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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6)] SF 스릴러로 한국소설 경계 넓히는 김희선 

“타인의 고통, 세계평화 내가 소설로 쓰고 싶은 것” 

공포영화 매니어, 약사 전문성 살려 기존 한국문학과 결 다른 작업
“끔찍한 고통은 뇌의 신경회로 바꿔… 정상·착란 경계 흥미로워”


▎소설가 김희선은 춘천에서 약사 생활을 하며 소설을 쓴다. 2017년 500쪽 분량의 장편[무한의 서]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사진:신인섭 기자
" ‘인간은 그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다.’ 어때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 ‘이봐, 젊은 친구. 정말 모르겠어? 그들이 기억하는 대신 지어내고 있다는 걸?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야.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니도록 진화한 유일한 동물.’”([무한의 책] 44쪽)

“‘난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길 공책에 적었을 뿐인데요. 그냥, 이런 세상도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에요.’ 할레드 말에, 아부엘은 빙긋 웃었다. ‘모든 소설은, 세계에 대한 상상이야. 네가 쓴 그 이야기처럼 말이다.’” ([라면의 황제] 225쪽)

72년생 소설가 김희선의 세계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인용문을 발췌한 두 책 모두 그의 소설책들이다. 잠깐, 72년생이라고? 지금까지 ‘젊은 작가 열전’에서 만난 최고령이다. 그런데도 젊은 작가 맞다. 생물학적으로는 젊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생 100세 시대를 상정하면 마흔일곱은 여전히 젊은 나이 아닌가?-이 땅의 유력한 작가 분류 기준인 등단 연도를 기준으로 하면 젊은 작가다. 2011년 계간지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니 9년 차. 그의 최신 단편 ‘공의 기원’(지난 3월 출간된 김희선의 세 번째 소설책 [골든 에이지]에 들어 있다)은 다른 여섯 작가의 작품들과 함께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등단 10년 이하의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물론 일곱 명 중 최연장이지만.

‘작가’ 말고 다시 ‘(작품)세계’로 돌아오면, 단순하게 말해 인간의 기억이 그리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것, 그리고 지금 말하는 대목이 더 의미심장한데,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세상 어느 곳에 이런 곳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의 세계를 옮겨 적은 게 김희선의 세계라는 말이다. 어차피 소설은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한 허구의 세계 아닌가? 김희선의 세계는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다. 진본 없는 가상 말이다.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얘기다. SF, 스릴러,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화(anecdote), 두터운 자연과학 지식 등이 김희선의 소설에는 대대적으로 들어와 있다. 이전에 소개한 정세랑, 일찌감치 SF적 상상력을 본격문학으로 끌고 온 윤이형 등 이 분야의 선구자들과도 또 다르다. 김희선은 보다 본격적이고 육중한 것 같다.

SF 안에 리얼리즘… 한국문학에 없었던 다름


▎김희선의 소설집. [라면의 황제] [무한의 책] [골든에이지]
간단히 특징 잡아본 김희선의 소설 개성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든든한 지원 세력을 만나지 못한 느낌이다. 4050 중장년층 남성들은 김훈 등의 선 굵은 문장들에 끌리고, 가장 활발한 소설 독자층인 2030 여성들이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에 끌린다면 SF·스릴러에 어울릴 법한 젊은 남성들은 미처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일까. 김희선은 지금까지 젊은 작가 열전이 만난 어떤 작가보다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취향의 문제겠지만, 그렇다고 재미와 울림의 진폭이 작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책 만드는 출판사 편집자들과 문학평론가들이 열광한다. 그렇다는 얘기가 풍문에 들린다. 가령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김희선의 2017년 첫 장편이자 유일한 장편 [무한의 책]을 분석한 글(‘가장 거대한 것은 어떻게 가장 사소한 것에 의해 구원되는가’, 계간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이것은 내가 한국문학에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그런 다름이다.”

“환상 속에 실재가 있고, 사이언스 픽션 속에 리얼리즘이 있고, 거대함 속에 사소함이 있고, 파국 속에 구원이 있는 이 놀라운 소설은 밖으로 밖으로 확장하면서 안의 윤리와 지혜를 드러”낸다고 평했다.

약학은 엄밀한 학문, 소설도 그렇게 쓴다

도대체 어떤 작품들이길래? 짐작하셨겠지만 김희선은 지금까지 세 권의 소설책을 냈다. 첫 소설집 [라면의 황제]를 2014년에, 그 다음 장편 [무한의 책], 두 번째 소설집 [골든 에이지] 순이다. 작가가 누구든 간에 각고의 노력 끝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조형해놓은 소설 작품을 또 다른 말로써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를 그리겠다며 면적을 차츰 확대한 결과, 실제 세상만큼이나, 실제 세상과 같은 크기의-더 컸던가?-지도를 제작한 우스꽝스러운 지도 제작자의 얘기가 나오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떠올리는 것으로, 특정 작품 내용을 요약하거나 핵심을 전하는 번거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

다만 세 권을 읽는 순서는 제안하고 싶다. 최신작인 [골든 에이지]를 먼저 읽으시라. 같은 강원도 출신 소설가 이기호가 ‘이 친구, 제대로 약 빨았구나’라고 추천사를 썼던 것처럼, ‘이건 뭐지’로 시작해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로 독후감이 끝날지 모른다. 어떤 종류의 능청스러움, 장광설에서 김희선은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흥미가 확 올랐다면 그 다음은 첫 번째 소설집 [라면…]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이후 소설책에서 반복 변주되는 김희선 소설의 밈(meme, 쉽게 말해 문화유전자)과 함께 풋풋함까지 접할 수 있다. ‘정복의 욕망’이 생겼다면 최종 심급은 어쩔 수 없이, 하나 남았으니 당연하게도, 장편 [무한의 책].

그런데 이곳이 허방 함정이다. 무려 500쪽이 넘는, 분량 면에서 흔치 않은 한국소설이다. 분량 뺨치게, 또 제목에 어울리게,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내용과 구조의 소설이다. 지구 종말, 신의 강림을 내세운 세기말 소설, 시간 이동, 재림하는 신의 외형이 멸종 생물 공룡을 똑 닮았다는 점에서 SF 판타지, 베트남 전쟁을 한 자락 걸치지만 80년 광주에서의 잔혹 행위를 트라우마로 안고 저주받은 평생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구원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해원소설, 소설 시점이 수시로 바뀔 뿐더러 단일한 스토리텔링 서술 평면이 아니라 다양한 글쓰기 형식을 통해 그 평면을 자주 떠난다는 점에서 메타소설이다. 읽는 게 어쩌면 도전일 텐데, 그래선지 인터넷 서점의 독자 서평들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완독에 의미를 부여하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다음 읽기 시작하는 게 좋다. 완독한다면 지금 한국소설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대해 그만큼 더 알게 되는 셈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한국소설과는 획을 긋는 독특함을 발산하는 어떤 인간 정신에 대해서도.

김희선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그를 두 번 인터뷰했다. [무한의 책]이 나왔을 때 한 번. [골든 에이지] 출간에 맞춘 이번 인터뷰를 위해 한 번 더. 알려진 대로 그는 약사다. 강원도 원주의 한 병원에서 일한다. 약국을 차리기도 했지만 접었다. 주4일 출근하는 병원 약사 직인데, 반드시 소설 쓰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자는 차원은 아니라고 했다.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은 이유도 있다고. 같은 약사인 남편도 그 점에 관한 한 취향이 일치한다.

약사라는 전문성은 소설 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김희선은 “약학이 조제 분량에서 실수가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엄밀한 분야여서인지 소설 원고를 쓸 때도 정확함에 집착하는 것 같다”고 했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사람 자체도 결국 물질로 이뤄진 존재라는 생각이 소설 기저에 깔려 있거나, 상상력의 범위가 다른 사람보다는 좀 넓지 않을까 한다”는 말도 했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다.

영화 '로보캅'에 감동해 고등학교 때 이과 선택


▎김희선은 고등학생 때 로봇을 만들기 위해 기계공학과 진학을 꿈꿀 만큼 SF 매니어였다. / 사진:신인섭 기자
세 권의 소설책에는 태어난 곳이 춘천으로 돼 있지만 실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교사였던 아버지의 전근지를 따라 정선·영월로 옮겨 다녔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학 시절까지 춘천에서 살아 고향으로 삼고 있다고.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표현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어린 김희선을 문학소녀라고 불렀다. 다만 독일소설을 좋아해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지와 사랑] 같은 작품을 20~30차례나 읽었다. 역사도 좋아해 문과 전공을 택한다면 독문학이나 역사학을 선택할 생각이었고, 그러면서도 추리소설을 무척 좋아해 초·중·고 시절 습작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 [로보캅]을 본 게 인생 항로 반전의 계기.

“너무 감동받아”(보통 재미있게 보고 말지 감동을 간직하지는 않는 영화 아닌가?) 기계공학과에 진학해 로봇을 만들려고 이과를 선택했다. 결국 약대에 진학했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무한의 책]에 끔찍한 인간 도륙 장면이 많이 나오던데 어떤 연원이냐고 물었더니 “공포영화, 스릴러를 너무 좋아해서 중학생 시절부터 많이 봤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본 공포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묻자 영국 감독 폴 앤더슨의 1997년 SF 스릴러 [이벤트 호라이즌]을 꼽았다. 우주선 ‘이벤트 호라이즌’ 탑승자들이 시공간 이동체험을 한 다음 누군가에게 미안했던 마음이나 후회, 잊히지 않는 슬픔이나 고통, 이런 것들이 환각·환청으로 나타나면서 하나하나 미쳐가 결국 서로를 살해하는 스릴러다. 폐쇄 공간 안의 공포(cabin fever)와 착란, 그로 인한 잔혹극이라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대표작 [샤이닝]의 우주판 같은 느낌의 영화라고.

김희선 소설을 조립하는 마지막 레고 블록은 영화·소설 등 장르 예술이었던 셈이다. 가령 [무한의 책]에 잠깐 등장하는 유령 로저 코먼은 미국 독립영화의 개척자로 꼽히는 생존 영화감독의 이름이다. 소설의 주인공 스티브가 연루된 한국인 가족 몰살사건이 벌어진 엘름가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1984년 공포영화 [나이트메어]의 영어 원제 ‘A Nightmare On Elm Street’의 그 ‘엘름’이다. 아, 배우 최무룡의 가요 ‘꿈은 사라지고’도 나온다. 마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제사(題詞)처럼 이 노래 가사가 반복 등장하는데 유튜브로 돌려본 최무룡의 가창은 야릇하고 허전했다.

이제부터는 지면이 허락하는 한 김희선의 육성을 전하겠다. 김희선은 과연 어떤 작가인가.

공포영화 많이 보면 혼자 있을 때 무섭지 않나.

“허구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볼 때는 긴장감 있게 본다. 공포물은 어차피 볼 거면 무섭게 보는 게 좋으니까 혼자 보는 걸 좋아한다. 스티븐 킹이 [죽음의 무도]라는 책에서, 실제로는 겁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일종의 정신적인 예방주사를 맞는 느낌으로 공포영화를 보는 거라고 써놨던데 내 생각이 꼭 그렇다.”

어떤 게 그렇게 겁나나.

“가령 주변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자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진정이 잘 안 될 정도로 놀란다. 한때는 뉴스를 아예 안 볼 정도였다.”

[무한의 책]에는 80년 광주 얘기가 많이 나온다. 새 소설집의 표제작인 ‘골든 에이지’는 결국 세월호에 관한 얘기다.

“세월호는 내게는 사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아이들이 느꼈을 생생한 공포가 상상이 되는 식으로 다가온다. 다른 작가들이 많이 썼지만 나는 못 썼다. 어차피 사실적으로는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재현을 잘한다 해도 피해 당사자들이 느꼈을 공포나 슬픔은 절대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팔십 넘어서까지 계속 소설 쓰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이번에는 세월호, 이번에는 광주, 그런 생각을 하고 쓰지는 않는다. 평소 많이 생각하던 것들이, 소설 쓰기 시작한 다음 나오는 것 같다. [무한의 책]의 광주 얘기는 스티브의 아버지 얘기를 소설 안에 써놓고 나서 ‘아, 이 사람이 겪은 비극은 80년 광주였구나’라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 광주 진압군 출신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정신병에 시달리다 사람들을 죽였다는 짧은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나오는 것 같다.”

[무한의 책]의 인물들은 과거 행동으로 인한 죄의식, 그에 따란 착란 상태에 무척 시달린다.

“책이란 책은 다 좋아하는데, 뇌과학책도 좋아한다. 과거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면, 쉽게 말하면 뇌의 신경회로 배선이 바뀌어 실제와 다른 얘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머릿속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 고통이나 슬픔을 잊으려는 거다. 그 자아, 그 새로운 인격에 머무르면 착란 상태가 되는 거고, 해리성 인격장애가 되는 거다. 그런 증상을 내가 재미있어 하다 보니 소설에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증상에 끌리는 건, 역으로 정상성에 대한 집착인가.

“그보다는 과연 정상은 뭐고 비정상은 뭔지, 그에 대한 의문이 큰 것 같다. 요즘은 정신과 병동에서 일하는데, 약물을 적절하게 투여하면 분열증이 심해 부모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산다. 그럴 때 정상, 비정상은 큰 차이 없는 거 아닌가.”

우리 존재 자체가 생각만큼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는 얘긴가.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다. 더 낫게 살 수 있고, 통증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일종의 양날의 칼 같은 거다.”

뇌과학 말고 또 다른 관심사가 있다면.

“약간 뜬금없긴 한데 세계평화? 그런 거에 관심 있다. 멀리 있는 일도 가깝게 느껴지는 세상 아닌가.”

[무한의 책]의 주인공 스티브는 인류의 죄를 혼자 짊어지고 세상 구원에 나선다. 마치 예수를 연상시킨다.

“나는 무신론자, 정확히는 불가지론자인데,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되게 신기하다. 어찌 보면 과대망상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숭고한 과대망상처럼 느껴진다. 큰 비극을 막으려면 내가 나서야 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답은 아직 못 찾았지만.”

앞으로 계획은.

“팔십 넘어서까지 내주겠다는 출판사만 있으면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싶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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