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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7)] 이제현(5) 고려와 몽골 연결한 코스모폴리탄의 최후 

여말선초 걸출한 인재 키우고 퇴장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인재를 잘 알았고, 잘 선택했던 것은 도량이 넓었기 때문… 대표적 문생 이색(李穡)은 이제현이 닦은 문명의 실크로드 따라 성장
토지문제, 재정문제, 빈부격차, 왜구문제는 고려말의 최대 현안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려왕조가 멸망했다. 이제현은 70세에 고령에 이르러서도, 국가와 민생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역불급의 말년이었다.


▎이제현의 제자 목은 이색을 모신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 오른쪽 아래의 건물이 위패를 모신 사당인 효정사이며 효정사 앞 건물이 유생들을 가르치던 진수당이다.
1352년 공민왕은 의욕적으로 첫 출발을 시작했다. 2월에 발표한 긴 즉위교서는 개혁적 문신관료들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정치는 곧바로 난관에 직면했다. 공민왕 시대의 개막을 대표하는 이제현과 조일신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즉 개혁과 권력 간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의 어려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개혁자라면 누구나 부딪히는 것이다. 권력은 본성상 개혁과 공존하기 어렵다. 권력의 목적은 ‘지배’에 있고, 개혁은 ‘지배’를 ‘봉사’로 바꾸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봉사는 불편하고 어렵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쟁취한 권력을 누가 ‘봉사’를 위해 쓰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개혁에 성공하려면 권력의 유혹에 견딜 수 있는 동지들이 필요하다. 공민왕에게는 당초 그런 집단이 없었다. 이제현을 대표로 하는 개혁세력을 포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편 공민왕에게는 권력 쟁취과정에서 형성된 측근집단이 존재했다. 그들에게 개혁세력은 불편한 존재였다. 천신만고 끝에 획득한 권력을 누려보기도 전에 뺏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적었고, 실제로 번번이 왕위 경쟁에서 패배했다. 두 번째 왕위 경쟁에서 패했을 때는 대부분의 측근이 곁을 떠났다. 하지만 소수의 측근은 집권에 대한 희망이 희박한 가운데서도 10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충성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주군이 왕위에 올랐고, 이제 주군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할 때인 것이다. 실제로 공민왕의 첫 인사는 측근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풍찬노숙하며 고락을 함께해온 측근들에게 공민왕은 확실히 보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최고위직인 도첨의정승은 이제현에게 맡겼다. 권력과 개혁의 조화, 그것이 공민왕이 첫 인사에서 의도했던 것이었다. 그의 첫 인사는 나무랄 데 없이 균형을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그 반대로서, 두 집단 모두의 불만을 샀다. 이제현 등 개혁적 문신집단은 공민왕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첫 인사를 보고 기대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52년 4월, 25세의 청년 이색(李穡)이 상소를 올렸다.

개혁은 ‘지배’를 ‘봉사’로 바꾸려는 것


▎고려 후기 섬세한 불화의 화법을 따른 능숙한 필법이 인상적인 <방목도>. 말을 중시한 고려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전하께서 이제 어지러움이 극하여 치평(治平)을 바라는 중요한 때를 당하셨으니, 마땅히 현사(賢士)의 기용에 목마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사를 맞이하기 위한 재물이 쌓인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힘써 정치에 대한 의견을 들어야 하는데 아직 밤중에 입시하는 신하를 위해 켜는 큰 촛불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현사가 어찌 모두 등용될 수 있고, 간사한 자를 어찌 모두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아직 한 가지 정치가 실행됐다는 것도 듣지 못했고 공연히 백성의 소망만 서운케 하니, 이렇게 하고서 그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李穡傳>)


▎원나라 문화와 고려문화는 융합의 길을 걸었다. 원나라 때 만들어진 흑칠나전누각인물문합. 고려시대 나전칠기를 연구할 때 좋은 자료 활용된다.
태고 보우(普愚, 1301∼1382)도 공민왕의 측근정치를 비판했다. 그는 고려 말 최고의 명승이자 16년간 공민왕의 왕사(王師)로 있었다. 명덕태후와 노국공주는 그를 극히 존신하여, 그를 보고 기쁨으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1352년 5월 공민왕은 보우를 내전으로 모시고, 불법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군주의 직을 잘 수행하려면 불교를 잘 믿는 것보다 교화를 널리 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부처에게 아무리 지극 정성을 다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아울러 “군왕이 사악한 자를 떨쳐버리고 올바른 이를 기용한다면 국가의 통치는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측근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내가 누가 사악하고 올바른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나 다만 그들이 나를 원나라까지 호종해 다들 고생했기에 함부로 내치지 못할 따름이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측근들의 불만도 컸다. 특히 조일신은 “이제현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을 대단히 시기했다”(<高麗史節要>)고 한다. 공민왕의 집권을 위해 자신은 목숨을 걸고 뛰었지만, 이제현은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가? 측근들 입장에서 보면, 이제현 등의 문신관리들은 프리 라이더들이었다. 더욱이 이들 문신관리는 과거를 주관하고 정방을 담당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측근들도 권력을 나눠주어야 할 추종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 측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조일신이 정방의 회복을 강력히 요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민왕이 완곡히 이를 거절하자 조일신은 사직으로 맞섰다.

근본 없는 자들이 요직을 차지?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모란당초무늬 나전경함. 짙은 갈색에 다양한 무늬가 별처럼 빛나는 수작이다.
문신관리들도 측근들의 행동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1352년 윤 3월 감찰집의 김두(金)와 감찰지평 곽충수(郭忠秀)는 감찰대부 이연종의 허락도 없이 조일신을 탄핵하고 그의 가노를 하옥시켰다. 그러자 조일신은 옥을 부수고 가노를 석방시킨 다음 오히려 김두와 곽충수를 비난하고 왕에게 파직을 요청했다. 공민왕은 양측을 모두 내전에 불러들여 각각의 입장을 경청했으나 결국 조일신을 지지하여 김두 등을 파직시켰다. 이는 개혁의 중단을 의미했다.

이제현은 이를 위험신호로 생각했다. 3월 그는 “신이 감히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지 못 하겠다”고 사직했다. 왕이 불허하자 그는 낙마(落馬)하여 발을 다쳤다는 이유로 다시 사직을 청했다. 이는 공민왕의 개혁이 중대한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이제현은 당시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도덕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자 개혁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퇴는 개혁의 장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공민왕이 이제현의 사퇴를 거듭 만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방이 부활되고 조일신의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감찰사 관리들이 처벌되었다면, 이제 이제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부에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불명예와 생명의 위협만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현의 사직은 공민왕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일신은 4월 들어 원승상 톡토가 공민왕에게 보낸 서한을 이용하여, 유숙과 김득배마저 축출했다. 측근들 가운데에서도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제거한 것이다. 두 집단의 싸움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측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측근들이 득세하자 기씨 일족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기씨 일족은 왕도 그들 아래로 보고 있었다. 원 제국 황후의 일족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기철은 왕에게 칭신(稱臣)하지 않았고, 거리를 갈 때는 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고려 내의 삶에서는 개성의 전통 있는 권문세족으로 행세했다. 이제현의 둘째 아들 이달존의 딸은 기철의 둘째 아들 기인걸(奇仁傑)과 혼인했다. 어울릴 수 없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제현과 기철은 사돈간이었다. 이 때문에 공민왕과 측근들의 처신에 대한 기씨 일문의 시각은 이제현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조일신이나 측근들은 근본이 없는 자들이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계조차 분명치 않은 말족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하고 세상을 횡행하고 다니니 달가울 리 없었다.

기철 일족의 불편한 심사는 감찰대부 이연종에게 먼저 표출되었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의 후손 이연종은 별명이 ‘철석간장’이었다. 충렬왕대 과거에 급제한 그는 젊을 때부터 부정행위자와 권신들에게 엄격했다. 충정왕 초, 원 사신 셍게(雙哥)를 위해 잔치를 베풀 때, 덕녕공주가 남면하고 왕이 동면했다. 원 제국의 서열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감찰대부 이연종은 왕이 남면해야 한다는 예법을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원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발언이었다. 원을 의식한 다른 관리들이 이연종을 힐난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는 왕에게 몽고식 변발과 호복을 버리라고 요청하여, 공민왕이 이를 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그가 충정왕대에 이어 공민왕대에도 계속 감찰대부로 재직한 것은 조일신의 비호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연종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서는 의심스러운 평가다. 하지만 그가 조일신 등 측근들의 범법 행위에 침묵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감찰사 관리 김두와 곽충수가 조일신을 탄핵했을 때 공민왕은 조일신의 요청에 따라 양측 입장을 청취하게 했는데, 이연종은 자신의 부하들이 올린 이 탄핵문을 조목조목 신문했다. 그러자 김두는 “공은 헌사(憲司)의 우두머리로서 죄인을 탄핵하지도 않고 도리어 우리를 신문하는 거요?”라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이연종은 부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기철 일문의 셋째 아들 기원(奇轅)은 “이 늙은이가 대체 들어서 아는 것도 없는가? 어째서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는가?”라고 이연종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이연종은 “최근 조익청과 전윤장을 탄핵하였는데, 이제현과 조일신마저 탄핵한다면 주상께서 누구와 국사를 의논하겠는가?”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동문서답이었다. 그러나 기원의 힐난은 의미가 분명했다. 공민왕의 측근들에 대한 적대감의 표시이자 경고였다. 그래서 이연종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생존 위해 조일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공민왕


▎충남 보은 소재 익제 이제현 영당. 60㎝ 정도의 석단을 쌓아 그 위에 당을 지은 것이 특징이다.
1352년 3월에서 5월 사이, 공민왕을 둘러싼 두 집단의 긴장은 점점 높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윤3월, 감찰사 관리들이 파직되자 이제현은 거듭 세 번이나 사직을 강청했다. 촉수가 민감한 사람은 이제현과 이연종처럼 정치의 장 밖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9월, 조일신은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다수의 친원파를 제거하고자 했지만, 살해된 사람은 기원뿐이었다. 보복은 확실히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난은 동기가 분명하지 않다. 당시 원나라가 기울고는 있었지만, 아직 천하대세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일신 한 사람의 의지로서 이런 모험을 감행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기철 일족에 대한 조일신의 두려움과 공민왕의 반감이 일치되어 일어났을 것이다.

5년 뒤의 사태를 보면 분명하다. 1356년 친원파를 제거하고 원에 보낸 문서에서, 공민왕은 기철 등이 “나라 다스리는 법을 흔들어 정령(政令)이 이에 따라 움직였고, 기강이 서지 아니하여 통제할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기철 일파를 확실히 제거하지 못하여, 사태가 위험해졌다. 왕이 살자면 조일신을 희생양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조일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을 불신한 그는 정부를 장악하고, 왕을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6일 뒤 공민왕은 이인복의 협력을 얻어 조일신을 제거했다. 만약 사임하지 않고 계속 정승 직에 있었다면 이색의 논평대로 이제현 역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해 겨울 10월에 조일신이 여러 불령배(不逞輩)를 모아 밤중에 왕궁에 침입하여 미워하던 사람을 해치고 군병을 풀어서 마구 살해했으나, 공은 그때 벼슬을 사퇴한 후였으므로 그 화를 면하였다.”(<李齊賢墓誌銘>)

조일신이 처형된 이튿날 공민왕은 인사를 단행하여 이제현을 다시 우정승에 임명했다. 하지만 개혁은 중단되었다. 조일신의 난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민왕이 완전히 국외자로 빠져 있다는 점이다. 먼저 원로들이 고려 정부의 최고 의결기관인 도첨의사에 상소하여 “천정(天庭, 원 조정)에 우러러 보고하여 확실히 처단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후손을 징계하라”고 요청했다. 조일신 난에 대한 최종 판단을 원 조정에 맡기자는 것이다. 이에 도첨의사는 원로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여 정동행성에 “황제에게 아뢰어 형벌을 밝게 시행하여 후손을 징계하라”고 요청했다. 원은 종친을 담당하는 종정부(宗正府) 상판(常判)과 이부상서를 파견하여 관련자를 심문했다. 조일신 난을 황실에 관련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관련자들은 엄격히 처벌되었으나, 다행히 공민왕은 무사했다. 기철 일족이나 원이 공민왕의 의도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광범위한 농민봉기로 인한 정치적 난국을 고려하여, 원은 일단 사태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대략 마무리 된 10월말 공민왕은 유지를 발표하여 조일신 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표명했다. “과인이 천자의 명을 받아 조종의 왕업을 지키니, 조석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다스림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아는 것이 미치지 못한 바 있고 성의가 신실치 못한 바가 있어,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재변이 거듭 일어났으며 역적 조일신과 정천기 등이 흉도를 모아 반역을 꾀하였다.”(<고려사>)

이 유지는 먼저 원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자신의 왕권이 천자의 명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성실하지 못해 천재지변이 발생하고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고 자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즉위 초 정력적으로 추진된 개혁 정치에 대한 책임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 실패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자숙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공민왕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국력 쏟아가며 기철 일당에게 굴신한 공민왕


▎익제 이제현은 인재를 잘 알아보고 그들을 잘 키운 문인으로, 조선의 새로운 유학 전통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사의 결과를 보면 공민왕대 초반은 반원정책을 감행해야 할 적기였다. 역사의 흐름이 원에서 명으로 바뀌고 있었고, 고려 내정을 혁신하려면 친원 세력의 척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적의 시기가 언제인가였다. 1352년은 다소 이른 시기였고, 공민왕의 시도도 실패했다. 1356년도 조금 빨랐다. 원나라는 1368년까지 버텼다. 그 사이 두 차례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원한을 품은 원이 1364년 덕흥군에게 1만의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입케 했다. 이런 사건들은 원과 협력하여 대처했다면 고려의 피해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조금만 늦었다면, 고려는 자비령 이북 동녕부와 영흥 이북 함경도를 포괄한 쌍성총관부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388년 요동정벌도 이들 영토에 대한 분쟁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실종되었다. 기철 일족은 권력을 회복했다. “관리의 선용과 이동이 기철 등의 기뻐하고 노함에 따랐”고, “중외의 관청에 다 친척을 두고 요직에 있는 자는 심복이 아닌 자가 없었다.” 1353년 7월 기황후의 소생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 1338∼1378)가 마침내 황태자에 책봉되자, 기씨 일족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공민왕은 그런 기철 일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전심전력했다. 왕은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게 해달라고 원에 요청했다. 그해 7월 원은 16세의 황태자를 직접 고려에 보냈다. <고려사>의 만만태자(巒巒太子)가 바로 그다.

고려 정부는 황태자와 기황후의 모친 영안왕 대부인을 모시고 몽골식 큰 연회인 보르챠연(孛兒扎宴)을 베풀었다. 연회장을 수천 필의 베(布)로 만든 꽃과 여러 가지 물건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일 간 주야로 춤과 노래를 즐기는 향연이었다. “산천은 용동(聳動)하여 서로 경축하고, 부로들은 이 성대한 연회를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宴孛兒扎宴後謝皇太子殿牋>) 하지만 그 비용이 막대하여 국가 재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왕실 창고가 비어 신하들에게 새해 선물도 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국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 시기 이제현의 정치적 행적은 임명과 사임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1357년(공민왕6) 5월 은퇴할 때까지 이제현은 네 차례나 정승에 올랐다. 인신으로서 영화의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은 그의 명망과 위신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실질적 의미는 없었으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도 있었다. 1353년 이제현은 다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관장했다. 그 시험에서 이제현은 이색을 장원으로 선발했다. 아버지 이곡도 이제현의 문생이었으니, 부자가 같은 좌주의 문생이 된 것이다. 드문 인연이었다. 부자는 모두 원나라 과거시험 제과(制科)에 합격했으니, 이제현의 빛나는 선발이었다.

조일신의 난 이후 이제현은 어떤 정치적 현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1353년 그가 출제한 과거시험 문제(策文)를 보자. 그가 제시한 주제는 크게 5개인데, 그중 현안은 3가지였다.

첫째, 토지와 재정문제다. 그는 “법제가 이미 400년 동안이나 오래 시행되어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대책을 물었다. 또한 겸병으로 인해 세금 수입이 무신들이 집권한 강화도 시대의 10분의 2~3밖에 되지 않은 현실을 지적하고, 대책을 물었다.

국가와 민생에 대한 관심의 끈 놓지 않아


▎1976년 전남 신안에서 인양된 원나라 무역선. 고려는 원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이종교배의 새로운 문화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둘째는, 고려를 원의 일부로 복속시키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에 대한 우려다. 입성책동은 1309년 충선왕 복위 이후부터 약 3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모두 고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네 번째 책동은 1343년 충혜왕 복위 4년째 되던 해에 일으킨 것이고, 그 뒤 10여 년간 잠잠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입성책동에 대한 우려가 생긴 것일까? 그 이유는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 원에 올린 문서에 나온다. 기철 일족이 원의 쇠락을 염려하여 졸지에 권세가 떠나갈 것을 우려하여 난을 도모했다고 한다. 기철 일족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정세도 불안한데 공민왕의 저의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닥쳐올 위험에 대비하여 자구책을 강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중 하나가 고려왕조를 폐하고 원의 일부로 만드는 입성책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고려정치 전반에 대한 개혁책을 묻는 것이다. 이제현에 따르면, 몽골 제국의 지배가 확립된 이후 평화와 번영이 도래했다. “국가에서 원을 섬기고 나서 중외가 걱정이 없고 여염이 즐비하며 행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날로 은부해지고 들판은 날로 개간되어 염분이 많은 땅은 논을 만들고 황무지는 화전으로 경작하니, 그 어찌 백성이 많게 된 것이 아니랴.” 그리하여 잘사는 집은 금과 옥으로 그릇을 만들고, 장사꾼의 아내도 비단옷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내는 자는 100에 2∼3도 되지 않고, 10에 8∼9의 백성은 의식이 떨어지고, 이자를 갚느라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

왜구에 대한 대책도 없다. 왜구를 막는다고 가난한 백성을 짜내서 비용과 군량을 충당하고, 농부들을 몰아 군사와 마필을 보충하되 법으로 하는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토지문제, 재정문제, 빈부격차, 왜구문제는 고려말의 최대 현안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려왕조가 멸망했다. 벌써 67세의 고령이었지만, 국가와 민생에 대한 이제현의 깊은 관심은 약화되지 않았다.

1365년 공민왕은 궁정에서의 소연회를 이용하여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거두들을 모두 살해하고, 반원 독립을 선언했다. 왕이 기철 등의 의복과 좋은 비단을 재상들에게 선물할 때 이제현은 공이 없다고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반원파의 척결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으나, 그에게는 비극적 일이기도 했다. 그의 손녀딸이 기철의 둘째아들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기철과의 혼인으로 집안이 너무 성만(盛滿)한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질투하는 마음 없는 겸손과 온유의 화신


▎공민왕의 스승이었던 원증국사 보우(1301∼1382)가 창건한 경기도 고양시의 사찰 태고사.
“공의 손자가 기씨의 집안과 인척을 맺었으나 공은 기씨들의 권세가 너무 극성하였으므로 꺼리더니, 그가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매 공민왕이 양제(兩制: 왕의 교서작성 담당 직위)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축하하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그 일을 서술하라고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하지 않았다.” 지위가 높아지고 이름이 빛날수록 오히려 몸을 굽히고 삶을 신중하게 영위하는 것은 그가 평생 견지한 처세의 방도였다.

1357년(공민왕6), 이제현은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5세에 등과하고 1308년 22세에 출사했으니, 50여 년을 정치에 종사한 것이다. 그가 활동한 초기는 몽골제국이 번영의 극치에 이른 때였고, 후반기는 퇴락하는 때였다. 젊을 때 그는 충선왕과 함께 10여 년간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 뒤 30여 년은 긴긴 암흑의 시간이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며 짧은 봄을 맞았고, 다시 1351년까지 별 희망 없이 지냈다. 1351년 이후 이제현은 큰 기대를 가졌으나, 다시 한 번 좌절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대부분이 실의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온전히 보낸 사람은 드물었다.

1367년(공민왕16) 이제현이 세상을 떠났다. 이색의 평가에 따르면, “공은 천품이 중후한데다 학문으로 보완하여 고명정대(高明正大)했다. 그 처음은 의론(議論)으로 시작하여 사업으로 베푼 것이 찬란하여 가히 볼 만했다.” 천품과 학문으로 인격을 완성하고(修己), 다양한 논의를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업적을 이루었으니(治人) 성공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력에 비해 이제현이 가시적으로 이룬 대업은 별로 없다. 다만 시대에 맞춰 적절히 선처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현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국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현의 문화적, 정신적 의미다. 이제현은 몽골제국 시대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고려로 잇는 브리지였으며, 그것을 고려 안에서 소화하여 꽃피운 것이 이색이었다. 이제현이 브리지라면 이색은 호수다. 몽골제국 시대의 모든 문화적 유산이 이색에게 온축되어, 이후 한국 역사를 혁신하는 잎과 줄기들이 그로부터 뻗어 나와 성장한 것이다. 이색은 이제현의 문생일 뿐 아니라, 이제현이 닦은 문명의 실크로드를 따라 성장했다. 이제현은 인재를 잘 알았고, 잘 선택했으며, 잘 길렀다고 할 만하다. 그것은 그의 도량이 넓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작은 선행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칭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며, 선배가 남긴 일이면 아무리 세미한 일이라도 자신은 따라가기 어렵다고 하였다.”(<李齊賢年譜>) 질투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이 잘났다는 마음이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말의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이제현의 울타리 안에서 자란 것이다. 신돈은 그것을 비난했지만, 역사는 그곳에서 개화했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 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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