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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인류의 미래] 가상현실과 뇌(腦)과학이 만났을 때 

지속되는 지각의 확장 새로운 인류 부르나 

서요성 대구대 교수 typus@daegu.ac.kr
순간적 경이로움에서 숨쉬는 공기처럼 일상적 체험으로까지 진화… 휴머니즘의 완성에 기여할지, 암울한 포스트휴먼의 판도라 상자를 열지 ‘의문’

▎구글의 가상현실(VR) 헤드셋인 카드보드를 착용하고 교육용 VR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미국 고교생들. / 사진·중앙포토
전통적으로 가상(假想)은 철학이나 예술에서 자주 논의돼온 주제다. 한자어 가(假)의 뜻이 ‘거짓’이다 보니 부정적으로 연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철학자 플라톤에게 가상은 진정한 깨달음의 방해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을 밧줄에 묶여 동굴 벽면의 그림자만 볼 수 있는 죄수로 빗대어 말한다. 죄수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만을 믿고, 그것만을 진짜로 생각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실체는 고사하고 실체의 그림자(실재·實在)만을 참된 존재로 맹신하는 인간의 우둔함에 대한 비유다.

따라서 실재를 재현한 예술작품은 실체로부터 두 걸음 떨어진 가상이기 때문에 플라톤은 예술을 기피했고, 심지어 예술가를 국가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재와 가상을 두 개로 선명하게 구분한 플라톤을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한다. 그는 실재를 다시 형상과 질료로 세분한다. 질료가 지각되지 않는 잠재태라면, 형상은 질료가 실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 개념을 통해 지각되지 않는 실재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질료는 훗날 가상현실의 실재성과 어떤 연관성을 갖게 된다.

철학과 달리 예술 영역에서 가상은 본질적인 효과다. 일례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화가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를 진짜로 착각한 새가 그것을 먹으려고 날아든 에피소드가 있다. 혹은 피그말리온 왕은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또 관람객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나 뮤지컬에 열광하며 사건에 몰입한다. 이처럼 예술적 가상은 관람객을 현혹시켜서 백일몽의 세계로 초대한다.

예술적 가상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 개념의 의미를 현대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이 넘겨받고 있다. 가상현실은 3차원의 디지털 이미지 세상이지만, 주체에겐 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으로써 철학자들 사이의 논란거리였던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현실이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물질성과 주체의 지각에 기반하는 것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인식능력과 뇌의 상관성


▎영화 <아바타>는 3차원 가상공간에서 실제와 같이 느끼고 행동케 하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 사진·중앙포토
과학기술에 의해 디자인된 세계는 공상과학영화나 사이버펑크 문학에서 빈번히 소재로 다루어진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소설 <뉴로맨서>(1984)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를 묘사한다. 주인공 케이스는 가상공간에서 기업 정보를 훔쳐 사장에게 제공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사이버 스페이스 덱을 통해 의식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킨다. 의식 세계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 그에게 육체는 허접한 것으로 다가온다.

가상현실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재론 레니어(Jaron Lanier)는 1980년대 VR용 장갑과 헬멧, TV용 가상카메라, 영화용 3D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상현실을 구현해나갔다. 그는 가상현실이 완벽하게 운영되기 위해선 첫째, 뇌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하고 둘째, 가상현실은 알고리즘의 법칙에 따라 설계되고 제어돼야 하며 셋째,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가상현실이 전부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가 꿈꾼 가상현실은 최첨단 과학기술 및 신경 과학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벌써 컴퓨터게임 마니아들은 과거의 인류가 되기도 하고 낯선 세계를 정복하기도 하며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인류가 되려고 한다. 그들의 가상현실에는 경계나 국경이 없고, 관행이나 규제도 적다. 실재에서 탈출한 그들은 가상 커뮤니티를 형성해 여러 조직을 만든다. 그래서 문화이론가 지젝(S. Zizek)은 디지털 문명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부정적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 모호성의 중립 지대를 인정한다. 첨단 디지털 기계는 가상현실을 창조해 인간의 경험을 위조하지만, 인간을 황량하고 치열한 현실에서 탈출시킨다. 따라서 가상현실도 개인과 집단이 확장된 형태이며 현실과 똑같이 소중한 곳이라고 두둔될 수 있다.

가상현실의 물질적 토대가 잠재태와 관련한다면, 그런 잠재태를 실재로 파악한 인간의 감각(sense)과 지각(perception)은 무엇인가? 헤겔은 주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감각, 지각, 오성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식은 그런 대상적 의식에서 벗어나 정신(자의식과 이성)의 단계로 상승하며 순수한 정신 활동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실체(이데아)에 도달한다. 이처럼 감각과 지각은 정신의 형성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상 관련 의식이지만, 정신으로 변신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적 불완전함을 보완한다.

현대 신경과학의 경우에 외부의 사물이 감각기관을 거쳐 신경자극으로 바뀌어 뇌에 연결된 결과를 감각과 지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유전자, 원자, 분자, 혈액 등과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뉴런 40억 개가 활동하는 뇌가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신경과학적으로 뇌는 감각과 지각의 중추이며, 그 이후의 고차원적인 인식능력과 뇌의 상관성은 아직 해명되고 있지 않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도 뇌의 중요성을 감지한 바 있다. 뇌는 물질적이고 정신적 특징을 동시에 지닌 곳이지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없었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육체에서 의식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음식물은 위에서 액체로 변한다. 위액은 장의 구멍을 통해 혈액에 섞인다. 혈액은 정맥을 통하여 심장으로 들어가고, 이 기관에 지펴진 불이 마치 펌프처럼 혈액을 온 몸으로 순환시킨다. 그런 심장의 정기에 뇌 활동이 합세하여 의식이나 이성이 탄생한다. 이처럼 의식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가교의 역할을 뇌가 담당하는 것이다.

감각은 자극이 신경을 통해 뇌에 도달함으로써 형성된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망막에 빛이 도달해 시신경을 거쳐 뇌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혹은 대상을 만져서 그 질감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피부에 닿은 자극이 뇌에 전달됐기 때문이다. 소리를 듣는 것도 고막의 진동을 통해 청신경이 반응했기 때문이며, 냄새를 맡는 것도 콧속의 신경이 뇌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감각에서 ‘대상’과 ‘주체’의 구분은 가능해진다. 주체는 대상을 통하여 자신을 확인하고, 대상은 주체를 통하여 존재한다. 물리적 대상에 주체가 반응한 결과인 감각은 대상의 ‘지금’과 ‘이곳’이라는 시간적, 장소적 조건을 의식의 전제로 받아들인다.

본격적으로 대상과 의식이 만나는 단계는 지각이다. 대상의 감각적인 사실이 계속되면서도, 그 대상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성질이나 속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각은 대상 자체에 뭔가를 덧붙이거나 빼면서 대상을 가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된 대상(신경계 구성물)은 객관적 대상과는 다르게 된다.

IT 기기가 시각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는 이유


▎두뇌의 신경망 연결도. 신경세포들이 어떻게 연결돼 있고,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프로젝트가 미국, 유럽 등을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 철학적인 감각 및 지각을 신경과학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가 가상현실을 지각한다는 것은 ①가상현실이 망막을 통해 전기화학적 신호로 바뀐다 ②그 신호가 시신경을 거쳐 뇌의 시각피질에 전달된다(시각) ③망막 정보만으로 외부 대상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간극을 뇌의 기억 부위가 메워줌으로써 불완전한 이미지는 보다 완벽한 이미지로 변한다(지각).

그렇다면 왜 현대의 IT기기는 오감 중에서 시각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는 것일까? 신경과학자 코흐(C. Koch)는 인간을 시각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전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대뇌피질 4분의 1이 이미지 생성 및 시각과 관련한다. 둘째, 뇌의 시각 부위에는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셋째, 시각은 착시 현상에서 보듯이 쉽게 현혹되는 성질이 있다.

신경과학자 다마지오(A. Damasio)도 시각을 의식 활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는 의식을 핵심의식(시각)과 확장의식(자아의식)으로 나눈다. 시각의 특징은 지금 여기라는 즉흥성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자극 A가 망막을 계속 자극한다 하더라도, 다른 자극 B는 한 번에 자극 A의 영향을 없앨 수 있다. 이처럼 핵심의식이 순간적이라면, 확장의식은 과거나 미래와 관련한다.

뇌에 연결된 신경자극만 있다면 우리는 고통, 쾌락, 허기 등을 느끼게 된다. 일례로 꿈을 꾸면서도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면서 마치 실재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매트릭스>(1999)의 주인공 모피어스도 실재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재가 뭐란 말이지? 실재를 어떻게 정의 내리나? 만일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 보는 그런 것들을 실재라고 하는 거라면, 네가 말한 모든 것은 그저 뇌에서 해석해 받아들인 전기 신호에 불과해.”

모피어스는 감각과 지각을 전기 신호로 환원할 수 있으며, 매트릭스 세계에서의 감각은 뇌를 교묘하게 자극해서 생긴 거짓 감각이라고 말한다. 거짓 감각은 거짓 실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다시 진짜 실재를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활도 편리해지지만, 우리의 지각도 변했다. 20세기 초반 카메라나 영화의 촬영기법인 클로즈업은 육안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시야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1960년대 커뮤니케이션 학자 맥루한(M. McLuhan)은 TV나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가 단순 수단이 아니라 감각의 확장으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그 뒤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임계점’ 그리고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과학기술의 제어력은 더 이상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인간이 불멸의 기계와 결합해서 진화의 마지막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 단계로 인류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간단하게 우리는 컴퓨터 화면과 자판을 통하여 인터넷의 가상세계에 입장하고, 포터블 단말기를 터치해서 앱이나 게임에 접속할 수 있다.

가상현실은 순간적 경이로움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숨쉬는 공기처럼 일상적 체험으로 전화된다.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정보 서핑은 장소와 시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또한 해상도가 뛰어난 카메라 영상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복사본을 더 신뢰하게 한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헤드셋이나 VR 기기와 연동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다. 그러면 가상현실의 외연은 훨씬 간편하게, 또 훨씬 긴 시간 동안 인간의 감각과 지각을 포위하게 된다.

이렇게 진화한 가상현실 체험은 더 이상 예술 체험과 동일하지 않다. 물론 관람객이든 IT 예찬자든 현실과는 다른 곳, 이른바 해방구를 원하고 있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뮤지컬 관람객은 라이브 공연에서 가상의 사건에 흠뻑 몰입하지만 한 번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알아채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반면 IT기술은 예술의 ‘지금 이곳’이라는 물리적 제한을 갖고 있지 않다. 디지털 세대는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디지털 게임을 하고 가상현실을 체험하며 원하는 만큼 오래 체류할 수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는 이들의 ‘아바타’는 위험

<매트릭스>의 조연인 사이퍼(Cypher)는 소설 <뉴로맨서>의 주인공처럼 의식을 육체와 분리시켜, 자유자재로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를 오간다. 그는 매트릭스 안에 있을 때 자기 앞의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가 가짜임을 알지라도 맛나게 먹는다. 왜냐하면 매트릭스 시스템이 맛있는 신호를 사이퍼의 뇌에 보내주기 때문이다.

“난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이걸 입속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뇌에 쫄깃하고 맛이 있다고 말하는 거지.”

사이퍼는 잘 차려진 음식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만끽하며,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면서도 가짜를 선호하는 별난 인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욕구의 충족이다. 따라서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매트릭스야말로 그에겐 진짜 세계로 다가온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소. 아무것도. 이해되나요? 그리고 난 부자에다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소. 배우처럼 말이죠.”

사이퍼에게 그가 살던 현실의 합리적 질서는 불편하고 불평등할 뿐이다. 그는 경험 밖에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그에겐 편안함과 풍요로움, 멋있음과 재미만이 인생의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아직까지 영화 <매트릭스>의 신경적 가상현실은 공상의 영역이다. 매트릭스 시스템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모든 인간의 목덜미에 장착된 바이오 포트(bio port)를 통해 뇌에 접속해야 비로소 작동한다. 바이오 포트의 섬세한 전선들이 대뇌피질에 수천 개의 작은 전극으로 자리 잡으면, 매트릭스 컴퓨터에서 주는 신호를 인간이 지각하게 된다.

가상현실은 자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보다 완벽해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신경계와 만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가상현실이 휴머니즘의 완성 시대에 기여할지 아니면 암울한 포스트휴먼의 서막을 열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가 감각과 지각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 부조리하고 치열한 현실, 자아를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을 재현한 콘텐트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본래 감각과 지각은 정신으로 지양되면서 소멸되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감각과 지각은 대상에 종속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대상의 이면을 파악할 수 없고 실재와 실체를 구분할 수 있는 인식 기능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껏 인류가 쌓아온 업적들, 이를테면 휴머니즘 문화나 공동체는 의식이 정신으로 비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행위들, 이를테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들, 이타적인 행위들, 연대적인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에는 정신(Geist)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절망한 사람들이 마치 사이퍼처럼 육체로부터 의식을 탈출시킨 가상현실 공간에서 제2 자아를 찾고 해방감과 즐거움을 맛본다. 그런데 그 아바타가 한동안, 아니 영원히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가상현실이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보편화된다면, 정신이 없는 자아들이 득세하고, 기존의 휴머니즘적 가치관과 전통은 대체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과학기술에 내재하는 인류애의 실현이라는 역사적인 책무성을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 서요성 대구대 교수 typus@daegu.ac.kr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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