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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연재 ② 지성과의 만남 | 조인원 경희대 총장 - “우주적 사고로 시민의식 일깨우자” 

정치와 권력은 시대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 인간은 참여 통해 삶 개척하고 미래 열어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① ‘압축 시대’를 넘어 ‘사유 혁명’의 미래로 ② 인간적 사유, 우주적 사유 ③ 주체의 재구성―포월(包越)의 초대 ④ 인문정치, 지구정치, 소임정치의 가능성

▎우리는 관계 맺고 있는 그 무엇, 대상과 세계를 인간화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세계에 대한 확신을 쌓아간다. 조인원 경희대 총장은 “우주적 사유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사진·지미연
삶 은 많은 인과관계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의 인과관계에서 우주를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유한다. 인간 정체성의 핵심은 사유다. 사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발견과 확인과 부정이다. 우주도 사유할까. 만약 그렇다면 우주의 사유를 인간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만약 우주가 사유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우주를 대신해 사유해야 한다. 사실 인간은 태고부터 그렇게 해왔다. 문명과 과학의 발전은 우주적 사유의 산물이다.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시대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주적 사유를 인간적 사유로 포섭하면 가능하다. 인간적 사유와 우주적 사유는 오늘의 좌표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조인원 경희대 총장은 메타폴리틱스(metapolitics)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조 총장은 인터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발문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결코 하늘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아마 하늘 자신도 알지 못하리라.”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프랑스 사상가)의 성찰이다. 우리는 관계 맺고 있는 그 무엇, 대상과 세계를 인간화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세계에 대한 확신을 쌓아간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싼 경이로운 복잡성은 언젠가 미래의 우리를 미소짓게 할 것이다. ‘해가 뜬다.’ ‘계절이 바뀐다.’ ‘우주는 팽창, 혹은 수축한다.’ 인간의 우주에 관한 관찰과 인과(因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인류가 쌓아온 위대한 발견이다. 그러나 그 위대함의 본질은 인간의 제한된 상상과 사유의 소산이다. 영원한 시간 앞에 모든 관찰과 인과의 세계는 언젠가 붕괴한다. 예정된 파국과 함께 인간은 우주와 세계를 끊임없이 인간화하고, 알 수 없는 영원한 ‘태초의 미래’를 살아갈 뿐이다. 그런 삶의 조건에서 인간은 인간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불확실한 ‘우주적 사유’를 또다시 오늘로 불러와야 한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Cosmos: A Spacetime Odyssey)>와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열풍이 불러온 우리 사회의 ‘우주 신드롬’을 어떻게 보는가? 정치학자로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나?

“놀라운 현상이다. 사회에 잠재된 대중적 소망, 혹은 갈망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소회를 갖는 이유는 인간· 우주·현실·상상·미래와 같은 불확정적 소재를 담아낸 창작물에 표출된 광범위한 뜨거움 때문이다. 21세기 초엽에 들어선 현대사회는 최근 별세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표현 처럼 ‘위험사회’다. 지구촌 도처에 산재한 자연적, 인위적 위험, 그 위험과 함께 깊은 불안과 심려의 심리가 확산되는 것 같다. 2011년 우리를 놀라게 한 이웃나라의 쓰나미 참사와 원전 위기, 지난해 참담한 현실로 다가선 세월호 사건은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에 무심한 우주와 자연, 정치의 모순에 평생 주목했던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 폴란드 작가)의 시적 응시처럼, 이 ‘짤막하고도 순진한 질문’이 새삼 불안과 위안의 실존의식을 일깨운 것이 아닌가 한다.

오랜 세월 정치학에 관심을 둬왔다. 비주류 정치학의 관점에서다. ‘비주류’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정치학은 현실적인 학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삶과 생존, 권력과 부, 권위가 빚어낸 각축과 투쟁,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실이 정치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이 무언가. 그 시작과 끝, 끝과 시작은 어디인가? 주류 정치학은 이런 질문에 무심하다. ‘제한적 시각’에서 눈앞의 정치에 집중한다. 현실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도(未到)의 세계’다. 그 해석과 이해의 가능성이 무궁하다. 그 무한성을 이른바 ‘현실 정치’가 가로막는다. 두 편의 영상물에 담긴 ‘우주적 상상’은 그런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겐 현실만이 중요하다. 생존과 투쟁, 쟁취 현실이 정치의 역사다’라는 시각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점에도 내가 내린 현실 이해와 해석은 과거가 되고, 미지의 미래를 맞이한다.”

한국 사회에 <인터스텔라> 못지않은 열풍을 몰고 온 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었다. 교황에게 열광한 원인은 영적 갈망과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불만 중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울까?


▎138억 년 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온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자연, 모든 환경을 만들었다. 인간도 그로부터 비롯됐다. / 사진·중앙포토
“우답일지 모르겠다. 신앙인이나 잠재적 신앙인에겐 영적 갈망이, 고통받는 이에겐 현실적 불만의 비중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상이해 보이는 두 마음의 기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다운 세상’, ‘치유와 구원을 갈망하는 세상’이다. 교황은 방한 기간 내내 종파를 뛰어넘어 고통을 끌어안았다. 관대함·겸허함·소박함을 보였다. 현대의 ‘부요(富饒)’ 곁에서 자라나는 고통에 주목했고, 배타적 경쟁의 쳇바퀴에 오른 사회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화두를 남겼다. 문명 진보, 성공 신화의 확대와 함께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다. 정치와 권력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중해야 할 소재다. 시대의 목소리에 응답하며, 정치와 사회는 인간적 가치와 권능 강화, 공감 확대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교황에 끌린 이유는 그가 던진 ‘인간다운 세상’이라는 화두 때문이라는 말인가. ‘인간적 사유, 우주적 사유’에 관한 발문을 보내줬는데, 이 시대 ‘인간다운’ ‘인간적’이란 말은 무엇을 말하나?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를 ‘뿌리 없음(groundlessness)’이라 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 모른다. ‘내 부모는? 내 민족은? 내 조국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매우 엉뚱한 말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생명의 ‘속(屬)’ 개념이다. 나도 인간이고, 남도 인간이다. 조상과 국가도 인간 집단의 산물이다. 우리 각자의 연원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식의 벽’과 마주친다. 그 벽은 ‘기원의 문제’다. 인간의 기원, 생명의 기원, 우주의 기원. 이 모든 것의 기원은 아직 명징하지 않다. 가용한 과학이론을 총동원해도 아직 모름의 영역이다. 모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불안과 심려를 낳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류는 신과 신화에 의탁했다. 왕과 영웅을 섬기기도 했다. 현대사회는 이를 대체할 이념과 제도를 고안했다. 지구화 시대는 시장경제, 민주주의를 최고의 권위로 신봉한다. 그 권위와 함께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고, 쟁취하고, 누리면서 꿈과 행복을 말한다. 이와 전혀 다른 국면에 처한 삶도 있다. 소외를 겪고, 고통을 느끼며, 불행과 분노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 양면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천착하는 것이 ‘인간적’이란 화두일 것이다. 우주 속 인간의 뿌리 없음을 생각하면서 ‘범 인간적 가치와 윤리’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그것이 ‘인간적’이란 말이 아닐까?”

인류는 ‘인간적 사유’에서 ‘우주적 사유’로 넘어가는 진화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나? 아직은 먹고 사는 문제가 최대의 화두인 것 같은데.

“시대사조의 빠른 변화와 함께 ‘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이 회자됐다. 니체는 그 사상을 선도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탈현대의 문턱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전통, 역사에 맞서면서 ‘틀’을 해체하는 파격을 드러냈다. 신과 인간의 죽음. 그 ‘상징적 죽음’ 앞에 무엇이 남을까. 우주와 자연이다. 혹은 물리적 원리에 충실한 탈인간적 세계다. 이 세계에도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하면서 지구상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본능, 생존에 충실할 뿐이다. 더 이상 인간의 인간적 고뇌가 시대의 흐름으로 설 자리가 없다. 현대를 살고 있는 많은 이가 아마도 그런 세상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남다른 생존 기술과 경쟁력을 중시한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원초적 원리를 체화하고, 이에 충실한 삶의 의지를 세울 것을 요청한다.

학교, 기업,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삶의 무게중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적 풍요와 함께 인간사회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생존에 편중된 배타적 경쟁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편중의 정치사회적 강령을 넘어서야 한다. 현실과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우주, 혹은 우주적 사유가 마음의 이동과 의식 전환의 교량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우주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다. 사유의 폭과 삶의 지평을 넓혀왔다. ‘내 삶, 내 성취, 내 소유의 세계’를 넘어 우주적 실존에 주목해야 한다. 우주 내 삶의 철칙은 오류일 수 있다. 불과 30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우주의 역사가 5천~6천 년 전 시작했다고 봤다. 지금의 지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사를 둘러싼 과학적, 인과적 사유의 지평을 넓혀야 더욱 온전한 인간과 우주의 길을 말할 수 있다.”

만약 ‘우주적 사유’가 이미 존재하거나 앞으로 등장할 수 있다면 그 핵심은 무엇인가?

“우주적 사유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의 원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미국의 천문학자)은 인간의 거처(居處)인 지구를 우주 내에 존재하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 불렀다. 그 ‘미미하고, 위태로운 티끌’ 위에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 이야기는 허무주의를 부른다. 그러나 그 허무의 사유공간 속에서 인간의 인간적 의미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아인슈타인은 또 다른 시야에서 우주적 사유의 핵심을 전한다. ‘인간은 시각적 환영(optical delusion)’과 함께 살아간다. 시각적 환영은 내가 만난 사람과 지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이 ‘감옥(prison)’이다.’ 인간의 환영과 감옥, 이는 어찌 보면 영원한 신비, 혹은 모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의 길이다. 그 길에서 아직 ‘다다르지 못함’, ‘신비의 숭고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초월과 연결’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해가는 것이 우주적 사유의 ‘미(美)’일 것이다.”

우주적 사유는 결국 ‘종교적’인 것인가? 종교가 ‘인간적 사유’에서 ‘우주적 사유’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나?

“우주적 사유와 종교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의 매력은 끊임없이 변화와 창조의 길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정(靜)보다는 동(動)이 변화와 창조의 역사를 만들었다. 인간 사유의 동학(動學)은 물론 우주의 산물이다. 138억 년 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온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자연, 모든 환경을 만들었다. 인간도 그로부터 비롯됐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 특유의 ‘가공물(artifact)’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사랑과 증오, 환희와 좌절, 행복과 불행….자연 질서에 충실하면서도 인간은 그들만의 우주를 만들었다. 우리가 ‘내재하는 신’, ‘내 안의 부처’를 말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종교인은 ‘더 나은 삶’을 말할 때, 절대적 ‘신의 존재’, 혹은 현자의 ‘보편 철학’을 말한다. 일반인은 인간의 열린 마음과 가치, 윤리를 중시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영혼과 사유, 실천의 우주적 감수성이다. 나와 남, 공동체와 자연을 말할 때, 유신론자, 무신론자 모두에게 소중한 삶의 가치이자 지향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와 비종교가 서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리 철학자’이기도 한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미래의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시공을 넘나드는 무궁한 현실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현실의 종교’가 말하는 모름과 신비의 실존적 의미는 종교인이 말하는 ‘신의 경지’, 혹은 ‘궁극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늘날 정치와 경제는 충분히 ‘인간적’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정치·경제적 비인간성을 극복할 것인가?

“유물론적 인간론의 태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 독일 철학자)는 인간을 ‘먹고 사는 것, 그에 부수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 그의 생각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문제는 경제야!’라는 시각이 지구촌 곳곳의 삶의 현장에서 시대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정치·경제는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점령하라’ 구호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모순. 지구촌 남북의 빈부격차에 못지않게 국가 내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심화하고 있다. 이에 부수하는 소외와 실업, 그리고 굶주림 등의 문제는 오늘의 정치· 경제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 경고한다. ‘무엇을 해야 하나?’,‘탐욕과 경쟁의 열풍이 만든 인간의 인간적 문제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의 답은 쉽지 않아 보인다. 또다시 정치와 경제, 혹은 시장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말하고 싶다. 세 가지 과제가 중요하다. 시민은 각성의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를 변화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시민성을 깨우는 일이다.

생존의 정치경제가 추동해온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절체절명의 과제다. 태곳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인간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화두에 모든것을 걸 것인가? 성찰과 전망을 통해 경제적 풍요를 지속적으로 이루되, 그 너머 인간의 가치와 희망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과제는 인간에 내재된 미래를 오늘로 불러오는 일이다. 인간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드는 일은 현재 주어진 유일한 시간, 미래를 실천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희망과 상상, 우리가 원하는 가치와 윤리 그 세계의 실천 가능성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일이다.

끝으로 참여와 책임이다. 인간은 참여를 통해 삶을 조직하고 미래를 개척한다. 나의 성취, 타자의 성취, 공동체의 성취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시민적 덕목이다. 참여를 통해 자기를 조직하고, 더 나은 자신과 타자,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것이 시민의식의 책무이자 기여다. 정치·경제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면, 위 세 가지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정치와 시장은 시민의식을 먹고 자란다. 표심과 소비성향을 읽어내지 못하는 정치와 시장은 생존할 수 없다. 시민의식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미래로, 세계로 드넓은 상상과 희망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특히 인간과 정치의 미래와 관련해서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나?


“<우주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다. 토마스 베리와 브라이언 스윔이 우주 이야기를 ‘경축’의 관점에서 풀어간다. 끝없는 생성과 소멸의 ‘우주 교향곡’이 생명과 인간에 어떻게 체화됐는지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명의 통섭을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인간은 필사의 존재다. 그 숙명과 함께 영욕과 부침의 여정을 이어간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선 주어진 숙명과 함께 나와 남, 지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이야기는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근대의 정치권력을 논했던 마키아벨리는 생존본능이란 ‘눈앞의 인간적 우주’에 주목 했다. 생존과 번성의 최적화 ‘전략’의 간결함을 정치에 추천했다. 그 전략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 생존의 바다에 내던져진 생명체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영성의 열린 가능성을 나와 인간, 사회와 지구에 환원하는 것이다. <우주이야기>는 그런 인간과 우주의 친교를 경이로운 우주적 서사로 승화시켰다.”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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