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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시인 박경희의 충남 보령 - 내 어릴 적 고향 집은 길이 되었다 

서해바다 대천항과 성주산, 오서산 등 바다와 산을 함께 품은 곳… 이문구, 김성동, 이혜경, 김종광 등 큰 숲을 이룬 문향 

글 박경희,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서해의 해넘이가 아름다워 매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이다.
고향? 고향은 떠나봐야 안다. 고향이라는 향기가 얼마나 늙었고, 애처롭고, 쓸쓸한지 알려면 일단 길을 떠나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면 비 그친 날,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켜켜이 쌓인 고향의 주름살이 제대로 보인다.

내 고향 보령은 바닷바람의 비릿한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흐른다. 앞에는 팔팔 끓는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뒤에는 소나무가 울울청청 바람으로 기우는 성주산(聖住山)이 있다. 누구나 어느 곳을 가든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살기 좋은 고장이다. 자신이 태어나 가슴이 기우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것이다.

내 시가 태어난 곳, 내 시가 기둥을 올려 지붕을 얹은 곳도 보령이다. 내 집이 지어지고 터를 넓혀가고 있는 곳도 바로 이곳 보령이다.

앞니앞니가 빠지고 등이 굽은 외정 마을에 사는 최씨 할아버지/ 손등은 감나무 껍질 벗겨진 듯 꺼칠하다/ 고집은 쇠스랑에 걸어두어도 좋을 듯한데 쉰내 나는 오토바이 한 대/ 동무 삼아 산 지가 손꼽아도 손가락이 모자라다/ 어디 탈탈거리며 늙어가는 일이 쉬운가/ 앞집 권 노인 농약 하다 쓰러져 콩밭으로 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자/ 끌끌거리던 경운기마저 주저앉았다 자전거로 달리던 삽자루에 핀 녹 푸른 나팔꽃/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무르팍 해진 자리에 헝겊을 덧대 서로 덮어주는 일/ 환삼덩굴이 제 손바닥 안에 별을 들여앉히는 일/ 권 노인 보내고 쭈그려 앉아 대문 밖만 바라보다가/ 수숫대 모가지에 달라붙는 새 떼만 쫓는 하루/ 번호판 왼쪽 찌그러진 삶처럼 그래도 탈탈거리며 가는 논둑길/ 쭈글쭈글 달라붙는 대추나무 길 (졸시 ‘늙어 간다는 것’ 2012)

내가 살던 집은 모두 길이 되었다. 그 길 위에서 어린 시절을 그려보았고, 집과 마당을 그려봤다. 대문이 없었던 집은 햇살을 있는 대로 받아들였고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렸으며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영락없이 눈 집이 되었다. 그 안에는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삼 남매의 웃음이 있었다. 웃풍 가득 허연 입김이 창문에 서려 엄니의 연탄 걱정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어릴 때, 방문을 열면 와글와글 개구리 울어댔던 논 위로 아파트가 들어섰고,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던 수멍에 뛰어들어 놀았던 곳은 도로가 되었다. 비 내리는 밤에는 발 없는 여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뒷동산은 3층 건물이 들어 서 있고 보리를 훑으며 몰래 구워 먹었던 밭 모퉁이 양지는 쓰레기가 가득 놓여 있다. 학교 가는 길가에 탱자나무 울타리는 진즉에 없어졌고, 수십 년 된 감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놓았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변했다. 아부지가 살았던 마지막 집은 구획정리로 차분하게 정리되어 길이 되었다. 해서, 내 어릴 적 고향은 모두 길이 되었다.

으악새가 서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으내 휘청거리는 오서산. 까치와 까마귀가 많이 산다고 하여 불리는 오서산은 서울을 등지고 앉아있다. 어느 어르신 말씀을 빌리자면 옛날 옛적에 오서산은 한양을 등지고 앉아 있어 역적의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그리하여 산봉우리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설도 내려온다. 여기저기 들리는 이야기를 쓰자면 동네 어른신의 주름살 깊이만큼 많은 것이 오고 가지만, 전해오는 설도 설인 만큼 그저 듣고 웃을 뿐이다.

바다로 흐르는 오서산 억새꽃


▎까치와 까마귀가 많이 산다는 오서산에는 으악새가 서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으내 휘청거린다.
오서산은 보령시를 비롯하여 청소면, 청라면, 홍성군 장곡면과 청양군 화성면으로 쭉 걸쳐있고, 주봉은 790.7m로 충남에서 둘째로 높다. 봉우리는 열두봉으로 기암괴석과 억새밭이 휘몰아치는 능선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부와 전북 군산 등을 바라볼 수 있는 명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서산 골골이 환하게 풀풀 날리고 있을 억새가 바다 쪽으로 흐르고, 그 아래 둥지를 틀고 사는 마을은 오서산의 기운 받으며, 푹푹 주저앉는 지붕을 벗삼아 많은 이들이 살았다. 물론 지금도 살고 있다.

그중에 울 아부지는 오서산이 품은 누런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젊은 날을 빨간 마후라로 내달리다가 보령 시내로 나와 당신 삶의 귀퉁이를 툭 잘라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저승길로 가셨다.

막내 삼촌이 초등학교 시절(1980년대) 오서산 억새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우연히 5천원짜리 지폐를 주웠다는데, 그때 당시 5천원은 큰돈이었기에 집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자리에 돌멩이로 묻어놓고 왔다는데, 그 돈 찾지도 못하고 훌쩍 커버린 삼촌은 5천원을 기억이나 할는지. 오서산을 병풍으로 삼은 마을은 자기만의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어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아들에서 손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상수리나무가 기우뚱거리며 뒷간 쪽으로 넘어질듯 서 있던 자리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섰고, 샘터에서 있던 향나무는 속이 썩어 옆으로 기운 지 오래되었다. 하나 둘 속속들이 변하고 있는 시골의 고요는 노인들의 밭은기침으로 깨지기도 하지만 금방 제자리로 돌아간다.

오서산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한겨울 청천 저수지가 쩡쩡, 우는 소리를 집필실에서 들었을 이문구 선생님의 그늘이 있다.

아부지와 형을 잃고 떠난 보령에 돌아와 작은 집필실에서 많은 작품을 쓰셨던 이문구 선생님. 집필실 마당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고,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숨막히는 눈매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그때가 눈부신 태양처럼 떠올랐다. 흔들려도 좋을 순간들이 저수지에 부리를 담그고 가는 황새 마냥 환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봉분을 만들지 말고, 당신이 살았던 뒷산에 재로 뿌려달라, 말씀하셨던 분. 그분을 만나기 전 편지로 먼저 뵈었던 분. 우연히 기차역에서 만나 옷자락을 붙잡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내내 서 있었던 기억이 청천저수지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제목으로 쓰인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 같지 않은 나무이지요. 그렇다면 덩굴이냐, 덩굴도 아니지요, 풀 같기도 한데 풀도 아니고 그러나 숲을 이루는 데는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이지요. 꼭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한 황장목 같은 근사한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돈없고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문구 선생님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에 쓴 글이다.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참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이다.

사라져가는 농촌의 실생활을 사투리로 촌스럽게 때론 능청스럽게 썼던 이문구 소설가의 고향이 보령이다. 이분을 비롯한 김성동, 이혜경, 안학수, 서순희, 김종광 등 많은 문인이 보령에서 태어나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보령은 바다와 산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문학으로 승화 시킬 작가가 숲을 이루고 있다.

화장골, 그 고운 줄기에 핀 성주


▎사라져가는 농촌 생활을 사투리로 능청스럽게 썼던 고 이문구 작가의 고향이 보령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굽이굽이 흘러가다 보면 탄광촌을 만난다. 물론, 폐광된 지 오래되었지만 그 잔재들이 조금씩 남아 구절초 향기로 흐르고 있는 성주면 개화리. 지금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폐광의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치고 지나가고 성주산 그늘에 젖어든 한적한 마을로만 남아 있다.

1980년대, 성주산 일대에는 석탄 채굴이 활발했다. 보령 시내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석탄 채굴작업을 했다. 지금은 도시가스나 기름보일러가 대신하지만, 그때는 연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석탄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성주산과 옥마산을 중심으로 보령탄전에서는 무연탄이 1950년대 말부터 채굴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연간 채탄량이 150만 톤을 넘었다. 이처럼 석탄산업이 활발할 때, 지나는 이들을 가락으로 불러들였던 주막이 번창하였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의 문지방이 닳았으며, 북적북적 많았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한때 보령 경제에 큰 힘을 주었으니, 이는 실로 대단한 산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인들의 시력만큼이나 희미해져 가고 있는, 마을 숨소리에 가릉가릉 시간만 덧 대어지고 있다.

바람에 휘어진 수숫대를 베는 주름진 손이 바쁜 날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머츰하고, 개 짖는 소리가 골 안에 흐른다. 돌아보니 밭은기침 소리 가득히 성주산 윗머리가 붉게 물들며 내려오고 있다. 가을이라는 길목에 선 성주가 깊숙이 받아들인 건, 번창했던 탄광촌의 웃음소리와 창문에 덧댄 비닐의 울음소리뿐이다.

툇마루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간간이 못 물결로 우는 소쩍새와/ 대나무 숲에서 휘청이는 파랑새 떨림이 내 안에 든다/ 뭉텅이로 앞산을 지나가는 산 그림자/ 참나무 숲도 무르팍 같은/ 큰 바위를 쓸고 간다/ 채반 가득 고사리 말라가고/ 늘어지게 하품하며 늙어가는,/ 개밥 그릇에/ 박새가 여러 번 왔다 간다/ 그런데,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흙 묻은 고무신 한 켤레 댓돌 위에/ 앉아 있을 뿐,/ 다람쥐 자갈 밟는 소리에/ 넘어지는 햇살만 있을 뿐,/ 어느 날/ 나는 사람이 아니다 (졸시 ‘윤슬에 출렁이다’ 전문)

산이 포근하게 감싼 마을을 돌아 슬슬 걸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숨은 보물찾기 마냥 두근거리고 긴장감을 꽉 쥐게 하는, 화사한 곳이 나타난다. 이름하여 화장골이다. 성주산 일대에 모란형 명당이 여덟 개가 있는데, 그중 한 곳이 화장골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화장골은 물맛이 좋다. 충남도가 수질과 인근 자연환경이 뛰어난 계곡, 폭포 등 31개소의 후보지를 추천받아 1999년에 선정한 충남 명수(名水) 11개소중 하나다. 자연환경이 잘 보전되고 있는 청정지역으로 계곡 가득히 상수리나무, 고로쇠나무, 굴참나무, 때죽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4㎞에 이르는 이 숲길이 삼림욕을 즐기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물론, 각 계절마다 느끼는 마음가짐은 다르나 개인적으로는 가을에 걷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 같다. 가을볕을 받으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도 듣고 슬쩍 지나가는 다람쥐의 발걸음도 따라가 보면, 어딘가에서 반갑게 손 흔들고 있을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성인이 사는 절, 성주사지


▎1 성주산 휴양림은 4㎞에 이르는 숲길이 삼림욕을 즐기기에는 딱 좋다. 2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어업을 생업으로 달고 사는 죽도 사람들은 선착장에서 직접 배를 몰고 먼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성주산 옥마봉 아래, 너른 터가 있다. 이곳은 성인과 선인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의 성주 품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성주사지다.

성주사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곳으로 이 시대에 번성했던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하여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 정도이며 성인이 사는 절이라 하였다. 성인은 곧 명무염국사를 일컫는데, 무염국사는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워와 성주산문을 만든 인물이다. ‘해동신동’으로 불렸으며 13세 때 승려가 되어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불렸다고 한다. 무염국사가 성주사에 머물 당시, 정진하는 수도승이 2천여 명에 달했고, 불전이 80칸이요, 수각이 7칸, 고사가 50여 칸 등으로 아주 큰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성주사의 터만 봐도 그 규모가 엄청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국보 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다. 무염국사가 입적한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최인연이 글씨를 썼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현재 전해져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 가장 큰 규모이며 글씨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이니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비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이 보물 제20호로, 성주사지서(西) 삼층석탑이 보물 제47호로, 성주사지 동(東)삼층석탑이 도지정 유형문화재 26호, 성주사지 석등이 도지정 유형문화재 33호, 성주사지 석계단이 문화재 자료 140으로 남아 있다.

어느 곳을 가나 흔적을 지우는 바람을 잡지 못하고 늙어간다. 굽이치는 촌으로 들어갈수록 온갖 것의 소리는 선명해지고 나무와 산 그림자가 짙어진다.

바위도 늙고 늙어서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모래로 변한다. 나무도 늙으면 가지를 스스로 놓아버린다. 그러나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돌이 있는데, 흑색 사암으로 까마귀 깃털처럼 검고 윤기가 난다는 남포 오석이다.

까마귀 빛깔로 빛나는 오석


▎보령의 오석은 흑색 사암으로 까마귀 깃털처럼 검고 윤기가 난다. 보령의 오석 전시장.
보령에서 나오는 오석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이 남포현으로 되어있어서 남포 오석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몸체가 오석으로 되어있으며, 천 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겉면이 매끄럽고 모양이 곱게 보전되었다. 또한, 비문 글씨가 또렷하게 남아있어 천년 세월을 견뎌 왔다고 하기에는 돌의 질이 뛰어나게 좋다는 것이 오석의 장점이다.

까마귀가 많이 산다는 산에 까마귀 깃털처럼 윤기가 흐르는 돌이 보령을 감싸고 있으니 여기저기 둘러봐도 살기 좋다고 한목소리가 되어 나온다. 허나, 누구든 자기 고향이 최고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해도 다 똑같다.

검은 돌 위로 바람이 흐르고, 산 그림자가 내려앉고, 억새가 휘어져 흩날리니, 우리네 고향은 늘 그렇게 흐름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

내 집은 보령이다/ 날마다 집으로 뻗은 장항선을 바라보는 게/ 일이었다/ 뜨끈하게 달궈진 철길을 바라보면/ 기차가 지나간 자리마다 배꽃이 가득했다/ 집을 떠나왔을 때는 몰랐다/ 저릿한 느낌이 배꽃의 진한 향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콕콕, 까치의 부리 자국이 깊게 파여 바닥에/ 떨어져도/ 단물은 씨방에서 싹을 키운다는 것을/ 수로를 끼고 있는 잡풀 가득한 과수원에서/ 깊은 발자국을 덮은 구름만이/ 웅덩이 속으로 흘러갔다 (졸시 ‘종이 비행기’)

길을 타고 천천히 흘러가다 보면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의 중간에 있는 죽도를 만날 수 있다. 죽도 앞바다에는 고려청자 매몰지역으로 사적 제 3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섬의 위치는 보령 현으로부터 서쪽으로 19리 지점이며 <여지도서>에서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도는 대섬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대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대나무가 울창한 섬이 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대섬으로 건너가기 위한 나루인 ‘대나루’가 남포면 월전리 영전(令田) 마을의 서쪽에 있었다. 한때는 섬이었으나 남포 간척지 공사로 인해 방조제가 서면서 죽도는 육지로 연육되어 섬 아닌 섬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굴 따고 대수리 줍고 돌게까지 잡을 수 있는, 낚시꾼들에게도 인기가 좋아서 사시사철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삶의 여유를 즐기는 곳인 죽도. 어업을 생업으로 달고 사는 죽도 사람들은 선착장에서 직접 배를 몰고 먼바다로 나가 작업을 하고 돌아와 물것들을 판다. 2001년 당시 죽도에는 서른일곱 명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 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대천항


▎성주면 개화리 탄광촌은 폐광된 지 오래됐지만, 그 잔재가 조금씩 남아 구절초 향기로 흐르고 있다.
대천해수욕장 하면 솔숲이 생각난다. 초·중·고 모두 소풍은 해수욕장이었다. 유일하게 넓고 아무리 소리 지르고 놀아도 뭐라 말하지 않았던 곳이 바다 였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천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그 솔밭에 자리를 펴고 앉아 수건돌리기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며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이다. 어릴 때 기억을 되짚어 보면, 모래밭에 어떻게 소나무가 울울청청 서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도 하고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어떻게 온몸으로 맞고 서 있는지도 신기했다. 솔숲 사이사이 텐트를 치고 여름을 나는 객도 많았고, 솔 냄새와 바다 냄새를 맡으며 걷는 연인도 많았다. 물론, 지금도 송림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다. 해수욕장 변화의 바람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고 셌다.

1930년대부터 외국인을 상대로 휴양 단지를 조성해 현재의 대천해수욕장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고, 보령시에서 주최하는 머드축제를 세계축제로 변화시켰다. 머드 체험관, 수상 스키와 요트 등 다양한 레저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하얀 조개껍데기가 부서져 만들어진 백사장을 걸으며 무인도인 다보도를 바라보고 바다 깊숙이 떨어지는 태양을 보면서 그 붉음에 젖기도 하는 곳. 해넘이가 아름다워서 매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무리를 하고자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 더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슬쩍 내비쳐본다.

통통거리며 통통배가 지나갔다. 깃발이 흔들리고 배가 들어온다며 갈매기가 선착장 근처에서 하늘을 돌며 울었다. 비릿한 냄새가 먼저 반기는 곳. 가는 곳곳마다 많은 물것이 소매상의 손길을 기다리며 배때기를 내밀고 있는 곳.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곳이 바로 보령 어항이다.

만선의 기쁨을 경적으로 울리며 파도를 가르고 먼 바다에서 돌아올 때면 내 가슴부터 뛴다. 어판장 가득 울리는 경매소리 위로 어부들의 표정에서 기쁨과 실망이 가림 없이 나타난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물고기들이 온몸에 힘을 실어 밀어 올렸다. 어항의 불빛이 파도로 흔들릴 때, 아부지 엄니는 그물을 손질하고 어둠을 꿰매고 있었다. 붉은 함지박을 필사의 힘으로 기어오르는 낙지와 주꾸미는 바다를 향해 가고 파도는 그렇게 육지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안면도 끝 실밥처럼 나부끼는 영목 너머/ 옷고름으로 풀어진 대천항, 바람을 끌고 가는 파도는/ 그녀가 놓고 간 젖 내음/ 옷깃을 여밀수록 서늘한 영목 너머/ 풀어진 단추 구멍으로 바람을 밀어 넣는 대천 항을 바라본다/ 갈매기 소리, 빚쟁이에 쫓겨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그 소리, 발을 절며 더디게 오는 어머니/ 복사뼈처럼 튀어나온 섬 끝/ 부리 굽은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 버캐가 하얗다/ 이삿짐 보따리 놓고 골목길 끝에서 쭈그리고 앉아 듣던 쩔뚝이던 발자국/ 어깨 위로 눈이 쌓이고/ 눈 보라 속에 쭈그리고 앉은 갈매기/ 겨울이 툭, 건드리면 쓰러져버릴 항구에서/ 눈보라로 날고 있는 어머니(졸시 ‘겨울 항구’)

복닥복닥, 지글지글 살아가는 사람들


▎만선의 기쁨을 담아 들어오는 고깃배들이 경적을 울리며 항구로 돌아올 때면 내 가슴도 고동소리를 낸다.
가을은 그렇게 가고 겨울은 저녁 굴뚝 연기 가득한 산허리를 붙잡고 오는 중이다. 아부지, 엄니가 계신 곳. 그 뿌리가 땅속에 박혀 그 끝이 머무는 곳에 고향이 있다. 그 안에서 복닥복닥 살아가고, 애면글면 살아가고, 지글지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아까, 가게 갔다 오다가 보니께 창수 아부지가 배추밭 다 엎고 있더구만, 그 집에 뭔 일 있대? 거의 다 키운 것들 경운기로 뒤집드라고."

“배춧값이 똥값이니께 승질 나서 그라는디, 에휴, 창수 아비도 승질 좀 죽이고 살지 그여 일을 쳤구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는 장날에 가서 그냥저냥 팔지 왜 엎어. 아깝더구만. 아니면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주던가.”

“너 같으믄 배추만 보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디 그걸 나눠주겄냐?”

“왜 못 줘? 그리 다 죽이는 것보다야 낫지.”

“오죽허믄 자슥 새끼 돌보듯 한 것을 그리 엎겄어.”

“그러니께 중간 상인 걸치지 말고, 발로 뛰어서 팔믄 비룟값은 나올 것 아녀?”

“그걸 왜 모르겄냐. 그게 맴처럼 안 되는께 그렇지.”

“해보지도 않고 왜 안 된다고 그려?”

“저년이 뚫린 게 입이라고 막 던지는구먼. 왜 안 해봤겄어. 이것저것 해도 안되니까 승질 나서 그러지.그 속이 염전일 껴. 거시기 비룟값도 안 나온다고 허더만. 세상살이가 그리 쉽깐? 나도 접때 가서 말렸봤는디 아무 소용 없었당께. 여기저기 생채기 난 손 보니께 맴이 아프더라고. 농사꾼은 천상 농사꾼인디 우째 살아갈지 참말로 모르것당께. 허기사 나도 나를 모르는디 넘들 나를 알겄어.”

“아주 노래를 허지. 거시기 타타타!”

“니 년이 뭘 알겄냐, 농사꾼 맴을.” (산문 ‘농사꾼 맴’ 중에서)


박경희 - 1974년 보령에서 태어나 한신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2001년 시 전문지 <詩眼> 신인상을 수상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벚꽃 문신>,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가 있으며 2013년 제3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에 나타난 농촌과 민중들은 우리가 상실한 공동체적 친화력의 근원적 결속감을 잘 보여준다. 친화력과 결속감의 안쪽에 사금파리처럼 숨어 있는 현실의 고통조차도 효모처럼 담담하고 부드럽게 발효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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