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수 현대문학(예술)
|
고통의 미학잘 안 읽히는 한강의 문장들은 사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몽환적이고 상징적이며 난해한 악몽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악몽에서 깬 현실은 더 고통스럽다. 나 경하와 친구 인선이의 딱한 처지와 고통은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다. 그 막다른 상황을 읽어가면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인선은 목공 일을 하다가 전기톱에 잘려 나간 손가락을 봉합 수술한 뒤에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끔찍한 고통이 이어지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환자처럼, 독자도 고통 때문에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없다.현대음악 중에는 끔찍한 불협화음과 소음을 들려줌으로써 듣는 이들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곡이 많다. 고통은 예술에서 왜 미학이 되었을까. 그렇게 된 데는 매우 다양한 이유와 의도가 있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느끼게 함으로써 ‘지금 당신이 접하는 작품은 거기에 빠져들고 동화될 꿈결 같은 예술이 아니라 지옥 같은 현실과 맞먹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고통을 주려는 현대 예술의 창작자들은 현대연극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발전시킨 연출 기법인 소외효과(疏外效果) 혹은 소격(疏隔)효과(alienation effect/Verfremdungseffect)를 기대한다. 이 기법은 예술 작품의 감상자에게 “이건 예술이야, 정신 차려!”라는 메시지를 준다. 기존의 고전적/낭만적 예술은 그것을 접하는 이를 동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술이 감동이라면 감상자는 그 예술 작품에 긍정적이고 찬성하는 상태이다. 예술이 불편하다면? 고통을 준다면? 저 예술가는 대체 왜 이런 끔찍한 걸 작품이라고 무대 위에 올렸지? 적어도 감상자는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한강은 고통스러운 묘사로 독자가 고통을 느끼게 했고,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리는 역사적 사건을 독자가 작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읽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이 작품을 작가는 매우 고통스럽게 썼다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지극한 사랑의 소설”이다.
환상적 사실주의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의 사무총장 마츠 말름은 한강의 작품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것들로 평가했다. 한강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년이 온다』에서, 제주 4.3 사건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다루었다.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 두 작품은 사실주의(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 상술했듯이 근대적 방식은 아니었다. 한강의 소설들을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환상적 사실주의 범주에 연관하는 평가가 있다. 노벨문학상위원회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한강의 작품들에서 확인될 수 있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꼽았다. 이런 연결은 환상적이다. 환상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은 더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나와 그녀, 대화와 서술, 현실과 몽환이 혼재한다. 인용 부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대화체인지 독백인지 속마음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대화가 독백이고 속마음인 걸까.문학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은 그냥(!) 리얼리즘과 대조된다. 이 후자의 사례들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음악, 특히 현대음악에서도 두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음악에서 리얼리즘이 필요한 이유도 대체로 저항과 기록, 잊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구소련의 대표적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11번 G단조 작품 103 ‘1905년’>에서 1905년에 있었던 ‘피의 일요일 사건’을 표현했다. 이 사건은 1905년 1월에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했던 유혈 사태를 말한다. 체불임금을 받게 해달라는 평화적 탄원 집회를 황제가 무력으로 탄압함으로써 노동자 500~600명이 죽고 부상자 수천 명이 발생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관현악을 통해서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시위, 총격, 사상자들의 급박한 도주와 학살 등을 적나라하게, 즉 리얼하게 묘사했다.이탈리아의 현대 작곡가 루이지 노노는 다소 다른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중단된 노래(Il canto Sospeso)>에서 2차대전 중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추도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처형 직전에 쓴 편지의 내용을 가사로 삼은 이 곡에서 노노는 가사를 음절에 따라 쪼개는 실험을 선보였다. 음절이 쪼개진 가사는 의미를 수월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서양 음악사에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가사는 의미의 수월한 전달을 바라는 이들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서양 음악사는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가사와 함께하는 화려한 선율들의 음악과 의미 전달이 잘되는 가사와 함께하는 수수한 선율들의 음악이 교체하고 순환하는 역사였다. 노노는 의미 전달이 잘되어야 하는 음악에서 실험한 것이다. 한강의 작품들은 필자에게 노노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이상의 분류상의 개념들은 현실을 재단하는 것일 수 있다. 한강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가 위 개념들과 정확히 매칭되지 않을 수 있다. 현실은, 특히 예술가의 현실은 개념보다 복잡하다. 우리가 개념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현실 이해를 돕는 필요악임을 고려해야 한다.
※ 김진호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