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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 인파·자본·테러가 춤추는 세계의 심장, 타임스광장 

한·중·일 각축전의 축소판이자 세계 최고 이벤트의 현장… 나스닥에서 점보트론까지 자본주의의 진실과 거짓을 대변 

뉴욕=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타임스광장의 계단형 무대와 왼쪽의 코카콜라 점보트론은 삼성이 소유·운영하고 있다. 반대편이 도시바 빌딩이다.
외국인에게 인상 깊게 새겨질 한국 고유의 특징과 특성을 담은 이미지로 어떤 것이 있을까? 광화문·동대문·세종대왕·명동·북촌마을·북한산…. 그런 것들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까? 건축물이나 대자연이 아닌 인간에 주목하는 사람이라면 서울 명동이나 신촌 나아가 김치 담그는 동네 여인들, 이데올로기나 시대 변화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휴전선이나 명동성당 같은 것을 연상할 듯하다.

미국은 어떨까? 3년 전 접한 시사주간지 <타임> 커버사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커버스토리의 주제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 유효한가라는 것이 주제다. 기사의 결론은, 곳곳에 문제는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전 세계인에게 통용되는 ‘믿음’이란 것이다.

‘잔디밭 풍경’은 전 세계인의 아메리칸 드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표지 사진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은 것으로, 잘 정리된 푸른 잔디밭이 전면에 깔려있다. 세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애완견이 잔디밭 위에 드리워져 있다. 야구를 즐기는 소년, 잔디를 깎는 중년, 애완견을 만지는 여성이다. 소년은 야구 배트를 옆에 둔 채 누워 있다. 인간이 아닌 개도 여성 옆에 누워 있다. 중년 남성은 미국이 ‘자랑하는’ 엄청난 소음의 잔디 깎는 기계를 통해 일직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잔디밭이 가져다주는 평화와 안정감, 스포츠와 애완견이 함께하는 여유와 품격, 기계를 이용한 정리정돈과 무공해 환경…. 아메리칸 드림을 한 컷 사진에 담은 편집진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메리칸 드림을 사진으로 표현할 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풍경이다. 지금 세대는 다르겠지만, 필자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잔디밭에 ‘마구’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잔디를 사랑합시다’라는 게시판에 익숙하기에, 잔디라는 것은 멀리서 지켜보는 ‘관상용(觀賞用)’ 정도로 이해했다. 안에 들어갔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도 많다. 잔디밭 주변은 쇠로 된 단(段)이나 줄로 가로막혀 있었다.

해마다 3900만 명 몰려드는 명소


▎아메리칸 드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타임> 표지사진.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메리칸 드림의 출발점을 상징한다.
축구 전용 잔디구장이 국내에 들어선 것도 1980년대쯤으로 기억한다. 잔디밭에 들어가 고기를 구워먹고, 축구도 하고, 낮잠을 자는 미국인이 부럽고 신기했다. 필자의 안방보다도 더 산뜻하게 느껴지는 미국의 잔디밭이야말로 풍요, 자유 그리고 평화 그 자체다. 어두컴컴한 밤이,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닫힌 공간이 아니다. 인종·연령·성별·신분 심지어 인간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구애받지 말고 마음껏 뛰놀수 있는 공간이다.

‘세계의 교차로(The Crossroads of the World), 나아가 우주의 중심(The Center of the Universe)’. 두 가지 표현을 들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공간적으로 한정한다면 어디가 연상 될까? 정답은 뉴욕 타임스광장(Times Square)이다. 맨해튼 7번가와 브로드웨이를 연결하는, 웨스트 42에서 47에 이르는 사각형 공간이다. 대략 축구경기장 두 개 정도의 크기다. 타임스광장은 미국인 여부를 떠나 뉴욕에 가는 관광객 대부분이 들르는, 첫째 관광명소다.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에 들르거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는 사람도 많다. 발로 걸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타임스광장이다.

<타임>의 잔디밭 표지사진은 아메리칸 드림이란 관점에서의 이미지다. 타임스광장은 세계인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에 들어갈 듯하다. 백악관이나 캘리포니아 금문교, 로키산맥의 독수리 같은 것도 아메리카를 구성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채취가 묻어나는, 사회적 교류를 직감할 수 있는 이미지를 고르라면 다른 답이 나올 듯하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광장이다. 타임스광장은 공간 그 자체나, 주변건물이나 환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도 포함된다. 현란하고 복잡한 주변환경은 물론이고, 1년 365일 24시간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 곳이 바로 타임스광장이다. 하루 평균 33만 명, 1년 3900만 명이 몰려든다. 1분당 대략 2300명이 광장으로 밀려든다. 글로벌 시대 덕분에 국적을 초월하는 환경이기는 하지만, 타임스광장을 찾는 사람의 90%는 미국 밖에서 온 사람들이다. 한국인으로 뉴욕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90% 이상은 타임스광장에 들릴 듯하다.

그동안 타임스광장은 필자의 관심과 무관한 세계였다. 차로 지나치는 경우는 있지만, 엄청난 인파로 압도당하는 인산인해(人山人海)의 공간이 바로 타임스광장이다. ‘흘러가는’ 사람바다가 아니다. 고여 있다. 이유는 2007년부터 등장한 아이폰 덕분이다.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얼굴만 찍는 것이 아니라, 광장 주변 모든 ‘풍경’을 모바일에 넣는다. 큰 태블릿 PC까지 들고 다니며 현장사진을 수집한다.

지난해 3월 <월간중앙> 기고문을 통해 지구를 공식 방문하는 외계인용 특별관광지를 추천한 적이 있다. 맨해튼 5번가 59의 센트럴파크 주변이다. 애플 뉴욕매장, 오드리 햅번의 <타파니에서 아침을>의 현장,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인 플라자호텔 주변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센트럴파크 동문을 낀 곳으로, 최첨단 IT 테크놀로지와 마차(馬車)가 늘어서 있다. 19세기식 여유, 나아가 아름다운 여성의 꿈인 티파니 보석으로 채워진, 과거·현재·미래가 드리워진 곳이다. 필자에게 낭만으로서의 뉴욕은 5번가 59 주변 공간에 한정된다. 뉴욕 어디를 가도 그러하듯 사람이 적은 곳은 없다. 애플 매장은 물론, 바로 앞에 들어선 핫도그 판매점 주변도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원과 플라자호텔 주변에 보인 인파도 엄청나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라 해도 여유가 느껴진다. 뉴욕의 다른 지역에 비해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층짜리 애플 매장과, 역사적 흔적이 느껴지는 플라자 빌딩, 그리고 개와 함께 산책하는 센트럴파크 내 풍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최고의 공로자일 듯 하다.

타임스광장은 빌딩으로 채워진 마천루(摩天樓)속 공간이다. 하늘이 좁다. 보행자 전용공간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과 높은 빌딩숲으로 인해 좁게 느껴진다. 뒤늦게 타임스광장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지난 7월에 일어난 스파이더맨의 ‘횡포(橫暴)’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보도됐지만, 영화 속의 스파이더맨으로 분한 캐릭터(Costumed Character)가 경찰과 싸우다 체포된 사건이다. 관광객이 스파이더맨과 기념촬영을 한 뒤 팁으로 1달러를 주자, 더 달라고 요구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있던 경찰과 시비를 벌이다 폭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의와 용기의 상징인 스파이더맨이 공권력에 도전하고, 마침내 체포된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타락과 네이키드 카우보이의 폭력


▎1 광장 주변에 자리 잡은 거리의 미술가들. 단순히 그림을 그려서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끌어들여 함께 그리면서 판매하는, 참여형 예술가들이다. 2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는 타임스광장. 흘러가는 것이 아닌, 아이폰 덕분에 고여 있는 인간바다의 현장이다.
기사를 접하면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2010년도 제작된 영화 <슈퍼맨을 기다리며(Waiting for Superman)>다. 미국 공교육의 붕괴를 그린 영화로, 미국 학부모들 사이에서 크게 공감을 얻은 작품이다. 복잡하고도 멍청한 갖가지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해 줄 슈퍼맨에 대한 열망이다. 스파이더맨이 경찰을 때려눕히고 더불어 체포된다는 것은 초능력 해결사의 붕괴와 같은 의미다. 가상의 세계에 사는 어린이들 입장에서 볼 때, 경찰에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도 문제지만, 스파이더맨이 경찰에 체포된다는 ‘굴욕(?)’도 충격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 어린이는 중학생이 되어도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다. 초능력 만능 캐릭터에 대한 신앙이 남다르다.


▎돈 세기에 바쁜 미니마우스. 입고 있는 캐릭터 복장이 워낙 무겁고 덥기 때문에 틈틈이 맨 얼굴(?)을 드러낸다.
스파이더맨의 ‘타락’은 이후 또 다른 후폭풍을 불러왔다. 타임스광장 안에 ‘살던’, 또 다른 영화 속의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네이키드 카우보이(Naked Cowboy)’가 체포된 것이다. 조사 도중 폭력을 휘두른 것이 원인이다. 기사를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타임스광장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상황’이다. 전 세계 어린이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살아있는 ‘캐릭터 전시장’이란 점이다. 무려 100여 명의 인간 캐릭터가 타임스광장 안에 잠복해 있다고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동심을 자극하는 갖가지 캐릭터의 집합장소가 ‘우주의 중심’인 타임스광장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수많은 초능력 슈퍼맨의 결전장(決戰場)이 바로 타임스광장이다. 곧바로 달려갔다.

오후 4시쯤 들렀을 때, 언제나처럼 사람바다 그 자체였다. 타임스광장에서 쉴 수 있는, 코카콜라 전광판 앞의 ‘무대’를 향해 몸을 비집으면서 파고 들어갔다. 무대란, 타임스광장을 찾은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삼각형 계단좌석이다. 붉은 카펫으로 만들어진, 비교적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계단이다. 대략 1천 명은 됨직한 사람이 앉거나 서서 뭔가를 열심히 찍고있다. 애벌레나 달팽이를 보면 더듬이를 앞세우며 뭔가를 열심히 탐색한다. 모바일은 언제부턴가 인간들의 더듬이로 변신한 듯하다. 계단좌석의 높이는 15m 정도다. 상석(上席)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봤다. 마천루에 비하면 도토리 키 재기겠지만, 보행자를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 캐릭터들을 찾아봤다. 위에서 보자 인간 속에 파묻힌 캐릭터들의 군상(群像)이 한눈에 드러났다. 대략 20여 캐릭터가 출현했다. 그들의 출근시간은 대략 오후 6시부터라고 한다. 오후 8시쯤 되면 100여 캐릭터가 활동한다고 한다. 뉴욕 곳곳을 돌아다닌 관광객들이 밤이 되면 타임스광장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이들이 던지는 팁이 캐릭터를 광장에 끌어모으는 동인(動因)이다.

헬로키티의 차가운 저주


▎타임스광장에서는 다양한 첨단 비즈니스와 재밋거리도 만날 수 있다. 15초 동안 점보트론 화면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 유명인이 되려 한다면 50달러를 지불하면 된다.
슈퍼맨·미키마우스·배트맨(Batman)·엘모·아이언맨(Iron Man)·원더우먼(Wonder Woman)·테디 베어(Teddy Bear)·캣우먼(Cat Woman)·스폰지 밥(Sponge Bob) 등 눈에 띈다. 필자의 유년시대 때 유행한 것부터, 21세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놀라운 것은 일본발 캐릭터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하녀복(Housemaid)을 입은 평범한 캐릭터에서부터, 포켓몬, 입이 없는 헬로키티, 슈퍼마리오, 닌자 등 다양한 종류의 ‘메이드 인 재팬’ 캐릭터가 광장에 서식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타임스광장 캐릭터들의 활동 내역에 관한 흥미로운 뉴스를 내보냈다. 타임스광장에서 만난 캐릭터 현황이다. 어떤 캐릭터가 많았는가라는 것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이미 활동 중인 ‘선배’ 캐릭터를 고려해 활동하지 않는다. 인기가 있는 캐릭터라면 염치도 없이, 그대로 모방해나간다. 신문기사는 전부 76명의 캐릭터 모델을 대상으로 한다. 1위는 이미 100세는 됐음 직한 미키마우스·미니마우스다. 무려 13명이나 된다. 2위는 <세서미스트리트>의 엘모와 쿠키 몬스터로 전부 11명. 3위는 헬로키티와 자유의 여신상으로 각각 7명. 4위는 최근 3D영화의 주인공 미니온(Minion)으로 5명. 5위는 스파이더맨과 일본의 슈퍼마리오로 각각 4명이다. 드라큘라·파라오·판다도 있지만 최고 인기스타는 미국산 디즈니랜드 미키·미니마우스다. 5위 안에 들어선 일본 캐릭터가 두 개나 된다. 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 등 미국이 낳은 쟁쟁한 캐릭터를 제치고, 헬로키티와 슈퍼마리오가 많은 팁을 찾아 광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캐릭터는 그 사회의 문화나 특성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표정 없는 헬로키티는 ‘3S’로 상징 지워지는 일본인의 모습과 캐릭터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항상 웃고(Smile), 조용하며(Silence), 툭하면 조는(Sleeping) 것이 세계에 비친 일본인의 이미지다. 같은 기독교 서방권 문화이기는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내면은 크게 다르다. 캐릭터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 여행에서 자주 만나는 캐릭터의 특징은 그냥 ‘정지’해 있는 상(像)으로 압축된다. 파리·마드리드· 베를린에 가면 스핑크스와 피라미드에서부터 돈키호테, 자유의 여신상 심지어 부처 같은 케릭터를 볼 수 있다. 1m 정도의 계단을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보통 화장을 한 얼굴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다. 어린이가 다가서도 꿈쩍하지 않는다. 팁을 던져주면 눈이 빙긋 돌아간다. 보기만 해도 어깨가 결릴 정도인데, 어떻게 같은 동작으로 오랫동안 서 있을까? 물론 캐릭터들은 사람이 전혀 없는 때를 이용해 틈틈이 몸을 푼다.

이에 비해 타임스광장에서 만난 캐릭터는 전방위 활동파다. 손님이 될 듯한 사람이 눈에 띄면 아예 그쪽으로 몰려가 호객행위를 한다. 캐릭터 스스로 손님에게 다가가 포즈를 취한다. 물론 촬영이 끝난 뒤에는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팁을 요구한다. 안 줄 수도 있겠지만, 지구를 지키는 용감한 슈퍼맨과 무표정의 헬로키티로부터의 ‘차가운 저주’가 머리 뒤에 따라 붙을 것이다.

유럽과 비교할 때 구별되는 점으로는 고독한 개개인이 아닌, ‘함께’로서의 캐릭터다. 캐릭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면서 사진을 청한다. 이 경우 촬영뒤 각자에게 전부 팁을 줘야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타임스광장의 캐릭터들은 할리우드형 영화에 비교 될 수 있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돈을 찾아나선다.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특유의 포즈도 취하면서 관광객들의 흥미를 북돋아준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자신들이 직접 나선다. 유럽의 경우 혼자서, 그것도 앉거나 서서 기다리는 수동형 캐릭터다.

‘최고, 최대의 하얀 길(The Great White Way)’


▎점보트론을 가장 먼저 도입한 도시바의 원(One) 빌딩. 타임스광장의 얼굴에 해당되는 곳으로 가장 위의 디지털 시계부분에서부터 연말연시 카운트다운이 이뤄진다.
야간경기야말로 스포츠 현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일지 모르겠다. 밤이지만, 낮보다 더 밝은 불빛을 통해 묘한 흥분에 빠지게 된다. 타임스광장은 그 같은 흥분을 24시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타임스광장을 수식하는 말 가운데 ‘최고, 최대의 하얀 길(The Great White Way)’이란 표현이 있다. 이유는 점보트론(Jumbotron)이라 불리는 대형 전광판에 있다. 보통 가로 20m 새로 10m를 넘어서는 초대형 화면이 타임스광장 빌딩 위 아래로 펼쳐져 있다. 희한한 법이지만, 뉴욕시는 타임스광장 내 건물에 대해 점보트론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최고, 최대의 하얀 길을 만들려는 의도로 광장을 24시간 내내 밝히라고 명령한다. 미국의 중심을 세계 그 어떤 도시의 번화가보다도 밝게 만드는 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백악관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공습에 불안해 했다. 진주만을 공격한 제로센 전투기의 순항거리는 무려 3500㎞에 달한다. 성탄용 ‘내셔널 트리(National Tree)’는 백악관이 자랑하는 크리스마스 전통이다. 백악관 앞뜰에 거대한 소나무를 세워, 51개 주에서 보내온 갖가지 선물과 염원을 장식하는 행사다. 군인들은 일본군 공습의 타깃이 될 수 있다고 내셔널 트리 설치에 반대한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 같은 제안을 무시한다. 불빛이 밝다는 것, 환하게 열려 있으며 모두가 볼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의 장점이자, 특성이라고 말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밝은 도시가 미국내 거리라는 것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화신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시끄럽고 소음이 많을수록 문명국이다. 열차가 다니고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로 잠을 깬다는 것, 그것이 바로 문명이자 발전이다.” 20세기 초 춘원(春園) 이광수가 갈파한 말이다. 아침이 와도 아무런 변화도 없고, 어둠 속에 긴긴 밤을 지샌 나라가 20세기초까지의 한국이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고, 강남의 밝은 불빛으로 인해 전기료가 걱정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과거지향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문명과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나라의 모습이다.

IT 수준의 결과는 모바일이나 컴퓨터 같은 곳에 그치지 않는다. 점보트론을 통한 경쟁도 IT의 수준을 증명해 보이는 좋은 본보기다. 점보트론은 얼굴에 점이나 피부의 빛깔마저 선명히 비쳐주는 LED 기술에 기초한 것이다. 선구자는 접는 점보트론을 처음으로 선보인 일본의 도시바(東芝)다. 올해 노벨상을 받은 3명의 일본인 과학자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LED다. 도시바가 설치한 최초의 점보트론은 월스트리트 시황(市況)을 알려주는, 43번에 있는 나스닥 전광판이다. 빌딩 전체가 큰 점보트론으로, 나스닥에서 보내오는 증시현황과 정보가 올라온다.

자본주의의 대부(代父) 미국은 친절하고도 부지런하다.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을 위해, 초대형 점보트론 디지털 경제지표를 온라인으로 제공해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잔디밭은 기온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1년 365일 푸르고 깨끗하다. 그 같은 쾌적한 상황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원동력은 바로 돈이다. 자유·문화·평등 같은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의 최고봉은 자금력에 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강국인 한, 아메리칸 드림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타임스광장·나스닥·점보트론은 그 같은 자본주의의 진리와 현실을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학습장이다.

코카콜라와 중국은 한통속?


▎중국인은 타임스광장을 인간바다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다. 중국어만 통하는 관광 흥행사들도 넘쳐난다.
타임스광장에 설치된 점보트론은 크게 볼 때 양대축으로 구성돼 있다. 43번 25층짜리 ‘원(One)’ 빌딩을 차지한 도시바의 일본세(勢)와 반대편인 46번에 들어선 한국세(勢) 빌딩이다. 한국세는 삼성을 지칭한다. 점보트론 자체는 미국 다크트로닉스(Daktronics)의 제품이지만, 소유권과 운영권을 삼성이 갖고 있다. 남쪽 43번의 도시바는 무려 7개의 초대형 점보트론을 빌딩 벽면 전체에 깔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디지털시계·뉴욕시·도시바·TDK·던킨도너츠·버드와이저·소니 등이다. 반대편인 북쪽의 36번의 삼성은 위로부터 기준할 때, 중국 신화사(新華社)뉴스·삼성·코카콜라가 들어서 있다. 도시바는 광고주를 뉴욕시·일본·미국으로 하지만 삼성은 중국관영통신사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를 끼고 있다. 2014년 겨울의 한국·중국·일본의 외교적 상황을 알려주는 징표는 동아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의 교차로, 우주의 중심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 코카콜라가 ‘악(惡)’의 음료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코카콜라의 미래는 13억 인구의 중국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한국·중국이 서로 대치하며 마주보는 것이 타임스광장 점보트론의 구도이다.

타임스광장은 12월 31일과 신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 전 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연말연시 특집방송의 고정 출연물이다. 해가 바뀌는 12월 31일밤 12시 정각, 전 세계를 통틀어,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 타임스광장이기도 하다. 정확히 매년 12월 31일 오후 11시59분1초부터, 다음해 1월 1일 0시0분1초 직전까지의 60초간 이뤄지는 카운트다운이다. ‘이브 볼(Eve Ball)’로 불리는 대형 크리스탈 볼의 하강식이 60초간 이뤄진다. 이브 볼이 내려오는 1분 동안 지난 365일의 기억과, 앞으로 닥칠 365일에 대한 다짐이 이뤄진다. 한때 한국의 애국가로도 불려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 울려퍼진다. 신년에 접어드는 순간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뉴욕’이 곧바로 광장을 뒤덮는다.

연말연시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모이는 사람은 최소한 100만여 명에 이른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전세계 10억 명에 달한다. 서울·런던·파리·로마·홍콩 등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신년 카운트다운이 이뤄지지만, 타임스광장은 그들 중 하이라이트에 해당된다. 카운트다운은 도시바가 있는 43번 빌딩정상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43번 광고단가는 반대쪽 삼성 점보트론을 압도한다. 타임스광장 내 수많은 점보트론 가운데 최고 명당은 카운트다운의 현장인 43번 빌딩 쪽이다.

백악관 불빛을 시민에게 보여주는 나라

2009년 카운트다운 때 간 적이 있지만, 12월 31일 점보트론 전광판 그림자를 보려면, 대략 낮 12시쯤부터 기다려야 한다. 간이의자와 영하 10도에 맞설만한 두툼한 옷,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자리를 지키려면,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물도 조금씩 마셔야 한다. 맥도널드 타임스광장 매점은 미국 내 최고의 매상을 자랑한다. 카운트다운 관련 기억이 선명히 남은 것은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참고 참으며 기다린 한 시간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행복이 넘치는 곳에는 악마의 흔적 또한 선명하다. 타임스광장은 전 세계 테러리스트가 노리는 테러 가능성 1번지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와 테러를 행한 뒤 쉽게 빠져 나갈 수 있다. 연말연시 카운트다운 이벤트는 뉴욕 경찰은 물론, 퇴직경찰들까지 총동원되는 초비상의 현장이다. 올해 2월 사방팔방의 점보트론을 통해 방송된 슈퍼볼 중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00만명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테러에 대한 경계도 최고 수위로 올라간다. 만약 시장 입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사실 슈퍼볼 중계를 해도, 안 해도 그만이다. 만약 테러가 있을 경우 사망자 규모가 엄청날 수 있다. 아무리 초강력 치안에 들어간다 해도 어딘가 빈틈이 생길 수 있다. 그만두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아무리 험악한 상황이라 해도 100만 명 이벤트를 강행하는 곳이 뉴욕시다. 피하고 도망갈 경우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을 고무하면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믿는다.

타임스광장은 이미 두 번의 테러 타깃이 된 경력을 갖고 있다. 2008년 3월 테러와 2010년 3월의 테러 기도다. 2008년의 경우 작은 폭탄이 터지기는 했지만, 피해자는 없었다. 2010년의 경우 장시간 세워진 자동차가 이상하다고 알린 매점 장사꾼의 제보로 미수에 그친다. 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위험한 곳이라고 하지만, 실제 광장에 가면 경찰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공권력이 아니라, 눈에 안보이는 과학적 방법으로 테러를 방지하고 있다. 열추적 로켓탄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백악관 침실의 불빛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뉴욕의 100만 이벤트도 마찬가지다. 용기와 낙관주의는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21세기 타임스광장은 시대의 흐름을 전해주는 현장에 해당된다. 중국과 인도다. 중국인과 인도인 관광객이 넘치고 넘친다. 중국인의 경우 인간바다를 구성하는 가장 큰 구성요소다. 타임스광장 구석구석에 중국인을 상대로 한 호객행위가 벌어진다. 관광버스·음식점·선물 가게 등으로 데려가는 흥행사들은 아예 중국어만 사용하면서 돌아다닌다. 타임스광장은 담배가 금지돼 있다. 위반자는 벌금 50달러를 문다. 그 같은 정보에 둔한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경찰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붙잡을 경우 언어문제와 나아가 인권문제로 시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담배를 피우는 중국인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전부 잡아낼 수도 없다.

범죄 소굴에서 디즈니피케이션의 발상지로

인도인의 경우 관광객만이 아니라, 인도가 자랑하는 최강의 ‘소프트파워’를 통해 타임스광장을 장악한 상태다. 인도 총리 모디(Modi)가 최근 유엔총회에서 제안한 국제 공휴일의 주인공, 바로 요가(Yoga)다. 가끔씩 해외토픽처럼 보도되지만, 타임스광장은 1만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 시범을 보이는 초대형 요가 이벤트의 산지다. 2002년부터 매년 시행하는 행사로, 타임스광장에 이어 파리·런던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도쿄(東京)도 추진하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도 국제 요가 이벤트가 벌어질지 모르겠다. 육체적 건강함은 물론, 정신적 평화를 얻자는 메시지가 요가 이벤트의 의도다.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뉴요커는 요가를 티베트불교의 달라이라마로 연결시킨다. 요가·불교·선·달라이라마는 뉴요커가 최고가치로 받아들이는 21세기형 이데올로기에 해당된다. 타임스광장은 ‘행동’으로서의 요가를 실천하는 세계평화 훈련장에 해당된다. 믿어지지 않지만, 타임스광장은 1980년대까지만해도 사람이 다닐 수 없는 범죄의 현장이었다.

1984년 기준으로 연평균 2300여 건의 각종 범죄가 일어나고, 그중 460건은 성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대형범죄였다고 한다. 존 보이트(John Voight) 주연의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Midnight Cowboy)>에 등장하는, 매춘과 폭력이 뒤섞인 범죄의 현장이 바로 타임스광장이다. 공중전화 동전 반환구 아래를 훑는 것이 뉴욕 빈민들의 ‘습관’이란 것을 안 것도 영화를 통해서다. 혹시라도 동전 반환구에 돈이 남아 있을까, 전화기마다 전부 손가락을 넣어 재삼 뒤진다. 동전을 하나하나 뒤지는 노력도 대단하지만, 잊어버리고 동전을 그대로 두고 가는 미국인도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0년대 초 줄리아니 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광장 주변에 대형건물 건축을 허락하면서 사람이 즐겁게 들릴 수 있는 관광지로 개발한다. 대형건물이 들어서면서 주변의 작은 상점들이 붕괴하자, 시민들 사이에서 반대 의견이 인다. 당시 등장한 신조어(新造語)가 디즈니피케이션(Disneyfication)이다. 건설업자들이 타임스광장을 디즈니랜드처럼 획일적으로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 디즈니피케이션의 골자다. 고유한 지방색을 무시하고 획일적 컬러로 나가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원조에 해당되는 것이 디즈니피케이션이다. 흥미롭게도 디즈니랜드 본사는 인형 판매 매장을 타임스광장 안에 설치해둔 상태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관광객이 들르는 타임스광장 내 필수코스다.

시민들의 비난과 반대를 근거로, 이후 뉴욕시는 다양한 모습의 타임스광장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건물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행자 전용도로를 만들고, 그린(Green)정책의 모델로 광장 전체를 재단장한다. 불과 20여 년 만에 새롭게 탄생된, 뉴욕의 얼굴을 일신(一新)한 테마파크가 바로 타임스광장의 현재 모습이다. 연말연시 이벤트만이 아니라, 요가 이벤트, 슈퍼볼 중계처럼 전 세계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세계 최대·최고의 이벤트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임스광장의 오늘이자 내일이다. 뉴욕은 잠들지 않는다. 타임스광장의 불빛과 정신은 전 세계를 밝히고 깨어있게 만드는 21세기의 심장에 해당된다.

유민호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 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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