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스키의 전설인 타케츠루 마사다카와 뮤즈 리타가 사랑하고, 살아가고, 위스키를 만들었던 요이치 증류소를 찾아 삿포로로 떠난 21번째 위스키 여행.
▎바늘로 찔러보면 툭 터질 듯한 코발트빛 북해도의 하늘 아래 단아하게 서 있는 증류소 전경. |
|
4월의 삿포로오래전 한가한 봄날, 곧 소멸될 항공사 마일리지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문득 한 곳을 떠올렸다. 남들이 다 가고 싶어 하는 곳의 마일리지 항공권은 이미 오래전에 마감되었으니, 남들이 가지 않는 계절에,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바로 4월의 삿포로! 한여름이나 한겨울의 삿포로도 물론 훌륭하지만, 아직도 언뜻언뜻 잔설이 보이는 초봄의 삿포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서늘한 찬 공기가 콧속으로 봄내음을 함께 전하는 북국의 그곳에는 일본 위스키의 전설인 타케츠루 마사다카가 만든 요이치 증류소가 있으니,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빨리 가서 왜 그가 이곳을 완벽한 위스키를 만들 최적의 장소로 선택했는지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삿포로 도심 한가운데에는 ‘연트럴파크’로 불리는 경의선 숲길처럼 폭이 좁고 긴 모양의 오도리 공원이 남북을 가르며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겨울이면 이 오도리 공원은 눈 조각으로 유명한 눈축제의 중심이 되는데, 봄날의 이곳은 아직도 군데군데 지난겨울의 잔설이 눈에 띄는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보통이고 중간이 되는 것이니 계절의 과한 기대를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도리 공원을 따라 삿포로 시내를 걸었다. 걷다가 적당한 보통의 식당이 나오면 보통 사이즈로 적당한 가격의 음식을 시켰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히 먹었다. 남들처럼 맥주도 한잔 마시며 그렇게 적당히 삿포로에서 첫날을 보냈다. 물론 숙소도 적당한 비즈니스 호텔에서 보통의 룸을 잡았다. 내일의 특별한 하루를 기대하면서!
요이치로 가는 길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위스키로 꼽히는 피트 위스키 요이치. 뛰어난 품질과 독특한 풍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
|
이튿날, 특별한 하루를 시작하는 JR 하코다테 본선 열차는 계속해서 바다를 따라 달린다. 초봄이지만 요이치 증류소로 가는 길은 꽤 험난하니, 멋진 해안 철도를 상상한다면 오산이다. 4월의 을씨년스러운 눈보라가 그대로 바닷속으로 방울방울 녹아 떨어지는 길이다. 에키벤과 차가운 삿포로 맥주 한잔과 함께, 나는 처음 요이치로 향하던 때 타케츠루의 심정을 상상했고 그동안 시골 열차는 요이치역으로 조금씩 다가간다.꽤 오래전에 일본 위스키의 또 다른 전설인 야마자키 증류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증류소는 역에서 내려 제법 오래 시골길을 따라 걸어가야 했다. 걸어가는 동안 나는 선선한 초가을의 맑은 공기와 또 다른 거장인 토리이 신지로를 찾아가는 몰입의 과정을 즐겼다. 하지만 요이치역 바로 앞에 있는 요이치 증류소는 그런 몰입의 과정이 생략되었고, 정면에 인공미가 보이는 중세의 성문이 있어 첫인상은 살짝 생뚱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장난감 같은 그 성문을 지나니 그제서야 내가 상상하던 풍경이 펼쳐졌다. 바늘로 찔러보면 툭 터질 듯한 코발트빛 북해도의 하늘 아래 하얀색 자작나무가 이어진 길을 따라가니, 증류소와 숙성창고 이외에도 많은 건물이 단아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건물이 타케츠루와 리타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선을 사용해 명료한 붉은 첨탑과 아름답게 어울렸다. 그들이 사랑하고 살아가고 위스키를 만들었던 이 공간에서 내 마음의 시계도 그 순간으로 되돌려 조금씩 천천히 음미하듯 발걸음을 옮겼다.증류소 입구에는 몰트를 훈연하던 연료인 피트가 쌓여 있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스코틀랜드처럼 이곳에서 피트가 생산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효율성 때문에 피트 처리된 몰트를 사용하니 이조차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타케츠루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피트 사용을 고집했겠지만 지금은 아사히 그룹의 한 회사가 되어버린 닛카의 한계이다.하지만 아직도 고집스레 유지하는 전통은 남아 있다. 증류기 건물로 다가가니 저 멀리 굴뚝에서 흰 연기가 보인다. 이곳에서는 이제 스코틀랜드에서도 볼 수 없는 석탄직화 방식으로 증류기를 가열하여 위스키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증류소는 전기나 증기를 사용하여 증류기 간접가열 방식을 택하고 직접 가열하더라도 다른 연료를 사용하는데, 이곳은 아직도 19세기 증기선처럼 석탄을 직접 태우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석탄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새파란 제복과 헬멧을 쓴 직원이 나란히 서 있는 증류기 아래에 열어놓은 화구에 삽으로 석탄을 퍼서 넣고 있다. 사람의 손으로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레 만드는 위스키를 꿈꾸었던 타케츠루의 마지막 유산이다. 뜨거운 증류기 아래의 그 열기는 요이치의 차가운 북풍을 이겨내던 타케츠루의 장인정신일 것이다.
맛상과 리타
▎겨울이면 눈 조각으로 유명한 눈축제의 중심이 되는 삿포로 오도리 공원. 봄날에는 군데군데 지난겨울의 잔설이 보이는 보통의 공원이 된다. |
|
이제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지만, 2014년 NHK 아침 드라마인 [맛상(Massan)]에 타케츠루와 연인 리타의 러브 스토리가 나왔다. 참고로 NHK 아침 드라마는 1961년부터 ‘연속 TV 소설’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매년 전후기로 나누어 두 가지 드라마를 방영하는데, 매일 15분 정도로 짧고 임팩트 있게 내용을 전달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이다. 유명한 드라마인 [오싱]도 연속 TV 소설에서 방영되어 최고 시청률 62.9%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작사인 NHK가 공영성을 담보하는 차원에서 작품별로 지자체 한 군데를 배경으로 정해서 그 지역을 소개하는 기회를 준다. 국토를 동서로 나누는 관례에 따라 전반기는 도쿄에서 제작하여 동일본 지역의 지자체가 등장하고, 후반기에는 오사카에서 제작하여 서일본 지역의 지자체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공영방송도 [6시 내고향]류의 방송만이 아니라, 이렇게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는 드라마를 장기 계획으로 잡아서 하나씩 만들어보면 어떨까? 방송국의 공영성은 거창한 슬로건보다 이렇게 착실하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는 데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이 드라마는 일본 위스키계의 ‘문익점’인 타케츠루의 일대기와 그의 영원한 뮤즈였던 리타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두 사람의 결혼은 양쪽 집안 모두에서 반대했고 특히 보수적인 일본이기에 반대가 더 심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로 해피 엔딩이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100년도 더 전의 일이 아닌가? 국제결혼을 한 나는 그가 그 당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증류소 입구에서 방문객을 반겨주는 닛카 위스키의 오크통. |
|
그는 이곳 요이치에 가장 영국적인 환경을 만들어 리타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본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리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이른 죽음은 타케츠루에게도 큰 충격이었지만, 제대로 된 위스키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리타가 사망한 이듬해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리타처럼 길고 아름다운 목선이 특징인 위스키, 슈퍼닛카를 만들었다. 닛카의 모든 위스키 중에서 가장 향기롭고 우아하다고 느끼는 건 느낌 때문일까? 홈페이지 한쪽에 나오는 슈퍼닛카 소개의 마지막 구절에 “자신의 가슴속에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 감정이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라고 적은 것은 리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일 것이다.
요이치를 떠나며
▎석탄을 직접 태우는 석탄직화 방식으로 증류기를 가열하는 증류소 내부의 모습. |
|
증류소를 방문했지만, 드라마 방영 이후 일본 위스키를 찾는 수요가 너무 높아져서 이곳 증류소에서도 요이치는 구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여기 올 수 있음에 감사하며 몇 가지 귀한 위스키를 시음하는 것으로 내 특별한 하루를 만족스럽게 마무리했다. 이제 요이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고 폭증하는 위스키 수요에 대응하느라 출하와 중단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숙성 연수를 표기한 위스키의 출시를 중단해버렸다. 충분히 숙성된 원액을 만들 리드타임이 도저히 확보되지 않아, 저숙성 원액을 섞어 숙성 연수를 표기하지 못하는 위스키를 출시했는데 그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나는 특히 이 요이치를 좋아해서 기회가 되면 구입해서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회식을 할 때면 늘 가지고 나가곤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위스키들이 아까운 소시민의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멋진 위스키로 보낸 것이 훨씬 더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 위스키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타케츠루는 청혼하면서 “나는 이곳 스코틀랜드에 남아서 당신과 함께 살겠다”고 했는데, 리타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위스키를 만들고자 하는 당신의 꿈을 위해 내가 일본으로 가겠다”고 해서, 일본 위스키의 문익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한 여성의 사랑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위스키 시장의 판도를 바꾼 셈이다. 게다가 2014년 드라마 [맛상]으로 일본 위스키의 수요까지 폭발적으로 늘려준 리타는 일본 위스키의 뮤즈라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자신만의 평생 꿈이 있겠지만, 누구나 그 꿈을 응원해주는 뮤즈를 가질 수는 없으니 타케츠루는 엄청난 행운아라고 할 수 있겠다.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이 먼저일까? 뮤즈를 찾아 나서는 것이 먼저일까?
▎요이치 증류소에는 인공미가 가미된 장난감 같은 중세의 성벽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
|
요이치로 가는 해안 철도의 그 폭풍우 속에서 언뜻 타케츠루의 뮤즈가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뮤즈는 서울의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