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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김부식이 껴안은 大國 문화 선진化 + 사대주의 낳았다 

프리즘 | 우리 역사 속에 중국은 무엇이었나
지나친 적대감도, 중국화도 국익에 도움 안 돼… 실리의 공존책 찾아야 

신명호 부경대 교수 [smh@pknu.ac.kr]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전 세계가 중국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이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중국을 통한 해결을 시도해왔다. 왜 중국인가?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되는 지근거리의 중국, 우리 역사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어왔나?
1920년대 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틈틈이 국내 언론에 한국사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렇게 발표한 논문들이 1929년 라는 단행본으로 엮여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6편의 논문이 실렸는데 마지막 편이 ‘조선역사상 1천 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는 논문이다.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가 문제의식이었고, ‘고려 인종 13년(1135) 서경전쟁,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단재 선생은 ‘묘청의 난’을 ‘화랑·불가(佛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자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으로, 또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자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보았다. 이 싸움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다. 그래서 조선 역사가 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또 묘청의 난이 조선 역사상 1천 년 이래의 최대 사건이었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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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호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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