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런던에서 매우 독특한 전시가 열렸다. 우리가 늘상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의 전시다. 전시를 오픈한 6월에 전시를 마감하는 11월 입장권까지 이미 매진되는, 그야말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전시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테이트 모던의 프리다 칼로 회화 전시가 아니기에 더욱 흥미를 끌었다.
▎Frida Kahlo, c. 1926. Museo Frida Kahlo. ©Diego Riviera and Frida Kahlo Archives, Banco de Mexico, Fiduciary of the Trust of the Diego Riviera and Frida Kahlo Muse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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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는 세계 최초의 국립 공공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이 버티고 있다. 런던에서 꼭 가보아야 하는 명소인 이곳은 연간 관람객이 4000만 명으로 영국 최고다. 이 방문객들은 단순한 여행 관람객이 아니라 내국인이나 그 지역 주민 관람객이라는 보고서도 있다. 이렇듯 런던 대영박물관은 사람들에게 그저 살면서 ‘평생 한 번’ 가보는 곳이 아니라 주말에 편안히 들를 정도로 문턱이 매우 낮은 곳이 되었다.그에 비하면 런던 박물관의 양대 산맥이라 할 만한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은 사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 애호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며, 귀한 디자인 컬렉션을 가진 명실상부한 ‘오늘날 최고의 디자인 박물관’이다. 기본적으로 세계 역사를 중심으로 쓰는 대영 박물관과 필적할 만한 세계적인 생활사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 완성도와 첨예함을 공유하겠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비전 아래 세계 최초로 열린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 이후 만들어진 곳이다. 그렇기에 의식주와 연결된 재료사가 매우 중요한 큐레이팅의 방향이 되고 있다. 이번 프리다 칼로의 전시도 그런 맥락에서 기획됐다. 과거 테이트 모던에서 페인터로서의 프리다 칼로 전시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매우 혁신적인 전시였다.이번 전시는 프리다 칼로의 많은 개인 소유물로 구성됐다. 그녀의 남편인 멕시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멕시코시티에 있는 그녀의 집인 카사 아줄(Casa Azul)에 보관했던 물건들이다. 그녀의 페인팅은 초상화 몇 개만 있을 뿐이고, 전시의 초점은 ‘그녀(HER)’ ‘자신(SELF)’이다. 옷, 속옷, 장신구, 화장품, 구두 등 200개 정도의 개인 물품이 반세기 만에 발견되었고, 그 자료들은 20세기 남미의 숨은 천재 여성 작가를 재조명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됐다.프리다 칼로를 현재 21세기 초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아방가르드한 퍼포먼스 작가다.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MAKING)’냈다. 마치 80년대에 활동한 신디 셔먼이나 영국의 그레이슨 페리처럼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다양한 자아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초기 회화 작품에서 엿보인다. 자신을 쌍둥이로 그리거나, 하나는 남성으로 하나는 여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즉 다양한 자아, 또는 이질적인 자아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했던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넘어 복수(複數)의 자아를 꿈꾸는 것은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과 관련 있다.
신체장애가 셀프 이미지 메이킹의 시발점
▎Self-portrait, Frida Kahlo, 1941 ©The Jacques and Natasha Gelman Collection of 20th Century Mexican Art and The Vergel Col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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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소아마비에 걸리고, 18세에 치명적인 버스 사고를 당한 후 침대에서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녀는 미술과 드레스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칼로는 침대 캐노피에 거울을 붙여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 시점에 유독 자화상 작업을 많이 한 이유는 이 집에서 나온 물건을 발견한 후에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즉, 이번 전시품들은 그녀의 약과 정형외과 관련 물품들, 몸과 척추를 지지했던 물품들, 종교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상징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그려진 그녀의 코르셋 등이었다. 바라보기가 민망할 만큼 아픈 ‘물건들’이다.기록사진에서 보았던, 거대한 디에고 옆 자그마하지만 아즈택 문화의 수호신과 같은 여신의 포스로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알았던 그녀의 모습 뒤에 가려진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했다고나 할까. 처음엔 한쪽 다리 의족이, 그 후에 30번 넘게 계속된 수술을 받고 발가락, 척추, 골반 등이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는데, 이때 사용한 다양한 형태로 고안된 지지대들이 전시됐다. 또 이번 전시의 한복판에서 아주 격렬하게 느껴지는 설치가 있었으니, 침대 프레임을 구조로 한 디스플레이다. 그것들이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의 부장품이 연상되는데, 그녀가 다시 태어나도 바로 필요한 물건들일 것 같아서다. 그 모든 것이 신체를 지탱해주는 장치들이었고, 그 다양한 기구 없이는 온전히 설 수 없는 여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기고 여행과 혁명적 삶을 이루어냈을까 하는 애잔함을 넘어 경외감까지 들게 하는 오브제라 할 수 있다. 개인 물품이나 자신의 코르셋에 쓰인 글과 그림들에선 두 자아를 늘 공유하며 인생과 신에게 끝없이 질문하는 작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즉, 신체장애는 그녀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시발점이 됐다. 그녀는 아주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의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머리채도 그녀만의 방법으로 땋아 올리고, 언제나 큰 숄을 이용해 드레이프를 만들었다. 아무도 그 아름다운 드레스 밑에 또 다른 현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도록, 완벽에 가까운 패션 아웃룩을 만들었다. 전시는 이 드레스들을 마치 알렉산더 맥퀸의 드레스 전시와도 같은 기법으로 이용했다. ‘패션디자이너 프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출로 그녀의 드레스를 전면적으로 소개하는 패션관을 만든 것이다. 칼로의 컬렉션으로 전시된 옷으로는 리보조, 멕시코의 전통 숄, 후필, 수를 놓은 사각 모양의 상의, 긴 주름치마를 비롯해 pre-Columbian 시대의 옥 장식부터 현대식 은식기까지 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남멕시코 테우안테펙 지협(Isthmus of Tehuantepec)의 모계 중심 사회 여인들이 썼던 레이스로 장식된 헤드드레스다.이번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은 사진가로 활동한 아버지의 사진 작업들이다. 프리다가 늘 병상에서 누워 있으면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계속해서 기록해주는 사진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더욱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SELF MADE UP’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초기 기록사진들의 전시는 마치 프리다 칼로를 통한 멕시코 르네상스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는 1920~1930년대에 외국 예술가, 작가,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들이 모여든 자유주의적 행선지로 번창했다. 1920년대에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과 티나 모도티(Tina Modotti)가 이곳에 와서 찍어 남긴 전통의상, 건축, 대중예술 사진들도 함께 전시됐는데, 멕시코시티가 유럽 못지않게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 수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바람이 이 아름다운 곳을 휩쓸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왠지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1980년대에 비로소 예술적 가치 인정
▎Self-portrait on the Border between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rida Kahlo, 1932 ©Modern Art International Found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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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비극을 품은 작가 프리다 칼로는 운명적으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낸 혁명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고, 강력한 스탈린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어머니 아래서 성장했고, 러시아 혁명가에 심취해 평생 공산주의 옹호론자로 살았다.20세기 초 독립국가 멕시코는 여전히 디아스라는 절대적 대통령에 의해 새로운 부조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도시는 혁명의 물결에 젖어들었다. 그 정점에 창조적 열정으로 멕시코 문화운동을 진두 지휘하고 있던 남자가 디에고 리베라였다. 프리다는 민족화가와 같은 모습에 반해 20살이나 많은 그와 결혼했다. 시대를 불태운 뜨거운 연인이었지만 동시에 치정극의 맞상대였던 두 사람. 그들의 작품은 멕시코시티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리베라의 계속되는 자유분방한 여자관계 때문에 그녀는 평생 실망과 배신, 분노를 겪었다. 이러한 감정은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프리다 칼로는 사실 작가로서는 당시 리베라에 비해 덜 중요한 작가로 알려졌지만,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 당대의 마스터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로 데뷔했다. 그럼에도 칼로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정체성을 밝혔다.드레스도 매우 여성적인 스타일로 보이지만, 당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는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페미니스트들에게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하지만 멕시코의 국민 예술가로 미국과 러시아에까지 명성을 떨친 디에고에 비하면, 프리다는 오랫동안 ‘디에고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에 와서야 새로운 예술운동을 통해 그녀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알려지게 됐다. 소아마비로 고통받은 어린 시절, 18세에 재난에 가까운 버스사고를 당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았던 여성, 엄청난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한 그녀는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마이너리티의 대변자가 됐다. 1984년에서야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했다. 이번 전시품들은 지금은 박물관이 된 프리다의 ‘푸른 집(La Casa Azul)’에서 가져온 물건들이다. 그녀의 예술과 더불어 남편 디에고와 혁명가 트로츠키가 머물렀던 곳으로도 매우 중요한 명소다.
▎Prosthetic leg with leather boot. Appliqued silk with embroidered Chinese motifs. Photograph Javier Hinojosa. Museo Frida Kahlo. ©Diego Riviera and Frida Kahlo Archives, Banco de México, Fiduciary of the Trust of the Diego Riviera and Frida Kahlo Muse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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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Frida Kahlo, 1948 ©Priva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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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of Frida Kahlo: Making Her Self Up, 16 June~14 November 2018. Sponsored by Grosvenor Britain & Ireland. ©Victoria and Albert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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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of Frida Kahlo: Making Her Self Up, 16 June~14 November 2018. Sponsored by Grosvenor Britain & Ireland. ©Victoria and Albert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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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of Frida Kahlo: Making Her Self Up, 16 June~14 November 2018. Sponsored by Grosvenor Britain & Ireland. ©Victoria and Albert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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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윤은…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 박사/미술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 360도]를 기획했고,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