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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 킵 건축 대표-기억을 담은 건축 

 

정소나 기자
건축은 꿈을 짓는 일인 동시에 현실을 담는 일이다. 사람의 기억, 땅의 기억, 사물의 기억을 차곡차곡 채워 만든 건축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백희성 대표는 오늘도 기억을 공간으로 바꿔나가며 많은 사람을 추억과 사랑으로 완성된 기억 속 공간으로 초대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기억을 건축하는 백희성 대표.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독특한 공간 경험을 선사한다.
‘아시아 최초의 폴 메이몽 상 수상자’ 건축가 백희성 대표에게 최근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10년간 이어진 자료조사와 집필 끝에 출간한 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가 큰 인기를 얻으며 작가로서 또 한 번 이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성공 가도만 달려왔을 듯한 그의 인생도 국내외 공모전에서 50번 넘게 낙방하는 등 처음에는 그가 설계한 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끈기 있게 매달린 결과 폴 메이몽 상을 비롯해 한국건축문화대상 계획부문 금상, TIFF어워드디자인 특별상 등 10여 개 상을 수상한 실력 있는 건축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건축사이자 프랑스 건축사인 백 대표는 한국에서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을 공부한 후 프랑스 발드센 건축학교에서 수학했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장 누벨 건축사사무소(Atelier Jean Nouvel)를 비롯한 프랑스의 건축사사무소에서 다양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이후 한국과 파리를 넘나들며 킵(KEAB) 건축 스튜디오 건축가이자 대표로 일하고 있다. 경기대학교 초빙교수이자 충청남도 공공건축가, 수원시 도시PD로도 활동 중이다.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리움미술관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아픈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놀이터를 실내에 넣어 놀이터 집으로 만든 환아들의 무료 숙소 ‘도담터’, 평생 식당을 운영해온 아버지의 기억을 담은 조형물들을 통해 아버지의 인생 여정을 풀어낸 식당 건축물 ‘서예정식’ 등이 백 건축가의 대표작이다.

간단히 소개를 부탁한다.

서울과 파리에 기반을 둔 건축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기억을 주제로 공간을 구축하고 건축설계를 하는 팀이다. 도시 속에 잠든 기억을 드러내어 형태를 만들고, 사람의 기억을 주제로 공간 연출을 하기도 한다. 또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공간을 만들어 미래의 기억으로 연출하기도 하는 등 주로 기억을 소재 삼아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하고 있다.

기억을 건축 재료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건축가 혼자서는 완벽한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건축가가 건물의 80% 정도를 만들면 나머지 20%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나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억, 땅의 기억, 사물의 기억을 차곡차곡 채워 완성한다. 결국에는 그 기억들이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들을 공간으로 끌어모으는 원동력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지그재그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증평의 매혹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심우상가의 수직산책로.
최근 출간된 『빛이 이끄는 곳으로』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원래 작가의 꿈도 있었나.

파리에 있는 건축가 사무소 장 누벨에서 일하며 1조원이 넘는 프로젝트를 두 번이나 진행하는 등 주요 프로젝트를 도맡으며 기고만장하던 시절이 있었다.(웃음) 그만큼 몸을 혹사해가며 일한 탓에 몸이 아파 한 달간 병가를 냈다. 센강 변에 앉아 여유롭게 쉬고 있는데, 시테섬 가운데 있는 고택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 순간 그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한 노인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관심도 없었는데, ‘저 집과 저 노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왕 쉬는 김에 ‘오래된 집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200장 정도 편지를 써서 시테섬에 있는 모든 고택에 뿌렸다. 많은 거절과 오해를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출입을 허락하신 한 할머니에게서 집에 얽힌 오랜 추억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렇게 수많은 저택의 주인들을 만나 그들이 건물에 담은 추억과 역사를 듣고 기록한 것들을 각색해 책으로 출판하게 됐다.

2002년부터 건축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기록하는 ‘자기 관찰 노트’를 써왔고, 이를 바탕으로『환상적 생각』이라는 에세이를 집필하기도 했지만, 소설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자료조사에만 8년, 쓰는 데 2년까지 총 10년이 걸렸다. 2015년에『보이지 않는 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그 당시에도 제법 인기를 얻으며 화제를 모았다. 파리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이기에 그들도 함께 볼 수 있게 번역해 해외 출간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해외 출간 역시 녹록지 않았다.

거의 포기했을 무렵, 내 소설을 눈여겨보셨던 출판사 대표님의 제안으로 책이 새롭게 재출간되었고, 해외 출간을 위한 계약도 막바지까지 왔다.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들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 뒤에 이름을 올렸으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에 이 책이 파리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운명인 것 같아 모든 상황이 희한하게 연결된 느낌이다.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 최고 건축상 ‘폴 메이몽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는데.

2010년이니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폴 메이몽 상은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가 아니면 수상자를 뽑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고, 주로 프랑스인이 선정되곤 한다. 몇 년째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던 터라 내부에서 올해는 꼭 수상자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고, 작품성만 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름이나 출신, 이력 등을 모두 가린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그저 작품만 보고 수상작을 선정했고, 이벤트처럼 내가 얻어 걸렸다.(웃음)

이례적으로 아시아인의 수상에 당황한 협회장은 나를 찾아와 정중하게 수상작에 대한 설명으로 청중들이 수상 이유를 납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시상식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을 마쳤고, 기립 박수를 받으며 수상했다. 머나먼 프랑스까지 건축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간 이방인이었지만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흥미로운 작품들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큰 상까지 수상했으니 잊지 못할 경험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축 작품은 뭔가.

군산에 있는 ‘공감선유’라는 프로젝트를 꼽고 싶다. 건물 3동을 합쳐 661㎡(200평)가 안 되는 규모의 갤러리카페로, 대중교통이 없는데도 연간 10만~12만 명이 방문하는 핫 플레이스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클라이언트는 평생 물로 사람을 살린 소방관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번 취업에 실패하며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소방공무원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덜컥 합격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있지만, 운명이 가리키는 일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고, 소방관으로 열심히 일하며 은퇴할 즈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내 사명이고 운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당신 생각에는 ‘은퇴하고 나서도 물로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법이 커피밖에 없더라’며 이 공간을 카페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 얘기가 내 마음을 울렸다.

이 공간은 시작점에서는 반대편 입구가 보이지 않는데 끝까지 가야지만 또 다음 입구가 보이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방향과 가야 하는 길이 다 엇갈려 있다. 2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언덕을 15~30분 정도로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자꾸 돌아서 가다 보면 꽃도 만나고 물길도 따라오도록 설계했다. 공간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곳이 자기가 바라는 인생과 운명의 길이 엇갈린 어느 소방관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소방관의 공간’으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1년에 두세 번 정도 그곳을 방문한다. 갈 때마다 그분이 어떻게 알았는지 번개같이 나타나 그간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과 나눴던 따뜻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신다. 건축가로서 큰 감동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새롭게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나. 또 현재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경상남도 진주라는 지역에서 온천이 발굴되었다. 아직까지 특별한 온천 문화가 없는 한국에 물과 관련된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한 온천을 설계 중이다. 클라이언트의 집안 내력을 스토리 삼아 기억을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인간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자 신이 남겨준 성경의 9가지 구절을 재료 삼아 모든 사람이 함께 힐링할 수 있는 숲속 문화 공간을 만드는 작업도 병행 중이다.

기억을 재료 삼아 작업을 하다 보니 때론 ‘너무 과거에만 매달려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지만, 미래에 담길 기억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공간에 새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며 해답을 찾고 있다.

건축과 글쓰기, 공통점이 있다면.

건물을 디자인하고 건축 재료로 건물을 구축하듯이, 글자로 상황을 연출하는 작업이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글을 쓸 때 문장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건축설계에서 그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는 과정과 똑같은 고도의 설계 과정이다.

건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또 좋은 건축을 위한 대표님만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내게 건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억을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이라고 대답한다. 수많은 경험 중 그냥 흘러가는 것이 있는 반면 어떤 경험들은 머릿속에 확 박힌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선택된 경험이 한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는데, 나는 그 선택된 경험이 기억이라고 믿는다.

기억을 주제로 건축을 한다면 지구상의 인구만큼 다양한 것을 만들어볼 수 있고,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개개인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건축물에도 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AI가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주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했고, 나는 그것이 사람의 기억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기억과 연결된 건축을 추구하고 있다.

내게 건축을 맡기는 분 중에는 한 번만 의뢰하는 분은 거의 없다. 대부분 2~3번, 많게는 12번까지 의뢰하는 분도 있다. 그동안의 프로젝트들을 보고 ‘너무 흥미롭다’며 응원해주시고, MOU를 제안하기도 한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남과 다른 ‘기억 건축’이 우리만이 가진 무기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를 들려달라.

나는 사실 목표가 없다. 목표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낸 것도 내가 파리에서 받은 메시지를 담백하게, 오역되지 않게 다시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베스트셀러를 쓸 거라고 생각했으면 결코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 것 같다. 건축 역시 역작을 만들겠다고 시작했다면 설계조차 못했을 거고. 처음에는 인도에 가려고 했던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첫발을 떼고 난 후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도 특별한 목표를 갖기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기억을 건축으로 혹은 글로 바꾸는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드는 일에 집중하겠다.

- 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202411호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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