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현장취재] 북중 접경지역을 가다 

6·25전쟁의 거대 박물관, 마오쩌둥 동상이 우뚝 

투먼·창바이·린장·단둥=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hae.intaek@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중국 국경수비대, 탈북자·밀수업자 단속 위해 곳곳에 감시초소·CCTV 등 설치… 中, 미국 상대 무역흑자로 경제 발전하고 있지만 정체성 바뀌지 않은 듯

▎북중국경에서 바라본 북한은 21세기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낙후되고 정체된 모습이었다. 압록강 수풍댐 일대에서 배를 타고 북한 삭주군 인근을 지나던 ‘2016년 평화 오디세이’ 참가자들이 북한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지난 7월 초 5박 6일간 돌아본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는 시간이 멎어 있는 땅 같았다. 북한이 지난 1월 6일 ‘수소폭탄 실험’이라고 주장하며 4차 핵실험을 하고 2월 7일 장거리로켓인 광명성호를 발사한 뒤 처음으로 북중 국경지대를 찾았다.

중앙일보 ‘청년 오디세이 2016’ 현장답사팀과 함께 국경지대를 따라 5박 6일간 총 1750㎞를 달리며 중국 측에서 북한지역을 관찰했다. ‘청년오디세이 2016은’ 통일 미래세대인 청년·대학생에게 북한 이슈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높이려는 중앙일보의 통일 어젠다 프로그램이다.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은 8개 대학·단체의 청년·대학생 23명과 전문가·취재진 등 32명이 함께했다.


▎단둥역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마오쩌둥의 동상. 주변에 북한 상인들이 많이 보인다.
북중국경 탐사는 두만강이 흐르는 중국 조선족자치주 투먼(圖們)시 외곽에서 시작했다. 북한의 온성군 남양노동자구를 마주보는 지역이다. 그 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여러 곳을 살필 수 있었다. 중국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과 맞댄 북한 양강도의 도청 소재지 혜산시, 김일성의 부인 이름을 딴 김정숙군, 아버지 이름을 딴 김형직군을 지나 수풍댐의 맞은편인 자강도 삭주 등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북중 교역의 중심지인 단둥(丹東)시를 돌아봤다.

북한 현실 목격할 수 있는 1400㎞


▎함경북도 의주군 마을 주민들이 수풍댐 하류에서 고기를 잡은 뒤 노를 저어 이동하고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본 온성군 남양노동자구는 한반도의 가장 북쪽인 ‘온성군 유포리 북쪽 끝’에서 불과 몇 ㎞ 떨어진 곳이다. 중학교 지리교과서에서 한반도의 동서남북의 끝을 ‘독도’, ‘평안북도 마안도’, ‘제주도 마라도’,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리’로 배웠던 세대로서 묘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양 근처에는 김일성이 1933년 3월 11일 항일유격대를 소집하고 무장투쟁을 조선 전역으로 확대한다는 전략을 제시한 ‘왕재산 회의’가 열렸던 해발 239m의 왕재산이 있다. 북한의 혁명전적지다. 북한의 왕재산 악단의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두만강을 가로질러 두 지역을 잇는 남양대교는 30위안의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돼 있었다. 입장료를 내도 다리는 건널 수 없다. 길이 320m의 다리 중간에 국경임을 표시하는 붉은 줄과 ‘邊境線(변경선)’이란 표시가 한자로 적혀 있다. 변경선에 서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리를 뻗어 그림자라도 국경을 넘어가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북한과 사이에 있는 두만강을 지나며 북한 쪽에 더 접근해서 살피는 작은 유람선이 운항 중이다. ‘은둔의 나라’ 북한은 중국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중국-러시아의 삼각교역 중심지로 번영을 누릴 지리적인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동쪽 바다로의 출구가 막힌 중국 동북지역, 인구 밀집지역이 없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활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 건너편으로 북한 경비병만 보였을 뿐 주민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한적하고 초라한 변경 마을일 뿐이었다.

국경에 있는 북한 남양역에는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중국 쪽으로 향하고 있어 눈에 잘 보였다. 중국 국경을 따라 가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으로 바라본 북한 지역은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와 이른바 ‘영생탑(永生塔)’으로 특징지어졌다.

김 부자의 초상화가 있는 곳은 북한의 철도역이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초상화는 설치돼 있었다. 영생탑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등 김 부자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나타내는 구호가 적힌 탑이다. 북한의 국경지역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사람이 몰려 사는 것에는 으레 그 한복판에 이런 구호가 적힌 영생탑이 보였다. 남양 노동자구는 김 부자 초상화와 영생탑을 끝없이 보게 되는 북중국경 답사의 시작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처음으로 본 북한 온성군을 접하며 참가자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민둥산이었다. 이는 서울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과도 흡사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강 풍경 뒤로 펼쳐진 북한의 개성시 남부의 산은 온통 헐벗은 모습이다. 북한의 가장 남쪽부터 가장 북쪽까지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북한을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도 이를 잘 증명해준다. 올 들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나무심기를 유달리 강조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민둥산은 북한 궁핍함의 상징이다.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 살펴본 북한의 모습은 기본적인 농업을 영위하기도 힘들 정도로 보였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산야에서 나무를 찾기 힘들어진 이유를 대체로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경제난으로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원을 제대로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선 나무를 때는 목탄차가 지금도 운행된다. 목탄은 가정이나 사업장의 연료로도 이용된다. 석탄은 중국에 수출해 외화를 얻는 자원이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1960년대 이후 김일성의 지시로 경사지를 일군 다락밭 사업이었다. 북한이 이를 도입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농업부문의 성과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협동농장체제 아래에서는 농민에게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힘든 것이 생산성 저하의 근본 원인이었다.

자연재해의 부메랑 다락밭


▎1.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긴 단둥 단교의 중국 측 입구에 설치된 중국인민지원군조형물. 가운데 망원경을 목에 걸고 있는 인물이 당시 사령관인 펑더화이. 2. 북한의 다락밭. 산비탈을 밭으로 개간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의 산은 황폐화됐다.
하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업적인 협동농장의 부작용을 인정하기 거부하고 대신 더 많은 경지의 공급으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다. 그렇게 도입된 다락밭은 농업생산을 증가시키기는커녕 자연재해의 원인이 됐다. 경사면의 나무와 풀을 베고 경작지를 만들었으니 우선 산에 나무가 사라졌다.

산에 나무가 사라지면서 홍수 조절기능도 떨어져 산사태와 홍수 등 자연재해가 수시로 발행했다. 비만 오면 토사가 씻겨 내려가 땅은 황폐해졌다. 폭우가 내리면 경사지가 무너지기 십상이어서 산사태도 수시로 났다. 다락밭은 북한 기근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산비탈에 계단을 쌓고 윗면을 수평으로 만들거나 완만한 비탈로 만든 밭”을 다락밭으로 정의했다. 윗면을 수평으로 만들면 수평다락밭이고 완만한 비탈로 만들면 비탈다락밭이다. 신문은 경사가 16도 이상 되는 비탈 밭을 다락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작품인 다락밭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울러 1999년부터는 ‘새땅 찾기운동’이라고 해서 간척지지 야산·경사지 등을 개간해 붙임땅(농경지)를 늘리도록 했다.

그 현장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북중국경에서 바라본 남양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북한의 산은 온통 다락밭 투성이다.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만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북중국경에서 바라본 북한은 낙후되고 정체된 모습이다. 도저히 21세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낡은 건물이 방치돼 있다. 공장과 집에서는 연기를 보기 힘들었다. 아무리 북한의 변방지역이라고 해도 심산(深山) 수준이었다. 2011년 김정일의 사후 김정은 시대가 열렸음에도 국경지역에서는 별다른 변화의 기미를 느낄 수 없다.

사실 김정은은 권력을 잡은 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시성 사업을 크게 벌였다. 2012년 평양민속공원에 이어 2013년에는 대성산 종합병원과 해당화관, 마식령 스키장을 잇따라 건설했다. 평양체육관과 문수물놀이장, 갈마호텔, 압록강 유원지는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하지만 이번 답사 중에 관찰할 수 있었던 북한 혜산시는 참담한 모습이었다. 양강도의 도청 소재지인 혜산시는 국경인 압록강변까지 마을이 형성돼 있다. 그곳에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과거 공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김일성 유적지 근처도 쓰레기장으로 방치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신압록강대교. 중국의 지원으로 완공됐지만 북한의 거부로 개통은 하지 못하고 있다.
강안의 경비초소에는 북한 병사들도 보였다. 아이들이 나와 공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었다. 압록 강변으로 이어지는 강둑에는 철망이 설치돼 있다. 북중 국경지대와 탈북자들을 연구하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과거 압록강변에는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탈북을 막기 위해 청망을 설치하고 감시를 늘리면서 주민들이 강변으로 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중에 깔끔하게 단장된 흰색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강 교수는 이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를 위한 노동당 사적관이라고 소개했다. 혜산에는 김일성의 첫 항일유격대 투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전투 기념탑도 보였다. 보천보전투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기획 아래 함경남도 갑산군 보첨면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이 이름을 따서 북한에는 보천보전자악단이 생겼다.

한국의 드라마·영화·가요 등 한류의 북한 유입과 탈북자 실태를 연구하는 강 교수는 압록강의 중국 국경 쪽 강변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설치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혜산을 출발해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서 약 2m 높이의 T자형 시멘트 기둥과 함께 중국측이 설치한 철조망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지난 몇 년간 설치작업이 계속 이뤄져 이제는 북중접경 1400㎞ 대부분에 설치됐다고 한다.

곳곳에는 중국의 국경수비대가 감시초소와 감시용 CCTV도 곳곳에 설치했다. 탈북자는 물론 밀수업자도 단속할 수 있는 시설이다. 북한 쪽에도 최근 들어 전기철조망이 새로 설치되고 있다고 한다. 탈북자의 유입은 북한에는 체제 불안 요소지만 중국으로서도 경비불안 요소의 하나다. 거기에 만일의 경우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몰려올 난민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혜산에서 김정숙읍을 지나 김형직읍에 이르는 220㎞ 구간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은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역사 교과서에서 봤던 압록강 떼몰이를 실제로 목격한 것이 그중 하나였다. 강이 얼지 않은 늦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압록강 떼몰이는 백두산 근처에서 벌목한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고 사람이 직접 올라타 물살을 따라 하류로 이동시키는 전통적인 목재 운송법이다.

동행한 조선족 안내인 권영범(43) 씨는 “강물의 흐름을 절묘하게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예술에 가깝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21세기의 모습은 아니었다. 북한 측 압록강가 모래 언덕에선 주민들이 허리를 굽혀 뭔가를 걸러내는 모습이 보였다. 강 교수는 북한 당국의 통제 아래 사금을 채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압록강 하구 쪽에서는 북한 수풍댐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만들어진 이 댐은 한때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해방 직후까지 남한 지역에도 전기를 공급했다.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한쪽으로 붙어 1시간가량 삭주군 청수지구를 살펴봤다. 교사와 어린 학생들이 나와 다락밭에서 작업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자전거가 줄지어 달리는 사이로 목탄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시골길을 지나갔다. 강변에선 염소에 풀을 뜯기는 할머니, 오리를 키우는 아주머니, 작은 보트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중년 남자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천진난만하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강변에는 과거 공장으로 보이는 곳에 거대한 굴뚝이 줄줄이 보였지만 연기는 볼 수 없었다.

냉랭한 북중관계와 은밀한 교역의 ‘공존’


▎1. 북중 경제교역의 상징으로 5년 전 성대한 착공식을 했던 황금평. 그러나 핵실험 등으로 인한 관계 냉각으로 인해 풀밭으로 변했다. 2. 압록강을 이용한 목재 운송.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19세기의 풍경이다.
신의주와 마주한 단둥에서는 유엔 제재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북중 경제교류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 부자 배지를 단 북한 사람이 단둥역, 고려거리 등에서 많이 보였다. 압록강에서 불과 1㎞도 떨어지지 않은 단둥 중심가에는 명품가가 성업 중이었다. 북한에 대한 사치품 교역을 막아 지도부를 압박하자는 유엔 제재를 무색하게 하는 현장이었다.

보따리 장수들이 명품을 구입해 들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수화물로 인정해 누구도 막지 않는다. 북핵 저지를 위한 대북 제재가 효과를 나타내는 데는 중국의 의지에 달렸음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5년 전 성대한 착공식을 하고 북중 경협의 상징이 됐던 황금평(黃金坪) 경제특구는 2013년 12월 장성택 처형 이후 개발이 중지돼 지금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압록강 가운데 있던 북한의 섬이었으나 강 흐름 변화로 이제는 중국 땅과 붙어버린 형국이다. 넓은 벌판의 입구에는 관리사무동 만 덩그러니 서 있다. 관리사무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철문으로 막혀 있고 자물쇠는 녹슬어가고 있었다. 근처로 다가갔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근처에는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현수교인 신(新)압록강대교가 보였다. 거대한 컨테이너 화물트럭이 지날 수 있도록 중국 지원으로 건설된 다리다. 사실상 완공상태지만 북한 측이 개통을 미뤄 방치되고 있다.

북한의 핵 도발과 중국의 대북제재 동참으로 냉랭해진 양측의 분위기는 단둥의 호시(互市)무역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호시는 북·중 양쪽이 번갈아 가며 장을 연다는 뜻이다. 지난해 10월 ‘100년 만의 재개장’을 알리며 문을 연 호시를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건물만 들어선 채 거의 비어 있었다.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으며 몇몇 중국 상인만이 창호재료나 목재 문 등 건축자재 등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릴 뿐이었다. 북중 간 교역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발전은 멈춰 있었다.

북중 국경지대는 6·25전쟁에 대한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국경지대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 천윈(陳雲, 1905~1995),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의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6·25전쟁과 관련 있는 인물이다.

중국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동상은 단둥역 광장에 만날 수 있다. 현지인 안내인은 “마오의 동상이 북중국경인 압록강의 반대쪽을 보고 있어 아들을 잃은 북한이 보기 싫어 그렇다는 설도 있었는데 사실은 베이징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소개했다.

마오안잉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뜻)전쟁으로 불리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숨졌다. 당시 인민지원군은 평안북도 동 창군 대유동에 총사령부를 마련했으며 마오안잉은 여기서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일했다.

상징적인 동상으로 본 중국의 국경도시


▎함경북도 온성군에 있는 영생탑.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마오안잉의 동상은 랴오닝성 단둥시 중심지에서 약 40㎞ 떨어진 관전현에 서 있다. 관전현 하구(河口)과 평안북도 청성군을 연결하는 길이 709m의 칭청차오(淸城橋) 근처에 서있다. 그는 1950년 이 다리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인 1952년 완공된 다리는 1951년 미군 폭격으로 끊긴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동상 근처는 꽃도, 장식도 없었다. 평일인 탓인지 찾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근처에선 중국인 중년남자가 북한 담배·우표·지폐를 팔고 있었다.

8대 원로로 불리는 천윈의 동상은 북한 자강도 중강진과 마주보는 중국 지린(吉林)성 린장(臨江)의 압록강변에 10m 이상 높이로 들어서 있다. 천윈의 동상은 두 가지 면에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하나는 그가 이렇게 대형 동상을 세울 만큼 위력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부총리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를 지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 개혁파인 덩샤오핑(鄧小平)에 맞선 보수파의 원로로서 활동했다.

개혁개방에 반대한 보수파의 동상이 북한 중강진을 마주 보는 린장의 강변 공원에 서있는 것은 6·25전쟁 때문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공산당 동북국 부서기, 덩북민주연군 부정치위원을 지낸 그는 중국 건국 뒤 경제부서에서 계획경제를 담당했다. 그러다 6·25가 발발한 뒤 국경도시인 린장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자 현장에 파견됐다. 린장에 도착한 그는 “린장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로 현지 주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 덕분에 그의 동상이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동상 뒤쪽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는 코카콜라를 팔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강 건너 북한 중강진 지역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펑더화이의 동상은 북한 신의주 맞은편에 있는 중국 단둥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문화유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압록강 단교(斷橋)의 북단에 서 있었다. 단독 동상은 아니고 6·25 당시 북한에 파병된 중국인민지원군 단체 동상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압록강 단교는 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끊겼는데 이후 복원하지 않고 문화유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중국 이데올로기 교육의 현장이다. 미국에서 거대한 무역흑자를 얻어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는 바뀌지 않아 보였다.

현장에서 살펴본 중국은 언제라도 북한의 혈맹임을 내세우며 최대 경제 파트너인 한국을 압박할 수 있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런 중국을 설득하고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얻고 통일의 길로 가는 어려운 과제가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 투먼·창바이·린장·단둥=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hae.intaek@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