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한강의 세계와 음악의 세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몇 가지 분류상의 개념들을 제시해보자. 이 개념들은 음악에서도 작동한다. 이 개념들과 함께, 한강 문학의 이해와 음악 일반, 더 나아가 예술 전반의 이해는 닿아 있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국인 작가 한강
한강의 문학들은 순수 현대문학에 속하는 것 같다. 순수 현대문학은 무얼까. 상업적 문학과 근대문학이 아니라면 이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잘 팔리는 걸 목표로 쓴 상업 소설들이 있다. 재미있고 잘 읽히며 모종의 전형적 문법과 스타일이 감지되는 소설들이다.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뉴스 덕분에 한강의 책을 찾는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사게 될 사람들이 한강의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소설들은 재미있는 상업 소설은 아니다. 『해리 포터』시리즈처럼 잘 팔리는 책을 쓴, 혹은 잘 팔리는 책을 쓰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책을 쓴 상업 소설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될 이유는 없다(그런 소설들에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벨문학상은 예술적 의지 탓에 시장에서 실패한 소설을 쓴 사람을 격려하고 보상하는 상인 것 같다(시장 실패 상황이 예술성의 보증은 아니다).

순수 현대문학(예술)


▎인공지능 챗GPT에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관련해 떠올려지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딱히 한국적이지는 않다. 챗GPT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관해 어쨌든 잘 알고 있었다.
예술적 의지 탓에 시장에서 실패한 소설을 순수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순수문학은 다시 근대적인 것과 현대적인(혹은 탈근대적인) 것으로 나뉜다. 한강의 문학은 탈근대적일 수 있는 한 방식을 구현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근대적 문학으로 위대한 성취를 보였으나, 낡아 보임으로써(!) 노벨상을 받지 못한 황석영과 한강을 비교하면서 한강의 새로움을 평가한다. 대작가인 황석영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분명히 낡았다. 그는 정통 리얼리즘 작가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근대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라는 뜻이다. … 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김명인, “왜 한강… 낡지 않아, 대답 없는 질문으로 소설 끌고 가”, 한겨레신문, 2024. 10. 14.).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 안데르스 올손도 한강의 “실험적 문체”를 지적했다. 노벨문학상이 앞으로도 영영 정통 리얼리즘 근대문학의 작가들에게 보상해주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한강의 특이한, 새로운 글쓰기가 올해에 먹힌 것이다.

다른 예술 영역에도 순수 현대 예술들이 있다.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은 사람들의 듣는 방식, 작곡가들의 창작 방식 등을 바꾸는 새로운 실험적 시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20세기 이후에 작곡된 많은 현대음악은 매우 놀라운 상상력과 실험성을 보여왔다. 대중가요에 익숙한 평범한 음악 애호가들은 그런 현대음악을 듣고 괴로워하고 싫어한다. 대중음악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자명성의 미학’을 계승한다. 현대음악은 이 작곡가들의 실험성을 계승한다. ‘자명성의 미학’은 처음 접하는 순간 바로 이해되는 (혹은 이해된다고 생각되는) 예술을 옹호하는 미학 이론이다. 자명성을 강조하는 관점에 따르면 예술적 체험은 그 체험을 겪는 순간에 오직 정서를 통해 즉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술적 체험 이전 혹은 이후에 동원되는 사유 과정을 거쳐야 이해되는 예술은 자명하지 않고, 번거로우며, 종종 거부감을 준다. 필자가 보기에 한강의 작품들은 자명하지 않다.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작품들을 쓴 한강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은 소설을 읽을 때도 종종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고통의 미학

잘 안 읽히는 한강의 문장들은 사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몽환적이고 상징적이며 난해한 악몽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악몽에서 깬 현실은 더 고통스럽다. 나 경하와 친구 인선이의 딱한 처지와 고통은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다. 그 막다른 상황을 읽어가면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인선은 목공 일을 하다가 전기톱에 잘려 나간 손가락을 봉합 수술한 뒤에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끔찍한 고통이 이어지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환자처럼, 독자도 고통 때문에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없다.

현대음악 중에는 끔찍한 불협화음과 소음을 들려줌으로써 듣는 이들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곡이 많다. 고통은 예술에서 왜 미학이 되었을까. 그렇게 된 데는 매우 다양한 이유와 의도가 있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느끼게 함으로써 ‘지금 당신이 접하는 작품은 거기에 빠져들고 동화될 꿈결 같은 예술이 아니라 지옥 같은 현실과 맞먹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고통을 주려는 현대 예술의 창작자들은 현대연극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발전시킨 연출 기법인 소외효과(疏外效果) 혹은 소격(疏隔)효과(alienation effect/Verfremdungseffect)를 기대한다. 이 기법은 예술 작품의 감상자에게 “이건 예술이야, 정신 차려!”라는 메시지를 준다. 기존의 고전적/낭만적 예술은 그것을 접하는 이를 동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술이 감동이라면 감상자는 그 예술 작품에 긍정적이고 찬성하는 상태이다. 예술이 불편하다면? 고통을 준다면? 저 예술가는 대체 왜 이런 끔찍한 걸 작품이라고 무대 위에 올렸지? 적어도 감상자는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한강은 고통스러운 묘사로 독자가 고통을 느끼게 했고,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리는 역사적 사건을 독자가 작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읽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이 작품을 작가는 매우 고통스럽게 썼다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지극한 사랑의 소설”이다.

환상적 사실주의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의 사무총장 마츠 말름은 한강의 작품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것들로 평가했다. 한강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년이 온다』에서, 제주 4.3 사건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다루었다.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 두 작품은 사실주의(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 상술했듯이 근대적 방식은 아니었다. 한강의 소설들을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환상적 사실주의 범주에 연관하는 평가가 있다. 노벨문학상위원회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한강의 작품들에서 확인될 수 있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꼽았다. 이런 연결은 환상적이다. 환상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은 더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나와 그녀, 대화와 서술, 현실과 몽환이 혼재한다. 인용 부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대화체인지 독백인지 속마음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대화가 독백이고 속마음인 걸까.

문학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은 그냥(!) 리얼리즘과 대조된다. 이 후자의 사례들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음악, 특히 현대음악에서도 두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음악에서 리얼리즘이 필요한 이유도 대체로 저항과 기록, 잊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구소련의 대표적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11번 G단조 작품 103 ‘1905년’>에서 1905년에 있었던 ‘피의 일요일 사건’을 표현했다. 이 사건은 1905년 1월에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했던 유혈 사태를 말한다. 체불임금을 받게 해달라는 평화적 탄원 집회를 황제가 무력으로 탄압함으로써 노동자 500~600명이 죽고 부상자 수천 명이 발생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관현악을 통해서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시위, 총격, 사상자들의 급박한 도주와 학살 등을 적나라하게, 즉 리얼하게 묘사했다.

이탈리아의 현대 작곡가 루이지 노노는 다소 다른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중단된 노래(Il canto Sospeso)>에서 2차대전 중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추도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처형 직전에 쓴 편지의 내용을 가사로 삼은 이 곡에서 노노는 가사를 음절에 따라 쪼개는 실험을 선보였다. 음절이 쪼개진 가사는 의미를 수월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서양 음악사에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가사는 의미의 수월한 전달을 바라는 이들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서양 음악사는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가사와 함께하는 화려한 선율들의 음악과 의미 전달이 잘되는 가사와 함께하는 수수한 선율들의 음악이 교체하고 순환하는 역사였다. 노노는 의미 전달이 잘되어야 하는 음악에서 실험한 것이다. 한강의 작품들은 필자에게 노노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상의 분류상의 개념들은 현실을 재단하는 것일 수 있다. 한강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가 위 개념들과 정확히 매칭되지 않을 수 있다. 현실은, 특히 예술가의 현실은 개념보다 복잡하다. 우리가 개념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현실 이해를 돕는 필요악임을 고려해야 한다.

※ 김진호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411호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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