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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사랑학개론] 문학에 담긴 사랑의 ABC(2) 카사노바 '내 인생 이야기' 

“자신의 사랑을 말로 드러내는 남자는 바보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130여 명의 여성과 ‘비공식적으로 결혼하고 이혼한 남자’…카사노바 유혹법의 핵심은 만난 여자를 ‘특별하게’ 대접한 것

▎독일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가 그린 카사노바의 초상화(1760). 카사노바는 서양사에서 가장 유명한 ‘유혹자다. / 사진:위키피디아
남자들은 “왜 여자들은 나처럼 착하고 능력 있는 남자가 아니라 ‘늑대 같은 나쁜 놈들’을 좋아할까”가 궁금할 수 있다. 여자들은 “왜 남자들은 나처럼 착하고 어여쁜 여자가 아니라 ‘여우 같은 나쁜 년’들을 좋아할까”가 궁금할 수 있다. 궁금증을 풀 열쇠 중 하나는 ‘유혹의 비밀’이다. 경찰관 수중에 있는 권총은 치안 유지 도구다. 권총이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나쁜 일에 쓰인다. ‘유혹의 기술’ 또한 마찬가지다.

유혹은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끎. 성적인 목적을 갖고 이성(異性)을 꾐”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다. 하지만 유혹은 사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요 과정이다. 연애나 결혼 또한 그 출발점은 유혹인 경우가 많다. 유혹은 기예(技藝)다. 기예는 ‘기술(skill)’과 ‘예술(art)’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서양사에서 가장 유명한 ‘유혹자(誘惑者)’는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다. 영어로는 ‘시두서(seducer)’ 즉 ‘성관계를 하자고 유혹하는 사람’이다.

카사노바가 태어난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교재판소는 그를 무신론자로 단죄한 적이 있다(나중에는 그를 스파이로 채용했다). 마치 이에 반발하는 듯 카사노바는 “나는 철학자로 살았으며 크리스천으로서 죽는다”라고 임종 때 침상에서 말했다고 전한다. ‘난봉꾼의 대명사’가 한 말이라서 이상야릇하다. 카사노바는 적어도 유혹이나 사랑에 관한 한 죄의식·수치심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파렴치(破廉恥)가 유혹자의 첫째가는 자질이다.

카사노바는 그가 살았던 18세기에 일반인들에게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귀족·명망가들 사이에서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카사노바에게 불멸의 이름을 선사한 것은 그의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내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The Story of My Life)](이하 [이야기])였다.

국보급 문헌이 된 회고록


▎동생인 화가 프란체스코 (1727~1803)가 그린 자코모 카사노바의 초상화. / 사진:위키피디아
2010년 프랑스 정부는, 3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를 프랑스의 국보(國寶)급 문헌으로 인정하고 960만 달러에 구입했다. ‘혁신적인 프랑스어 사용’에 주목했다. [이야기]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과 상류층의 국제어(lingua franca)이자 계몽주의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집필됐다. [이야기] 원고의 존재를 알고 있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연합국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원고가 무사한지 염려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60년 이후 출간된 무삭제판 [이야기]는 12권 분량이다. 120만 단어다. 카사노바는 ‘사진처럼 정확한 기억력(photographic memory)’으로 유명했다. 읽은 책이나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그들과 나눈 대화를 사진처럼 머릿속에 복사해 끄집어내는 능력을 과시하며 살았다.

[이야기]는 카사노바의 생애에서 그가 50세가 되기 전인 1774년 여름까지만 다룬다. 서문은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한다. 카사노바는 자신이 그리스도교가 믿는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며 서문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 “나는 곤경에 빠졌을 때마다 기도했으며 기도에는 항상 응답이 있었다.” “신의 섭리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신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절망은 죽이지만, 기도는 절망을 떨쳐버린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서문에서 “도덕적인 책이나 비도덕적인 책은 없다. 잘 쓴 책과 잘 못 쓴 책만 있다. 그게 다다”라고 했다. 카사노바의 [이야기]가 ‘잘 쓴 책’인 것은 확실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극악무도하게 ‘비도덕적인 책’이기도 하다. 카사노바는 [이야기]를 통해 ‘난봉꾼·플레이보이는 지옥에 간다’는 당시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가톨릭교회는 카사노바 사후에 출간된 [이야기]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반짝반짝 야망으로 빛나는 눈, 185㎝에서 2m에 달하는 훤칠한 키, 넓은 이마, 북아프리카 사람을 연상시키는 검은 피부···. 젊었을 때 카사노바는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는 여성도 많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 카사노바도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빠지고 이가 빠졌다. 60세를 넘겼을 때엔 거의 무일푼이 됐다. 카사노바가 말년(1791년부터 거의 사망 직전까지)에 [이야기] 집필에 매진한 것은 인생이 너무 따분하고 슬펐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마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 6만5000㎞를 이동했다. 돈과 명성, 그리고 유혹할 타깃인 여성을 찾아서다. 온 유럽을 누비며 풍운아·모험가로 살았던 카사노바의 말년 직업은 발트슈타인 백작 도서관의 사서였다. 월급도 괜찮았고 생활도 안정적이었지만 모험은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다른 직원들과 ‘파스타 삶는 법’ 같은 시시콜콜한 문제로 다투었다. 자살까지 생각했다. 한 의사가 그에게 정신치료 방안으로 회고록 집필을 권유했다. 의사의 판단은 옳았다. 카사노바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나를 비웃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성공하고 있다. 하루 13시간씩 쓰고 있는데 13시간이 13분처럼 지나간다.” 카사노바는 [이야기]를 출판할 것인지 불태워버릴지를 고민하다가 결론을 못 내리고 원고를 조카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달인’


▎1. 카사노바에게 불멸의 이름을 선사한 회고록 [내 인생 이야기]의 프랑스어 원고. / 2. 감옥에서 탈출하는 카사노바. [내 탈주 이야기](1788)에 나오는 삽화다. 카사노바는 1755년 마법사· 프리메이슨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탈옥해 프랑스로 갔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야기]에는 카사노바가 최대 130여 명의 여성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소상하게 나온다. 아주 솔직한 책이다. 자랑하고픈 성공담뿐만 아니라 조기사정(premature ejaculation)이나 발기불능(impotence)으로 인한 실패담도 나온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결코 ‘섹스가 다’는 아니다. “[이야기]에는 체위보다는 음식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이야기]는 18세기 유럽 풍속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소중한 문헌이다. 일부 날짜나 장소 등의 착오가 있지만, 현미경을 들이밀고 확인해보니 전체적으로 정확하다고 학자들이 인정한다.

카사노바는 천재였다. 12세에 파도바 대학에 입학했다. ‘유대인들이 ‘시나고그’를 지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문으로 17세 나이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발음 문제가 있는 여배우를 위해 알파벳 ‘r’이 들어가지 않은 희곡을 하룻밤에 완성하기도 했다.

카사노바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은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은 단 한 분야에서도 달인이 될 수 없다(Jack of all trades, master of none)”라는 격언일지도 모른다.

‘폴리매스(博識家·polymath: 지식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였던 카사노바는 모험가·소설가·시인·사학자·수학자·음악가(특히 바이올린 연주자)·외교관·법률가·군인·여행가·번역가·사서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사기꾼·미식가·맵시꾼이었다. 특히 그는 ‘타짜(cardsharp)’였다.

카사노바는 자신보다 왜 괴테나 볼테르가 세인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카사노바 자신의 탓도 있다. 그가 인정한 신의 섭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카사노바를 난봉꾼 이미지가 너무 강한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업적을 덮어버렸다. 사실 카사노바는 ‘이것저것 다 잘하는 달인(master of all trades)’이었다. 카사노바는 세계 최초의 과학소설로 평가되기도 하는 [20일 이야기(Icosameron, 1788)의 저자이기도 하다. 회사를 차려 염직 산업 발전에도 공헌했다. 페미니즘의 초창기 이론가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세계 최초로 국가가 경영하는 복권 제도를 창시했다. 그는 성병 예방 효과를 대폭 증진시킨 콘돔의 개량자로도 기억된다.(카사노바는 젊었을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이가 좀 들고 수차례 임질·매독으로 고생한 다음부터는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고 개량했다. 19세기 이전 콘돔은 부자들만 구매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카사노바가 유혹한 여성은 다양했다. 공작부인·여배우·댄서·노예, 호텔의 객실담당 여직원, 수녀, 농가 아낙네 등등이 포함됐다. 그렇다면 카사노바는 ‘치마 두른 여자’라면 무조건 정복의 대상의 삼은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카사노바는 20세기, 21세기 ‘픽업아티스트(pickup artist)’, 즉 ‘특별한 전술(tactics)로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의 대선배다. 하지만 그는 ‘하룻밤의 정복’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호색한이 아니었다. 욕정(lust)을 채우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여성을 침대에 눕히는 게 아니라 ‘밀고 당김’을 포함하는 코트십(courtship), 즉 ‘짝짓기를 위한 구애’가 그에게 더 중요했다. 그는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유혹’을 추구했다. ‘연쇄 유혹자(serial seducer)’였던 그는, 달리 보면 ‘연쇄 일부일처제(serial monogamy)’를 실천했다. 그는 130여 명의 여성과 ‘비공식적으로 결혼하고 이혼한 남자’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양보다는 질’이었다. 1년에 3~4명 정도를 유혹했다. 사랑이 식으면 헤어졌다. 헤어진 다음엔 사랑의 순간들을 회상하며 두고두고 음미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유혹자


▎카사노바는 여성이 ‘나는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줬다. 그림은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1703~1770)가 그린 ‘비너스와 마르스’(1754). / 사진:위키피디아
9개 유형의 유혹자와, 24개 종류의 유혹의 기술을 정리한 [유혹의 기술(The Art of Seduction)](2001)의 저자인 로버트 그린은 카사노바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유혹자로 꼽는다. 카사노바의 ‘수법’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대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던 카사노바는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결혼식 같은 공공 행사에 눈에 띄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인물은 ‘유혹의 메시지’를 띄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선물·아첨·속임수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아쉽게도 그가 항상 페어플레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카사노바 유혹법의 핵심은 만난 여자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 여성의 인생에서 부족한 ‘그것’을 알아내 모험이건 로맨스이건 우정이건 대화이건 ‘그것’을 주었다. 카사노바는 여성을 특별하게 대접했다. 여성이 ‘나는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줬다. 특히 그는 여성에게 질문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를 즐겼다. 지적인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들과 알쏭달쏭한 사랑의 언어 유희를 즐겼다. 카사노바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사랑을 말로 드러내는 남자는 바보다.” “언어가 빠지면 사랑의 쾌락은 적어도 3분의 2로 줄어든다.”

둘 다 대영제국 총리였지만,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은 ‘여성에게 가장 똑똑한 남자로 느껴지는 남자’,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장 똑똑한 여자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남자’로 평가된다. 카사노바는 유혹의 세계에서 글래드스턴과 디즈레일리를 통합한 고수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카사노바는 어떤 여자들은 포식자(predator)처럼 대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헤어진 다음에도 계속 서신을 나누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옛 연인들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남편감을 찾아줬다.

카사노바가 가장 사랑한 여인은 코드네임 ‘앙리에트’로 알려졌다. 어떤 장교와 남장(男裝)하고 여행 중이던 앙리에트를 만나 꿈같은 3개월간을 동거했다. 앙리에트가 카사노바를 먼저 버렸다. MM이라는 이니셜로 알려진 어느 수녀도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에고가 무지막지하게 강한 나르시시스트였던 카사노바가 사랑한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배우였던 어머니의 스폰서들

카사노바는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가에타노, 어머니 자네타는 배우였다. 야심가였던 어머니는 코티즌(courtesan), 즉 ‘귀족과 부자들을 상대하는 고급 성매매 여성’이었다. 동생인 유명화가 프란체스코에 대해서는 영국 조지 2세(1683~1760)가 생부라는 설이 있다. 카사노바는 어머니의 스폰서들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당시 배우는 신분이 낮았다. 신분 상승을 위해 열린 두 길은 사제나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카사노바는 두 길을 모두 시도했지만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그만뒀다. 카사노바는 볼테르, 루소, 새뮤얼 존슨,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3세, 교황 클레멘스 13세, 예카테리나 2세, 루이 15세, 프리드리히 대제 등 당대의 명사나 권력자들과 교유(交遊)했다. 그들 상당수는 카사노바의 매력에 무장해제됐다. 만약 카사노바가 유혹은 접고 권력이나 명성만을 탐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카사노바는 돈을 쓸 줄은 알았으나 늘리는 법은 잘 몰랐다. 큰돈이 들어온 적도 많았으나 결국 탕진했다. [이야기]에서 카사노바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의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했다. 카사노바가 묻혀있던 곳은 19세기 초 공원이 되었기에 그의 무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카사노바의 말말말···

- 내 오감의 즐거움을 함양하는 게 내 인생에서 주된 업무였다.

- 내 인생에서 성공과 불행, 밝은 날들과 어두운 날들과 같은 모든 것들이 내게 입증한 것은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악에서 선이 나오듯 선에서 악이 나온다는 것이다.

-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

- 인간은 자유롭지만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기 전까지는 아니다.

- 기록될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게 없다면, 적어도 읽을 가치가 있는 뭔가를 쓰라.

- 젊은이를 과감하게 만드는 것은 얄팍한 욕망이다. 강렬한 욕망은 그를 당혹하게 만든다.

- 실수하지 않는 자는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 내게 유일한 삶의 체계는 부는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내가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 사랑의 4분의 3은 호기심이다.

- 나는 사랑에 굴복할 뿐 사랑을 정복하지 않는다.

-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

※ 김환영 - 강중앙일보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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