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며 그 역할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몇 해 전 친구 아내가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조문을 갔다. 오십 대 초반의 나이에 아내와 사별하게 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망자에게 분향하고 상주라고 생각한 친구에게 맞절을 하려는데 옆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상주가 그의 아들이라는 자각을 하고 문상을 마칠 수 있었다. 30년 가까이 함께 산 아내이지만 망자가 되었을 때 남편은 상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가 있을 때는 남편이라는 자리가 있지만 아내가 사라지면 남편이라는 자리도 함께 사라진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며 그 역할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부모 자식과 형제로서 친구와 사제지간 등으로 끊임없는 인연을 맺어가는 것이 인간사가 아니겠는가. 둘 이상의 사람과 사물은 물론 현상조차도 모두 관계로 이어져 있다. 어떠한 이유로든 관계가 끊어진다면 그 역할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는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하에서 생겨난다는 불가의 연기법(인연법)을 빌지 않더라도 새겨볼 일이다.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듯이 만물은 변화한다. 세상과 사람이 그러하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인 기업도 마찬가지다. 조직 내에서 유기적인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조직문화가 바뀌게 된다. 관계라는 것은 상호 작용이므로 신뢰를 바탕으로 풀어가는 것이지 일방적일 수가 없다. 사장은 사장답고 신입사원은 신입사원 다울 때 조직은 원활하게 돌아가게 된다.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인 시장논리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소비자의 윤택한 삶과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세상에 이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데 있다. 소비자도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선별 구매하는 현명한 소비자의 역할을 다할 때 시장은 건강해진다.최근에 생산자와 소비자의 중간자인 유통업계에서 그 균형을 깨는 일들이 빈번하다. 일례로 소비자에게 더 싸게 공급한다는 미명하에 제조사에 일방적인 가격 할인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제한된 판매공간에서 할인판매 하는 제품만 취급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사고 싶은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품질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리 싼값에 판다고 해도 전체 소비량은 정해져 있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싸게 소비하는 것보다 제값을 주고 제대로 된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현명한 소비다. 결국 중간자인 유통업체 간의 경쟁 논리로 인해 생산자나 소비자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될 일이다.세상 만물이 관계로 이어져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단순한 진리가 가족과 기업은 물론 인류를 윤택하게 했으면 한다.- 조운호 하이트진로음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