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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22)] 이길래 조각가 

소나무와 돌에서 찾은 생과 사의 연결고리 

동파이프 자르고 붙여 소나무의 거친 질감과 기상 웅장하게 표현
4월까지 사비나미술관에서 철필 드로잉 등 대표작 106점 선보여


▎이길래 조각가(사진)가 동파이프를 활용해 표현한 소나무는 껍데기의 질감과 장엄한 기운을 그대로 살렸다. 사방으로 내린 뿌리의 모습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사진:사비나미술관
나무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생명을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원천이자 출발점이다. 이번 전시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생물, 무생물 등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와 이를 탐구한 작업이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 미술관에서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 생명의 그물망’ 전을 개최하고 있는 이길래 조각가의 말이다.

소나무 작가로 알려진 이길래는 소나무 형태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과 자연의 순환성에 관해 주로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의 작업 방식에서 소나무뿐 아니라 드로잉 작업 역시 한 걸음 더 깊이 응시한 확장된 작품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무한한 우주질서를 반영한 최근의 대형 철필 드로잉 작업은 수행자의 느린 호흡과 닮아 있다. 이는 드로잉 작업뿐 아니라 입체 작업 등 이길래의 모든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읽혀진 지난한 요소다.

이번 전시의 압권은 2층에서 3층까지 뻗어 올라간 ‘Millennium-Pine Tree Root 2023-2’이다. 동(銅)파이프를 얇게 자른, 수백 개의 타원형 고리를 산소용접으로 연결해 완성한 것으로, 소나무와 그 뿌리의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동안 많은 소나무 형상을 선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땅 속, 소나무 뿌리 작업은 처음 형상화했다. 몇 년 전부터 산에 자주 올라 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너머를 사유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일부 기하학적이고 미니멀리즘 조형언어로 표현된 추상조각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트럭에 가득 실린 동파이프 원형 배열에서 영감

이길래는 경희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초기 작품 ‘잃어버린 성’ 연작은 주로 문명사회의 폐허가 된 잔해 느낌의 철조와 흙을 많이 사용했다. 급속한 산업사회가 되면서 겪는 사회 변동의 이질감으로 과거에 대한 원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고학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게 되었다. 물질문명 시대에 인간성 상실에 대한 본원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대학 4학년 재학 시절, ‘잃어버린 성(城)’의 철조 작품으로 제1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2등상)을 받았다. 재료적인 조각가답게 2000년대 초반까지 물성 탐색을 좋아해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했다. 충북 괴산에서 자연과 밀접하게 생활하면서 영감을 얻어 조개 껍데기, 굴 껍데기, 옹기 파편 등 온갖 오브제를 이용하여 ‘점으로부터’, ‘점에서 선으로’ 외에도 고대 유물에서 연상되는 자연의 시간성과 역사성 등을 탐구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지금까지 동파이프를 잘라 원형 고리를 만들고, 이를 용접으로 붙여 조형물을 완성하는 등 지난한 작품에 천착했다. 고속도로에서 동파이프를 가득 실은 트럭을 본 게 계기가 됐다. 규칙적인 동그라미들이 마치 벌집 같기도 하고, 하나의 세포 단위로 느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물성의 형태를 크게 확대해 마늘, 호박, 사과, 체리 등 채소와 과일 형태를 주로 표현하다가 2012년부터 나무와 자연의 형태적 조형물, 구체적인 소나무 형태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오페라갤러리, 2015년 겸재정선미술관, 2012년 갤러리BK, 2010년 사비나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한강조각 프로젝트’(2023, 한강공원), ‘영감의 원천’(2023, 주상하이한국문화원, 상하이예술품박물관) 등 여러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소나무 조각과 철필 드로잉 등 총 106점을 볼 수 있으며 2024년 1월 25일부터 4월 21일까지 열린다.


▎이길래 작가의 작품 활동 초기 굴 껍데기를 이용한 작품 ‘점에서 선으로 2’(1998). 이후 동파이프를 자르고 붙인 소나무 작품들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2019년 작 ‘천년- 소나무(Millennium- Old Pine Tree)’. / 사진:이길래
‘소나무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많은 나무 중에 소나무를 주된 작업으로 선택하고, 동(銅) 파이프를 사용하는 이유가 뭔가?

“소나무는 우리 고유의 나무처럼 상징화되기도 하고, 신적인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우리 민족과 친숙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나무 표피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소나무 작업을 하게 되었다. 소나무 표피는 마티에르가 강렬하게 드러나 ‘누적된 시간성’ 같은 느낌이 좋았다. 나무줄기, 껍질, 나이테, 이파리, 옹이, 뿌리까지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조형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재료적 측면에서 볼 때 동파이프는 소나무 껍질과 닮아 있다. 샌딩을 하면 적송이 되고, 부식 처리하면 마치 이끼 같다. 동의 선은 솔잎처럼 보여 소나무를 표현하기에 딱 맞는 재료다. 오랜 기간 재료를 탐색하고 연구하다가 얻은 결론이다. 우연 같지만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다. 끊임없는 관찰과 관심, 생각들이 모여 가능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작업을 해 왔는데, 유독 소나무 작품이 주목을 받은 이유가 뭘까?

“우리 민족과 밀접한 점도 있지만,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컬렉션 하는 것을 보면 ‘나무’는 자연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그러면서 친숙한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나만의 조형언어로 독특하게 표현해서 색다른 맛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다. 동 본연의 색을 내기도 하지만, 동을 샌딩하거나 부식시켜 한 작품에 여러 가지 색을 표현한다. 도색하지 않고 물성 자체의 특성을 살려 색을 표현한다. 곡선이 많고, 조각이지만 회화적인 느낌이 들고, 동양적인 느낌이 들어 좋아하는 것 같다.”

동파이프 갈고 부식시켜 소나무의 다양한 물성 표현


▎쇠못에 잉크를 묻혀 그린 드로잉 작품은 이길래 작가의 실험 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4월 21일까지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다양한 드로잉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사진:사비나미술관
현재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생명의 그물망’전이 개최 중이다.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면.

“평소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메인 작품을 눈여겨봤으면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있기에 나무가 지탱할 수 있다. 이번에 대형 작업을 시도한 ‘돌’덩이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조각은 밖에서 안이 투과된다. 그 점에 주목하면 재미있을 거다. 모든 작품은 가변성이다. 조명이나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다. 각별히 조명에 신경을 썼다. 조각의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조명 방향에 따라 조각 본래의 느낌과 또 다른 감상의 묘미를 준다. 부조는 벽과 간극을 살짝 띄워 그림자가 강하게 나타나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보이게 설치했다. 정면과 측면에서 그런 점을 살펴보면 감상을 다각도로 할 수 있다.”

이번 작업에서 나무와 대비되는 물성으로 돌을 가져온 의미가 궁금하다.

“큰 바위와 나무는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대표적인 생물과 무생물로 대비해서 바라봤다. 나무는 살아 있는 것의 상징성이 있고, 돌은 무생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이 둘을 대비시켜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나무와 돌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 지탱할 수 있고 존재한다고 본다. 한국의 조경 문화에서 ‘나무와 돌’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것에서 착안하기도 했다.”

붓 대신 쇠못에 먹물 묻혀 독특하게 드로잉 작업


▎이길래 작가(오른쪽)는 자신의 작품 앞에서 대학 은사인 이종각 전 경희대 미대 학장(리각미술관 관장)과 찍은 사진을 인생 사진으로 꼽았다. / 사진:이길래
최근 장지, 커피가루, 철가루 등 혼합재료와 지지체로 회화적인 분위기를 내는 벽면 드로잉 작업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향후 작업 계획이나 목표하는 방향은?

“드로잉은 ‘호흡’이라고 생각할 만큼 중요하다. 그림을 그리든 조각하든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기다. 입체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드로잉 작업을 작게 해왔다. 이번에 드로잉 자체를 작품화해 제작하게 되었고, 대형 작업은 처음 시도했는데 반응이 좋다. 장르를 넘나들며 표현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 중인데 조각가라고 입체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드로잉 작업에 유난히 애정이 있어 보인다.

“드로잉은 작가의 호흡이자 중요한 기본기이다. 대학 때부터 습관처럼 해오고 있다. 조각을 하려면 먼저 모형을 만드는데, 그 이전에 원형에 가깝게 치밀한 드로잉 작업을 통해 어떤 느낌이 나오는지 미리 가늠해 본다. 완성되면 복사해서 원본은 두고 그것을 입체로 확장한다. 드로잉을 꾸준히 하다 보니 그 자체가 작품이 되었다. 2018년부터 드로잉 대형 작업을 시작했는데 입체 작업과 병행해서 계속 진행할 생각이다.”

드로잉 작업 방법이 독특하다.

“붓 대신 쇠못에 먹물을 묻혀, 한지에 켜켜이 누적된 선들을 겹쳐 어떤 형태를 이루는 맛을 좋아한다. 먹 외에도 철분가루, 커피 찌꺼기 혼합재료를 쓰기도 한다. 작업을 고단하게 하는 편이다. 입체 작업이나 드로잉 작업이 서로 닮아 있다. 시간성이나 노동집약적인 것이 포함되어야만 스스로 만족한다. 관객들은 우주의 블랙홀로 보는 경우도 있다.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것들을 찾아가다 보면 인간은 어떻게 왔으며, 별은 어떻게 탄생했고, 지구는 어떻게 생명이 살게 되었는지 등 근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드로잉으로 표현된다.”

“조각의 위기, 국·공립 미술관과 갤러리 관심 가져주길”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가 있다면 뭘까?

“인생을 60년 이상 살아온 이 시점에서 보니 생과 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 또한 새로운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나무’는 살아 있고, ‘돌’은 죽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돌도 흙도 있어야 한다. 현상적인 것만 봐서는 다를지 몰라도 모두 다 동질의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작업을 통해서 ‘원형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하고 있다.”

K-조각의 세계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최근 ‘조각이 위기’라며 말이 많다. 국·공립 미술관이나 사립 미술관, 갤러리 모두 마찬가지다. 조각에 관심을 갖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사실 K-조각의 세계화 문제를 논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국내 조각 환경이 열악하다. 한국 조각가들이 손재주도 많고, 충분히 역량도 있는데 환경이 열악해 의욕이 많이 상실된 점이 있다. 일선에서 비평가들도 관심을 갖고 기획전도 자주 하면 좋겠고, 아트페어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상업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도 있다. 저변 확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면.

“대학 2학년 때 이종각 선생님께 ‘작가정신’과 ‘작업세계’를 배웠다. 그런 점이 좋아 이후 조각을 전공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당시에 작가로서 왕성하던 시기였는데 권위도 없고, 술 마시며 친구처럼 작업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고, 존경심이 생겼다. 우리나라 조각가들 중에서 조형 형태나 안정적인 구조가 남달랐다. 특히 조각의 마티에르나 회화적인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절대적인 영양을 주신 스승이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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