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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단장이 말하는 프로스포츠의 세계(4)] 프로야구 43년 서사 그 자체인 연봉 협상의 역사 

LG 新연봉제, 삼성 뉴 타입 인센티브… 연봉 시스템에는 그룹의 방향성 묻어있다 

1982년 원년부터 야구 선수 연봉 도시 직장인 3배, 연봉상한제 탓에 선수협 결성 촉발
LG는 ‘WAR 데이터’ 차용한 新연봉제 도입, 삼성은 선수가 연봉 구조 택할 수 있게 변경


▎2020년 12월 이대호 당시 프로야구 선수협 회장이 부산 사직구장 광장에 자리한 고 최동원 투수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최동원은 현역 시절 선수 처우 개선을 위한 선수협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후 KBO리그에는 이대호처럼 150억 연봉을 받는 선수가 등장했다. / 사진: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82년 프로야구 창설 당시, 선수 연봉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나라에서 프로스포츠가 처음으로 탄생하다 보니 한국야구위원회(KBO)로서는 프로야구 선수의 연봉을 어떤 기준으로 산정할지에 관해 무척이나 고심을 거듭했다.

프로야구가 태동하기 전에는 실업야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업야구 선수들은 일반 직장인으로서 선수 활동을 겸하고 있다 보니 소속 회사에서 정해진 연봉을 받고 정년을 보장받고 있었다. 반면 프로야구 선수는 1년 만에 방출될 수도 있는 계약직 신분이다. 이에 KBO는 일반 직장인이 몇 년 동안 받을 수 있는 연봉을 1년에 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간판선수였던 김봉연의 연봉과 상여금이 480만원인 점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1982년 프로야구 선수의 평균 연봉은 1215만원으로 산출됐다. 같은 해 정부가 발표한 2분기(4~6월)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이 34만6963원이었다. 이를 한 해 소득으로 환산하면 416만3556원이 된다. 다시 말해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은 도시 근로자의 연봉보다 3배 가까이 많이 받은 셈이다. 당시 송파구 잠실과 강남구 도곡동의 주공아파트 13평 아파트가 900만~1150만원에 거래됐으니 프로야구선수 평균 연봉은 확실히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해 최고 연봉은 미국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뛰다 한국프로야구에 합류한 OB 베어스 박철순 투수의 2400만원이었다.

이와 같이 프로야구 초창기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고액이다 보니 구단들은 선수들의 연봉 인상이 부담스러웠다. 그 방편으로 구단들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인상에 25% 상한선을 설정했다. 예를 들면 1200만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그해에 MVP급 활약을 해도 300만원만 인상돼 다음 해 연봉이 1500만원을 넘지 못하는 방식이다.

CF 출연으로 연봉 보전해주던 시절도


▎1982년 프로야구 최고 연봉 선수는 OB 박철순이었다. 일반 직장인의 약 3배를 받았다.
이에 대해 선수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구단에서 보완책으로 연봉 이외에 보너스를 별도 지급했는데 다음 해 연봉을 산정할 때 보너스가 기준 금액에서 제외됐기에 선수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이로 인해 스타급 선수들의 경우, 광고 출연으로 보전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프로야구 선수의 광고 출연이 드물지만, 1980년대 야구 선수들의 광고 출연을 곧잘 볼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1988년 고(故) 최동원 선수를 중심으로 각 구단의 주축 선수들이 선수협을 결성한 이면에는 연봉인상 상한제 철폐 목적이 있었다. 결국 연봉인상 25% 상한선은 1990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이 당시에도 해마다 연봉협상이 구단의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이벤트였다. 이때는 스타급 선수 한 명 한 명이 계약할 때마다 스포츠 전문지에서 비중 있게 기사를 다룰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선수가 계약하지 않고 오랫동안 버티면 연봉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찍 계약한 선수가 손해 보는 경우가 발생해 선수들이 연봉 계약을 늦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에 구단들은 처음에 제시한 금액에 변동을 주지 않고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면서 구단과 선수 간에 갈등도 증폭됐다.

선수와 구단 간에 연봉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KBO 연봉중재위원회를 통해 원만한 해결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연봉중재위원회까지 가면 선수, 구단 모두가 상처를 받을 수가 있어서 양측 모두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부 구단들은 양측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센티브(옵션)를 도입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인센티브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점이 있지만, 팀보다 개인 성적에 치중하게 만드는 단점도 있기에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필자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LG 트윈스에 근무하는 동안, 다른 구단들에 비해 인센티브(옵션)를 다음 해 연봉의 기준점에 반영한 시즌이 있었다. 덕분에 그해 연봉계약은 순탄했지만 인센티브를 다음 해 연봉의 기준점으로 반영하다 보니 연봉 인플레이션이 생기게 됐다. 결국 구단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워져 이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파격과 부작용 난무했던 LG 新연봉제


▎이제 초고액 연봉 선수만이 송파구 잠실주공 아파트 가격을 따라잡는 세상이 됐다. / 사진:연합뉴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2010년, LG 트윈스는 야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新)연봉제’를 추진했다. 그 이전에 시행했던 인센티브 시스템도 당시에는 신연봉제로 불리기도 했었으니 또 다른 ‘신연봉제’가 탄생한 것이다. 구본준(당시 LG그룹 부회장, 현 LX그룹 회장) 구단주의 주도 하에 그룹과 야구단이 참여한 태스크포스(TF)팀이 조직됐고, 여기서 신연봉제가 만들어졌다.

구본준 구단주는 2011년 1월 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기자 간담회를 통해 “프로골퍼는 성적이 나쁘면 연봉(상금)이 없는데, 야구선수는 3억원을 받다가 못해도 이듬해 2억원은 받는다. 그래서 신연봉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LG 트윈스의 신연봉제는 세이버메트릭스(야구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의 대부 빌 제임스가 고안한 ‘윈 셰어(win share)’를 기반으로 고안됐다. 윈 셰어는 타격-수비-주루의 모든 기록을 기초로 팀 승수에 3을 곱한 다음 타격, 투구, 수비 등의 활약에 따라 배분해 선수 1인의 팀 승리 공헌도를 추산한다. 지금은 웬만한 야구팬이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의 초기 버전에 해당한다.

사실 신연봉제는 LG트윈스가 전화번호처럼 ‘66685876’, 8년간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 끝에 나온 극약처방이었다. 신연봉제 도입 첫해인 2011년 연봉이 10분의 1 토막이 난 선수도 있었고, 325%의 파격적인 인상률을 기록한 선수도 있었다. 신연봉제는 잘한 선수는 더 많은 연봉 인상을, 부진한 선수는 더 많은 연봉 삭감을 부여하자는 방향성이었는데 해마다 뉴스 메이커 역할을 하다가 2016년부터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2021년, 삼성 라이온즈가 ‘뉴 타입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다. 이 제도는 선수가 본인의 연봉계약 구조를 직접 선택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고 선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먼저 팀 고과 체계에 근거해 선수와의 협상을 통해 기준 연봉이 정해진다. 이후 기본형, 목표형, 도전형 등 세 가지 옵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기본형을 선택한 선수는 고과 체계에 근거해 합의한 기준 연봉을 그대로 받게 되며 별도의 인센티브가 없다. 목표형을 고른 선수는 기준 연봉에서 10%를 낮춘 금액에서 연봉이 출발하게 되며 이후 성적이 좋을 경우 차감된 금액의 몇 배를 더 받을 수 있다. 도전형을 택하면 선수는 기준 연봉에서 20%를 낮춘 금액에서 연봉이 시작한다. 이후 좋은 성적을 내면 역시 차감된 20%의 몇 배를 더 받을 수 있는 구조다. 이 시스템 도입 첫해인 2011년, 적용 대상 선수 28명 가운데 기본형을 15명, 목표형을 7명, 도전형을 6명이 선택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뉴 타입 인센티브 제도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2022년 모 기관에서 직장인 87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이 가운데 기본형을 43.7%, 목표형을 44.6%, 도전형을 9.6%가 택했다

이 제도는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 출신인 원기찬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 겸 대표이사가 주도하고 삼성경제연구소의 설계를 통해 만들어졌다. 삼성 라이온즈는 이전까지 ‘99688’의 부진한 팀 성적으로 암흑기의 전화번호를 만들 뻔하다가 이 제도를 적용한 첫해인 2021년 2위로 급반등을 이뤘다. 그러나 이듬해인 2022년 7위, 2023년 8위로 추락하며 지속성은 떨어졌다.

구단들은 한편으로는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당근을 제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선수들의 연봉 상승을 제한하는 시도를 병행했다. 1988년 선수협 파동에 계기가 된 25% 연봉인상 상한, 1998년 도입부터 시작된 외국인선수 연봉 상한, 2018년 KBO가 추진했지만 선수협의 반대로 무산된 FA 연봉 상한(4년 총액 80억원), 그리고 FA 연봉 상한의 대안으로 합의해 현재 시행 중인 샐러리캡(팀 연봉 총액 상한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FA 연봉 상한은 FA 계약금액이 구단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해를 거듭할수록 치솟다 보니 KBO가 선수협에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수협은 곧장 거부했다. 당시 SK 와이번스 전략육성팀장을 맡고 있었던 필자는 KBO 관련 제도를 담당했지만, 이 제도의 실현 가능성을 낮게 봤다. FA 연봉 상한을 넘길 만한 선수들이 선수협의 주축인데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고 이 제도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이 제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대신 선수협과 KBO는 샐러리캡(팀 연봉 총액 상한제) 도입에 합의했다. 그리고 2023년부터 KBO리그에 샐러리캡(상한액)이 적용되고 있는데 2~3년이 지나면 구단의 기대대로 선수단 연봉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본격 도래하는 샐러리캡(총액 상한제) 시대


▎2008년 구본준 (왼쪽 두 번째) 당시 LG 트윈스 구단주는 철저한 신상필벌에 근거한 신연봉제를 들고 나왔다. / 사진:LG 트윈스
한편 선수협에서는 2004년 2월 외국인선수 연봉 상한선을 엄격히 적용해줄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당시에 외국인선수 연봉 상한은 허울뿐이고 이면계약이 비일비재했다. 국내 선수들로 구성된 선수협에서 외국인선수 연봉 상한선 준수를 촉구한 대목은 이채롭다. 하지만 외국인선수 연봉 상한선은 결국 2014년에 폐지됐다.

이와 같이 프로야구 선수 연봉과 관련한 각종 제도와 시스템은 43년 프로야구의 역사만큼 오랜 기간, 선수와 구단 간에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거쳤고 현재는 구단마다 방향성에 따라 연봉 고과를 산정하는 방식만 다를 뿐, 큰 틀에서는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야구 이외에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 선수 연봉과 관련해서 구단이든 선수 측이든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 류선규 - SK 와이번스의 마지막 단장이자 SSG 랜더스의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26년간 프로야구단(LG 트윈스·SK 와이번스·SSG 랜더스) 프런트로 근무하며 홍보·마케팅·운영·육성·전략기획 등 거의 모든 부서를 경험했다. 단장으로서 우승 1회(2022년 SSG 와이어 투 와이어 통합 우승)를 포함해 총 다섯 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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