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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 대표 

160만 ‘사장님’의 데이터 플랫폼 

장진원 기자
‘캐시노트’는 지난 2017년 4월 소상공인 매출관리 서비스로 출발했다. 창업 7년 차에 접어든 현재 캐시노트를 사용하는 국내 소상공인 고객사는 160만 개에 달한다. 국내 전체 소상공인의 80%를 장악한 슈퍼앱이자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2011년 오픈서베이 창업에 이어 한국신용데이터까지 연쇄 창업에 성공한 김동호 대표는 2025년 제4인터넷전문은행 인가를 놓고 또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장이나 서비스는 그 실체와 효용성이 입증돼도 여전히 ‘검증’을 요구받을 때가 많다. 2010년 등장한 카카오톡은 “카톡 쓰려고 스마트폰 샀다”는 말이 돌 정도로 출시 직후부터 국민 애플리케이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2012년 모바일게임 ‘애니팡’ 신드롬이 불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걸로 어떻게 돈을 버느냐”며 비아냥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은 이커머스의 제왕이 된 쿠팡도 카카오톡과 같은 2010년 창업했다. ‘소셜커머스’ 열풍이 사그라지고 대규모 적자 상황이 이어질 때마다 쿠팡의 ‘지속가능성’은 “저러다 결국 망한다”는 쓴소리로 이어지곤 했다.

카카오톡과 쿠팡은 모두 이전에는 없던 전혀 다른 플레이어였다. 이들은 그때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서비스를 내놓아 시장을 선점했다. 당장의 수익 모델이 없다 해도, 경쟁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환경에서 가장 많은 사용자를 끌어모은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겠느냐”던 의심은 오래지 않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슈퍼앱’이란 확신으로 굳어졌다. 시장은 그제야 플랫폼이라는 말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7년 창업한 한국신용데이터(KCD)는 소상공인, 즉 작은 가게 사장님들을 위한 ‘캐시노트(Cashnote)’ 서비스를 선보였다. 기업에 회계장부가 있어 매출-이익 구조를 확인하듯이, 가게 사장님에게 그날그날의 매출관리, 즉 현금흐름을 보여주는 게 기본 모델이었다. 그날 영업으로 우리 가게에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카드 대금은 언제 입금해야 하는지, 2번 이상 방문한 단골고객은 어떤 사람인지도 데이터로 뽑아냈다. “단골손님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손가락을 헤아렸던 사장님들은 캐시노트를 이용하면서 2번 이상, 3번 이상 찾은 손님이 몇 명인지, 이들이 올린 매출 비중이 얼마인지,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의 매출 비중이 얼마인지를 명확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2017년 4월 첫선을 보인 캐시노트는 서비스 출시 석 달 만에 고객사 1만 개를 확보했다. 이어 2018년 8월 10만 개, 2022년 3월에는 캐시노트를 쓰는 고객사가 100만 개를 돌파했다. 올 10월 현재 캐시노트 고객사는 160만 개에 달한다. 창업 CEO인 김동호 대표는 “소상공인 대상 서비스를 내놓겠다고 하자 ‘동네 가게 상대해서 뭘 얼마나 벌겠느냐’는 애정 어린 조언이 태반이었다”고 돌이켰다. 카카오톡이, 쿠팡이 처음 그랬듯 캐시노트는 소상공인을 정조준한,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였다. 현재 국내 소상공인 수는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바꿔 말하면 캐시노트가 국내 소상공인 시장의 80%를 장악한 플랫폼이 됐다는 뜻이다. 불과 창업 7년 만에 거둔 성과다.

소상공인 시장 80% 장악한 슈퍼 플랫폼

김 대표는 ‘연쇄 창업’ 성공 사례를 들 때 단골로 등장하는 기업가다. 그의 첫 창업은 연세대 산업공학과 재학 시절인 2011년 선보인 ‘오픈서베이(당시 사명은 아이디인큐)’였다. 모바일 기반 설문조사 툴에서 출발한 오픈서베이는 이후 소비자 데이터 플랫폼으로 확장해 현재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2016년 전문경영인에게 오픈서베이를 맡기고, 두 번째 도전인 KCD 창업에 나섰다. 당시 오픈서베이는 단순한 설문조사 서비스에서 진화해 시장을 선도하는 소비자 데이터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첫 창업부터 시장 안착에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눈을 돌린 것 자체가 여러모로 화제였다. 김 대표는 “세상을 바꿀 거대한 파도를 직감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아이폰과 갤럭시가 나온 게 2010년이에요. 모바일이 IT 산업의 촉매제가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넥스트 빅뱅’이라는 확신은 아직 없었죠. 하지만 카카오톡과 쿠팡은 2010년 과감하게 그 파도에 올라탔습니다. 오픈서베이 창업이 2011년이었지만, 불과 그 1년 사이 후행 주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갭이 크다는 걸 절감했죠. 2016년은 모바일금융 영역에서 핀테크의 가능성을 반신반의하던 때였어요. 시장이 어떻게 진화할지 아무도 모르던 때가 오히려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뒤늦게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듣던 와중에 KCD 창업을 결심하고 즉각 실행에 나섰죠. 2010년 시장 선점의 기회를 놓친 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요.”

김 대표는 한국과학영재학교 1기 졸업생이자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과학도 출신이다. 과학영재고는 전국 유일의 카이스트 부설 고교 과정이라 재학생 대부분이 카이스트에 진학하는 게 수순이었다. 김 대표는 “종합대학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연세대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연구는 대학원에 가서 깊이 있게 하고, 학부 시절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자는 생각에서였다. 인문학동아리에 들어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던 공학도가 시대의 흐름을 직시한 건 2008년 들어서였다.

“미국 새너제이주립대학에 교환학생 기회를 얻었어요. 미국에선 이미 2007년에 아이폰이 출시됐었죠. 스탠퍼드대학 옆 작은 건물에 있던 페이스북 본사가 생생해요. 실리콘밸리, 스탠퍼드가 있는 새너제이는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의 성지 같은 곳이죠. 연구자·과학자로 사는 것도 좋지만, 뭔가 사회에 즉각적인 변화를 주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어요. 뜻하지 않게 창업이란 꿈을 꾸게 된 거죠.”

2009년 귀국 후 병역특례로 일한 와이즈에프엔(현재는 에프앤가이드가 흡수)에선 산업과 시장의 거대한 흐름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산가치의 폭락을 불러왔다. 하지만 양적완화 등에 힘입어 2009년 2분기부터 시장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 대표는 인덱스펀드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데이터마이닝 파트에서 일했다.

“제가 개발한 똑같은 투자 방법론을 2008년에 내놓았다면 급락했을 게 분명했어요. 아무리 잘 설계한 상품도 매크로 흐름에서 벗어날 순 없었죠. 2009년이 되자 시장에서도 충격이 잦아들었고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개인의 미시적 관점을 뛰어넘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2010년 한 해 동안 국내에 판매된 스마트폰은 약 800만 대 수준이었다. 100만~200만 대를 예측한 시장의 전망을 훌쩍 뛰어넘는 신드롬이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아이폰이 과거 PDA처럼 한때의 유물로 끝나는 건 아닐까’ 했던 의심도 스마트폰이 불러온 모바일 환경이 넥스트 빅뱅이 될 거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흐름 앞에 서서 창업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금융의 본질은 신용 공급과 확장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2011년 첫 창업을 돌아보던 김 대표의 말이다.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에 억대 연봉을 받아 입사한 것도 아니었고, 이제 막 병역특례 근무를 마친 터라 몸도 가벼웠다. 수중에 모은 돈이라야 1000만원이 채 안 됐지만 ‘해보고 안 되면 취업하면 된다’고 마음먹었다. 오픈서베이가 첫선을 보인 2011년은 공무원시험 경쟁률이 97대 1에 달해 단군 이래 최고를 기록한 해였다.

“당시엔 스타트업이란 말도 없었어요. 다들 벤처기업이라고 했죠. 다행히 오픈서베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했어요. 경영 때문에 미뤘던 졸업을 위해 남은 한 학기를 마치려 복학했죠. 그런데 자꾸 2011년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모바일 빅뱅이 가져다준 수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아쉬움은 이를 대신할 또 다른 기회가 눈앞에 왔음을 직감케 했다. 이른바 ‘핀테크’의 개화였다. 뱅킹, 결제, 펀딩, 투자, 대출, 송금, 자산관리 등 온갖 금융 영역에서 데이터 기반의 테크 기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금융에 대한 환호와 의심, 우려가 교차하는 사이 김 대표는 금융의 본질을 고민하며 10년 만에 찾아온 넥스트 빅뱅을 확신했다.

“표면에 드러난 기회와 물밑에 흐르는 진짜 기회에는 늘 차이가 있게 마련이에요. 2010년 초, 소셜커머스 기업이 수백 개에 달했습니다.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2015년 말부터 2016년 사이에도 온라인 P2P(Peer to Peer) 대출 서비스가 100개도 넘게 쏟아졌는데, 소셜커머스 광풍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더군요. 핀테크건 테크핀이건 결국은 금융업이 본질이고, 금융의 기반은 신용정보 인프라라고 정의했습니다. 자본주의 금융의 본질은 신용의 확장이니까요. 한국신용데이터라는 사명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김 대표는 중금리 시장을 주목했다. 개인과 기업의 신용평가 모델은 이미 기존 금융권에 정교한 평가 모델이 완성돼 있었다. 중금리 영역은 달랐다. 제대로 된 신용평가 모델이 없으니 금융시장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상공인, 사회초년생, 경제활동을 멈춘 노년층 등이 중금리 시장의 타깃이었고, 김 대표는 그중 가장 큰 세그먼트인 소상공인의 신용정보 인프라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 판단했다.

“타깃은 정해졌어요. 소상공인, 즉 가게 사장님들이죠. 이분들의 금융 데이터를 어떻게 모으고 확보할 것인가가 남은 숙제였어요. 사장님들이 쓰는 비즈니스 서비스를 만들자, 거기서 자연스럽게 데이터를 모으자고 결론 내렸죠. 그렇게 개발한 서비스가 바로 캐시노트였습니다.”

2016년 법인 설립, 2017년 1월 캐시노트 베타테스트, 4월 정식 론칭까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연말까지 8개월 안에 고객사 1만 개를 확보한다는 베스트 플랜도 세웠다. 벤치마킹한 성공 사례들도 대부분 서비스 오픈 1년 만에 1만 개를 달성했던 터였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깜짝 놀라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시 석 달 만에 1만 개 넘는 고객사가 캐시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날그날의 매출 정보와 현금흐름이 한눈에 들어오자 “이런 신기한 서비스가 있다”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김 대표는 무엇보다 ‘단골손님 비율을 알려준 첫 금융 서비스’에서 캐시노트가 초반에 일으킨 돌풍의 단초를 찾았다.

“시장조사에서 만난 사장님 대부분이 자기 가게의 단골을 정확히 몰랐어요. 눈짐작과 느낌적인 느낌뿐이었죠. 캐시노트는 특정 카드번호가 몇 번째 결제인지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어요. 우리 가게 단골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이들의 매출이 전체의 몇 퍼센트인지가 수치로 나오는 거죠. 사장님들에겐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은 충격이었어요.”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접근성’도 캐시노트 흥행에 불을 댕겼다. 아무리 좋은 서비스를 잘 만들어도 쓰기 어려우면 말짱 꽝이라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었다. 다만 자본력이 달리는 스타트업이 안드로이와 iOS 버전을 모두 개발하는 건 넘기 어려운 허들이었다. “운도 따랐어요. 마침 카카오톡이 새로운 API를 내놓았고, 이걸 이용하면 챗봇 형태의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개발진의 의견을 들었죠. 따로 앱을 개발하지 않고 카카오톡 안에서 서비스가 이뤄지니 사장님 입장에서도 사용하기 편했습니다. 포스를 바꾸거나 앱을 깔 필요도 없었죠.”

서비스 사용자의 감탄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와우 익스피어리언스(wow experience)’와 더불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은 초기 캐시노트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2018년 고객사 10만 개, 2019년 고객사 20만 개를 넘어선 캐시노트 사용자는 2022년 3월 100만 개를 돌파했고, 그해 말 기업가치 1조원을 인정받으며 유니콘에 등극했다.

캐시노트 내 연간 거래액만 500조원


현재 캐시노트는 전국 소상공인 고객사의 80%를 장악한 슈퍼앱이다. 국민 배달 앱 ‘배달의민족’ 입점 업소 수가 30만 개로 추산되는 것과 비교하면 ‘고객사 160만 개’라는 수치의 함의를 체감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소상공인을 타깃으로 하는 금융 서비스를 착안할 때 정했던 두 가지 원칙을 사업 성공의 원천으로 평가했다. 첫째, 얼마나 보편적인 서비스인가, 둘째, 얼마나 자주 쓰는 서비스인가이다.

“KCD 사업 시작부터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금융을 염두에 뒀어요. 이들의 신용평가를 위한 데이터를 모으는 서비스가 바로 캐시노트죠. 똑같은 돈을 벌더라도 더 많은 가게가 우리 서비스를 사용해야만 광범위한 데이터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유저 수만큼이나 중요한 게 서비스 이용 빈도죠. 이삿짐센터 고객이 많아도 몇 년에 한 번 쓰는 게 고작이잖아요. 그런 빈도로는 데이터를 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가게 사장님들이 가장 자주 들여다볼 기능이 뭘까. 매일매일 발생하는 매출 분석 아닐까. 마침 우리나라만큼 카드 결제가 많은 금융 환경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가게의 매출 정보가 전자적 로그로 광범위하게 남겨지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초기 사업 방향을 잡는 과정에선 으레 겪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2017년 초 베타테스트 때만 해도 김 대표가 내세운 서비스는 ‘가장 쉬운 회계관리’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뜨뜻미지근한 반응만 돌아왔다. 사장님은 CEO나 CFO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파일을 업로드해 만든 회계장부가 아니라, 그날 내가 얼마를 팔고 얼마가 남았는지에 대한 정보, 즉 매출관리와 현금흐름이었다. 당장 서비스명을 ‘가장 쉬운 매출관리’로 바꿨다. 업무 중엔 컴퓨터 앞에 앉기도 어렵다는 걸 알고는 자체 앱도 만들지 말자는 극단적 전략으로 선회했다. 바뀐 전략은 고객의 페인포인트를 명확히 짚어내며 적중했다.

사업 초기 “소상공인 대상으론 큰 기업 못 만든다”던 주변의 우려는 창업 7년 후 KCD의 성장이 어디까지 갈지 기대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현재 캐시노트 안에서 파악되는 160만 고객사의 매출 총 합은 연간 280조원에 달한다. 식자재·비품 구입, 임대료, 수리비 등 연간 매입 규모도 200조원 이상이다. 소상공인 160만 곳의 거래 정보가 연간 500조원에 달한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바로 이 500조원을 KCD가 도달 가능한 시장 지표로 이해했다.

“지난해 캐시노트 고객사의 결제액 280조원 중 우리 서비스를 이용한 금액이 40조원 수준입니다. 결제에서만 7배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죠. 사장님들의 전체 매입 200조원에선 1조원도 소화하지 못했어요. 우리 비즈니스가 그 영역에서 100배 이상 커질 수 있다는 말과 같죠. 현재 KCD는 캐시노트를 기반으로 결제, 포스, 금융, 마켓 등 다양한 영역에 진출해 있어요. 사장님들의 가게를 운영하고 성장시키는 솔루션을 한곳에서 제공하는 ‘사장님 포털’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소상공인 중심의 신용평가 모델을 개발해 중금리 시장을 열겠다는 비전도 차근차근 실현 중이다. 김 대표는 지난 2022년 국내 최초로 개인사업자의 신용평가를 전업으로 하는 한국평가정보(KCS)를 출범시켰다. 신용평가업(CB) 전체로 봐도 17년 만의 인가다.

매출과 이익 규모도 견고하게 성장 중이다. 2021년에 68억원을 기록한 매출액은 이듬해 646억원, 지난해엔 1380억원을 올렸다. 김 대표는 “올해도 큰 폭의 성장이 예상된다”며 “영업손실도 드라마틱하게 줄여가고 있다”고 말했다. 2021년 382%였던 영업손실률은 2022년 48%에서 2023년 들어 16%로 축소됐다.

김 대표는 “고객사 200만 개라는 1차 목표에 이어 또 다른 시장도 남았다”며 사업계획을 밝혔다. 올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에 예비창업자 영역으로 서비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전자상거래 기반 소상공인도 새로 개척해야 할 타깃이다. 전자상거래 사업자의 경우 사업 플랫폼만 다를 뿐,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는 오프라인과 큰 차이가 없다. 김 대표는 “예비창업자와 전자상거래 사업자를 더하면 고객사가 100만 개 정도 추가될 것”이라 전망했다.

소상공인 특화 인터넷전문은행에 도전장


김 대표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지난 7년간 KCD를 유니콘 반열에 올려놓은 기업가의 우직한 행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오는 2025년 김 대표와 KCD는 지금까지의 사업적 성과를 뛰어넘을 새로운 전기를 준비 중이다. 네 번째 인터넷전문은행 인가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9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11월 중인가 심사기준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내년 초 예비인가에 이어 3~4월경 본인가 신청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한다.

“2016년 KCD 창업 때부터 내심 은행 설립이 목표였습니다. 한국신용데이터라는 이름 자체에 소상공인의 중금리 금융 공급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죠. 소상공인을 우리 고객으로 모시고, 그들의 신용평가를 잘하면 언젠가 자체적으로 금융 공급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은행업이라는 게 손든다고 시켜주는 게 아니어서, 현재 무르익은 우리의 역량과 정부 인가라는 타이밍이 잘 들어맞은 셈이죠. 3년 전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기존 은행권의 소매금융과 기업금융에 비해 소상공인 전문 금융은 관련 상품도 신용평가도 초기 단계다. 분위기는 우호적이다. 정부와 금융당국도 소상공인 금융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는 첫 번째 정책 제안으로 소상공인 특화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내걸었다. 소상공인의 대출 채널을 확대하고 이자 부담을 경감해주자는 제안이 골자다. 이날 국민통합위는 금융위가 은행 인가를 심사할 경우 소상공인 대출 취급 목표와 비중을 주요 평가 항목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존 인터넷전문은행의 소매금융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법인 대상 거래는 특정 규모 이하를 제외하면 아예 금지돼 있죠. 새로운 인터넷은행의 심사 기준이 소상공인 특화 금융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요. 소상공인 데이터를 가장 많이 확보한 KCD가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게 자명합니다.”

현재 김 대표는 KCD를 주축으로 우리은행, 우리카드 등과 함께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을 구성한 상태다. 김 대표는 제4인터넷은행 인가 전략의 핵심은 당연히 소상공인 신용평가의 정교함과 정확성이라고 밝혔다.

“은행업 인가에 가장 주요한 요소는 고객 확보와 자본조달 능력입니다. 동네 가게의 80%가 KCD의 고객이니, 소상공인 특화 은행이 갖춰야 할 고객 접점은 누구보다 완벽하다고 볼 수 있어요. 자본조달 능력은 지분율 34%의 대주주(KCD) 외에 어떤 주주 구성원이 참여하느냐가 핵심이에요. 안정적인 증자와 투자 능력을 갖춘 파트너라야 하죠. 우리은행은 그 점에서 최상의 파트너입니다.”

창업 이후 KCD의 누적투자액은 3100억원에 달한다. 김 대표는 KCD 자체로 1000억원 수준의 실탄을 확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조만간 깜짝 놀랄 만한 초대형 금융기관이 컨소시엄에 새롭게 참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인터뷰 막바지에 김 대표는 “저는 아직 배워나가는 사람”아라며 몸을 낮췄다. 1987년생이지만 어느덧 창업 14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 기업가의 얼굴에선 ‘서두르지 않되 쉬지도 않는’ 우보만리의 차분함이 배어나왔다.

“캐시노트 출시 후 2년이 지날 때까지도 호들갑 떨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고객사 100만 개를 넘어설 때도 풀타임 직원이 12명에 불과했죠. 지금은 본사 200명, 계열사를 더하면 500명이 KCD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회사의 비전과 방향을 명확히 전파하고 공유하는 게 CEO의 역할임을 절감하고 있어요. 적시에 내리는 의사결정도 CEO의 몫이죠. 우리는 신소재 로켓을 만들지도, AI의 파운데이션 모델링을 하는 회사도 아니에요. KCD의 고객이 가장 좋은 선택을 하게 하는 것, 이를 방해하는 허들을 제거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11호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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