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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이발관’과 ‘수양제 스낵’  

 

朴漢濟 ;




배만 화려했던 것이 아니었다. 용주를 끄는 사람(殿脚이라 한다)에게 금채의포(金彩衣袍)를 입혔다. 채의(彩衣)를 입힌 자가 9,000여명, 배를 끄는 자를 합치면 8만명이었다. 양제의 용선과 후비가 탄 배는 오월(吳越)지구에서 선발한 미모의 전각녀(殿脚女)를 썼다. 8월 낙구를 출발한 선단은 10월에 강도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정월 동도 낙양이 완공되었다는 우문개(宇文愷)의 연락을 받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3월 강도를 떠나 4월에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후 대업 3년 양제는 친히 50만 군대와 군마 1만필을 거느리고 장성 이북지역을 순행하였다. 이때 거대한 이동식 궁정인 관풍행전(觀風行殿)과 둘레 4km나 되는 조립식 성인 육합성(六合城)을 만들었다. 수나라의 국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허세 부리기였다. 졸부의 과소비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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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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