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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2) 

벤처붐 신호탄 쏜 벤처기업협회 출범하다 

최영진 기자
벤처 30년 역사를 돌아보는 두 번째 주제는 벤처기업협회 설립이다. 협회 설립으로 벤처 기업인의 목소리가 정부의 지원과 정책을 이끌어냈고, 벤처 생태계 확산으로 이어졌다. 벤처기업협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봤다.

▎1997년 11월 12일 한국종합전시장 (코엑스)에서 ‘97 벤처기업 전국대회’가 열렸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기술개발에 성공한 벤처기업에 훈장과 포장을 수여했다.
1995년 12월 2일 서울 삼성동에 있는 섬유센터 17층 중 회의실에서 벤처기업협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150여 개 벤처기업이 총회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벤처기업’이라는 단어가 대중화되는 계기였다. 벤처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벤처기업협회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이스트 출신 기업인 모임 협회 산파 역할

벤처기업협회의 전신은 1991년 6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카이스트 출신 기업인의 모임 ‘한국과학기술원 기업인 동우회’다. 일명 ‘과기회’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카이스트 출신 장흥순 터보테크 대표가 주도했다. 현재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장흥순 교수는 “당시 이범천 큐닉스 대표와 이민화 메디슨 대표를 만나서 카이스트 출신 후배 창업자에게 경영과 관련된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면서 “후배 창업가들이 선배 창업가의 경험을 공유하면 기업 경영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과기회는 카이스트 출신 기업인 13명이 모여 시작됐다. 이범천 큐닉스 대표, 이민화 메디슨 대표, 원종욱 원다레이저 대표, 정광춘 잉크테크 대표, 강경석 메모리앤테스팅 대표, 정철 휴먼컴퓨터 대표, 장흥순 터보테크 대표, 허진호 아이네트기술 대표 등이다. 이들은 한 달에 두 번씩 정기 모임을 갖고 정보를 교환하고 사업과 관련된 경험을 나눴다. 후배 창업가의 사무실을 찾아가 멘토링을 하기도 했다. 과기회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임윤철 기술과가치 대표가 과기회를 이끌며 100여 개 기업이 매달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다.

벤처기업협회 설립에 참여한 기업 중 3분의 1이 과기회 출신 기업인들이었다. 장흥순 교수는 “과기회가 처음에는 13명으로 시작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회원들이 늘어났다”면서 “자연스럽게 회원들이 협회 창립을 논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협회 탄생의 또 다른 계기는 1995년 9월 나온 ‘한국 벤처기업 최초로 ‘메디슨이 상장을 추진한다’는 소식이었다. 메디슨은 카이스트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학생 이민화 등 카이스트 출신 7명이 1985년 창업한 바이오 벤처기업이다. 후배 창업가들은 상장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상장이 가능했던 이유 등을 묻기 위해 이민화 대표를 찾아왔다.

정작 벤처기업이 코스피에 상장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벤처기업 성장을 위한 투자사나 인재 등이 태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게 벤처기업인의 결론이었다. 목소리를 합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한국 경제의 위기다. 벤처기업인의 눈에 한국 경제는 점점 활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첨단 기술을 무기로 하는 벤처가 새로운 희망이라는 공감대가 퍼졌다.

1995년 중반부터 벤처기업협회 창립 필요성이 대두됐고, 일은 빠르게 진척됐다.

‘벤처기업 육성방안’ 보고서로 벤처 생태계 근간 마련


▎1997년 서울대학교 창업동아리 ‘VENTURE’ 회원들의 모습.
벤처기업협회가 발간한 백서에 따르면 1995년 10월 중순 이민화 대표는 모임의 이름을 가칭 ‘벤처기업협의회’로 정하고 발기인대회를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벤처기업이 몰려 있던 테헤란로 인근 중식당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 임원진이 정해졌다. 조직 운영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그해 11월 10일 창립총회를 위한 준비 모임이 열렸다. 연간 4회 벤처포럼을 개최하고 전자게시판을 운영하고, 각종 정책 제안을 하자는 내용 등이 논의됐다.

주목해야 할 보고서가 이날 발표됐다. ‘벤처기업 육성방안’이라는 4쪽짜리 보고서다. 이민화 대표가 주도해서 만든 짧은 보고서였지만, 한국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 대부분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을 위한 정책과 제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21세기 한국 경제의 대안은 벤처기업’이라는 말로 벤처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도발적으로 제기했다. 성장단계별 벤처기업 육성방안도 담겨 있다.

창업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대기업이나 대학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사업화하는 스핀오프 극대화’ ‘대학교수 겸직제도 허용’ ‘이공계 대학원 창업강좌 개설’ 등이 제시됐다. 알다시피 이 모든 주장은 현실화됐다.

창업 후 벤처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중 하나가 자금 조달 문제 해결 방안이다. 중소기업은 부동산이나 설비 등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술 중심의 벤처기업은 담보 부족으로 자금을 빌리기가 어려웠다.

보고서에는 ‘코스닥 시장 활성화’ 제안도 담겨 있다. 벤처 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정책이었다.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할 수 있도록 미래 성장이 높으면 적자인 기업도 상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벤처캐피털이 해외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제안도 담겨 있다.

사무실도 없이 시작했던 벤처기업협회


▎1999년 서울 서초구 양재2동사무소 2층에 마련한 서초벤처지원센터. 벤처기업 관계자들이 정부 부처에서 파견 나온 실무 간부들과 상담하고 있는 모습이다.
벤처 1세대 기업인들은 “4쪽에 불과한 간단한 보고서였지만, 한국의 벤처 생태계의 과거와 현재를 있게 한 바이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정도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민화 명예회장은 “창업을 하고 벤처기업을 운영하면서 필요하다고 느낀 것을 정리한 보고서”라며 “한국 벤처 생태계의 근간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95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협회 설립 준비는 3~4개월 만에 결실을 맺었다. 1995년 12월 2일 벤처기업협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 회장은 이민화 메디슨 대표가 맡았다. 12월 18일 통상산업부 기술정책국에서 사단법인 등록을 받았다. 유례없이 빠르게 등록된 것이라고 한다.

벤처기업협회의 시작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초창기에는 사무실도 없었다. 당시 삼성동에 있던 기술혁신협회 사무실을 빌려서 사용했다. 임직원은 달랑 세 명뿐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당시 대외정책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유용호 실장이 협회 사무국에 합류했는데, 유 실장이 초창기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할 정도.

벤처기업협회의 규모와 인력은 작았지만,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벤처기업협회가 제안한 ‘벤처기업인증제도’ ‘코스닥 설립 제안’ ‘벤처기업특별법’ ‘스톡옵션제도’ 등은 스타트업 생태계 확산의 기초가 되고 있다.

특히 코스닥 설립은 놀랄 만큼 빠르게 실현된 대표적인 지원 정책이다. 벤처기업협회는 1996년 3월 벤처포럼에서 ‘벤처 활성화를 위한 코스닥 설립’을 공식 제안했다. 이로부터 4개월 후 코스닥이 설립됐다. 그만큼 정부도 벤처기업 활성화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줬다는 반증이다.

1996년 10월 벤처기업협회는 ‘벤처기업 비전 2005’를 발표했다. 협회를 설립하고 10년 후의 모습을 미리 예측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벤처기업 수가 1996년 1000개가 되고, 2000년 6400개, 나아가 협회 설립 10년 째인 2005년에는 4만3000개로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목표는 원대했지만 실현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이 비전을 발표했던 이 명예회장도 “협회를 발족하면서 주목을 끌기 위해서 목표치를 높게 잡았다”며 웃었다. 벤처 붐은 실제로 일어났다. 2001년 1만 개가 넘는 벤처기업이 설립됐다.

[박스기사]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협회 설립 후 ‘벤처’라는 단어 대중화”


1996년 1월 한국 벤처기업 최초로 코스피에 상장된 메디슨의 창업가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한국 벤처 역사의 산증인이다.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으로 한국 벤처 생태계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유라시안네트워크 이사장, 카이스트 겸임교수 등으로 일하면서 4차 산업혁명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나 벤처기업협회 설립과 1990년대 후반의 벤처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1995년 12월 벤처기업협회가 출범했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당시 벤처 업계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시장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벤처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다양한 지원정책이 필요했다. 벤처 업계를 활성화하려면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벤처 기업인의 목소리를 모을 협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협회 설립으로 벤처라는 단어가 대중화됐다는데.

1990년대 후반에도 미국에서는 벤처 대신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반면에 창투사는 벤처캐피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미국에서 사용된 스타트업은 자영업도 포함했다. 우리는 기술 중심의 모험적인 스타트업을 추구했기 때문에 벤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벤처라는 단어 자체가 ‘모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모험기업이나 창조기업 같은 단어도 후보였지만, 당시 이찬진 한글과 컴퓨터 대표가 ‘모험기업이라고 하면 투자자가 투자를 하겠느냐. 그냥 벤처로 하자’고 주장했다. 벤처기업협회 설립을 계기로 벤처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벤처기업협회가 제안해 만든 벤처 인증제도가 처음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는데.

처음에는 연구개발비를 5% 이상 투자하는 기업은 모두 벤처로 인증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기술보증기금 보증이 벤처의 주된 등록 창구가 됐다. 기술보증기금의 특성상 안정된 기업에 보증을 해준다. 벤처 인증이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벤처 인증제도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벤처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1997년 8월 10년 한시법으로 벤처특별법이 시행됐다. 2007년과 2017년에 연장됐다.

벤처특별법은 엔젤 투자자 세금 감면, 기술개발 지원, 연·기금 벤처 투자 허용 등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담고 있다. 벤처 빙하기를 감안할 때 2007년 연장한 것은 옳다고 본다. 당시 창업 붐이 꺼지면서 벤처 생태계가 붕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2017년 다시 연장된 것은 벤처 생태계 미비로 인한 결과인데 다시 연장된 게 아쉽다. 한시적인 특별법이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일몰하는 게 맞다.

벤처기업협회 설립 이후 한국에 벤처 붐이 일었다.

시대적인 상황이 잘 들어맞았다. 정부는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경제 활성화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던 시기다.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과 정책이 빠르게 진행된 이유다. IMF 여파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능력 있는 젊은이들도 창업에 눈을 돌렸다. 시대적인 상황이 벤처 생태계가 활성화되는 데 유리했다. 준비된 벤처기업 지원 제도와 인터넷 혁명, IMF 외환위기가 삼위일체를 이룬 결과였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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