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커버 스토리 | 바이든 시대 개막! 한국의 선택 - 인물탐구] ‘엉클 조’가 ‘프레지던트 바이든’이 되기까지 

안정 원했던 미국, 포용의 지도자 택하다 

상원 당선과 동시에 사고로 아내·딸 잃어… 아들도 후유증으로 세상 떠나
“실제 국정 참여” 조건으로 부통령 수락한 것이 백악관행 신의 한 수


▎올 11월 7일, 지지자들 앞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승리를 확신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 사진:AP/연합뉴스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으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애송하는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구대로 오랜 희망이 실현되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는 미국의 역사에 어떤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바이든 당선인의 꿈은 정책과 사람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미국의 변화는 미국에 그치지 않고 국제 정치·경제·외교·안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대선 삼수 끝에 목표를 이룬 바이든 당선인은 연방 상원의원 36년과 부통령 8년을 지낸 워싱턴 정가의 거물이다. 내년 1월 20일 78세의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으로 취임할 예정이지만 열정과 에너지는 충만하다.

바이든 당선인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새 행정부 디자인에 바쁘다. 역사를 함께 만들 백악관 참모들과 내각 고위직 선임에 여념 없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 공무원 수는 6000명이 넘는다.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고위직만도 1000여 명에 달한다. 인수팀은 시대정신을 구현할 대통령의 어젠다 설정과 실행 로드맵도 짜야 한다. 선거 때 발표한 공약을 정책으로 구체화하면서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대 전환의 중차대한 시점에서 바이든 당선인의 인물 특징, 정치적 이력, 핵심 참모 그룹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대선 개표 중 승부의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조급한 마음에 승리를 선언했다. 이어 선거 불복 소송을 줄줄이 제기했다. 하지만 바이든 후보는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젠틀맨 정신을 보여줬다. “모든 개표가 끝날 때까지 선거가 끝난 게 아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느낌이 좋다”라며 극도로 절제된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리고 선거 나흘 뒤 승리를 선언하며 “국민 대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다.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안정감으로 또다시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미국 유권자들은 위기를 안정되게 극복할 지도자, 민주적 시스템에 따라 국가를 운영할 지도자를 찾았다. 겸손하게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가를 안정시킬 대통령을 원했다. 바이든 후보가 적임자로 부각됐다. 선명한 색깔의 공약도 부족하고 정치인으로서 참신성도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담대한 비전과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적 전략도 없었다. 하지만 바이든 후보는 오랜 정치 경륜, 삶의 고난을 극복한 후에 획득한 포용과 소통의 능력을 어필했다. 이로 인해 인종 갈등을 해소하고, 정치적인 대립을 완화하고, 중산층을 되살릴 수 있는 적임자로 보였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비정상적 국정운영에 지친 유권자들의 정상화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바이든 후보가 선택받았다.

시대가 선택한 ‘평범한 리더십’


▎조 바이든 당선인 (오른쪽 둘째)이 10살 때 어머니·형제자매와 델라웨어주 클레이먼트의 집에서 찍은 사진. / 사진:조 바이든 선거캠프 홈페이지
바이든 당선인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조셉 바다라코 교수가 주장하는 ‘평범한 리더십’의 전형이다. 카리스마가 뛰어난 리더들은 강한 변화를 추구하다 보니 조직을 망치고 오히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정도를 지키는 평범한 리더십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50여 년의 워싱턴 정치 경험, 중도 온건 합리주의 노선, 수많은 전문가 자문단, 원만한 인품과 소통 능력을 지닌 바이든 후보가 승리한 것은 시대정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어린 시절.
바이든은 아일랜드 이민 4세대로 중산층 가정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펜실베이니아 주는 전통산업이 발전했던 러스트 벨트에 속하고, 대선 때마다 승부를 가르는 경합 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선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이번에는 바이든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바이든은 어린 시절 심하게 말을 더듬어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생각이 너무 빨라서 말이 못 따라가는 것”이라며 바이든을 위로했다. 그는 어머니의 격려를 등에 업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시를 암송하는 연습을 했다. 완치는 힘들었지만, 점차 나아졌고 연습 덕분에 말수가 늘어 수다쟁이라는 핀잔도 들었다. 정치인이 된 후에는 말실수로 인해 구설에 많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가식 없이 솔직한 화법으로 호감을 샀고 ‘동네 아저씨(Uncle Joe)’와 같은 편안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십대 사춘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겪은 경제적 고통은 또 다른 상처였다. 고향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델라웨어로 이사했고, 외할머니댁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곧 회복됐다. 부친으로부터 ‘인생에서 시련은 운명적으로 있게 마련이지만 자책할 필요는 없다. 넘어지면 일어서면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출신 특유의 강인한 인내심과 자립심을 키우게 됐다.

두 번 대권 고배 후 부통령으로 예행연습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이 올 11월 8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성 요셉’ 성당 묘지를 찾아 큰아들 보와 첫 번째 부인 닐리아, 딸 나오미의 묘를 참배했다.
1972년은 바이든 당선인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정치적 행운과 가족의 불행이 한꺼번에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해 11월, 29세 젊은 나이로 델라웨어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골리앗과 같았던 공화당 중진 상원의원 칼렙 보그스를 상대로 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윗의 승리였다. 가족이 총동원돼 유권자를 일대일로 찾아가는 열정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그렇게 역대 여섯 번째 젊은 상원의원이 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첫 번째 부인 닐리아와 한 살배기 딸 나오미를 잃었다. 두 아들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생명은 건졌다. 가혹한 시련 앞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바이든 당선인은 신을 원망했다. 삶의 의욕과 정치적 열정도 사라졌다. 상원의원도 사퇴하려 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선배 상원의원들의 격려로 용기를 되찾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상원에 대한 애정은 커졌다.

부통령 시절인 2015년 5월, 또 한 번의 불행이 찾아왔다. 장남이자 정치적 후계자였던 보 바이든이 사망한 것이다. 델라웨어 주 검찰총장을 연임하고 국민들의 인기도 높았다. 아버지를 닮은 외모뿐만 아니라 차분하고 교양 있는 공직자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방 의회에 진출할 수도 있었고,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인 대통령 도전의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세 살 때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증세가 악화돼 입원하고 수차례 수술을 거쳤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고난을 이겨낼 힘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신은 외면했다. 장례식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조사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무차별적인 잔혹한 운명에 직면하게 되면 아무리 선한 사람도 삶을 비관하고 아무리 강한 사람도 위축되고 맙니다. 그럼 비열하거나 냉혹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이기심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조의 넓디넓은 가슴과 자유로운 영혼, 든든한 어깨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합니다.” 아들을 가슴에 묻는 고난 속에서 인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배려를 갖게 된 바이든 부통령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진실한 평가였다.

1987년 6월, 3선 상원의원이 된 바이든은 45세의 참신함을 앞세워 첫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중도 실용주의의 온건한 정치성향, 친숙한 중산층 이미지 등으로 강력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상원 법제사법위원장을 맡고 있어 정치적인 주목도도 컸다.

하지만 선거운동은 원활하지 못했다. 참모들의 실수로 연설문 표절 논란과 허위 홍보 논란에 휩싸였다. 영국 노동당 당수 키녹의 연설문을 표절했다는 논란,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무단 인용했다는 비판에 급기야 로스쿨 재학 당시 부적절한 인용 논란까지 겹쳤다. 정치인들이 다른 정치인의 연설문이나 경구를 인용하는 것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고, 검증 기관에서 문제없다고 판정까지 내렸다. 하지만 상대 후보 측의 집요한 네거티브 공격으로 바이든 후보는 성실하고 정직한 이미지에 타격을 받았다. 결국 경선 레이스를 포기했다. 사퇴 후유증으로 이듬해 육군 의료 센터에서 뇌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두 번의 수술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수술과 요양 기간을 합쳐 7개월 동안이나 상원의원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2008년 대선을 앞두고 2007년 1월 출마를 선언했다. 이미 두 번째 상원 외교위원장을 맡아 이뤄냈던 외교적 성과를 부각시켰다. 원숙한 정치인답게 연설과 토론도 잘 진행했다. 하지만 민주당 대의원들의 지지가 약했다. 오바마의 참신함과 힐러리의 정치적 무게감에 뒤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2008년 1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위에 머물며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비록 대선 도전은 실패했지만, 워싱턴 정가에서 그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오바마는 부통령 후보로 바이든을 지명하게 된다. 오바마의 철저히 현실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당시 오바마는 자신의 일천한 정치 경험을 보완해주고 흑인 후보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백인 중산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부통령감이 필요했다. 바이든은 부통령 후보 수락 조건으로 형식적인 자리가 아닌 실제 국정에 참여하는 역할을 요구했고 오바마의 약속을 받아냈다. 8년간 부통령직 수행은 바이든에게 대통령직을 수련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전문가 그룹만 2000명, 핵심 참모는?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 / 사진:연합뉴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의 정치적 계승자로 대선 출마를 계획했으나 결국은 포기했다. 아들 보 바이든의 사망도 영향을 끼쳤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출마 만류가 결정적이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4년을 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 고령이란 건강 문제 등 우려가 있었지만 2020 대선을 앞두고 기회는 서서히 찾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호감이 날로 커지고 외교 정책의 난맥상에 민주당 내에서 구심적인 인물이 부재하자 시대가 그를 다시 불러냈다.

경선 초기 지지도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온건 중도 노선의 확장성과 백인 중산층 표의 결집력을 살려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다. 반(反) 트럼프 진영을 대표할 수 있는 후보로 선택됐다. 경선 후보였던 캘리포니아주 출신 상원의원 카멀라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본선 초반부터 트럼프 대통령에 상당한 격차로 리드했다. 경합주로 불리는 러스트 벨트와 선 벨트에서도 앞서 나갔다. 아들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바이든 본인의 성추행 논란이 불거졌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많은 기록도 세웠다. 역대 최다 득표(약 7500만 표)를 기록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성공은 결국 핵심 참모들의 손에 달려있다. 권력의 속성상 지근거리에 있는 예비 퍼스트레이디 질 바이든(Jill Biden), 한평생 선거 참모로 일한 여동생 발레리 오웬스(Valerie Owens), 부통령 당선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등 여성 삼인방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랜 정치 활동 중에 많은 참모 그룹이 형성돼 있으며 대선 과정에서 참여한 전문가 그룹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안보 자문 그룹만 20여 개, 분야별 실무그룹이 49개나 되고 이에 참여하는 전문가만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도 핵심 이너서클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은 따로 있다.

최측근인 백악관 비서실장에는 론 클레인(Ron Klain)이 낙점됐다. 바이든의 상원 법사위원장 시절부터 30년 넘은 인연을 맺고 있는 클레인은 선거 기간 중 캠프의 수석 고문 역할을 맡았다. 앨 고어 부통령 비서실장(1995~1999년)을 지냈고 이후 바이든 부통령 비서실장(2009~2011년)을 지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에볼라 바이러스 백악관 대응팀장(2014~2015년)을 맡은 경험이 있어 코로나19 사태 대응에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선거기간 중 캠프 위원장을 맡았던 스티브 리체티(Steve Ricchetti)도 백악관에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 부통령 시절 비서실장(2012~2013년)을 지낸 측근이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백악관의 입법 담당 부보좌관, 비서실 부실장을 지냈다. 의회와 입법을 조율하는 정무적인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김정은 분석서 펴낸 전 CIA 분석관 ‘정 박’ 인수위 참여


▎2001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당시 조 바이든 미 상원 외교위원장.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한반도 관련한 실무 전문가 3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을 설계한 커트 캠벨(Kurt Campbell)도 아시아 정책의 핵심 인물이다. 오바마 정부에서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2009~2013년)를 지냈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대통령 특별보좌관 등 주요 외교 직책을 두루 거쳤다. 신미국안보센터(CNAS) 공동설립자이자 최고 책임자이다. 제이크 설리번과 바이든 당선인 외교자문 그룹 동아시아 팀장 얼리 라트너와 함께 중국과 아시아 정책을 수립했다.

얼리 라트너(Ely Ratner)도 아시아 정책 관련 핵심 인물이다. 바이든 부통령의 국가안보 부보좌관(2015~2017년)을 지냈고 이전에 상원 외교위원회와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전문 참모로 일했다.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선임 연구원이자 아시아 태평양 안보 프로그램 부소장을 맡고 있다. 미·중 관계, 동아시아 지역 안보, 미국의 아시아 안보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민주당 정책·인재의 산실로 불리는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한국 석좌를 맡고 있는 정 박(Jung Pak, 한국명 박정현)도 바이든 당선인 외교·안보 그룹에서 한반도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9년에서 2017년까지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국(DNI)에서 한반도 담당 분석관으로 일했다. 한국인 교포 2세로 한반도 관련 우수한 정보분석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동아시아의 안보 문제, 한미 관계, 북한 전문가이다. 올해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분석한 [비커밍 김정은(Becoming Kim JongUn)]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 박은 당선자 인수위원회 기관검토팀 정보당국 분야(23명)에 합류했다. 기관검토팀은 원활한 정권 인수를 위해 현 정부 핵심 기관들과 접촉해 예산과 인력, 계류 중인 정책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 서성교 바른정책연구원 원장(건국대 초빙교수)

202012호 (2020.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