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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야설천하③ - 중국 무술고수 20년 연구 채희배 

“이소룡은 실전 최고수, 이연걸은 무술 배우에 불과” 

사진·김현동 월간중앙 기자
불가의 소림권은 한 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발필살의 권법…도가의 ‘팔용일호(八龍一虎)’ 권법은 물(水)처럼 싸우지 않는 유연함을 추구

▎채희배 씨는 중국 무술의 역사와 고수들의 삶을 연구하면서, 한·중 양국의 무술을 배우고 틈틈이 수련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 20년간 중국 무술 고수들의 역사와 계보를 추적한 중국전문 서적사 대표 채희배. 그는 요즘 중국 한나라 때의 고대 악기인 고금(古琴)에도 관심이 깊다. “무(武)는 무(舞)와 통하고, 무(舞)는 결국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채희배가 들려주는 중국 무술계의 변천사, 그리고 당대 주역의 파노라마와 같은 인생 총정리.

삶의 노선이 있다. 대부분은 생계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고 산다. 하기 싫지만 먹고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므로 돈 버는 일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 어디 그냥 오는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돈이 생기는 수가 많다. 하지만 50대가 되면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했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소수의 노선은 돈은 별로 안 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좇아서 간 인생이 있다. 그럭저럭 겨우 생계만 유지하고 자기가 재미있어 했던 일, 좋아했던 분야를 좇아간 추적자의 삶도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감수한 인생이라고나 할까.

중국의 무술 고수들을 20년간 추적했던 채희배(蔡熙培·50)의 삶은 후자의 경우다. 생계 수단인 현재의 직업은 중국 서적을 수입해서 파는 화문서적(華文書籍) 대표다. 외모는 무술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武)’자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성실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관상이다. 겉으로는 서점 주인의 관상이지만 내면으로는 무술에 대한 관심이 온통이다.

중국에는 언제 어떻게 갔는가?

“1995년이다. 성균관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갔다. 중학교 때부터 무술에 관심이 있어서 무술도장에 다녔다. 국내에서도 여기저기 무술 고수가 있다면 찾아가서 배웠다. 그러나 갈증이 있었다. ‘오리지널’을 알고 싶은 욕구가 그것이다. 중문과 나왔으니까 중국어를 대강은 알았다. 처음에는 북경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한어사(漢語史)’를 공부했다.”

부인이 중국 한족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결혼했는가?

“북경대학에 구내서점이 있었다. 구내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카운터에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책값을 계산하려고 봉투에 담긴 100위안짜리 지폐 다발을 꺼냈다. 현금을 봉투에 통째로 넣어가지고 다닐 때였다. 이 장면을 본 그 여직원이 ‘그렇게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강도를 당한다. 은행 통장에 넣어놓고 다녀야 한다’고 조언해주는 게 아닌가.

당시 1년치 하숙비와 용돈, 수업료를 합친 금액이었으니까 당시 1만5천 위안 정도 되는 현금이었다. ‘나는 외국인이어서 통장을 가질 수 없다. 당신이 알아서 중국은행 통장을 만들어주라’ 하고 그 자리에서 1만5천 위안을 그에게 통째로 맡겼다. 물론 처음 만난 초면의 관계였다.

당시 북경의 집 한 채 가격이 2만 위안 정도 할 때였다. 거의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액수를 처음 만난 여자에게 믿고 맡긴 것이었다. 열흘쯤 후에 다시 그 구내서점에 가보았다. 사실 열흘을 기다리는 동안 약간 초조하긴 했다. 초면의 그 여직원이 돈을 챙겨 어디론가 잠적할 가능성도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서점에 가보니까 그 여직원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맡긴 그 금액을 정확하게 입금시켜 통장을 만들어놓고 말이다.

‘이 통장도 당신이 갖고 있다가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대신 인출해 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이 여직원과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여직원은 구내서점 사장의 딸이었다. 결국 그와 결혼하였다. 돈 맡긴 일이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현재 서울에서 운영하는 화문서적도 처갓집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서점이다.”


▎UFC 경기의 결정적 타격의 순간. 중국 소림사 무술은 실전 능력의 감퇴로 이어져 UFC 선수들과 겨뤄 이기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중국 무술이 허약해진 이유

몇 년 전에 소림사 출신의 무술 고단자가 종합 격투기인 UFC에 출전하였다가 몇 번 겨뤄보지도 못하고 KO패 당하는 망신을 겪었다. 왜 이렇게 중국 무술이 허약해졌는가? 소림사 권법은 영화 찍을 때나 필요한 쇼였던 것인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역사적 맥락부터 봐야 한다. 모택동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통 무술계는 크게 위축됐다. 공산당에서 무술단체를 폭력 집단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무술 고단자들을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수 있는 위험인물 집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전통 무술 연마를 금지했다. 여기서 금지했다는 것은 실전무술 부분이다.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격투기적 요소를 금지시켰다. 그 대신에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강 체조와 같은 분야는 허용했다. 무술이 체조로 변한 것이다. 형식만 남고 실질적인 내용은 쇠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현대에 들어와 소림사 무술은 실전 능력의 감퇴로 이어졌다. 체조선수가 UFC와 같은 실전 격투기에 가서 버티기 어렵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전통 무술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두 가지 갈래로 분화됐다. 하나는 산타(散打)라고 불리는 영역이다. 격투기다. 실제로 때리고 가격하는 분야다. 그렇지만 이 분야도 정부에서 관리하는 시합에 출전하는 과정에서 약해졌다. 산타에 출전하는 것 자체도 돈이 들어간다. 이전에는 집 반 채 값 정도를 주최 측이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복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이 많기 때문에 산타 챔피언이라고 해도 실력이 일급이 아닐 수도 있다.

현재 중국정부에서 양성한 산타 선수는 수백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한 분야는 표연(表演)이라고 하는 분야다. 체조처럼 화려한 동작을 보여주는 갈래다. 형식화된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모택동 정권이래로 중국에서는 ‘산타’보다는 ‘표연’ 쪽으로 무술의 대세가 발전되어왔다. 산타야 말로 실전무술인 셈이다. 현재 중국에서 산타 분야의 고수는 많지 않다.

영화배우 이연걸은 무술의 고수로 알려져 있다. 이연걸도 표연 쪽의 전문가로 봐야 하나?

“그렇다. 이연걸은 동북 3성의 심양 출신이다. 무술은 북방과 남방의 스타일이 다르다. 이연걸은 북방 출신인데 표연 분야에서 5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던 인물이다. 단순한 영화배우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실전 무술 고수는 아니다. 기예적(技藝的)인 무술의 고수인 것이다. 이연걸이 만약 UFC의 밴텀급 정도에 출전한다 해도 크게 승산이 없다고 생각된다.”

서양 권투 선수들을 제압한 곽원갑도 있지 않은가? 영화화돼서 한국에도 소개됐다. 곽원갑은 어떤 사례인가?

“곽원갑(霍元甲, 1868~1910)은 하북성의 천진(天津)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무예인 미종권(迷蹤拳, 일명 燕青拳)을 배웠다.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 아들을 시원찮게 본 부친이 무술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배워가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곽원갑은 미종권의 기초 위에 여러 문파의 장점을 받아들여 미종예(迷蹤藝)로 발전시켰다. 원래 미종권은 곽씨들에게만 전수하도록 하는 전통이 내려왔다.

외성인(外姓人)에게 전수하지 못하게 한 전통규정을 깨고 곽원갑이 외부 제자를 받는다. 오픈한 것이다. 그때 중국에 들어와 당당한 체격과 복싱의 힘으로 중국의 권법가들을 격파하고 있던 러시아·영국·일본의 격투가를 물리치며 민족영웅으로 떠오른다. 곽원갑은 남방 무술의 중심인 상해에서 활동했다. 상해에 외국인 조계가 있을 때이니까 북경보다도 상해가 더 활발한 중심지였다.


1 이소룡은 그가 배운 영춘권을 넘어 자신만의 독보적인 경지로 진입한 무술 고수였다. 2 이연걸은 기예적인 의미의 무술 고수였을 뿐 전통적인 의미의 실전 고수는 아니었다.
1910년에 중국최초의 민간체육단체인 중국정무체조회(中國精武體操會)를 창립했으나, 몇 달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많은 의혹이 있어 훗날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추측에 의한 스토리 구성이 난무하게 된다. 독살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가 창립한 중국정무체조회는 1916년에 상해정무체육회(上海精武體育會)로 개명되고 이를 간단히 정무문(精武門)이라고도 한다.”

197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소룡 영화의 제목인 ‘정무문(精武門)’ 말인가? 이소룡은 실전 무술의 고수로도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10∼20대를 보냈던 한국의 청소년들은 모두 이소룡의 액션에 넋이 나간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무술 바람이 불었던 것 아닌가! 이소룡의 무술계보는 어떻게 되는가?

“영춘권(詠春拳)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소룡은 원래 무술적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홍콩의 길거리 복싱대회에서도 우승할 정도로 실전 타격 감각도 있었고, 영춘권의 사부를 만나 영춘권법을 익히게 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이소룡은 영춘권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나중에는 자기 혼자서 연구했다.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무술 형태를 창안한 것이다. 이게 절권도(截拳道)다. ‘종래의 모든 권법을 절단 내는 무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작명이다. 이소룡은 영춘권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경지로 진입한 무술 고수이다. 연기에 적합한 무술가인 이연걸과는 이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소룡은 실전 문파의 장문인급이고, 이연걸은 무술배우라고 할 수 있다.”

이소룡의 무술계보

이소룡이 처음에 익혔던 영춘권은 원래 소림권(少林拳)에서 갈라져 나간 권법이라고 한다. 소림권이 발전하면서 소림남권(少林南拳)과 소림북권(少林北拳)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어서 북쪽 사람의 기질과 남쪽 사람의 기질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어느 지역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무술의 유형도 확연히 다르게 발전되었다. 영춘권은 소림남권 계통이다. 오키나와에서 시작되었던 당수도(唐手道)도 소림남권 계통이 뻗어나간 것이다. 이 ‘당수도’가 일본의 가라테가 되었다.

중국은 불교의 선종(禪宗)에도 남종선(南宗禪)과 북종선(北宗禪)이 따로 있다. 그림에도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로 나뉜다. 다른 분야도 남파(南派)와 북파(北派)가 있다. 권법에 있어서도 북권(北拳)은 상대적으로 다리를 많이 쓴다. 북방은 동북 3성에서 사천성까지 평지로 연결되어 있는 지형이 많다. 교류가 많았다. 언어도 비슷하다. 평지이므로 말을 많이 타고 다녔다. 말을 타면 다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무술에서도 발차기가 발달되었다.

이에 비해 남방은 물이 많은 지형이다. 강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 강남인 것이다. 물이 많으면 가까운 지역이라도 격리가 된다. 언어와 풍습도 서로 다르다. 교류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물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한다. 배를 많이 타다 보니까 노를 젓는 팔의 힘이 상대적으로 발달되었다. 노를 저어야 하는 남방은 북방에 비해 다리보다는 팔을 많이 쓰는 권법이 개발된 것이다. 기후가 더워서 실내에서 연습을 많이 한 영향도 있다. 영춘권도 팔을 많이 쓴다. 원래 여자들 호신용으로 개발된 것이 영춘권이다. 이소룡은 이 영춘권을 기반으로 본인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권법을 가미시켰다.

이소룡은 무술 천재였다. 연습할 때 문을 잠그고 하루 종일 연습을 하기도 했다. 거의 미친 듯 수련에 몰두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선대에 무술을 했던 조상이 있었던 듯하고, 이런 무술 고수가 환생한 것으로 해석된다. 1960년대 중반에 미국의 가라테 대회에서 한국의 태권도 대부인 이준구(준 리)와 이소룡이 주최 측의 초대를 받아 서로 시범 대련을 한 적이 있다.

이준구의 회고에 의하면 두 사람이 팔씨름을 했는데 이소룡의 팔심이 엄청 셌다고 한다. 영춘권의 고수답게 손을 쓰는 수기(手技)가 발달했다. 이준구는 이소룡에게 발차기인 족기(足技)를 알려주고, 수기를 배운 적이 있다고 10년 전쯤 필자에게 들려준 바 있다. 이준구가 이소룡에게 물었다. “무술 철학이 있느냐?” “있다. 물(水)이다.” “왜 물이냐?” “물은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낮은 데로 흘러간다. 흘러가면서 만물을 먹여 살린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승천한다.”


▎소림사 무술 시연 장면. 소림사는 중국 무술의 발원지로 달마대사 때부터 ‘역근경’의 무술 전통을 이어왔다.



떼돈 만드는 이소룡을 홍콩 갱조직이 살해

이소룡은 원래 홍콩에서 태어났다. 홍콩에는 도사와 역술가도 많았다. 이소룡의 아버지가 어린 이소룡의 사주팔자를 보니 “이 아이는 고향을 떠야 한다. 고향에 머물러 있으면 명이 짧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시키면 명이 길어진다. 외국으로 유학 보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이소룡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다른과도 아닌 철학과를 다니게 된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나 계속했으면 했지만, 사람이 팔자 도망을 못 간다.

아르바이트 하다가 우연히 영화사에 발탁되어 무술영화를 찍게 되었다. 이것이 <정무문(精武門)>이다. 다시 고향인 홍콩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너무 히트를 치니까 떼돈이 들어왔고, 떼돈 만들어내는 이소룡을 홍콩의 갱조직이 그냥 놔두지 않았다. 결국 고향에서 갱단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명이 짧았다.

중국 무술의 발원지는 소림사다. 소림사는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면벽을 했던 곳이다.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와서 <역근경·易筋經>이라는 경전도 썼다. 근육을 단련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된 경전이다. 승려들은 좌선만 한다고 너무 앉아 있다 보니까 몸이 쇠약해진다. 몸이 쇠약하면 정신 집중도 안 된다. 육체를 단련시켜야 좌선도 할 수 있다. 이 ‘역근경’은 인도 요가(yoga)의 영향을 받았다. 요가는 육체 단련을 통해서 챠크라를 열고, 결국 해탈로 나간다는 노선이다. 육체에서 출발한다. 하타요가의 중국적 변용이 ‘역근경’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달마대사 때부터 ‘역근경’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던 소림사는 민간에서 싸움에 일가견이 있던 전문가들을 초빙한다. 발차기 잘하는 사람, 주먹이 센 사람, 창 잘쓰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들의 한 가지 주특기를 소림사에서 모두 흡수한다. 여러 가지 무술 동작을 소림사가 융합한 것이다. 소림사는 당시에 ‘무술연구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정치적 지원도 작용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의 후원을 받아 세력이 강해졌다. 소림사와 이세민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소림사는 여러 조대(祖代)에 걸쳐 조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융성하게 되고 소림사의 무예체계도 그에 힘입어 정비되고 여러 지역으로 퍼지게 된다. 소림사의 위치도 하남성(河南省)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남성은 중원(中原)에 해당한다. 여러 곳에서 모이기가 좋았다. 위치도 중국의 중앙에 있어서 유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에 이르러 조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게 되었다. 만주족은 소림사를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했다. 탄압을 받으면서 소림사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소림사에 모인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도가(道家)에 대한 애착과 겹치며 소림사의 무예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된다.

무술도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경향이 다르다. 원래 소림권은 한 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발필살의 권법이다. 여러 방이 아니다. 길면 세 초식(招式)에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이 불가에 바탕을 둔 소림권의 전통이었다. 반대로 도가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도가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불가가 불(火)이라고 한다면 도가는 물(水)을 숭배했다.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설파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과 같다는 것은 유연함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부딪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피해라. 도가에 철학적 바탕을 둔 도가 권법은 상대의 공격을 되도록이면 피하다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한 방을 때리는 식이다. 예를 들면 ‘팔용일호(八龍一虎)’다. 8번은 물에서 사는 동물인 용처럼 미끌미끌 피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 호랑이처럼 공격한다는 방식이다.

권법에서 용은 도가, 호랑이는 불가를 상징한다. 한 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불가의 소림권이 도가의 물(水)을 만나면서 유연한 권법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시기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중국 토착사상 체계인 도가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다. 청나라가 불교를 숭상했던 것도 그 배경이다.

소림무술은 민간으로 퍼졌다. 특히 군인들이 훈련하는 병영(兵營)에서 소림무술을 연마했다. 소림사와 병영은 사방의 무예가 종합되는 역할을 했고 환속제자(還俗弟子)와 퇴역장병(退役將兵)은 무예가 사방에 전파되는 역할을 했다. 소림사에 있다가 속세로 환속한 제자들이 민간인에게 무술을 전파한 것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 태극권 조형물 무술 시범 현장. 중국 무술계는 공산당 집권 이후 폭력집단으로 규정돼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퇴역장병도 집에 돌아가서 쉬기만 하니까 건강이 안 좋아졌다. 건강과 호신 차원에서 계속 무술이 필요했다. 거기에다가 먹고 사는 생계수단으로 일반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서 창검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만 하는 권법위주의 무술이 발전되었다.

소림무술의 대가는 명나라 척계광

소림무술의 대가가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다. 그는 일본의 왜구를 제압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검법을 제압하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것이다. ‘척문용형검법’을 완성했다. 창검을 다루는 데 능숙했고 권법, 화포와 무기제작에도 전문가였으며, 성(城)을 쌓는 데도 전문가였다. 한마디로 척계광은 전쟁신이었다.

척계광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남겼다. 명대에는 병영에서 권법을 익혔다. 검과 창을 다루기 위한 기본동작이 권법이다. 창검을 직접 들고 연습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래서 권법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 척계광의 부장들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되었다. 그들이 조선에 전해준 무술을 한명회의 5대손인 한교가 정리하여 <무예제보>를 편찬하였고 이는 바로 <무예도보통지>의 기원이 된다. 그동안까지 조선은 활을 쏘는 궁술(弓術)이 주된 무기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은 창과 검, 소림사에서 유래한 권법을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왜검(倭劍)도 익혔다. 일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에 귀화하여 왜검을 조선에 전수해준 것이다.

명나라 말기에 심의권(心意拳)이 나온다. 산서성(山西省)에서 발생했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무술이다. 6방(상하, 전후, 좌우) 가운데 상하에서 힘이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척추와 경추를 늘려야만 힘이 나온다는 이치를 발견한 것이다. 척추에서 힘이 나와야 팔다리로 전달된다. 팔다리의 힘은 척추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척추를 뽑는 연습을 많이 한다. 이 문파가 심의육합권(心意六合拳)으로 정리되었다. 이 문파가 다시 소림사로 들어간다. 소림사에서 재융합된다.

이 심의권이 중국 각 문파의 무술에 영향을 미친다. 심의권은 북방무술인데 소림사에 들어가 남방무술과도 혼합되는 것이다. 이 심의권의 한 파가 청나라 말기에 가면 형의권(形意拳)으로 발전된다. 실전에서 주먹으로 치는 실전무술이다. 그 형의권의 창시자가 이낙능(李洛能, 1808~1890)이다. 청나라로 들어오면서 종래의 창검 대신에 화포, 총포가 주류를 이룬다. 창검이 필요 없어졌다는 말이다. 병장기 무술이 사라지고 운동으로서의 권법이 발달하게 된다. 청나라 말기에 가면 병장기는 적어지고 맨손으로 하는 권법이 대세를 이룬다.


1 채희배 씨는 한나라 시대 고대 악기인 고금(古琴)을 직접 제작하고 연주한다. 2 요승용·저국용 등 중국의 고수들에게 직접 무술을 배우기도 한 채씨는 창술 분야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37세에 시작해 10년 만에 최고수 된 곽운심

이낙능의 제자가 곽운심(郭雲深, 1820~1901)이다. 이낙능으로부터 형의권을 배워 당대 천하무적이 된다. ‘반보붕권타편천하무적수(半步崩拳打遍天下無敵手:반 보만 움직이는 붕권으로 온 천하를 쳐서 적수가 없다)’라는 명성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 곽운심은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무술을 시작해서 47세에 천하무적이 되었다. 그가 깡패를 때려죽여서 감옥에 3년간 들어가 있었는데, 감옥이 좁으니까 반 보(半步)만 움직여서 가격하는 권법을 개발한 것이다.

곽운심이 말년에 동해천(董海川, 1797∼1882)과 붙는다. 동해천은 팔괘장(八卦掌)의 창시자다. 그는 안후이성 구화산(九華山)에서 운반노조(雲盤老祖)를 만나 무예를 전수받아 팔괘장을 창시했다. 곽운심은 동해천과 겨루어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동해천이 곽운심의 공격을 피하기만 한 것이다. 팔괘장은 다리를 많이 쓰는 보법(步法) 위주의 무술이다. 유연하게 상대의 공격을 잘 피하는 용(龍)의 권법인 셈이다. 결국 둘은 친구가 되었고, 동해천을 통해서 곽운심은 자기의 약점을 알게 된다.

곽운심이 말년에 자기의 고향인 하북성 심현(深縣)에 돌아가 팔괘장을 격파할 수 있는 무술개발에 몰두한다. 그것이 참장공(站樁功)이다. 곽운심의 참장공을 배운 제자가 왕향재(王薌齋, 1886~1963)다. 곽운심에게 배웠으나 형의권을 배운 것이 아니라 곽운심이 말년에 연구한 참장공(站樁功)을 배웠다. 곽운심 말년의 무예심득(武藝心得)을 바탕으로 하고 여러 무예가와의 교류를 거쳐 의권(意拳)을 창시했다.

19세기 말에 중국에 철도가 놓이면서 여러 무예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교통이 불편해서 그 전에는 서로 만나볼 수 없었던 무술 고수들이 서로 활발하게 왕래하면서 여러 문파의 초식이 섞이게 된 것이다. 왕향재는 그러한 교류의 시대에 살았다. 왕향재는 소년시절에 스승 곽운심이 별세함에 따라 자신의 배움이 부족함을 느껴 심의파(心意派)의 다른 전승자들 중에도 스승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무예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천하를 유람하며 여러 심의파의 무예가를 만난다. 주유천하 하다가 하남성 소림사에서 항림화상(恒林和尙)을 만난다. 소림심의파(少林心意派)의 고수였다. 서로 겨루어 보고 만남이 늦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된다.

왕향재가 만난 또 한 명의 고수가 해철부(解铁夫)이다. 심의문(心意門)의 고수로서 강남제일묘수(江南第一妙手)라는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호남성 충양(衡陽)에서 만나 겨루어 10전10패를 당했다. 그 후 1년간 해철부의 집에 머물며 무예를 배우고 같이 연구했다. 그 후 왕향재의 실전가격 능력이 급속히 상승하여 패하지 않게 된다. 왕향재는 말년인 1950년대 말부터 북경의 중산공원에서 수백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매일 건강체조와 같은 무술을 전파한다. 양생법으로서의 무술에 집중한 것이다. 왕향재는 의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 없이 지도하였기에 사람들이 마땅히 부를 이름이 필요했다.

이는 실전무술을 금지한 중국 공산당 정권의 영향도 있다. 이 과정에서 나온 이름이 바로 ‘기공(氣功)’이라는 단어다. 왕향재는 의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 없이 지도하였기에 사람들이 마땅히 부를 이름이 필요했다. 이 시절 왕향재로부터 기공을 배운 세대로부터 전수받은 인물이 현재 중국 법륜공(法輪功)의 창시자인 이홍지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채희배가 정리한 무예 단련법 7단계

왕향재의 무술 전법 제자는 요종훈(姚宗勳, 1917~1985)이다. 원래 이낙능의 3전제자(李洛能-劉奇蘭-張占魁)인 홍연순(洪連順)으로부터 형의권을 배웠다. 홍연순이 왕향재에게 3전3패하여 모든 문하생을 데리고 왕향재의 문하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여 의권을 배우게 됐다. 왕향재의 수제자가 되고 의권을 정비하여 현재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다.

요종훈은 민국 시절에 중국 공산당을 감시하는 국민당 소속의 감찰 단체인 삼청단(三淸團)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모택동 정권으로부터 연금생활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사형당할 뻔했는데 공산당 제자가 구명운동을 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북경 근처의 창평이라는 동네를 벗어날 수 없는 연금 생활을 했다. 요종훈의 제자가 아들인 요승영(姚承榮, 1953~)이다.

채희배는 요승영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무술을 배웠다. 그리고 저국용(邸国勇, 1948~)에게도 배웠다. 저국용은 이존의의 3전제자(李存義-尙雲祥-劉化甫)인 조충(趙忠)으로부터 형의권을 배웠고, 동해천의 재전제자(董海川-梁振蒲)인 이자명(李子鳴)으로부터 팔괘장을 배웠다. 이존의(李存義, 1847~1921)는 유기란과 곽운심에게 형의권을 배웠다. 1900년 53세의 나이로 의화단에 참여해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전쟁터를 종횡무진하여 ‘단도리(單刀李)’라 불렸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채희배가 정리한 무예 단련법은 7단계가 있다.

▷천적공(踐跡功): 무예선배들의 흔적을 밟는 공법. 동작위주. 움직임이 커서 따라 하기만 하여도 효과가 있다. 주로 소림권(北派長拳)에 근원을 둔다.

▷적형공(跡形功): 천적공과 천형공 사이를 연결하는 공법. 동작과 의념(意念)을 적절히 조화시킴이 중요하다. 주로 형의권에 근원을 둔다.

▷천형공(踐形功): 자신의 특성을 밟는 공법. 의념위주. 의념을 통하여 몸 전체의 미세한 근육을 움직이고 이를 통하여 강력한 힘을 외부로 발출할 수 있게 한다. 주로 의권에 근원을 둔다. ▷예유보(豫猶步): 조심스럽게 더듬어 가며 걸음을 걷는 연공방식. 무예의 최종적인 힘은 땅에서 나온다. 유예보는 땅을 장악하는 공법으로 무예의 핵심을 이해하는 첩경이며 동류무를 출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주로 팔괘장에 근원을 둔다.

▷목인공(木人功): 목인장(木人樁)을 통하여 좀더 실질적인 운동이 되도록 만든 공법. 전통목인장의 여러 문제점을 개선한 이동식 가변목인장을 사용한다.

▷대인공(對人功): 사람과 같이 운동하는 공법. 대인공은 항상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하여 착실한 연공을 할 수 있게 한다. 근육통제와 무관한 의념활동은 무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류무(同流舞): 일체의 형식을 버리고 사전에 준비된 동작이 아닌 즉흥적인 운동방식으로 춤을 추듯이 천지의 흐름을 타는 공법. 연공의 최고형식이다. 음악과 춤을 통한 연공방식이다.

무술에서 동(動)과 정(靜)이란 무엇인가?

“정(靜)이 기본이다. 글자를 뜯어보면 혈관에 쌓인 노폐물을 뽑아낸다는 의미가 있다. 동(動)은 무거운 짐을 지고 힘을 쓰는 형상이다.” 채희배는 요즘 중국 한나라 때의 고대 악기인 고금(古琴)에 관심이 깊다. 고금을 직접 제작할 정도의 단계다. “무(武)는 무(舞)와 통하고, 무(舞)는 결국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온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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