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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④] 일본 교토┃웅숭깊은 문화 간직한 천년 고도(古都) - 봄은 ‘하나미(花見)’로 와서 ‘오도리(踊り)’로 간다 

오사카와 같은 상업도시가 가질 수 없는 아우라 가득… 야사카 신사와 기온 마츠리가 교토 시민의 마음의 고향 

글·사진 조관희 상명대 중문과 교수
수도의 역사에서 도쿄와 교토를 비교할 수는 없다. 도쿄는 150년이 채 못 되고, 교토는 1천 년이 넘는다. 교토인은 그래서 겸손하면서도 오만하다. 오랜 도읍의 역사적 DNA가 시민의 혈관에 각인됐기 때문이다. 언제 찾아가도 교토의 모습은 그대로다. 이국이지만 고향 같은 곳, 교토의 매력이다.

▎교토의 봄은 ‘벚꽃구경’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카와 천변의 벚나무가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면 시민은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꽃구경에 나선다.
‘천년 고도(千年古都)’. 역사가 1천 년에 이르는 오래된 수도라는 말이다. 본래 일본 역사의 뿌리는 나라(奈良)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라이진(渡來人)의 피를 타고난 간무(桓武) 천왕이 나라의 토착 세력과 갈등을 피하고자 794년 수도를 지금의 교토(京都)인 헤이안교(平安京)로 옮겼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천왕이 근대화를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수도를 현재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로 옮겼다. 그러니 교토가 한 나라의 수도로서 보냈던 시간이 1074년, 꼭 1천 년이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을 의미하는 한자 ‘경(京)’의 일본어 독음이다. 주지하듯 한자음은 여러 개의 독음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경(京)’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어에서는 이것을 ‘게(けい)’라고도 읽고, ‘교(きょう)’라고도 읽는다. 이것은 이른바 음독이고 훈독으로는 ‘미야코(みやこ)’라고 읽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음독이다. 일반적으로 ‘경(京)’은 대부분의 경우 ‘게(けい)’라고 읽어야 하며 ‘교(きょう)’라고 읽는 것은 수도를 의미할 때뿐이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수도를 가리킬 때는 단순히 ‘교(きょう)’라고만 읽고, 이것은 단 하나의 ‘미야코(서울)’ 교토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였다. 그러다 ‘에도’가 수도가 되면서 ‘동쪽의 수도’를 의미하는 ‘도쿄(東京)’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도쿄’ 역시 처음 이 말이 만들어졌을 때는 ‘도케’라고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나중에 ‘도케’가 ‘도쿄’가 되었다.

가모카와(鴨川) 천변의 ‘화려만개한’ 벚나무


▎한여름 가모카와 천변의 식당들은 하천 쪽으로 임시 가건물을 세우고 야외영업을 한다. 가와도코(川床)의 일종으로, 특별히 ‘노료유카(納凉床)’ 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쇠락한 일개 지방 도시의 하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천 년의 수도’인 교토는 일본의 다른 도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도시의 규모나 인구로 보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오사카(大阪)가 훨씬 크고 번화하지만, 교토는 오사카와 같은 상업도시가 가질 수 없는 아우라가 도시 전체에 감돈다. 교토 사람들 역시 교토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교토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결코 자신들의 속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교토 사람들이 외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겸손한 가운데 미야코, 곧 서울 사람 특유의 오만함도 깔려 있다.

어쨌거나 현재의 교토는 일본 사람이라면, 아니 교토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 그러나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화려하기보다는 웅숭깊고, 떠들썩하기보다는 음전한 것이 교토의 매력이다. 아울러 한 나라의 수도로 보낸 세월이 1천 년이 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와 문화를 둘러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교토를 방문하기 좋은 때가 언제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어느 도시라고 다를 게 없겠지만, 교토 역시 봄과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봄을 대표하는 것은 벚꽃이고 가을은 단풍일 터이나, 그중에서도 어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벚꽃으로 뒤덮인 교토의 봄을 내세운다. 봄에 피는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꽃이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벚꽃은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봄꽃의 여왕이 아니겠나 싶다.

교토의 봄은 ‘하나미(花見)’와 같이 온다. ‘하나미’는 말 그대로 ‘꽃(花)’, ‘구경(見)’을 의미한다. 습도가 높아 으슬으슬 뼛속까지 시린 교토의 겨울이기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절실한 것일까? 교토의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카와(鴨川) 천변의 벚나무들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면 도시 전체가 아연 활기를 띠고 사람들은 저마다 달뜬 마음을 주체 못해 ‘사쿠라노 하나미(櫻の花見)’에 나선다.

벚꽃이 지면 교토 사람들은 그 기분을 그대로 살려 오도리(踊り) 공연을 보러 간다. 교토의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기온(祗園)에는 게이샤가 되기 위해 수련을 쌓고 있는 일종의 게이샤 견습생 격인 마이코(舞妓)가 수련을 쌓는 곳이 있다. 오도리 공연은 마이코들이 평소 갈고 닦은 실력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으로, 1년에 딱 한 번 4월 한 달 동안만 한다.

오도리 공연 가운데 스케일이나 지명도에서 가장 월등한 것은 기온코부가부렌조(祗園甲部歌舞練場)에서 열리는 ‘미야코 오도리(都舞みやこをとい)’이다. 교토에는 이곳 말고도 미야카와쵸가부렌죠(宮川町歌舞練場)의 교오도리(京踊り)와 교토 북쪽의 기타노톈만구(北野天滿宮) 근처에서 열리는 가미시치겐가부렌죠(上七軒歌舞練場)의 기타노오도리(北野踊り)와 같은 오도리가 열리고 있다.

짧은 봄날이 가고 나면 우리 서울의 남산 격에 해당하는 히가시야마(東山)의 숲이 신록으로 뒤덮이며 이내 여름으로 접어든다. 교토의 여름은 그야말로 찜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악명이 높다. 높은 기온뿐만 아니라 높은 습도로 인해 불쾌지수가 극에 달한다. 더위에 지친 교토 사람들이 찾는 곳 역시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다. 시원한 계곡이나 천변에 평상을 놓고 더위를 식히는 것이다.

이런 평상을 ‘가와도코(川床)’라 부르는데, 교토에서 가와도코가 유명한 곳은 시내 한복판을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카와(鴨川) 연변과 교토시 북쪽 산지에 있는 기부네(貴船)라는 곳이다. 기부네로 가려면 교토대학 인근의 데마치야나기(出町柳)역에서 전철을 타야 한다. 좁은 계곡을 따라가는 이 노선은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 고작 2량의 객차만으로 운행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명색이 관광지를 오가는 열차라고 객차의 좌석 일부를 창가 쪽을 향하게 해 바깥 경치를 조망하게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이다.

교토 초여름 음식은 은어와 갯장어


▎기온마츠리의 전야제 교토 거리에는 난전이 벌어져 곳곳에 노점이 들어선다. 여기에 한밤중에도 식지 않는 대지의 열기가 더해져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기부네는 종점인 구라마역 바로 전 역이다. 기부네와 구라마는 산길로 이어져 있어 기부네에서 내리건 구라마에서 내리건 상관없지만, 기부네에서 내리면 목적지인 기부네 신사까지는 오르막길로 걸어서 30분 남짓 걸린다. 이 구간은 별 정취가 없는 아스팔트길이기 때문에 기부네 역과 신사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걸어서 올라가든 버스를 타든 기부네 신사까지 가는 길은 좁은 계곡길이다. 그 계곡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거기에 연도의 음식점들이 평상을 놓고 장사하는 것이 바로 ‘가와도코(川床)’다. 가와도코 요리의 주인공은 ‘은어(鮎, あゆ)’와 뼈를 가늘게 썬 후 하얗게 장식한 ‘갯장어(鱧, はも)’라고 하는데, 교토의 초여름 음식을 대표한다.

교토 시내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가모카와 천변에 있는 식당들 역시 여름에는 하천 쪽으로 임시 가건물을 세우고 야외 영업을 한다. 이것 역시 가와도코(川床)의 일종으로, 특별히 ‘노료유카(納凉床)’라 부른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노료유카들이 본격적인 영업 시작을 준비한다. 이때쯤이면 교토를 찾은 관광객들은 가모카와 천변의 노료유카를 찾거나 그 아래 둔치에서 휴식의 취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게 된다. 박제된 어항 같은 느낌을 주는 청계천보다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가모카와가 더 푸근하고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교토의 일상은 가모카와가 있어 생기를 더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일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영험이 있다는 신사를 찾아 기원한다. 어찌 보면 일본에서 종교는 다른 나라의 종교와 같이 현실 초월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일부이고 문화인지도 모른다. 교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신사를 보면 제각각 기원하는 바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나리다이샤(稻荷大社)가 재물신을 모시듯, 어떤 신사는 허리와 다리 아픈 사람이 찾아와 기원을 드리고, 어떤 신사는 여인들의 액을 없애주는 것만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신사 가운데 교토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친근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야사카신사(八坂神社)다. 9.5m의 도리(鳥居)로 적색 문에 기와가 올려진 위풍당당한 신사의 문은 보기에도 장쾌하다. 교토 사람들은 아예 이 문을 의인화하여 기온상(祗園さん)이라 부른다.

이 야사카 신사가 세워진 것은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되기도 전인 656년으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라이진이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런데 서기 869년 교토에 역병이 크게 돌자, 당시 천왕이 점쟁이와 대신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우두천왕이 탈(O, たたり)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두천왕의 탈을 풀기 위해 짜낸 해결책이 바로 당시 66개 지방 제후국의 숫자만큼 가마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교토의 대표적인 ‘마츠리(祭り)’인 기온마츠리의 기원이다. 교토를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마츠리인 만큼 기간도 길어 해마다 7월이 되면 교토 사람들은 기온마츠리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데 매달린다. 물론 요즘에는 도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예전과 같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시민들의 참여 역시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마츠리 기간이 한 달이라고는 해도 마츠리에 참여하는 가마를 만드는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모두 합한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상 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것은 7월 17일의 야마보코 순행과 그 사흘 전인 7월 14일부터 바로 전날인 16일까지 이어지는 일종의 전야제라 할 수 있는 요이야마(宵山)다.

야릇한 흥분의 절정, 기온마츠리 전야제


▎기온마츠리의 절정은 야마보코 순행이다. 10t이나 되는 가마를 끌고 바퀴를 조정하는 일에는 엄청난 체력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기온마츠리의 절정인 야마보코 순행은 각 마을마다 공들여 만든 가마를 끌고 나와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다. 아오이마츠리나 지다이마츠리도 결국 클라이맥스는 이 행진에 있는데, 기온마츠리의 가마 행진은 그 규모와 참여 인원 등에서 다른 마츠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원래는 일본 전체 제후국을 대표하는 66개의 가마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32개의 가마가 행진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들 가마는 근대 이후 니시진(西陣)을 중심으로 한 섬유업자와 인근 상공업자가 자신들의 재력과 기술을 동원해 만들었던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들어진 가마는 행진 당일 이전까지 해당 마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서서히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행진 당일에서 3일 전부터 전야제를 진행한다. 바로 전날은 요이야마(宵山)라 하고, 전전날은 요이요이야마(宵宵山), 전전전날은 요이요이요이야마(宵宵宵山)라 부른다.

전야제에서는 32기 가마 전체의 제등식과 기온바야시라 불리는 악사의 악기 연주 등으로 거리는 흥청거리고 사람들이 몰려나와 거리 전체가 야릇한 흥분감에 휩싸인다. 거리에는 난전이 벌어져 곳곳에 노점이 들어서 한편에서는 삼겹살을 굽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코노미야키를 굽고, 차도에 퍼질러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여기에 한밤중에도 식지 않는 대지의 열기가 더해져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전야제가 끝나고 나면 야마보코 행진의 날이다. 행진은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피하고자 아침 9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각자 가로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행렬이 오기를 기다린다. 야마보코의 기본 몸체는 다시(山車)라고 하는데, 큰 것은 10m가 넘는 것도 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큰 가마를 못을 쓰지 않고 순전히 목재와 노끈으로만 연결해 만든다는 사실이다. 마차의 꼭대기에는 역병을 몰아내는 의미로 긴 창을 묶고, 네 면은 화려한 무늬의 비단으로 장식한다. 그런데 이 비단 장식에는 박래품도 섞여 있으니, 중국이나 페르시아, 심지어 유럽에서 들어온 태피스트리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교토의 한여름 날씨는 악명이 높다. 그 뜨거운 햇살 아래 길거리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역이지만, 10톤이나 나가는 가마를 끌어야 하는 사람들은 초주검이 될 정도다. 하지만 정작 죽어나는 사람은 가마의 바퀴를 조정하는 사람들이다. 엄청난 크기의 가마이지만 바퀴를 조종할 핸들이 없어 방향은 순전히 커다란 쐐기와 넓적한 막대기로 바로잡는다. 육중한 바퀴 밑에 쐐기와 막대기를 넣어 바퀴의 방향을 튼 뒤에는 재빨리 빼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내 가마를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일단 그 일에 숙달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엄청난 체력이 요구된다.

고에몬후로와 도요토미의 잔혹사

너무 볕이 잘 드는 집에 사는 아이는 우울증에 잘 걸린다던가? 오밀조밀 어느 것 하나 허술한 데가 없는 완벽함이 때로는 사람을 질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는 어딘가 웅숭깊고 어수룩한 공간이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토에도 이렇게 웅숭깊은 공간이 있다. 바로 교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민가인 마치야(町家)가 바로 그곳이다.

교토의 집들은 외형이 독특하다. 곧 도로에 면한 쪽은 짧고 그 대신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직사각형이 바로 교토의 전형적인 가옥 구조인 것이다. 교토 사람들은 이렇게 기형적으로 생겨먹은 자신들의 집을 ‘장어의 침실(うなぎの寢床)’이라 부른다. 전하는 말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을 때 도로에 면한 쪽의 넓이에 따라 세금을 거두었기에 가급적이면 세금을 적게 내려고 이런 모양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교토의 민가인 마치야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집의 도로에 면한 쪽 외벽에는 대나무나 나무를 가로세로 거칠게 얽어서 임시로 둘러친 울짱을 둘렀다. 이것을 ‘이누야라이(犬矢來)’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라면 개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은 비가 많이 오는 일본의 기후를 고려해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주로 나무 재질인 벽에 튀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혹자는 집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도둑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또 마치야의 외부로 난 창은 나무 살로 만든 격자로 가려져 있다. 격자창의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 외부로부터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에서는 밖이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또한 마치야의 격자창인 코시는 집주인의 취향이나 직업에 따라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자시키(座敷)라고도 부르는 객실이 있다. 객실 벽면에는 그림이나 화병 등으로 장식한 도코노마(床の間)가 있으며, 이곳이 집안의 중심 역할을 한다. 이곳은 손님을 맞거나 집주인의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객실과 정원, 방과 중정 사이에는 ‘엔가와(緣側)’라 부르는 폭이 좁고 긴 툇마루가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일본은 날씨가 덥고 습하기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여기에 화산 지대의 특성상 온천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이래저래 일본은 목욕 문화가 발달해 집집마다 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욕실에 마련된 오후로(お風呂)라고 부르는 욕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입욕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여기에도 순서가 있다. 제일 먼저 집안의 손님으로 온 사람이 들어가고 다음에 할아버지, 아버지… 이런 순서로 차례차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오후로에도 조금 독특한 형태가 있으니, 곧 아궁이에 직접 올려놓은 솥단지가 바로 그것이다. 아궁이에 직접 불을 때 물을 데우되, 솥단지 바닥이 뜨거우므로 옆에 있는 뚜껑처럼 생긴 나무판자를 바닥에 깔고 입욕한다. 이것을 고에몬후로(五右衛門風呂)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그 유래가 있다. 예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이시카와 고에몬(石川五右衛門)이라는 도둑이 있었는데, 대담하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시미성(伏見城)에 들어가 보물을 훔쳐냈다고 한다. 이에 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붙잡혀 온 고에몬을 산조(三條) 가와라(河原)에서 솥단지에 넣어 삶아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긴 오후로에 그 사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집은 삶의 기본을 이룬다는 점에서 한 나라의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교토 사람들의 일상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집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가모카와(鴨川), 윤동주와 정지용의 교토


▎기온마츠리 전야에 교토에서 가장 번화한 시조(四條)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정지용, ‘압천(鴨川)’ 전문

교토는 묘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과 북쪽, 서쪽은 깊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은 툭 트여 너른 들을 마주하고 있는데, 도심으로는 가모카와(鴨川)가 흐르고, 서쪽 교외에는 가츠라카와(桂川)가 그리고 남쪽 우지(宇治) 쪽에는 우지카와(宇治川)가 흐른다. 천생 배산임수, 명당자리에 터를 잡았으니, 천년고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희한한 것은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일본 열도에서도 교토만큼은 그런 일로 피해를 입은 적이 거의 없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도읍지인 셈이다.

세 하천은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라는 큰 강이 되어 오사카만으로 흘러든다. 이 가운데 교토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가모카와라는 개천이다. 규모는 예전의 청계천 정도 되는 셈인데, 강폭은 어지간하고 수심도 깊지 않아 사람들이 무시로 찾기에 알맞은 곳이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의 압천(鴨川)이 바로 이 가모카와를 지칭한다. 이 시를 지은 이는 당시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에 다니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다. 당시 교토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윤동주 시인도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시인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도시샤 대학은 교토에서는 교토 대학 다음으로 알아주는 명문대학이다. 그러니까 교토를 대표하는 대학 가운데 국립대학으로는 교토 대학이고, 사립대학으로는 도시샤 대학인 셈이다. 설립자인 니지마 조(新島襄)는 쇄국정책으로 외국에 나갈 수 없을 때, 몰래 밀항하여 미국 애머스트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도시샤 영어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도시샤 대학의 전신인 셈인데, 당시 니지마 조의 모교인 애머스트 대학을 비롯해 많은 미국인들의 기부로 학교 건물을 건축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학교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이 남아 교토시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市) 전체가 문화재, 개발은 없다


▎평상 영업으로 유명한 기부네로 가는 전철은 객차의 좌석 일부를 창가 쪽으로 향하게 해 바깥 경치를 조망하게 만들었다.
사립학교인 데다 아무래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신이 제국대학인 교토 대학보다 학풍이 자유로워서였을까? 식민지 조국을 떠나온 젊은이들이 마음 붙이기에는 교토 대학보다는 도시샤 대학 쪽이 좀 더 나아 보였던 모양이다. 고맙게도 도시샤 대학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시인의 시비가 다정하게 어깨를 걸고 교정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도시샤 대학 자체를 다닌 기간만 놓고 따지자면 윤동주는 불과 1학기 정도 다녔지만, 정지용은 6년간이나 다녔으니 교토에 대한 인연은 정지용만 못했던 셈이다. 젊은 시절 시작(詩作)에 매진했던 정지용은 가와라마치의 번화가나 가모카와 천변, 그리고 서울로 치면 북한산 정도에 해당하는 히에이잔(比睿山) 등을 떠돌아다니며, 앞서 소개한 ‘압천’을 비롯해 ‘카페 프란스’, ‘황마차’, ‘다리 위’, ‘슬픈 인상화’ 등의 시를 남겼다.

해방 뒤 정지용이 자신이 주간으로 일하는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시>를 초간했다. 서문에서 그는 윤동주를 가리켜 “冬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고 칭송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 교토부립중학교 유학생 출신이었던 염상섭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보니 교토의 인맥이 위대한 민족 시인을 낳았던 것이다.

오랜 역사에 걸맞게 교토에는 도시 곳곳에 역사·문화 유적이 널려 있다. 그런 까닭에 교토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도시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교토에서는 고도 제한과 같은 여러 가지 규제 때문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자들에게는 이것이 커다란 장점이 된다. 곧 언제 찾아가도 교토는 그 모습 그대로 여행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창업한지 600년, 심지어 800년이 넘는 노포(老鋪)가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교토가 좋다는 소문을 들어도 막상 찾아가기 어렵지만, 일단 발길을 옮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찾게 된다. 교토는 누구에게나 고향과 같은 푸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토의 매력이다.

조관희- 1994년부터 상명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0년 안식년을 맞아 교토에 1년간 체류하면서 자전거로 도시 전체를 이 잡듯이 돌아보고 <교토, 천년의 시간을 걷다>(컬춰그라퍼)를 펴냈다. 그에 앞서 베이징을 10년간 돌아보고 쓴 <천년의 수도, 베이징>(창비)을 펴내기도 했다. 2014년 1∼2월 사이 KBS <인문강단 樂> 프로그램에서 ‘중국을 이해하는 6가지 키워드’를 강연했다. 전공은 중국소설이지만,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에 대한 인문지리적 탐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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