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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현 HPK 대표 

지역 제조업 부활에 팔 걷은 CEO 

장진원 기자
HPK는 세계 최고 수준의 카메라 모듈 검사장비와 레이저 기반 디스플레이 가공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다. 조창현 대표는 최근 세아메카닉스 인수를 계기로 지역 제조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한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먹여 살리는 효자 아이템이다. 과거 디스플레이 산업의 주류였던 액정디스플레이(LCD)는 이미 중국 업체들이 장악한 지 오래다. 가벼운 무게, 뛰어난 화질, 높은 전력 효율을 자랑하는 OLED 디스플레이는 모바일과 대형 TV 패널을 가리지 않고 국내 기업이 최고의 기술력으로 상용화를 이뤄내고 있다.

OLED 디스플레이의 단점도 있다. 높은 가격대 말고도, 소재 자체의 민감도가 매우 커 수율을 담보하기 어렵다. 미세한 회로에 먼지라도 하나 앉으면 이내 불량품으로 파기되기 십상이다. 제조사 입장에선 불량을 일으키는 화소를 복원하는 일이 수익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 수밖에 없다.

HPK는 OLED 불량화소 복원장비 제작과 기술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기업이다. 기존 나노초 레이저, 마이크로초 레이저보다 훨씬 파장이 짧은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해 초정밀 회로를 복원해내는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기계개발원, 독일 기업 등과 협력해 개발한 OLED 불량화소 복원 기술은 2017년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하는 산업기술성과로 뽑혔고, 유럽 유레카총회에서도 혁신상(Eureka Innovation Award 2017)을 수상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HPK의 혁신을 이끄는 조창현 대표는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후 LG그룹 생산기술센터(현 LG 생산기술원) 등에서 10년간 근무한 후 지난 2008년 HPK를 창업했다. 재료관련 열처리, 용접, 각종 뿌리기술 등 소재와 장비 부문의 베테랑 엔지니어 출신이다.

세계 최고 OLED 복원 레이저 기술

OLED 불량화소 복원 기술을 갖추기까지 HPK의 혁신 과정을 묻는 질문에 조 대표는 “시작은 그저 작은 부품 에이전트였다”고 말했다.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친 것도 “나이 마흔을 앞두고 내 일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계획에서 출발했다”는 회고도 이어졌다.

“연구직으로 일하다가 직장 생활 말미에는 스태프 조직으로 빠졌는데, 그걸 계기로 업계를 보는 눈이 넓어졌어요. 연구사무직노조 부위원장도 맡았는데, CEO 면담이나 계열사별 기술 교류 등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시야가 더 넓어졌죠. 막연히 마흔이 되기 전 내 사업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무작정 사직서를 냈는데, 1년 반 만에 수리됐습니다.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실행력인 것 같아요. 사업 초기에는 돈과 사람을 잃는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그때 결단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HPK는 없었을 테죠.”

창업 후 HPK가 본격적인 기술 기반 기업으로 자리 잡는 데는 상당한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LG전자에 일용직 노동력을 공급하는 단순한 사업 구조에서 시작한 회사는 이후 부품 에이전트로, 다시 부품을 구입해 모듈화하는 단계로 발전해갔다. 비약적인 성장은 창업 8년 차인 2015년 우연치 않은 기회에 찾아왔다.

“당시 TV에 레이저를 투과하는 렌즈 모듈을 납품했는데, 기술적 설계와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작업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LG에서 카메라 검사장비를 납품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 검사장비였는데, 수익성이 없어 제안을 받아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당장의 수익보다는 레퍼런스를 쌓는다는 각오로 제작·납품을 결정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 결정이 회사의 미래를 결정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2015년 일본에서 일어난 큰 지진은 당시 LG이노텍과 소니가 나누어서 납품하던 해당 검사장비를 전량 LG전자로 돌리게 만들었다. 갑자기 수요가 폭증한 LG전자 입장에선 단시간 내 폭증된 장비를 납품받을 협력사를 찾아야 했고, 검사장비를 1년에 고작 10여 대 납품하고 있던 HPK에 천금 같은 기회로 다가왔다.

“갑자기 발주 물량이 300대로 늘더군요. 50억원 수준이던 한 해 매출이 300억원대로 급증했어요. 거기서 동력을 얻어 OLED 불량화소 복원 기술도 더 고도화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들어선 600억원대로 뛰어올랐죠.”

처음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 대표의 생각은 바뀌어갔다. 당장 돈이 되는 아이템에만 급급하기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가 기업 성장의 절대조건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제조업 사이클은 어느 때보다 빨라졌습니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거나 포기한 아이템이 미래를 먹여 살릴 효자가 될 수 있어요. 현재의 캐시카우도 중요하지만 항상 ‘넥스트 버전’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탄소섬유·음극재 소재 개발에 도전장


현재 HPK의 주력사업은 카메라 검사장비와 디스플레이 레이저 가공이다. 최첨단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최고 사양의 카메라 모듈을 제작할 수 있는 검사장비 기술과 제작 능력을 갖췄다. 검사장비의 경우 100%에 가깝게 불량을 잡아낸다.

디스플레이 부문에서도 토털 레이저 가공 기술을 보유한 장비 전문기업으로 탄탄히 자리 잡았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에 필요한 디스플레이는 커다란 원판을 적당한 크기로 가공해서 제작된다. 밀가루 반죽을 넓게 펴놓고 만두피를 찍어내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이때 원하는 크기와 용도의 디스플레이를 자르고 떼고 붙이는 데 필요한 기술이 레이저 가공이다. 이 밖에 불량화소를 레이저로 정밀하게 깎아내거나 미세하게 용접하는 기술도 HPK가 가진 강점이다. 현재 HPK의 레이저 가공장비는 전량 LG에 독점 공급되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주요 설계나 디자인을 아웃소싱에 의존하는 경쟁사와 달리 프로그램 설계부터 제작까지 독자적인 일관체제를 갖춘 것도 HPK의 장점이다. 대부분 제품을 기술을 선도하는 대기업에 납품한다는 것도 HPK가 업계에 쌓은 기술 신뢰도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업계 상식을 뒤집은 결단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낸 조 대표는 앞서 언급한 ‘넥스트 버전’을 위한 실행에도 과감한 투자와 도전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17년 전라북도 전주에 세운 연구소가 거점이다.

“탄소 소재와 2차전지용 음극재 소재 개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탄소섬유 기술을 개발하던 중 파생 기술로 음극 소재 개발에도 나섰죠. 지난 9월에는 해당 연구분야를 더욱 고도화하기 위해 데카머티리얼이라는 사명으로 물적분할을 했습니다. ‘중소·중견기업이 매출 제로인 순수 연구개발(R&D)이 웬말이냐’며 무모한 도전이라는 말도 듣고 있지만, 독자 원천기술을 확보해 다음 먹거리를 준비하는 게 제조업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대표는 지난 8월 열린 ‘한국 소재·복합재료 및 장비전’에서 자체 개발한 탄소섬유 소재와 음극재를 처음 공개했다. ‘울트라 스몰 토우 탄소섬유(ULTRA Small Tow Carbon Fiber)’라 이름 붙인 신소재는 기존 탄소섬유 대비 20~30% 수준의 저렴한 가격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조 대표는 “기존 제품은 섬유를 이루는 최소 가닥수가 1000가닥 수준인데, 우리가 개발한 소재는 10~100개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2차전지용 음극재는 충전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제조 효율과 공정은 크게 간소화한 신제품을 선보였다. 양극재에 비해 국내 개발이 활발하지 못한 음극재 시장에서 새로운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포부다.

지역 제조업 살리기 프로젝트

2020년에는 창사 이후 처음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업 확대에도 나섰다.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기술 선도기업인 세아메카닉스 인수다. 세아메카닉스는 국내외 주요 기업들에 2차전지, 자동차, 전자·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다이캐스팅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올 3월에는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며 투자 여력을 끌어올렸다.

“세아메카닉스가 있는 구미에 처음 갔을 때는 거의 문전박대 수준이었습니다. 매수자, 즉 HPK가 너무 작은 회사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2019년 12월 말에 다시 만났고, 1월 초에 인수합병 MOU를 맺었어요.”

조 대표는 세아메카닉스 인수를 결정하면서 철저하게 기존 사업·기술과의 시너지를 고려했다. HPK의 자동화 기술, 스마트 공정 시스템을 적용하면 세아메카닉스의 기술력과 품질을 몇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예를 들어 육안으로 하던 검사를 장비로 해 정확도를 높이는 거죠. 붕어빵을 찍어내면 끝에 튀어나온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게 불량입니다. 예전에는 이걸 일일이 사람 손으로 깎았어요. 여기에도 장비를 도입했죠. 고객사도 국내외 대기업 위주로 탄탄히 잡혀 있어 과감하게 인수를 결정했습니다.”

M&A 과정을 설명하던 조 대표는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닥친 승계 문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한국 제조업 1세대, 특히 지방에 적을 둔 제조산업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제조 1세대는 이미 투자 여력을 잃었고 사업을 지속할 의지도 꺾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에게 물려주려 해도 힘든 일 싫다며 다 도망가죠. 팔려고 해도 제값을 받기 어려워 포기하고요. 탄탄한 기술을 보유한 제조업체가 그냥 사라지는 겁니다. 다들 천천히 죽어가고 있어요. 국가적인 문제입니다.”

조 대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세아메카닉스의 시장성을 본 건 맞다”면서도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에 몰려 있던 투자금이 지방으로 내려가 소외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조 대표가 생각하는 이번 M&A의 의미다.

조 대표는 세아메카닉스 인수를 계기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제조기업들과 지역 경제를 함께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지방 소멸을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라 활력을 잃은 지역 제조업에 혁신을 더하는 일부터 시작하겠다는 다짐이다.

“지방에서 제조업 하시는 분들을 만나보면 다들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혔어요. 제조업은 끝났다는 패배주의도 점점 강해지니 새로운 혁신은 언감생심이죠. 사장이야 그렇다 쳐도, 직원들과 딸린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심각한 문제예요.”

조 대표는 “독보적 기술은 밤낮없이 수십 년을 매달려야 하는 일”이라며 지역 제조업에 새로운 기술로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경북을 중심으로 한 지역펀드 조성에도 나설 계획이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지만, 제조업의 근간은 끊임없는 기술 개발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최영재 기자

202211호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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