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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23)] ‘컬러 밴드’ 추상화가 하태임 

“그림은 색(色)들이 펼치는 노래이자 미지로 향하는 통로” 

단순명료한 컬러 밴드 통해 색의 언어로 소통하려는 욕구 반영
1세대 추상화가 ‘하인두의 딸’ 부담감 떨치고 자기만의 색깔 정립


▎추상화가 하태임은 곡면의 ‘컬러 밴드’가 겹치고 어우러지는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색을 덧입히는 반복적인 행위의 궤적으로 생명을 얻는다.
"나에게 색이란,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음표들이 하나의 곡을 완성해가듯, 색들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펼치는 하나의 노래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이자 ‘통로’이다.” 하태임 작가의 말이다.

색(色)은 작가의 심미적 언어 시스템을 천명해 주는 원형질이다. 하태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비선형 반곡면의 컬러 밴드(색 띠)는 각각 임의적인 시각적 매스로 색 면을 쪼갬으로써 상호 ‘마주보기’, 나란히 ‘바라보기’, 서로 ‘교차하기’, 각기 ‘어긋나기’ 등의 반복적인 형태 안에 역동성이 내재된 현대적인 조형감각이 돋보인다.

몸에 힘을 빼고, 팔을 뻗어 콤파스 축이 만들어내는 반복과 틈새의 궤적이 색 공간으로 표출된다. 한 밴드를 칠하고 마르기를 5~12회 정도 반복하면서 중첩을 통해 파동과 리듬감을 부여하는데, 단순명시적인 컬러 밴드는 때때로 빠른 호흡과 느린 호흡의 다른 양태로 은밀하게 색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태임은 1994년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디종보자르)를 졸업하고, 1998년 파리 국립 미술학교(파리보자르, DNSAP)를 졸업했다. 201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파리보자르 재학 당시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벙어리, 아크릴 1993], [험담꾼들, 아크릴 1993], [토하기, 아크릴 1994] 등의 구상화를 통해 ‘자기확인’과 ‘자기표출’에 의한 자화상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후 유학 당시 겪었던 언어적·문화적 소통의 어려움을 토대로 영어, 한글 등 문자를 쓰고 애써 다시 지우는 방식의 [통로(Un Passage)] 시리즈를 통해 문자 소통의 한계와 색채 이미지 소통의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몸을 축 삼아 그린 ‘컬러 밴드’로 자기만의 화풍 개척

2000년대에 와서 즉각적인 문자 소통을 벗어나 색채에 의한 은유적 소통을 시작하면서 비정형 색 띠, 색 줄무늬 등 추상표현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다. 컬러 밴드는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문자를 지우다가 그리기로 치환하면서 행위의 집적이 차곡차곡 모여 하나의 컬러 밴드로 탄생한 것이다. 컬러 밴드는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하며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자신만의 색채 표현 양식으로 정제해 단순명료한 화면을 만들어낸 하태임은, 60세가 되면 자서전을 통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이야기를 털어 놓을 생각이다. 1세대 추상화가 ‘하인두의 딸’이라는 부담감 외에도 아픈 과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새삼 초기의 탁한 컬러 밴드에서 최근까지 이어진 밴드 색이 점차 밝고 투명해진 변화가 삶의 궤적에서 비롯되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비단 색채뿐 아니라 화면 구성 역시 초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반면, 최근에는 점차 공간의 여백미가 돋보이는데, 이 역시 무의식적인 정서의 투영에서 기인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태임의 색은 관념적 색 언어 너머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언어로서 ‘기억의 색’이자 ‘치유의 색’이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그림은 ‘지금, 여기의 기록’이라 말한다. 삶의 솔직한 궤적을 그려나가는 컬러 밴드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확장될지 기대된다. 아버지 하인두 작가(1930~1989)의 그림 ‘비’가 있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청계리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눈부신 날, 하태임 작가를 만났다.

프랑스 유학 시절, 우울감 극복하려 자화상에 천착


▎하태임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컬러 밴드를 캔버스 바깥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해 작품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2022년 서울옥션 강남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와 2023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선보인 다양한 형태의 컬러 밴드. / 사진:하태임
초기 작업이 궁금하다.

“자화상을 그렸다. 유학을 간 지 얼마 안 돼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유학에 대한 꿈을 심어주셨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혼자 프랑스에서 작업하다 보니까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힘들어져서 자화상을 그리며 내 자신을 바라보며 침잠했다. 고통스러운 자화상 작업은 첫 번째 전시회를 끝내고 나서 더는 그리지 않았다.”

자화상으로 첫 개인전 이후 문자를 가지고 소통(통로)에 관련된 작업을 했다.

“파리보자르로 편입해서 프랑스로 다시 들어갔을 때는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우울증이 심해 신경쇠약증에 걸리기도 했다. 치료도 받고, 개인전을 끝내고 나니 자존감도 생기면서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벙어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프랑스에서 소통이 자유로워지면서 진정한 소통이라는 것은 문자나 언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양한 문자를 그린 다음 그것을 다시 지워나가는 작업을 했다.”

대학 졸업 이후 2000년대에 컬러 밴드를 시작해 최근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

“문자 작업을 하면서 애써 그렸다가 지우는 작업을 반복했는데, 지우는 행위가 계속 패턴화하면서 어떤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고, 지금의 컬러 밴드가 나오게 됐다. 가사가 없는 음악에서도 우리는 무언가 감동을 느낀다. 구체적인 어떤 형상(문자) 없이 색채만으로도 나의 이야기로 소통이 가능하고,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되었다.”

행위의 궤적 쌓이면서 생명 가진 존재로 탄생


▎하태임은 프랑스 유학 시절 겪었던 소통의 어려움을 문자를 쓰고 지우는 방식으로 표현하던 것을 단순화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컬러 밴드를 만들어냈다. 2022년작 [소통(Un Passage)] / 사진:하태임
컬러 밴드는 언뜻 보면 한 번 쓰윽 그리고 끝날 것 같은데, 팔의 궤적을 따라 반곡면이 나타나고, 수차례 반복해 덧칠하고, 중첩되어 교차되는 등 그리는 방식이 독특하다.

“컬러 밴드는 행위의 궤적이다. 맑고 투명하게 올리는 그 흔적과 반복적인 행위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칠하고 한 시간 말리고, 또 칠하고, 말리고 또 칠하는 것을 반복한다. 칠하는 과정에서 미묘하게 흔들리게 되는데, 첫 번째 칠했을 때와 두 번째 칠했을 때 차이들이 나타나면서 움직임이 느껴지고 이런 행위(나의 움직임)가 켜켜이 쌓여질 때 이게 진짜라는 생각도 들고, 살아 있는 어떤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잠자리 날개처럼 다 들여다보이는 맑고 투명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선택한 방법이다. 목도 아프고, 팔, 허리도 망가져 가면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지만, 그리는 행위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2023년 ‘Between Green and Green’ 전시에서 컬러 밴드 작업의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 컬러 밴드에서 마티에르를 느낄 수 있게 변화가 있었다. 밴드 위에 어떤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긋는 밴드가 아니라 그 밴드를 긋고 나서 스펀지로 닦아내고 그 위에 마티에르를 내고 또 칠해 효과를 주는 작업들을 했다. 이전의 컬러 밴드 그림에서 좀 탈피하고 싶어 회화적인 느낌으로 여러 효과들을 시도해봤다. 가슴에서 박하사탕이 퍼지는 것처럼 그동안 억눌렸던 조형의 맛, 표현적인 자유로움을 한껏 느꼈다.”

2차원의 평면 그림뿐 아니라 입체 밴드 조각이나 설치 조형작품 등 다양하게 시도해 오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무대 디자인도 하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그런 경험들을 녹여서 판매하지 않을 작업이라고 규정하고 설치 작품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스틸로 만든 조각 작품도 있고, 마당에 설치해 놓은 대형 조형 작품처럼 같은 재료로 한 작품이 송도에도 있고, N타워에도 설치돼 있다. 조형물 작업은 2015년에 시작해 계속 진행하고 있다. 컬러 밴드가 2D였다가 3D로 나왔을 때 또 다른 상상력을 주기도 하고, 작업 과정에서 창작에 대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작업한 것도 있는데 앞으로 다양한 시도를 할 생각이다.”

컬러 밴드가 다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은 없나?

“어느 날 어쩌다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면 밴드를 접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밴드 작업은 나만하고 있는데 아직 보여줄 게 많다. 지금 이것을 접고 다른 것을 하게 되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후회가 많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색의 조합이라든지 색의 농도라든지, 더 많은 실험과 반복을 통해 그 끝을 좀 더 보여주고 싶고 확장하고 싶다. 20년 전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 몰랐다. 앞으로 10년 후에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 길 중 하나를 택해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인데 이 길을 통해서 아직 만들지 못한 어떤 조합을 또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컬러 밴드로 여러 조합 더 보여줄 수 있을 것”


▎하태임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으로 1980년대 어머니 류민자 씨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 찍은 가족사진을 꼽았다. 그의 아버지 하인두(오른쪽) 씨는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로, 어릴 적부터 하태임에게 화가에 대한 꿈과 프랑스 유학의 동기를 부여하곤 했다. / 사진:하태임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면?

“엄마가 대학원 졸업할 때 찍은 가족사진이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찍은 사진이다. 화가의 길을 열정적으로 태우고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아파오고 아쉬움과 그리움이 밀려온다. ‘너의 대담성과 미술적 소질이 아깝다. 훗날 네가 자라서 파리보자르에 들어가면 아빠와 아파트를 얻어 함께 그림 그리자’며 파리 유학의 동기를 심어주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두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커다란 바위만큼의 무게로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예술혼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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