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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순섭 한파그룹 회장 

45년 이어온 남태평양 ‘작은 신화’ 

장진원 기자
팔라우는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다. 위치도 지명도 낯선 먼 타지에서 45년 넘게 사업가로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가 있다. 하순섭 한파그룹 회장이다. 하 회장은 팔라우 현지에서 모든 업종의 사업 허가권을 가진 유일한 외국인이다.

▎하순섭 한파그룹 회장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팔라우 현지에서 45년간 기업을 일궈왔다. 팔라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업종의 사업권을 가진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다.
“맑은 물과 풍광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습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거센 파도만 보던 사내가 청명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서 ‘저곳이 내 정원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된 거죠. 그야말로 완전히 매료돼버렸다고 할까요. 나도 모르는 전생의 연분이라도 있었던 게죠.”

하순섭 한파그룹 회장은 팔라우와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된 이야기부터 꺼내놓았다. 팔라우의 정식 국호는 팔라우공화국(Republic of Palau)이다. 필리핀의 남동쪽, 인도네시아 서뉴기니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로, ‘신들의 바다 정원’이라 불린다. 남태평양의 숨은 보석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나라다. 하 회장은 팔라우에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거의 모든 업종의 허가권을 가진 사람이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팔라우에서 45년 넘게 거친 환경과 현지인의 텃세를 이겨내온 한 회장은 한때 팔라우 GDP의 10%에 육박하는 매출을 기록했고, 임기 4년인 대통령 경제고문을 두 번이나 맡아 팔라우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한파그룹은 종합건설·유통·호텔 사업 위주의 ‘한파산업개발(Hanpa Industrial Development Cooperation)’과 부동산·레저 사업을 하는 ‘골든퍼시픽 벤처(Golden Pacific Venture)’를 중심으로 다양한 업종에 걸쳐 사업체를 영위 중이다.

일찍이 1976년 팔라우와 첫 인연을 맺은 하 회장은 종합건설, 유통, 호텔, 무역, 부동산, 레저 등 23개 분야에서 사업을 일궈왔다. 하 회장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최근 새로운 관광사업을 준비하며 ‘작은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한파’라는 사명도 한국과 팔라우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하 회장은 194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염전을 일구던 조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그 시절 대개가 그렇듯, 하 회장도 매사가 부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의사가 돼 돈도 많이 벌고 국회의원도 되겠다던 꿈을 꿨지만, 의대 진학에 실패한 후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산대를 나와 선장이나 어로장이 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집안 어르신의 조언을 듣고 나서다. 하 회장은 “수산대 입학이 인생의 항로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틀게 한 시작이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어로장 하면 돈 많이 법니다. 의사 돼서 정치까지 도전하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대안으로 선택한 게 수산대였어요.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배를 타고 바다에서 활약하는 수산대가 적성에도 맞았어요. 멋들어진 파이프를 입에 물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에 대한 로망도 큰 시절이었죠.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저를 기다린 건 바다가 아닌 ‘전쟁’이었습니다.”

수산대 입학에서 베트남 파병까지

당시 수산대는 4년 동안 학업과 함께 예비원 해군사관 후보생 신청을 받아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졸업 후 예비원 해군이나 해병 소위로 임관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었다. 임관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남들보다 3~4년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하 회장이 수산대를 선택한 이유였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발발과 한국군 파병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 수산대 졸업생 하순섭의 삶도 180도 달라졌다.

“졸업을 앞두고 실습선에 올라 대만에 갔다 왔습니다. 부산항 제3부두에 내렸는데, 사관후보생들만 집에 가지 못한 채 다시 버스를 타고 수산대로 가야 했습니다. 버스 안에는 해군과 해병대 기관병들이 동승했죠. 수산대 학훈단에 내리지마자 ‘지금부터 외출과 외박을 일체 불허한다. 내일 임관과 동시에 진해 해병학교로 입교한다’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죠.”

부모, 형제자매들과 인사를 나눈 임관식도 바로 다음 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됐다.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배를 타고 진해 해병학교에 입교했다. 평시라면 9개월간 받아야 하는 장교 기초교육도 석 달 만에 일사천리로 끝냈다. 하 회장을 기다린 건 베트남 파병이었다.

“지금 기준으론 말도 안 될 정도의 위법한 일들이었죠. 하지만 당시엔 나라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병대 소대장이 특히 부족했어요. 강제징용 수준으로 징집돼 1967년 베트남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교전, 후방 지역이라도 툭하면 터지는 부비트랩과 비명 소리. 해병대 소대장으로 사선을 넘으면서 총탄에 전우를 잃는 아픔을 겪은 끝에 1968년 9월 말 본국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다시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하 회장은 “인생이란 예상하고 계획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는 법”이라고 말했다. 원양어선 마도로스를 꿈꾸던 청년이 해병대 장교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자꾸 꼬이는 운명 앞에 어쩔 수 없었다”는 노신사의 너털웃음이 이어졌다.

원양어선으로 누빈 오대양 육대주


▎팔라우의 그림 같은 풍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하순섭 회장.
전역 후 하 회장은 당시 가장 큰 원양어업사인 고려원양에 취업했다. 수산계통 교사 등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았지만,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책상 앞 일은 도통 내키지 않았다. 고려원양 일등항해사로 들어가 한 번 배를 타고 나가면 보통 4개월씩 조업을 이어나갔다. 20~30명 정도 되는 선원과 함께 350톤에 달하는 물고기를 주낙으로 낚아 올렸다. 인도양과 대서양이 주무대였다.

“튜나(tuna), 우리말로 참치나 참다랑어가 주요 어종이었어요. 일등항해사로 30개월 정도 일한 후 선장으로 2년 정도 조업했죠. 그렇게 5년 정도 배를 타고 큰 바다를 누볐습니다.”

당시 원양어업은 달러벌이의 첨병으로 대접받았다. 정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원양어선을 무수히 사들였다. 하 회장은 새로운 조업 기술을 익히기 위해 태행수산이라는 한일합작 회사에 취업했다. 학창 시절 은사가 세운 회사였다. 아프리카 서부 가나 어장에서 활약할 첫 한국 가다랑어 개척선이 그에게 떨어진 임무였다.

당시 가나 어장은 일본 배들의 독무대였다. 파도가 높은 태평양에서와는 달리 선미를 낮춰 설계한 일본 배들은 하루에 30~40톤, 많을 때는 90톤까지 어획고를 올렸다. 배 모양 자체가 어장과는 맞지 않던 한국 개척선은 현지에서 비웃음을 살 정도로 형편없는 조업 실적에 좌절해야 했다.

“모두 낙담하던 끝에 어군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제안했어요. 일본인 어로 기술자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특별한 돌파구도 없던 터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선박 조종 키를 제가 맡고 난 후 8일 만에 100톤을 잡아 올렸어요. 한국 원양 채낚이 어업이 본궤도에 오른 순간이었습니다.”

1975년 들어 하 회장은 본격적으로 독립에 나섰다. 일본에서 200톤급 가다랑어 채낚이선을 인수해 대윤수산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그해 7월 선주 겸 선장으로 첫 항해에 나섰다. 당시 목적지가 바로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팔라우였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놓기도 잠시, 팔라우와의 질긴 인연은 혹독한 시련부터 안겨줬다.

“수산업은 현지 사전답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뉴스로 엄청 시끄러웠죠. 그 여파로 해외 출국이 엄청 까다로워졌습니다. 저도 조업 실태나 어장 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팔라우에 도착했죠.”

팔라우 도착 직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낮은 수심과 산호초 탓에 작은 40~60톤급 목선이면 될 것을 200톤이나 되는 배를 끌고 들어간 것부터 패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움에 빠졌고, 급기야 불만에 가득 찬 선원들이 한 회장을 줄에 매달아 바닷물 속에 담갔다 꺼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당시를 돌이키던 한 회장은 “베트남 전쟁터를 버텼는데 여기서 죽기야 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말 그대로 패가망신뿐이었다. “배나 잘 탈 것이지 사업한다고 까불대다 당했다”는 주변의 비아냥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귀국 후 한 회장은 수산개발공사에 말단으로 취직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모아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현지에서 활약하던 한 회장은 1978년, 미국 통조림기업에 스카우트되어 다시 아프리카 가나 지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선단 관리자로 일하며 선원 관리와 고기 수매 업무를 맡았다. 한국에선 꿈도 꾸기 어려운 연봉을 받는 좋은 대우였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왔다. 당시 세계 참치조업규제위원회가 3.2kg 이상만 잡도록 하는 규제를 발표한 것. 당장 어획고가 눈에 띄게 줄었고, 가나지점 폐쇄와 팔라우 지점 발령이 이어졌다. 팔라우와의 질긴 인연이 다시 시작된 셈이었다.

“팔라우 생활도 만만치 않았어요. 조류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 바람에 혹독한 어획 부진에 빠진 거죠. 운명이 날 가만두지 않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결국 미국 본사도 팔라우에서 철수했죠. 팔라우에 온 지 2년 만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에도 미련은 이상하리만큼 한 회장을 붙들었다. 그간 쏟아부은 돈도 너무 아까웠다. 결국 아내를 설득해 ‘아리랑’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냈다. 외국인 투자가 제한돼 있어 현지인 이름을 빌려 개업했다. 오늘날 한파그룹의 시작이었다.

당시 팔라우 관광개발에 적극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고급 호텔을 지으러 온 일본인들은 매일 밤 불고기 파티를 벌였다. 아리랑 식당의 매출도 매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내친김에 농장도 새로 열었다. 현지 텃세를 무던히도 이겨내며 1986년 1월 1일 드디어 현지인이 아닌 한국인 하순섭의 이름으로 사업 허가를 따냈다. 몇 달 후에는 유통업 도소매와 건축자재, 자동차, 기타 판매 허가까지 획득했다. 1988년 들어선 건축설계와 중장비 대여, 콘트리트 제조, 중장비 수리, 산호 채취, 골재 생산, 석산 개발, 자동차 정비공장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92년 들어선 관광 붐에 대비한 리조트 부동산 회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골든퍼시픽벤처(Golden Pacific Venture)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여든 나이에도 “도전 멈추지 않아”

“팔라우에서 도소업매 허가를 받았다는 건 어떤 업종이든 사업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구적인 권한이죠. 외국인으로는 제가 유일하고요. 한창 최대 매출을 기록했을 때는 팔라우 전체 GDP의 10%를 차지한 적도 있었어요. 현재는 한파건설, 아일랜드건설, 골든패시픽, 관광사, 농업 등 5개 업종을 주력으로 합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한 회장이 꿈꾸는 한파그룹의 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팔라우의 그림 같은 경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관광사업이다.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팔라우 록아일랜드에서 해상 관광과 낚시, 다이빙을 연계한 요트와 스피드보트 사업을 추진 중이다. 역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하 회장만 가지고 있는 관광업 라이선스다.

한 회장은 마지막 목표로 대형 리조트와 카지노 사업을 들었다. 팔라우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의 주의회 의장과 친분이 있어 카지노 사업 허가를 논의 중이다. 공무원연금 재정이 넉넉지 않는 팔라우의 사정을 고려해 개발 이익금의 일부를 연금에 기부하겠다는 복안이다.

“가장 중요한 건 투자자를 찾는 일입니다. 현재 팔라우 하원에선 허가안이 통과됐고 상원에 계류 중이죠. 호텔, 펜션, 골프장, 카지노 등 설립에 약 1조원이 소요될 전망인데, 국내외 투자자를 물색 중입니다. 현재 팔라우 대통령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사업이죠. 팔라우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게 마지막 꿈이자 목표입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502호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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