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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9)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대한민국 의류혁명을 선도한 애국 경영인 

나일론을 수출산업으로 키워 한국의 섬유강국 도약에 기여
국리민복 중시하고 ‘상지상’ 경영철학 실천한 ‘현대판 문익점’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을 역설한 이원만을 관심 깊게 지켜본 박정희 의장은 이원만과의 잦은 접촉을 위해 박태준 비서실장을 연락비서관으로 임명했다. 1962년 나일론 원사공장 기공식장에서 연설 중인 이원만 창업주. / 사진:㈜코오롱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李源万, 1904~1994)은 1904년 9월 7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우각리에서 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의 15대손이자 본관(本貫)이 여주인 이석정(李錫政)의 8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들이 태어난지 채 1년도 못 돼 모두 사망한 탓에 그는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17세까지 향리의 4년제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한 그는 흥해읍에 있는 6년제 흥해공립보통학교에 입학, 5·6학년 과정을 마쳤다.

이원만은 1920년 4월 월성 이씨 집안의 이위문(李渭文) 규수와 결혼했다. 1923년에는 영일군 산림기수보(補)로 취직했다. 29세 때인 1933년에는 일본 오사카로 갔다. 당시 일본은 중화학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임금도 상승하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그는 어느 날 한 공장에서 머리에 쇳가루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작업하는 인부들을 목격하면서 사업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작업모에 회사 이름이나 상품명을 프린트해서 판매하면 광고효과로 모자가 많이 팔릴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옷감에 직접 인쇄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하고 1935년에 미싱 6대로 아사히공예사란 모자공장을 차렸다. 사원은 그의 동생 이원천(李源千)을 포함, 미싱을 담당하는 여직공 6명 등 10여 명이었다.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자투리 원단을 구입해서 모자를 제작했다. 이윤이 원가의 3배일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아사히공예사는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착실히 성장했다. 이원만은 1937년에는 아사히피복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니혼(日本)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했다.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 수입해 판매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그간 축적한 자본을 갖고 귀국했다. 1947년에는 대구에서 직물공장 성격의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송진우, 김성수 등이 이끄는 한민당(韓民黨)에 입당, 청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나는 한민당의 지도자들과 자주 만났다.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金性洙)씨는 이활(李活) 형님과 사돈간이었다. 장덕수(張德秀)씨는 대구에 오면 우리 집에 유숙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와는 더욱 친했다.”([코오롱사십년사])

그러나 그는 정치보다 경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한편 1949년 재일한국인 경제동우회의 부회장을 맡아 많은 활동을 했다. 당시 한·일 간 국교는 단절됐으나 장차 한국과 일본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뤄질 것을 확신했다. 일본의 유력한 무역업체들과 제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다.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간부들이 설립한 호양무역(互洋貿易)과 인연을 맺어 1951년 2월에는 도쿄에 삼경물산(三慶物産)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상호 ‘삼경(三慶)’은 미쓰이물산의 ‘삼(三)’과 경상북도의 ‘경(慶)’을 조합한 것이다. 자본금은 200만원(圓)이었다. 이원만과 호양무역이 각각 50%씩 출자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듀폰사가 개발한 나일론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6·25전쟁(1950~1953년) 중 주한미군에 의해서다. 이원만은 1952년 말 미쓰이물산 직원으로부터 나일론사(絲)를 처음 접했다. 거미줄보다 가볍지만, 강철처럼 질긴 데다 탁월한 탄력성이 특징이었다. 벌레도 먹지 않고, 세탁 즉시 물기가 마르는 ‘환상의 실’이었다. 다른 원사에 비해 경제성도 뛰어났다.

이원만은 동양레이온(도레이) 제품 판매를 전담하는 일본 제일물산(第一物産)의 니이제키(新關) 사장과 협의해 나일론사의 한국총판 대리점권을 획득했다. 동양레이온은 미쓰이(三井)물산의 자회사로서 모든 제품을 동일 계열의 제일물산을 통해 시장에 출하했다.

이원만은 부산과 대구에 각각 삼경물산 한국사무소를 설치하고 1953년부터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를 수입해 대대적인 판매 활동을 전개했다. 국내 편직업자들은 삼경물산이 공급하는 나일론사를 이용, 양말과 직물을 생산했다. 견직업자와 포목상들이 거세게 반발했음에도 나일론 수요는 점증했다. 당시 삼경물산은 나일론사 국내 독점 공급업체였다. 이원만은 1954년 12월 국내에 별도로 한국삼경물산(三慶物産) 주식회사를 설립해 스트레치 나일론사(絲)의 국내 수입 및 공급을 전담했다. 이원만의 장남 이동찬(李東燦)이 한국삼경물산 사장에 취임했다.

이동찬은 1922년 4월 1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서 이원만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동찬은 마을에서 20리 떨어진 신광보통학교 4년을 수료한 직후 흥해읍으로 이사,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가 5학년 2학기에 다시 기계면으로 이사했다. 당시 그는 기계공립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포항에서 10여 개월 일본인 상점 점원생활을 한 그는 이원만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향했다. 15세 소년 이동찬은 부친이 경영하는 아사히공예사의 경리를 담당하면서 4년제 흥국상업학교(興國商業學校) 야간부에 진학했다. 흥국상업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2학년을 마칠 무렵인 1944년 1월 20일 쓰루가(敦賀)의 중부 36연대에 조선학도 특별지원병으로 징집됐다. 그는 군복무 중이던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귀국했다. 이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1953년 경위로 경찰 생활을 마감하고 부친의 사업에 힘을 보탰다.

이 무렵 한국삼경물산이 수입한 스트레치사(stretch yarn)는 동양레이온이 카프로락탐을 가공해서 만든 것으로, 양말 등 신축성을 지닌 편직물 소재로 사용됐다. 이원만은 원사(原絲, nylon filament)를 수입해 국내에서 스트레치사를 생산하기로 했다.

1955년에는 공장 건축용으로 대구시 동구 신천동 1090의 대구농림학교 부지와 실습지인 뽕밭 1만 평을 매입했다. 1957년 4월 12일 자본금 2억 환(圜)의 한국합성공업주식회사(한국나이롱)를 설립,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스트레치사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한국나이롱의 본점은 서울 중구 충무로 1가 47에 뒀다. 취체역에는 이원만, 이원천, 이동찬, 신병옥, 이원중, 이원갑, 정치상 등이었다. 이원만은 사장을, 이동찬은 전무를 맡았다. 당시 종업원 수는 30명에 불과했다.

이원만은 해방 직후부터 한민당 당수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등과 친분을 유지하는 등 정치적 성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울리는 소탈한 성품까지 겸비한 타고난 사업가였다. “나는 털털하게 잘 놀았다. 비록 술은 많이 마시지는 않으나 주흥을 돋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내 입에서는 즉흥적인 재담이 쏟아져 나왔고 내가 앉은 주석은 언제나 웃음바다였다.”([코오롱사십년사])

이 밖에도 그는 1958년 8월 일본 도레이에 사원을 파견해 2개월 동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게 했다. 200여 명의 공원들을 확보하고 1958년 10월 18일에 총건평 1500평의 공장을 완성했다. 200추짜리 이탈리아식 연사기 55대, 권반기, 합연기, 인양기, 스팀세트기 등 총 1만1000추를 갖춘 일산(日産) 970파운드인 국내 최대의 스트레치사 생산공장이었다. 1일 3교대로 시제품 생산에 착수했으나 제조과정이 까다롭고 기술문제로 불량품이 속출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1959년 1월부터는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0년 6월에는 480추짜리 프리마텍스(PRIMATEX)기 2대를 서독에서 도입, 품질 향상 및 생산량도 일산 0.86t(1900파운드)으로 확대됐다. 나일론양말 제조용으로 공급, 국내에 나일론양말 시대를 열었지만 경영상 어려움이 많아 1962년까지 적자상태였다.

박정희 정부 경제개발사업에 깊숙이 관여


▎1963년 코오롱 원사공장 준공식. / 사진:㈜코오롱
이원만은 스트레치사 공장 건설 직후부터 나일론원사 생산공장의 건설계획을 추진했다. 스트레치사 판매(한국삼경물산), 스트레치사 제조(한국나이롱), 나일론원사(nylon filament) 제조 등 수직계열화(up-stream)의 일환이었다. 물론, 막대한 자본 조달이 관건이었다.

“자본을 미국의 DLF(해외개발차관기금)에 신청하기로 했다. (당시 이원만과 같은 경북 출신의) 신현확(申鉉碻, 1920∼2007) 부흥부 장관이 국내에서 큰 사업은 DLF에 의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권유” ([코오롱사십년사])한 것이다. 1958년 2월 13일 나일론 필라멘트 2.5t 공장건설자금 218만6800달러를 DLF에 신청했다. 이후 1960년 9월 1일 320만 달러의 도입이 승인됐다. 원사공장 부지로 한국나이롱의 스트레치 공장과 인접한 경북잠업시험장과 뽕밭 2만9000평을 평당 1200환에 수의계약 체결하는 등 제반 준비를 마쳤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이원만의 후원자였던 신현확이 권부에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이원만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경상북도에서 집권당인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임기 6년의 참의원에 당선됐지만, 1961년 5·16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원만에게 기사회생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무렵 군사정부가 혁명공약인 빈곤 탈출 방안 모색을 위해 기업인들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혁명정부가 수출을 앞세워 경제개발에 나서겠다는 목표를 정하게 되기까지는 한 차례 계기가 있었다. 1962년 초 코리아하우스(서울 중구 퇴계로36길 10)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혁명 주체세력들이 기업인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열린 경제간담회 자리가 마련됐다. 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과 대한상의 송대순 회장, 무역협회 이활 회장 등 경제단체장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기업인 200명이 참석했다.

공업화로 방향을 내심 확정한 박 의장은 혁명이 불가피했음을 강조한 뒤 ”지금부터 어떻게 우리나라를 강건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 기업인 여러분들의 의견과 지혜를 듣고자 합니다.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라며 이날 모임의 목적을 설명했다.

몇몇 기업인들은 우수한 품질의 공산품을 생산 중인 선진국과는 경쟁이 불가능하다며 한국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국이라 농업부터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지하자원이 없어 공업화의 경쟁력도 없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한국나이롱의 이원만 사장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강력히 역설했다.

“경제인은 안 되는 일을 되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소극적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본은 지하자원이 없습니다. 석유도 없고 철광도 없습니다만 그들은 세계가 놀라 자빠질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원이 있고 없고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두뇌와 의지가 문제입니다. 달러가 우리나라에 앉으려고 꿀벌처럼 빙빙 앉을 곳을 찾을 때는 우선 바가지라도 엎어놓고 앉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도자기 기술을 배운 일본은 지금 도자기를 만들어 자기네들의 특허처럼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원료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듭시다. 위생도기와 쟁반, 접시만으로도 1억 달러는 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못합니까? 우리의 임금은 일본보다 쌉니다. 무엇이든 수출할 수 있습니다. 양말은 내가 하겠습니다.”(이종재, [재벌이력서])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을 역설한 이원만을 관심 깊게 지켜본 박정희 의장은 이후 이원만과의 잦은 접촉을 위해 박태준 비서실장을 연락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이원만은 1963년 10월 12일 서울 구로동의 한국산업공단 창립위원장을 맡아 공단 조성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교포실업가 78명에게서 구로공단 조성공사에 참여할 것을 약속받았다. 귀국 즉시 구로공단에 시범적인 대규모 공장을 착공했다.”([코오롱건설35년사])

한편 그는 1963년에 대구시 동구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됐다. 제7대 국회의원이던 1967년에는 국회 농림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사업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군사정부가 사업과 정치를 병행하려던 이원만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대한민국 합성섬유 시대를 열다


▎이원만은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으로 불렸다. 초기 코오롱 실제품. / 사진:㈜코오롱
이원만은 이승만 정부 하에서 DLF차관자금으로 건설하려던 나일론 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다시 추진했다. 1960년 9월 1일 민주당 정부에서 DFL차관 320만 달러 도입 승인을 얻은 그는 1961년 2월 20일 미국 켐텍스(Chemtex)사와 50:50의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했다. 내자 1억5000만원과 정부 지불보증으로 외자 320만 달러를 도입해 2.5t의 공장을 1962년 8월에 착공했다. 우리나라 나일론산업의 효시이자 총본산인 한국나이롱의 나일론 원사공장(1900평)이었다.

1963년 8월 8일 준공식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태준 상공분과위원장, 조성근 건설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 공사는 군사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번째 시범사업이란 점에서 국가적으로 의미가 컸다. 당시 국내에는 경쟁업체로 풍천산업과 삼덕섬유가 있었으나, 한국나이롱이 건설한 2.5t의 공장이 국내 최대규모였다. 일산 1.3t의 이 공장은 1964년 1월부터 정상 가동됐다.

한국나이롱은 정상가동 4년 만인 1963년 3월 31일 제5기 회계연도 결산에서 매출액 9100만원, 순이익 300만원을 기록하는 등 설립 이래 최초로 흑자를 시현했다. 1963년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스트레치 나일론사 1만886㎏을 수출해 3만9400달러를 획득했다. 나일론의 수입대체 및 수출 가능성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이원만은 일본 도레이에서 나일론 제조 기술을 이전받아 1963년 8월에는 서울 구로공단에 나일론 원사 공장을 준공했다. 1964년 1월에는 ‘나일론6’ 원사를 생산해 상품명을 ‘코오롱(KOLON)’으로 지었다. 코오롱이 대한민국의 합성섬유 시대를 연 것이다.

이 무렵 나일론사는 작업복지, 학생복지, 농촌용 면포를 비롯해 어망용, 타이어코드지 등으로 사용돼 품귀 상태였다. 당시 한국나이롱과 한일나이론의 나일론 원사 생산량은 1475t이었다. 수입 원사량은 3287t으로 국내 생산의 2배 이상이었다. 경쟁업체인 한일나이론은 국내 최초 재벌로 불린 태창방직이 1957년에 설립한 한국양모공업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과도한 부채로 경매돼 삼성물산, 한국모방, 대한모방 등에 넘어가 한일나이론으로 변경됐다. 1964년 4월에는 스위스의 인벤타(Inventa)사와 우하그(Uhag)사에서 차관을 도입, 경기도 안양에 1.3t 규모의 나일론 필라멘트공장을 건설했다. 이후 ‘하이론’ 상표의 나일론사 생산에 착수했다. 한일나이론은 이후 성장을 거듭해 생산 규모가 일산 16.1t으로 확대됐으나 1970년 부도위기에 몰려 동양나이론(조홍제)에 인수됐다.

한국나이롱은 1966년 6월 미국 AID(국제개발원조기금)로부터 581만 달러를 들여와 7.5t의 원사 생산공장 증설에 착수, 1967년 4월에 완공했다. 이후 1967년 6월에는 나일론사보다 천연섬유에 가까운 폴리에스터사(絲)에 대한 수요가 향후 많을 것으로 판단하고 KFX자금 198만 달러를 들여와 일산 2.5t의 폴리에스터 필라멘트공장 건설에 착공했다. 폴리에스터 필라멘트공장은 1968년 완공됐다. 나일론 필라멘트공장 증설을 위해 미국수출입은행(EXIM)으로부터 342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 1968년 5월에 일산 8t으로 생산능력을 확장했다.

차관 들여와 나일론 일관생산체제 구축


▎이원만의 사업철학은 수평론(水平論)에서 출발한다. 1957년 코오롱 대구공장 전경. / 사진:㈜코오롱
나일론 제품의 판매를 전담시키기 위해 1967년 3월에는 삼경복장(주)과 한국염공(주)을, 4월에는 코오롱상사를 각각 설립했다. 이 무렵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나일론양말 붐이 조성됐는데, 특히 여성들의 미니스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스타킹류의 수요가 급증했다. 국내에서도 수요가 점증해 당시 국내 10대 양말제조업체에서 연간 2500만 족을 생산했다. 이 중 40%가 코오롱 브랜드의 나일론사를 원료로 사용했다. 국내 나일론 원사 생산은 한국나이롱, 한일나이론, 동양나이론 3사 과점체제였으나 동양나이론이 한일나이론을 흡수해 국내 나일론 원사시장은 한국나이롱과 동양나이론으로 양분됐다.

한편 한국나이롱은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1500만 달러, 미국 켐텍스사에서 274만6000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다. 이후 1968년에는 경북 구미공단에 22만여 평의 부지를 확보해 일산 20t 규모의 폴리에스터 사(絲)공장을 착공했다. 그 결과 1969년 3월에는 한국폴리에스텔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화학섬유의 총아인 폴리에스터 원사(原絲)는 그간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국내에서는 선경합섬(SK), 대한화섬, 삼양사 등이 뒤늦게 생산에 착수했다.

한국나이롱은 1974년 1월 30일 한국카프로락탐(주)의 자본금 30억원 중 8억3852만원을 출자했다. 경쟁업체인 동양나이론, 고려합섬, 고려나이론과 공동으로 출자했는데, 나일론 원료인 카프로락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목적 때문이었다.

한국나이롱은 산하에 스트레치사(絲) 공장, 나일론 원사공장, 폴리에스터사 공장을 완비했음은 물론 카프로락탐까지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됐다. 그 결과 국내 최대의 나일론 일관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1971년 5월 한국화섬(주)을 설립하고 1972년 4월에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삼정동 17-1에서 각종 의류용 부직포 및 인공피혁을 생산하는 (주)제텍스를 설립했다. 같은 해 4월에는 한국바이런(주)을, 8월과 12월에는 각각 코오롱엔터프라이즈(주), 삼경동화레자(주)를 설립했다. 1973년 3월에는 코오롱섬유(주)를, 1974년 9월에는 코오롱스토아(주), 1975년 3월에는 유니온복장(주)을 설립했다. 이후 1976년 2월에는 (주)코오롱이 일본석유화학(주)과와 합작 투자했다. 그 결과 종합화학회사인 코오롱유화를 설립했다. 1977년 2월 25일에는 한국나이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을 각각 ㈜코오롱(나일론)과 ㈜코오롱(폴리에스텔)로 상호를 변경, 국내 최대의 종합화학기업으로 전환했다.

이원만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해외로부터 5000만달러 이상의 차관을 들여와 한국나이롱을 완성했다. 당시 은행금리가 연 25~30%인데 반해 차관금리는 5~6%에 불과했다. 정부가 지불보증까지 해줌으로써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박병윤, [재벌과 정치])

‘can do’ 정신과 ‘상지상’의 경영철학 귀감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 사진:㈜코오롱
이원만은 1977년 3월에 그룹 회장직을 장남 이동찬에게 넘기고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다. 이후 이원만은 1994년 2월 14일 향년 91세로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으로 불렸다. 국민들의 의류문화에 변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합성섬유시대를 열었다. 또한 그는 1960, 1970년대 개발 경제의 비전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지난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가 대한민국의 빈곤 타파를 위해 기업인들에게 자문을 구할 당시 이원만은 자원이 빈약한 일본도 공업화에 성공했다며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역설, 군사정부에 자신감을 고취했다. 이원만은 1963년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주도했다. 두 공단은 섬유류, 가발, 플라스틱, 전자제품 등 제조업 중심의 수출시장을 개척했다. 이원만이 ‘수출 한국의 선구자’로 불린 이유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생활정치를 폈다.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경상북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정치에 입문한 이래 제6, 7대 국회의원(1963∼1971)을 연임하며 사업가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발휘했다. 의정활동 10여 년 동안 경제개발을 위한 해외차관 도입을 주장하고 국민들이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한 탓에 금수강산이 황폐해졌다며 대안으로 프로판가스 수입을 강조함으로써 ‘프로판가스’라는 별명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원만의 본업은 비즈니스로 ‘상지상’의 경영철학이 돋보인다. 그의 사업철학은 수평론(水平論)에서 출발한다. 즉, 수평선 위는 상(上)이며 수평선 아래는 하(下)인데, 상(上)은 ‘상지상(上之上)’과 ‘상지하(上之下)’로, 하(下)는 ‘하지상(下之上)’과 ‘하지하(下之下)’ 등으로 구분하고 ‘상지상’을 국가와 개인,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상지하’는 국가에 이익이 되나 개인에게는 무해무득한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상’을 기업의 이익만 도모하는 것으로, ‘하지하’는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원만에게 나일론은 필생의 ‘상지상’ 사업이었다. 그는 나일론으로 코오롱그룹을 키우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의류혁명을 선도했다. 또, 나일론을 수출산업으로 키워 한국이 섬유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했다. 이원만의 ‘can do’ 정신과 ‘상지상’의 경영철학은 후배 기업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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