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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소록도병원 100년 

한센인 ‘인권유린’ 현장에서 ‘인권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 

글 김호·정종훈 기자 kimho@joongang.co.kr / 사진 오종찬 프리랜서
자혜의원에서 소록도병원까지… “건강·복지·역사·문화·인권·생태 어우러진 ‘평화의 섬’”

▎소록도병원과 육지를 잇는 소록대교. 5월 17일 개원 100주년을 앞둔 소록도병원은 한센인들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생생한 인권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했다.
하늘에서 바라본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소록도(小鹿島). 푸른 바다와 울창한 나무가 어우러진 이 섬은 아름다운 경치와는 달리 아픔이 깃든 곳이다. 한센인의 강제 격리수용 공간이었던 소록도는 지금까지도 반쯤은 세상과 단절돼 있다. 소록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가 개통됐지만 한센인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견이 남아 있는 탓이다. 과거 ‘문둥이’, ‘문둥병 환자’로 불리며 상처받았던 한센인들의 슬픔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하는 섬.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에 얽힌 회한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4월 21일 아침,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소록대교의 한쪽 끝에 위치한 섬 주차장에 도착한 관광버스에서 30여 명의 중년 여성이 줄지어 내렸다. “우와~.” 경기도에서 왔다는 등산복 차림의 이들 방문객은 소나무가 심어진 소록도 해변 길을 걸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스마트폰 카메라로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소록도 주차장에서 소록도병원까지 가는 해변길은 소나무와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소록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10분 남짓 걷자 화살표와 함께 ‘중앙공원 가는 길’이라 적힌 푯말과 함께 소록도병원 본관 건물이 나타났다. 2만5000㎡ 규모의 중앙공원에 이곳의 한센인들이 직접 심었다는 조경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30여 분간 중앙공원을 둘러보는 사이 한센인이 전동휠체어를 타거나 걸어서 마을과 병원 본관을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방문객들은 ‘여기부터는 한센인의 치료 및 주거공간으로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푯말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대신 소록도병원에 보존하고 있는 감금실·검시실 등 인권 유린의 현장에 들러서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5월 17일 개원 100주년을 앞둔 소록도병원은 과거 한센인들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생생한 인권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해 있다.

전체 면적 약 3.8㎢의 소록도는 원래 여느 섬처럼 주민들이 고기잡이와 농사를 짓고 사는 평범한 섬이었다. 소록도가 한센인의 한(恨)이 서린 섬으로 바뀐 건 일제강점기인 1916년 2월부터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자혜의원’ 설립을 공포했기 때문이다.

일제, 치료시설 아닌 격리수용소로 설립


▎1.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을 불법적으로 가뒀던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은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작은 갤러리로도 사용되고 있다. / 2. 일제가 빨간 벽돌로 담을 쌓은 소록도병원의 감금실. 환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던 한센인들은 이곳에 갇혀 죽거나 불구가 됐다. / 3. 현재 몸이 불편한 한센인들은 소록도병원 건물 내 입원실에서 지내지만 건강을 회복한 환자들은 주거용 건물에서 생활한다.
일제는 그해부터 세 차례에 걸쳐 ‘토지수용’을 명목으로 소록도 주민에게 모두 섬을 떠나게 했다. 한센인을 소록도에 수용하기 시작한 건 자혜의원이 들어서고 이듬해 4월 병사(病舍)가 건립되고부터다. 평범한 명칭과 달리 자혜의원은 의료시설이라기보다는 격리 공간에 가까웠다. 일제는 전국에서 뚜렷한 주거지 없는 한센인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소록도로 보냈다.

소록도 안에서는 자혜의원의 일본인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의 거주공간은 무독지대, 환자의 거주공간은 유독지대로 분리에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환자들에게 일본식 옷을 입히는 등 일본의 생활양식을 강요했고 신사를 세워 참배케 했다. 처음에는 40여 명의 한센인이 입원했지만 환자 수가 급증하자 병사 신축 등 확장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에는 그곳에 수용된 한센인들이 동원했다.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해 벽돌공장을 세우고 벽돌을 찍어냈다. 그 밖에도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인 짚신 만들기부터 환자들의 치료 보조까지 모든 작업에 한센인이 투입됐다. 일제는 적당한 작업이 ‘정신 위안’, ‘체력 증진’ 등 치료 효과를 낸다면서 환자들에게 작업을 독려했다. 게다가 독한 약을 먹기 때문에 영양소 공급이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일제는 작업에 동원되는 한센인들에 충분한 음식을 주지 않았다. 작업의 대가로 소종의 작업장려금을 지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한센인들이 이 돈을 실제 사용했을지는 의문이다.

제대된 음식을 먹지도 못하면서 각종 작업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불만이 커져가면서 소록도를 탈출하는 환자도 생겨났다. 치료는커녕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한센인들은 어선을 타고 800m 남짓 떨어진 녹동항으로 도망쳤다. 무조건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한센인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일제는 한센인의 탈출을 막기 위해 4㎞ 길이의 순찰도로를 만들었는데 그 작업에도 환자들을 동원했다. 1937년 말, 환자들은 추위 속에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삽과 지게 등에 의존해 도로를 닦아야 했다.

그해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소록도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제는 한센인들에게까지 국방헌금·장병위문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거둬갔다. 작업장려금도 헌금 명목으로 회수해갔을 정도다. 환자들은 필요한 전시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동원됐다. 목탄 생산, 가마니 짜기, 송탄유용 송진 채취, 토끼 가죽 생산, 벽돌 제조 등이다. 1935년부터 소록도에서 생활한 한 한센인은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센병, 고통의 기억과 질병 정책>이란 자료집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 확장 공사할 때는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져야 들어와요. 사람들이 많이 맞았어요. 당시 (일제는) 환자를 인간 취급을 안 했거든요.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죠.” 노동력 착취는 물론이고 환자에 대한 폭행도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증언이다.

당시 소록도의 인권 유린의 상황을 웅변해주는 시설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자혜의원’이 ‘나요양소’라는 이름을 거쳐 1934년 10월 ‘소록도갱생원’으로 명칭을 바꾼 뒤 지어진 감금실·검시실 등이다.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한센인 중에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감금실에 끌려가서 최장 60일까지 갇혀 지내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갱생원 원장은 정해진 금지행위를 한 한센인에 대해 직권으로 판결 및 징벌을 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자치권 주장하는 84명 학살 만행


구금·체벌이 아무런 법 절차 없이 이뤄졌다. 소록도 한센인이 지켜야 할 규정 등을 담은 ‘조선총독부 자혜의원 연보’에 따르면 ‘환자가 사망한 경우 학술연구를 위해서 시체 해부를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시체 해부가 이뤄진 장소가 바로 검시실이다. 소록도 환자는 사망하게 되면 가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검시 절차를 거친 뒤에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시신은 소록도 내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현재 검시실에는 당시 사용된 검시대와 세척 시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감금실 등은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유지되고 있다.

남녀가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소록도에는 1936년부터 동거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원래 호적상 부부, 법적인 부부는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혼인한 남녀, 소록도에 오기 전부터 연인 사이였던 남녀 등에 한해서다. 하지만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자식을 갖지 못하도록 단종(斷種) 수술, 즉 정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센병이 유전되는 것으로 오인했던 일제가 단종과 낙태 수술 등의 인권 유린을 했는데 이러한 수술은 해방 후 1980년대까지도 계속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런 피해를 입은 한센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며 2014년 4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의 판결을 시작으로 정부가 이들 한센인에게 1인당 3000만~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잇따랐다.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광활한 중앙공원은 한센인의 피땀이 서린 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는 작은 공원이었던 이곳을 확장하는 공사를 1939년 12월부터 벌였다. 환자들은 조경에 사용할 돌과 나무를 나르고 산을 깎는 작업에 동원됐다.

정원석은 다른 지역에서 배에 실어 소록도에 들여왔다. 환자들은 통나무를 이용해 정원석을 해안에서 공원까지 끌어왔다. 돌을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진 환자에게 공사 감독자들이 채찍질을 가했다. 이에 어떤 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중앙공원은 1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만9800㎡ 규모로 완공됐다. 현재는 확장을 거쳐 2만5000㎡ 규모로 황금편백·향나무·후박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심어져 있다.

소록도병원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해 한센인 환자가 일본인 원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1942년 6월 20일 일어난 스오 마사스에 원장 살해사건이다. 1940년부터 2년여 동안 소록도에서 지낸 당시 27세의 한센인 이춘상 씨는 스오 원장이 훈시를 위해 환자들 앞을 지나던 순간 흉기로 가슴을 찔렀다. 이씨는 곧장 체포돼 감금실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았다. 이씨는 사건 두 달 만인 8월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항소·상고 기각을 거쳐 형이 확정됐다. 이씨에 대한 사형 집행은 1943년 2월 19일 대구형무소에서 이뤄졌다. 이씨의 행동은 범죄지만 일제로부터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평가가 비등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소록도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8월 22일 자치권을 요구하던 환자 84명을 직원들이 끌고가 총살한 ‘84인 학살사건’이다. 세상과 단절된 섬 소록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은 이듬해 4월이 돼서야 바깥세상에 알려졌다. 진상 조사가 이뤄진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56년이 지난 2001년 12월 8일이다. 소록도 환자들로 구성된 원생자치회는 숨진 환자들이 화장·매몰된 현장을 발굴했다. 2002년 8월 22일 매몰 현장에 추모 시설물이 세워졌다. 소록도병원 본관 앞 ‘애한의 추모비’다.

좌절로 끝난 ‘희망의 사업’ 오마도 간척


▎국립소록도병원의 외경. ‘자혜의원’으로 시작된 이 병원은 여러 차례 개칭을 거쳐 1982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현재 200명에 가까운 직원과 500여 명의 입원환자가 머무르고 있다.
‘한’이 서린 섬에 점차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은 1945년 9월경. 김형태 원장이 부임하면서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원장이었다. 이 시기 직원 전용 지역인 소록도 장안리에 환자의 마을이 새로 생겼다. ‘직원지대’와 ‘환자지대’의 구분을 처음으로 깬 사례였다.

1947년에는 환자들의 자치 활동을 주도하는 조직인 환자 자치회가 꾸려졌다. 현재 원생자치회의 전신이다. 소록도의 주인인 한센인들이 그동안의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마을을 둘러싼 각종 행정에 참여하게 됐다. 1946년 9월에는 녹산중학교가 소록도에 문을 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이어 중학 과정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점차 안정돼가던 소록도병원에 다시 암운을 드리웠다. 1950년 8월 인민군이 소록도에 들어온 이래 환자들은 육지에서의 식량 운반 등 각종 작업에 투입됐다. 환자들은 인민군가를 배우고 불러야 했다. 인민군은 감금했던 직원 11명을 소록도를 떠나기 직전에 사살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북한의 한센인이 소록도에 수용되기도 했다. 북한에 진입한 우리 군이 철수 과정에 데려온 한센인들이다. 현재는 거의 모두 숨지거나 소록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소록도의 한센인이 인권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1950년대 초 한국인 원장 시절에도 환자를 대상으로 한 나균 검출실험이 있었다. 환자의 가슴에 침을 꽂아 골수에서 나균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실험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거나 숨진 환자도 발생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환자들은 원장 퇴출을 요구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희망의 빛은 서서히 찾아왔다. 1962년 7월 시작된 소록도 북쪽 ‘오마도 간척’ 사업은 다시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소록도 한센인의 꿈이 담긴 사업이다. 한센인들은 소록도에서 벗어나 벼·보리 농사를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고흥군 오마도에 2693m 길이의 방조제를 쌓고 바다를 메워 농지를 조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병이 나은 한센인들이 일반 농민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며 지내는 삶을 꿈꾸며 돌을 날라 바다를 메웠다. 공사 과정에 사망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2000여 명의 한센인이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꿈은 1964년 7월 무참히 무너졌다. 소록도병원 측이 주도한 오마도 간척사업의 권한이 정치적 이유로 전라남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센인의 의사는 무시됐다. 낮은 임금에도 참아가며 중노동을 했던 한센인들은 공사에서 손을 떼게 됐고, 그동안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이 사업을 한센인에 대한 인권 침해라고 규정했다.

1963년 2월 이뤄진 전염병예방법 개정은 작게나마 한센인의 인권 보장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우선 강제 격리가 폐지되고 한센인이 집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뤄진 한센인 격리 수용제도가 40여 년 만에 허물어진 것이다. 한센인 환자의 사망 시 사체를 화장해야 한다는 규정도 폐지됐다. 1960년대 소록도 한센인의 호적과 주민등록을 복원하는 일도 이뤄졌다. 한센인은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실제와 다른 이름을 쓰면서 주민등록을 말소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는 소록도병원이 과거 한센인 격리 목적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치료 체제를 갖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병원 직제도 총무과·의무과·보육과로 조정되고 직원 정원이 과거에 비해 늘어 95명으로 조정됐다. 1967년부터는 환자들을 위한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새로운 병동이 들어섰다. 1970년 대에도 오래된 병원 시설 개선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각별한 소록도 사랑


▎국립소록도병원 뒤편에 위치한 소록도 중앙공원. 공원 안에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적힌 ‘구라탑(求癩塔)’이 있다. 미카엘 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는 소록도병원과 특히 인연이 깊다. 고(故) 육영수 여사는 고령의 소록도 한센인들을 위해 2000만원을 기부했다. 여기에 국고 1000만원을 더해 1974년 11월 소록도병원에 병실과 진료실·목욕실 등을 갖춘 최신 건물이 세워졌다. 양지회기념관이다. 육 여사를 비롯한 정부의 고위급 인사 부인들의 모임인 양지회에서 이름을 따왔다. 육 여사가 그해 8월 서거하자 소록도 한센인들은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센인들은 소록도에 육 여사를 위한 공덕비를 세우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1975년 12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소록도병원에 1억여 원의 특별예산을 배정했다. 이 돈은 양지회관 좌측에 건물을 추가하는 공사에 쓰였다.

1974년 1월에는 소록도 한센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한센인의 생활 공간과 외부세계를 갈라놓은 총 2㎞ 길이의 경계 철조망의 제거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소록도는 유독지대와 무독지대, 직원지대와 환자지대 등으로 구분된 상태였다. 철조망 철거는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를 넘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왔던 한센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됐다.

1980년대 역시 치료 본관이 세워지는 등 소록도병원의 시설과 의료 인력이 점차 보강되는 시기였다. 1976년 13만원에 불과하던 환자 1인당 연간 예산은 1985년 69만원으로 늘었다. 현재는 250만원이 넘는다. 1984년 5월 4일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서 소록도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위로 방문이었다. 한센인들은 헬기를 타고 소록도를 찾아준 교황에게 엎드려 인사했고 교황은 차에서 내려 직접 한센인들을 마주하며 위로했다. 소록도는 교황의 방문을 앞두고 도로 및 기반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져 주변환경이 한층 나아졌다.

교황 방문은 한센인 인권 신장에도 큰 기여를 했다. 병원 직원과 한센인이 하나의 선창을 함께 쓰게 된 것이다. 당시 소록도를 찾은 기자들이 직원과 환자가 서로 다른 선창을 쓰고 있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환자 전용 선창인 제비선창은 폐쇄됐다.

자원봉사자도 소록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소록도에서 자원봉사자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는 1990년대다. 자원봉사자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소록도를 찾아 봉사활동을 벌인다. 목욕 시켜주기부터 용변 도와주기, 식사 보조, 빨래 등이다. 장기간 소록도에 머무르는 이를 위해 1995년 4월 소록도에 ‘자원봉사자의 집’도 들어섰다. 현재 의대생·군인·미용학원 관계자·종교단체 관계자 등이 수시로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의 벗이 되어준다.

2000년대 들어 소록도는 한센인의 고령화에 따라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노인 전문병동 신축이나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2009년 노인재활병동이 새로 건립됐고 2010년에는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 내부도 현대화됐다. 현재 소록도병원의 역할은 환자들의 치료·재활과 함께 복지 서비스 제공에 맞춰져 있다. 증세가 없는 한센인은 병실이 아닌 자신의 주거 공간에서 머무르며 수시로 부식과 의류 등을 지급받는다.

‘이방인’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발돋움

2009년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의 개통은 소록도가 다시 한 번 바깥세상과 교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록도를 찾는 외지인이 크게 늘어나면서부터다. 이전까지 한센인들과 외부인들은 육지와 소록도 사이의 700m 거리를 배를 이용해 이동해야 했다. 다만 소록대교가 차량만 통행이 가능해 한센인의 입장에서는 섬 밖으로 이동하기가 더욱 불편해졌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센인의 자치 조직인 원생자치회는 더 이상 소록도가 강제 수용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원생자치회는 병원과 함께 소록도 7개 마을 관리, 주거지역 질서 유지, 공원관리 등을 맡고 있다. 병원 측과 함께 소록도 주민들의 삶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다.

100년 역사의 소록도병원은 이제 인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특히 병원 측은 소록도를 인권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한센병 정책과 전시실 등을 갖춘 한센병 박물관 조성, 개원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개최, <소록도 100년사> 편찬 등을 통해서다.

1962년 처음 소록도병원에 입원한 명정순(82) 씨는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오게 되면서 남편과 헤어지고 두 아들도 맡겨 키워야 했다. 감금실에 갇힌 채 주먹밥 한 덩어리만 먹은 적도 있지만 지금의 소록도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 것 같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하지만 소록도 한센인 개개인이 안고 있는 상처까지 아물어지기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전미자(75·여) 씨는 “17세 때 한센병에 걸린 사실이 알려져 동네우물도 이용하지 못하고 부모와 떨어져 소록도에 왔다. 당시에 겪은 서러움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형철 소록도병원장은 “개원 100주년의 키워드는 한센인의 건강·복지·역사·문화·인권, 그리고 소록도의 생태”라며 “소록도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그동안의 상처를 씻고 대한민국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 글 김호·정종훈 기자 kimho@joongang.co.kr / 사진 오종찬 프리랜서

[박스기사] 소록도에 청춘 바친 파란 눈의 천사들 - “한국에 내 마음을 심었다”


▎43년간 전남 소록도에서 ‘한센인의 친구’로 지냈던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에서의 삶이 행복했다”고 돌이켰다.
20대에 ‘슬픔의 섬’ 찾은 두 명의 성녀…마리안느 스퇴거(82) 수녀는 1999년 호암재단 호암상 수상하기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누구보다 주목을 받는 이들이 있다.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한센인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 스퇴거(82), 마가렛 피사렛(81) 수녀다.

소록도 한센인에게 ‘마르안느 할매’, ‘마가렛 할매’, ‘할매 수녀’ 등으로 불리던 두 사람이 소록도를 처음 찾은 건 1962년 2월이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대 때였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의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며 공부했다는 두 수녀는 졸업 후 천주교 광주대교구의 요청을 받은 인스브루크 주교로부터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볼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건네 듣고 소록도에 왔다.

두 수녀는 허름한 창고 형태의 소록도 영아원에서 감염 우려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고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 피부병으로 몸이 아픈 아이들에게 약을 구해다 먹이는 것도 두 사람의 몫이었다.

‘문둥병 환자’라며 사람들이 다가서기조차 두려워하던 한센인에게 두 수녀는 진심을 다해 함께했다. 맨손으로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고 소독하며 이들의 친구가 됐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노인 환자에게 줄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고, 환자의 생일에는 직접 빵을 구워 대접했다.

두 사람을 통한 천주교 차원의 지원도 활발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는 영아원 자금과 구호물품을 제공했다. 한센인 구호단체인 벨기에 다미안 재단은 5년간 90만 달러를 들여 몸이 불편한 소록도병원 환자의 수술을 지원했다. 미국 가톨릭 구제회도 밀가루와 옷 등을 보냈다. 마리안느 수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의사였고, 언니는 약사였다. 그의 가족은 수시로 소록도에 의약품을 보내주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1999년 호암재단의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인재 제일주의와 사회공익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평소 자신의 봉사활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조명 받는 것을 꺼리던 마리안느 수녀는 이때 수상을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금 1억원을 받아 소록도 한센인에게 지원하기 위해 어렵사리 수상을 결정했다고 한다. 평소 “소록도에 뼈를 묻겠다”고 말하던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는 2005년 11월 22일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돌연 소록도를 떠났다. 소록도에 온 지 43년, 20대였던 수녀들이 일흔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 됐을 무렵이었다.

당시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평소 함께 봉사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우리의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일할 수 없고 상대에게 부담을 줄 때가 되면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왔습니다.” 대장암에 걸린 마리안느 수녀는 한국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43년간 소록도에서 진정 행복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소록도성당 등의 초청을 받아 지난달 다시 소록도를 찾았다. 한국을 떠난 지 11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는 소록도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한센인이 입원 중인 병동과 마을을 방문했다. 한센인들은 “할매가 다시 왔다”며 반겼다.

마리안느 수녀는 자신의 활동이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언론 인터뷰도 대부분 사양했다. 마가렛 수녀는 함께 한국에 오지 못했다. 치매로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리안느 수녀는 4월 27일 어렵게 이뤄진 기자와 인터뷰에서 “제가 한 일은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치료를 마친 환자를 가족이 기다리며 받아줄 때가 너무 기뻤다”며 과거를 돌이켰다.

이어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소록도까지 왔고, 한국 땅에 내 마음을 심었다. 43년간 소록도에서 진정 행복했다”고 말했다. 전남 고흥군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반 세기 가까이 헌신한 두 수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한다. 그들의 봉사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두 수녀의 삶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도 제작되고 있다. 소록도의 마리안느·마가렛 수녀 사택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도 추진되고 있다.

소록도성당 주임신부인 김연준 프란치스코는 “43년간의 헌신에도 두 수녀님은 우리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며 “우리 정부가 나서 현재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수녀님에게 보답해야 한다. 소록도 한센인의 친구이자 어머니였던 두 수녀님을 이제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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