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agement

Home>포브스>Management

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4) 

대중은 리더보다 현실적이다 

현실은 차갑고 거칠다. 사람들은 쉽게 환상에 빠져들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대체로 어떤 조직이든 리더보다 구성원들이 더 현실적이다. 차가운 현실이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리더에겐 미래가 없다는 얘기다.

‘천서상서(天書祥瑞)’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 책을 내려 상서로운 조짐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면 그저 상서로운 일을 일어나게 하면 그만인 것을 구태여 책을 써서 인간에게 미리 보여주는 수고를 하는 하늘을 이해할 수 없지만, 옛날엔 하늘도 그만큼 여유로웠는지 ‘천서상서’를 자주 보였다. 어리석은 주군이 다스리는 나라에 특히 많았다.

중국 북송의 3대 황제 진종 때 그랬다. 사실 그는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4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현명함이 있었다. 진종의 초기 치세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세의 시기로 ‘함평의 치(咸平之治, 998~1004)라 불린다. 이 시기 송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호황을 누려 지극히 안정된 사회를 이뤘다. 토지 경작 면적도 크게 늘고 직물, 염색, 제지 등 수공업도 크게 발전했다. 당시 북송의 수도 개봉은 한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진종이 운이 없었을 따름이다. 북쪽 오랑캐 땅 요나라에 역사상 보기 드문 명군이 나타난 것이다. 야율융서, 즉 요 성종 말이다. 고려를 세 번이나 침략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요나라는 송 태조 조광윤이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북벌에 나서 요의 코털을 건드린 986년 이후 1003년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송나라를 침범해 괴롭혔다. 1004년에도 요 성종은 송나라 국경으로 쳐들어갔다. 송나라 군대가 전주(澶州, 오늘날 하남성 복양현)에서 요나라를 저지했으나,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진종은 마침내 그해 12월 요나라와 화약을 맺었다. 요나라가 송나라를 형의 나라로 인정하는 대신, 해마다 송나라가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진상하고 진종이 요나라의 서태후를 숙모로 모신다는 내용이었다. 그 유명한 ‘전연의 맹(澶淵之盟)’이다. 전주가 전연으로도 불렸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화(戰禍)의 불씨를 없애고 국가 에너지를 경제 발전에 쏟아부음으로써 송나라 경제와 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진종의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백성들 앞에서도 영 위신이 서지 않았다. 병부시랑 왕흠약이 진종의 불편한 심경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태산에 행차하시어 봉선 의식을 거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대내외적으로 송나라의 부유함을 과시해 외적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봉선(封禪)이란 제왕이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봉은 옥으로 만든 판에 기원문을 적어 천신(天神)에 비는 일이었고, 선은 흙으로 단을 쌓아 지신(地神)에 비는 제사였다. 최초로 봉선을 행한 이는 진시황이었는데, 당초 불로장생을 기원한 의식이었으나 한무제에 이르러 대규모 정치행사로 바뀌었다.

진종이 되물었다.

“봉선이란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고 세상에 비범한 일이 있어야 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왕흠약이 말했다.

“과거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조짐도 모두 사람들이 지어낸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군주가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숭배해 천하에 드러내면 진짜 하늘의 상서로운 조짐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계속되는 천서 코미디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천서상서’라는 코미디다. 1008년 정월 진종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고한다.

“지난해 11월 27일 짐이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며 붉은 도포를 입고 머리에 관을 쓴 신선이 나타났소. 놀란 짐에게 신선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소. ‘다음 달 초삼일 정전에 도장을 세우고 한 달 동안 성심껏 기도하면 정월에 하늘이 내리는 천서인 『대중상부(大中祥符)』 세 편을 내려줄 것이니라. 절대로 천기를 누설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 이에 짐은 신선의 말대로 심신을 정갈히 하고 진심으로 하늘에 기도했소. 그러던 차에 얼마 전 황성사(황궁의 출입을 관장하는 관리)가 보고하기를, ‘승천문 남쪽 용마루 위에 누런 비단 보따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두어 장 길이로 그 안에 파란 실로 감긴 책이 있고 은은하게 쓰인 글자들이 보인다는 것이었소. 그것이 바로 신선이 말한 천서가 아닌가 하오.”

황제의 말을 듣고 대신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진종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승천문으로 행차해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 뒤 용마루에서 천서를 내려오도록 명했다. 이어 천서를 열어보게 했다. 그 안에는 ‘진종이 제위를 계승했으니 마땅히 깨끗하고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천하에 복이 가득하고 국가의 안녕이 장구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진종은 천서를 금궤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고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아울러 연호를 천서 이름을 따서 대중상부로 고치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불편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고 자신감을 회복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사방에서 천서가 쇄도한 것이다. 아첨하는 무리들이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계속 천서를 만들어냈다. 4월에는 천서가 공덕각에 내려왔다. 두 달 뒤에는 한 목공이 숲속 샘터에서 진종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비단을 주웠다. 천서가 끊임없이 강림하자 대신들은 황제에게 다시 한번 봉선 의식을 거행할 것을 주청했다. 진종은 10월 봉선을 결정하고 개봉에서 태산까지 가는 길을 닦고 행궁을 세우는 데 많은 재물을 쏟아부었다.

이후에도 천서 코미디는 계속됐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도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느라 국고를 바닥냈다. 1019년 내시들이 국정을 자신들 멋대로 주무르고자 다시 천서를 조작했다. 건우산에 천서가 강림했다고 황제에게 알렸다. 진종은 기뻐하며 천서를 황궁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에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천서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유독 황제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태자의 스승인 노종도가 참다못해 상소를 올렸다.

“하늘은 악을 징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데 언어를 쓰지 않습니다. 하늘은 군주가 정치를 밝게 하면 홍복으로 응답하고 군주가 무도하게 다스리면 재앙과 천재지변으로 본을 보입니다. 하늘이 어찌 친서로서 의사를 표현하겠습니까?”

용도각(황궁의 책과 문집, 도화를 수집·보관·관리하는 기구) 대제 손석도 황제에게 쓴소리를 했다.

“간사하고 음험한 소인배들이 천서를 거짓으로 꾸며냈는데도 황상께서는 이를 믿어 천자로서의 존엄을 굽히고 천서를 경배하니,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저잣거리에 이르기까지 원망이 극에 달하고 남몰래 황상을 비웃고 있습니다. 통촉하소서.”

하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만사 제쳐두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일에 몰두했다. 그 같은 천서 코미디는 진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말년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인 진종은 1022년 죽은 뒤 그동안 그가 수집했던 수많은 천서와 함께 묻혔다.

진종의 천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그와 같은 리더가 오늘날에도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나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다. 크든 작든 보편적인 조직 관리에서 흔히 드러나는 문제다. 불편한 현실을 마주할 경우 많은 리더가 그것을 타개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흔히 불안한 현실에 두려움과 불만을 느끼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피한다.

내친 김에 다른 예를 보자. 이번엔 서양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달라진 현실에 직면한다. 신세계가 발견되면서 부(富)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옮겨간 것이다.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베네치아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파산한 귀족 가문이 줄을 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변화였기에 베네치아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때 베네치아에 ‘브라가디노’라 불리는 신비한 인물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그는 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였다. 몇 해 전 베네치아의 한 귀족이 폴란드에 갔다가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가 나타나 베네치아를 부흥시킬 것”이라는 현자의 예언을 들었기에 소문은 현실이 됐고, 사람들은 브라가디노에 열광했다.

베네치아 귀족들이 브라가디노를 찾아갔다. 브라가디노는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늘 사나운 개 두 마리가 지키고 있었기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브라가디노는 베네치아 귀족들 앞에서 쇳가루를 금가루로 바꾸는 시연을 성공해 보였다. 브라가디노한테서 부활의 기회를 본 귀족들은 그를 베네치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하고, 주데카섬에 있는 궁전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브라가디노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지만, 앞으로 그가 만들어줄 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네치아의 연금술 열풍

베네치아에 연금술 열풍이 불었고, 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하지만 정작 브라가디노는 금을 만들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연금술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사교 생활만 즐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지친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찾아갔다. 브라가디노는 자신이 이미 금을 만들 재료를 준비해뒀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만들면 원재료의 두 배가 되는 금을 얻을 수 있지만, 숙성을 시키면 훨씬 더 많은 금이 나온다고 말했다. 밀봉한 재료를 7년 정도 묵히면 서른 배의 금을 얻을 수 있노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성급한 사람들이 어떻게 7년을 기다리느냐고 아우성쳤다. 조금이라도 당장 증거를 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브라가디노가 화를 내며 말했다.

“어리석은 베네치아 사람들과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가 없군요. 내가 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닌 당신들의 인내심 부족 탓이오.”

그는 베네치아를 떠나 이웃 도시 파도바로 갔다. 이듬해인 1590년에는 바이에른 대공의 초청을 받아 뮌헨으로 옮겼다. 당시 뮌헨도 경제 사정이 어려워 사람들을 달래줄 환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브라가디노의 호화 생활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환상은 없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바이에른 사람들은 원래 연금술 따위를 믿지 않았다. 오로지 바이에른 대공만이 믿을 따름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속는 셈 치고 브라가디노를 지켜보던 바이에른 사람들은 분노했다. 1592년 그들은 심판을 요구했고, 시연할 때 만든 소량 말고는 더는 금을 만들어내지 못한 브라가디노는 교수대에 매달리고 말았다.

현실이 차갑고 거칠수록 환상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더욱더 쉽게 환상에 빠져든다. 리더들은 구성원들이 기댈 수 있는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곤경을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다.

대체로 어떠한 조직이든 리더보다 구성원들이 더 현실적이다. 차갑고 거친 현실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환상을 필요로 하지만 환상에 지나치게 몰입되지는 않는다. 구성원들은 리더가 제시한 환상에 어느 정도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즐긴다. 그런다고 손해 볼 게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내 싫증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거나 계속 악화된다면 환상 놀이를 걷어차버린다.

북송 백성들도, 베네치아 시민들도 천서나 연금술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당장 해악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두고 보며 즐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변화가 없거나, 지도자가 계속 그런 환상에 빠져 있으면 그를 비웃거나 그에게 분노한다.

리더는 틀림없이 조직을 이끌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환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구성원들이 환상을 즐기고 있을 때 (즐기는 척할 때) 지도자는 현실적 난관을 해결하는 데 매달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길지 않다. 구성원들이 환상에 싫증을 느낄 때까지 현실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리더에겐 미래가 없다. 또 다른 환상을 제시할 기회를 얻는 리더가 있다면 그는 대단히 운이 좋은 리더일 뿐이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1907호 (2019.06.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