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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피어나는 집 | 유창현·김미순 부부의 남한강 보이는 집 

강물에 달빛 비치고 마음에 여유가 흐른다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사진 전민규 월간중앙 기자

▎자연에서의 삶을 축복이라 여긴다는 유창현 씨 가족. 고추와 오이, 쑥갓 등 수십 종의 채소를 텃밭에서 무공해 농법으로 재배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내 김미순 씨, 어머니 김은이 씨, 딸 유정민 씨, 집주인 유창현 씨.



자연과 벗하며 살기를 소망하는 서울 사람들 중 한 번쯤 경기도 양평에 발걸음을 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바다처럼 출렁이는 팔당대교를 건너면서 시작되는 양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특히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길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푸른 산야는 마치 우리에게 어서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의 품에 안기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세상의 번뇌를 씻겨 보내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비친 대자연의 절경은 도시인의 각박한 심사를 달래기에 충분하다.

한때 앞이 안 보일 듯 삶이 고단해 자연의 품을 그리워했다는 유창현(56·인쇄업·가미레이블 대표)·김미순(56) 씨 부부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양지바른 산 밑이다.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그들은 경기도 일대를 훑고 다니며 그들의 둥지를 찾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에 와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편안함이 차오름을 느꼈다. 바람과 청정한 공기가 달빛마저 씻어준다는 세월리(洗月里) 아니런가.


▎다락방에서 내다보면 남한강의 수려한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숲 속의 집

서울 면적의 1.5배에 이르는 양평군은 1읍, 11개면 265개 리 거의 모든 지역이 강과 산을 끼고 있다. 어느 곳이 더 수려하다고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곳곳이 아름답다. 그래서 끊임없이 외부 인구가 증가해 현재 10만여 명이 살고 있다. 양평에는 친환경·생태 마을, 건강·힐링의 고장, 수상·레저의 본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이곳에 오면서 우리 가족도 웃음과 활력을 되찾았어요. 자연의 치유력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이곳에 사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실망을 안겨줬던 사람과 삶에 대해서조차 기쁨과 애착이 다시 솟아오르더라고요.” 마음속의 번뇌가 사라지니 한때 부도가 나 내리막길을 걸었던 사업도 술술 풀렸다고 한다. 유씨 부부는 “편하고 여유 있는 마음이 삶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은 팔당대교를 건너 시작되는 6번 국도를 타고 산모퉁이를 몇 굽이 돌아가면 나타난다. 양평군립미술관과 경찰서를 지나고 양평교 코바코(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수원을 거치는데 길가에는 물오른 나뭇잎들이 살랑이는 포플러와 은행나무뿐만 아니라 붉은 철쭉꽃과 노란 아기똥풀꽃이 마중이라도 나온 듯 이방인을 반긴다. 오르막길을 지나면 나오는 세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어릴 적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유씨 부부의 집이 있다.

세월리 마을 입구에는 600년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장중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부부의 집은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서울 성수동의 사무실에서 58㎞,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집이 병풍처럼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복잡한 도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든다.

지저귀는 새소리, 햇볕에 졸고 있는 진돗개 쫑이가 한낮의 여유로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이다. 뒷산의 상수리나무와 갈참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만이 귀에 들릴 뿐이다. 이들은 7년 전에 이곳에 정착했다. 경북 고령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상경한 유씨는 30년 동안 서울 성동구의 뚝섬역 근처에 살다가 쉰 살이 되던 해에 이곳으로 삶터를 옮겼다.

“젊었을 때 영업사원을 할 때 다섯 번 정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갇힌 적이 있어요. 그 후로 폐소공포증 같은 것이 생겨 고생했어요. 그때부터 언젠가는 서울의 아파트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릴 적에 시골에서 보낸 여유로운 삶이 그리웠죠.”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을 때 유씨도 거래처가 부도가 난 바람에 전 재산을 잃다시피 했다. 그동안 애써 억눌러왔던 삶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견디기가 어려웠다. 더는 도시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 아내와 함께 출퇴근이 가능한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찾아낸 곳이 이곳 세월리였다.


▎적송의 나무결과 옹이가 그대로 드러나 소박함을 더해주는 다락방 내부 모습.



자연의 멋 스며든 소박한 황토집

이 마을에는 3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본래 주민들이 사는 옛날 집들은 좁은 마을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어느덧 마을 주민의 절반을 넘긴 외지인들의 집은 숲 속에 점점이 박혀 있다. 밖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숲이 유씨 부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고 한다.

처음엔 69.3㎡(21평) 크기의 작은 통나무 집 한 채가 있는 땅을 조금 샀다. 그곳에서 살면서 필요에 의해 조금씩 땅을 넓혀갔고 나중에 191.4㎡(58평) 크기의 2층짜리 본채를 통나무 집과 붙여서 지었다. 세간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시골생활이 가져다 주는 재미가 그만이었다.

내친김에 황토집(49.5㎡·15평)도 지었다. 구들장을 놓고 아궁이를 만들어 장작을 지핀다. 온돌방 찜질도 하고 산에서 따온 각종 나물을 말려 겨우살이 준비할 때나, 각종 효소를 넣은 술을 발효하는 데에도 제격이다. 그 옆에는 각종 농기구와 살림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와 비닐하우스도 지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터전이 넓어져 지금은 2013㎡(610평)의 산과 텃밭, 대지에 5채의 건물이 늘어서게 됐다.

“자연에 살고 싶다”는 다짐과 어울리게 유씨 부부의 집은 소박하면서도 정감 있다. 집을 짓는데 건축설계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지었단다.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두 사람은 애당초 살기 편한 집을 대충 그려 주변에서 소개받은 건축 인부들과 하나하나 상의하면서 지었다.

공간을 뚝뚝 잘라 3개의 방과 마루, 부엌과 화장실을 앉힌 지극히 단순한 집이다. 왼편의 통나무 집은 1층에 통나무 외벽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운데 본채는 외관에 붉은 벽돌을 붙여 통나무 집과 자연스런 조화를 꾀했다. 본채 거실 내부 벽은 황토로 마감 처리해 건강에 신경을 썼다.


1 나무 데크에 서서 날로 푸르름을 더해가는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김미순·유정민 씨 모녀. 2 마당 한켠에 새로 지은 황토집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식구들이 찜질과 사색을 즐기고, 산에서 채집한 나물을 말리는 곳이다. 3 뒷산에서 따 온 열매로 담근 과실주 항아리들. 4 햇살이 좋을 때에는 오가피, 고사리 등을 말려 저장한다.
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는 이층 다락방은 큰 창을 달아 1㎞ 남짓 떨어져 있는 남한강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남쪽으로 창을 내겠다’던 월파 김상용의 시구대로 ‘새 노래는 공으로’ 듣고, ‘괭이로 파고 호미로 김을 맨’ 밭의 풍경이 창밖에 펼쳐진다. 다락방 전체에 옹이가 보이는 적송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어느 산중의 펜션에 머무는 느낌을 준다. 마당에는 꽃잔디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텃밭에는 밥상의 행복이 자란다

“집은 식구들이 편하게 눕고 쉴 자리만 있으면 돼요. 자연이 있으니 집안 장식엔 아무 욕심이 안 들어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의 멋을 따라갈 수 있나요?” 유씨 부부는 자신들이 그동안 공들여 지은 집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눈치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집은 자연의 멋을 해치지 않고 다소곳이 그 안에 스며드는 집이다.

집주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별채로 만든 황토집이다. 붉은 황토가 보기만 해도 정겨움을 준다. 앞뒤로 툇마루와 나무 데크를 둘러 바람과 햇살에 온갖 산나물들을 말리 수 있게 했다. 곳곳에 고사리와 오가피가 널려 있고 여기저기에 과실과 약초 발효주가 든 유리항아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넓은 방안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펴 온돌방의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고 본채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출가한 딸 정민(32) 씨는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옛집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틈만 나면 양평으로 달려온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만날 때는 조금 불편했지만 저한테도 정말 좋은 집이죠. 특히 엄마아빠가 이 집에 살면서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바라만 봐도 저절로 제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어요.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으면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이 집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정민 씨는 머지않아 다시 이곳으로 이사와 엄마아빠와 살림을 합칠 생각이라고 했다. 유씨 부부는 딸과 아들(29)에게 엄마아빠의 사랑과 행복이 쌓여 있는 이 집을 대대로 지켜달라고 미리 주문해놓았다고 한다.

웬만한 도시 근교 전원주택에서도 가질 수 없는 넓은 텃밭은 유씨 부부의 또 다른 행복을 키우는 곳이다. 594㎡(180평) 크기의 텃밭에는 5월의 햇살을 받아 고추·상추·케일·쑥갓·오이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식탁에 오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채소가

이 텃밭에서 생산된다. 텃밭 가장자리로는 배나무를 비롯해 자두, 대추, 블루베리 등을 심었다. 땅콩, 표고버섯도 재배하니 웬만한 농사는 다 짓는 편이다. 뒷산에선 자연산 산도라지, 두릅, 장뇌삼, 곰취 등이 이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안주인 김미순 씨는 “이곳이 살아생전의 천국”이라고 말한다. “달리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밖에 나가 있으면 어서 집으로 돌아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채소와 과일나무들을 마주하고 싶어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질 정도예요.”

유씨 부부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여가를 텃밭 가꾸기에 쓴다. 텃밭 일구는 일은 이들에게 신성한 노동이자 놀이이며 사색과 자기 성찰의 시간이라고 했다. 또 소중한 가족들이 먹는 무공해 농산물을 내 손으로 직접 생산하니 더할 수 없이 보람되고 뿌듯하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일체 사용하지 않아 수확량은 다른 농가의 20% 수준에 불과하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고라니 등 산짐승들이 밭을 망치는 것을 막으려고 산 쪽으로 얕은 담장을 둘러쳐놨을 뿐이다.


▎텃밭 옆에 지어놓은 정자에서는 농사일을 하다가 바람에 땀을 말리거나 새참을 먹는다. 정자에서 바라본 텃밭과 집 주변의 풍경.



친지·직원들에게도 언제든 개방

텃밭 한켠에 지어놓은 정자는 일하면서 수시로 땀을 식히는 장소이며 농부의 가장 큰 즐거움이랄 수 있는 새참을 즐기는 곳이다. 이곳에 올라 앉으면 신선 놀음이 따로 없다. 칠흑 같은 밤에는 무수히 많은 별과 함께 청정지역에만 사는 반딧불이의 유영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단다. 부엉이 울음소리는 두 사람을 아득한 어릴 적 추억의 저편으로 내닫게 한다.

자동차로 10여 분만 나가면 강 주변에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즐비하지만 유씨 부부의 보금자리에서는 그곳이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심리적인 거리감은 멀게만 느껴진다. 해마다 뒷산의 도토리를 걷어다 수시로 맛깔스러운 묵을 직접 쑨다는 유씨의 어머니 김은이(77) 씨 역시 산골에서 사는 맛에 푹 빠져 있다.

서울 근교아파트에 사는 딸 집에 한동안 머물렀던 김씨는 이 곳에서 사는 재미를 들이고 난 뒤로는 딸 집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을 정도란다. 이곳에서는 일상의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을 정도다. 텃밭의 먹거리를 돌보고 수확해 밥상에 올리다 보면 하루하루가 풍요롭게 느껴진다. 김씨가 양념을 해서 만든 보들보들한 도토리묵 요리는 혀에 낭창낭창하게 감기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을 준다. 도회지의 시장에서 파는 묵은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맛있고 신선한 음식 재료로 맛을 낸 진수성찬을 가족만 독차지하기는 아까워 유씨 부부는 틈날 때마다 이 집에서는 각종 모임을 연다. 친지들의 야외 돌잔치, 부부가 몸담은 교회의 수련회와 작은 콘서트는 물론이고 휴가철이면 사돈댁까지 이곳에 여장을 풀고 여러 날을 묵어가기도 한다. 유씨 부부의 집은 파티장이자 피서지이며, 근사한 레스토랑인 셈이다.

근처 개울에서 물고기와 가재잡이도 하고 즉석 추어탕도 끓여먹고, 쉬는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남한강가를 달린다.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얼굴 표정과 마음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출근길에는 늘 보따리를 들고 가요. 수확한 농산물을 이웃이나 친지,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주려고요. 받는 사람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행복감을 대신 받아요.” 이 집에 이사온 이후로 유씨 부부는 사는 데 필요한 적당한 재물과 건강, 이웃과의 화목함을 얻었고, 아이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다.


▎산속의 고즈넉함과 평화로움이 가득한 유씨네 집과 앞마당. 처음 들어와서는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지만 조금씩 땅을 늘려 본채를 짓고 텃밭도 만들었다.
유씨의 어머니도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김씨는 “나이에 상관없이 이곳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가끔은 걸어서 20분 걸리는 마을 노인정에 나가서 마을 노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마을 주민들이 마련해준 각종 여가활동에 참여할 때면 이곳에서의 삶이 ‘축복’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마을 주민과 조화가 귀농의 성공조건

유씨는 “지금의 행복이 우리 가족 만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도 컸다. 유씨는 “도시에서 시골로 와서 전원생활을 하는 데는 초기 1년 동안의 생활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도시인의 귀촌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마을 주민과의 갈등과 불화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고 생활수준이 다르다고 마을 사람들을 멀리하면 결국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같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대접해주길 바라기보다 먼저 그분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먼저 숙이고 먼저 베풀면 그 열 배가 돼서 돌아옵니다.” 유씨가 경험을 통해 말하는 귀촌생활의 성공 요령이다.

아내 김미순 씨도 한마디 거든다. “시골로 들어오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대중목욕탕에 왔다고 생각해야 돼요. 무슨 비싼 장식이 소용이 있을까요? 다들 이세상에 처음 주어진 그 모습대로, 민낯으로 서로를 대하면 됩니다.”

세월리 마을 어르신들은 유씨 부부의 마음 씀씀이를 예쁘게 봐준 덕분인지 어떤 일이라도 제 일인 양 앞장서서 도와준다. 텃밭 농사에도 경운기와 트랙터를 이용해 밭을 갈아주는 것은 물론, 농사짓는 방법도 전수해주었다. 김씨와 시어머니는 마을 어르신들과 어우러져 산에 나물을 캐러 나서는 등 전원생활의 묘미를 만끽한다.

이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는 동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 마을과 수백 년을 함께 해온 이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쉼터이자 때로는 마을회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마을이 잘 되길 축원하는 기원제도 올린다. 유씨는 “도시적 감성으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삶의 진리를 장구한 세월을 말없이 살아온 나무 그늘 아래서 마을 어르신들께 배운다”며 활짝 웃는다.

201406호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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