ‘선택과 집중형’ 전략을 밀고 나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역 곳곳을 꼼꼼하게 살피는 지역밀착형 영업은 대구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도 통하는 비법이다. 발로 뛰며 고객을 찾아다니는 데 우리를 마다할 곳이 있겠나?”DGB금융이 지역금융그룹의 한계를 벗어나겠다는 출발점은 거창하지 않았다. 특히 DGB금융에는 ‘사람’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인수 무산 소식이 언론을 달굴 때마다 박 회장이 가장 신경 쓴 것은 직원들의 사기였다. “직원을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말한다. 절대 기죽지 말라고. 다른 회사를 인수하든 새로 차리든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만의 방식으로 갈 수 있다. 의욕을 가지고 활기차게만 일해달라고 거듭 강조했다.”박 회장은 일화 하나를 꺼냈다.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인 2008년 얘기였다. 그가 포항지역을 아우르는 환동해본부장을 역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전국에 있는 대구은행 7개 본부 중 환동해본부가 반기(半期) 내내 꼴찌를 했다. 직원들의 빗발치는 건의에 그가 지점장들을 불러모았다. 불려온 지점장들은 ‘엄청 깨지겠구나’하는 생각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실적이나 업무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고, 싫은 내색도 안 했다. 그는 “골프는 잘 다녀왔는지, 가족은 잘 지내는지, 지난주 회식했다는데 나도 부르지 그랬냐?며 수다를 떨었다. 그 말만 하고 다들 일하러 가시라고 기분 좋게 돌려보냈다”고 했다. 이심전심, 그 마음을 알았을까. 그 해 3·4분기 환동해본부의 카드와 방카슈랑스(은행 내 보험판매) 실적은 급상승했다. 전체 7개 본부 중 1등을 차지했다. 꼴찌의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박 회장은 그 이유에 대해 “(깨지지 않아서) 지점장도 기분이 좋고, 그 지점도 밝아지니 고객에게 더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라고 해석했다.그는 오랜 은행생활을 통해 ‘직원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하고, 이를 돕는 사람들이 지점장이다’라는 나름의 철학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런 덕분일까? DGB금융의 총자산은 지난해보다 24% 넘게 늘었다. 당기순이익이 30% 가까이 오른 금융지주는 DGB금융이 유일했다. 회장 취임 후 내친김에 계열사 사장단에도 힘을 실어줬다. ‘선집행·후보고’ 하라며 권한을 내어주었고, 기간과 범위만 정해주고 새로운 사업 구상을 마음껏 해보라고 멍석도 깔아 주었다. 박 회장은 “우리 인력이 가진 에너지와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게 내 몫이다. 직원이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발로 뛰어야, 더 많은 고객에게 수익을 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1% 초저금리 시대에 수익내기 한층 어려워진 환경을 극복하려는 박 회장의 타개책이기도 했다.최근 DGB금융이 관심 있게 보는 시장은 동남아시아다. DGB금융의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해외 시장으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다보면 대구·경북지역민에 소홀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박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대구·경북지역민을 위한다고 해도 수익을 내기 위해 시야를 국·내외로 넓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 기준금리가 1%라면 동남아 일부 지역은 15%에 달하는 곳도 많다. 순마진(NIM)만 5%나 거둘 수 있다는 얘기”라고도 했다.
라오스 코라오그룹과 아세안지역 진출 발판 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