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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일본 직설(直), 요설(妖) 그리고 곡설(曲説)(12)] 관군에서 반군으로… 일본판 흙수저 조직 ‘신센구미’ 순례 

칼 하나로 최고 자리 오른 스토리에 열도 열광 

에도 막부 지킨 농민 출신 사무라이 ‘곤도 이사미’는 특별한 캐릭터
충절 보여준 우직한 인생… 죽음으로 증명한 집단 속 신념에 추앙


▎페리의 흑선은 막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실업자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성공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실행된다. / 사진:유민호
"바다를 모르는 땅, 소금 맛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지원군은 오지 않고 포로가 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사무라이로 대해 주신 도쿠가와(徳川) 막부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다.”

동서(東西)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는 명구(名句)다. 첫째 구절부터 보자.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대서사시 오디세우스(Odysseus)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말이다. 10년 트로이 전쟁과 10년 바다 방랑을 끝낸 뒤 고향 이타카(Ithaca)에 돌아온 오디세우스. 그리운 아내 페네로프(Penelope)와 20년 만에 만나자마자 전하는 말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한, 길고 긴 여행이 자신의 미래라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 일본 역사 속에 등장하는 패장(敗将)의 대명사 중 하나인 ‘곤도 이사미(近藤勇)’가 남긴 말이다. 사무라이 문화에 따르면 죽기 전 최후의 시(詩)를 남긴다. 이른바 ‘지세이(辞世)’로 통하는, 한시로 구성된 짧은 글이다. 곤도는 사무라이로서 메이지(明治) 신정부에 대항해 도쿠가와 막부를 지킨 인물이다. ‘이기면 관군, 지면 도적(勝てば官軍負ければ賊軍)’이란 말이 있다. 곤도가 처음 막부를 위해 일할 때는 관군이었다. 그러나 막부가 스스로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면서 한순간 반역자로 전락한다. 패잔병으로 쫓기던 중 메이지 관군에게 붙잡힌다. 위 문장은 곤도가 처형 직전 남긴 최후 유언이다.

일본판 흙수저 사무라이 조직 신센구미

3000여 년 전 오디세우스가 부인에게 전한 말과 160여 년 전 곤도가 처형장에서 남긴 마지막 한시는 유럽과 아시아 문명·문화의 기본자세를 가늠할 최적의 본보기 중 하나다.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차이가 확연하다. 첫째는 개인과 집단, 둘째는 철학과 사상이란 잣대다. 먼저 동서가 얼마나 다른지 개인과 집단이란 관점에서 살펴보자. 오디세우스는 부인에게 자신의 미래 초상화를 알려준다. 단기간에 이뤄지거나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 ‘투어(Tour), 트래블(Travel)’이 아닌 평생 여행으로서의 ‘저니(Journey)’다. 평생 세상을 전전했던 예수, 부처, 마호메트가 보여준 여행 방식이다. 동양적 사고로 보면 예수, 부처, 마호메트 모두 패륜아로 비칠 수 있다. 부모나 주변을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만을 위해 평생 여행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인생이 그러했듯 부인은 물론 자식, 부모, 국가마저 간섭할 수 없는 것이 여행을 통한 ‘나만의 인생’이다.

사무라이 곤도는 어떨까? 목이 날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군(主君)에 대한 의리를 언급한다. 곤도가 말한 주군은 막부 최후의 쇼군(将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지칭한다. 비극이자 희극이기도 하지만, 요시노부는 부하들에게는 메이지 신정부에 대항해 싸우라고 말하고선 정작 본인은 몰래 도망간 인물이다. 그러나 곤도는 주군을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최후 순간까지도 요시노부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 기린다. 개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종적 관계에 기초한 집단 속에서의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부인, 자식, 부모도 멀리한 채 집단과 전혀 무관한 ‘나만의 인생’을 추구 한다. 사무라이 곤도는 정반대다. 자신의 삶의 근거와 가치를 주군으로 연결해 마지막까지 이어간다. 오디세우스는 개인, 곤도는 집단이다.

둘째, 철학과 사상의 각도에서 살펴보자. 필자가 분석한 세계관이지만, 철학은 극히 드물고 사상만 넘치는 곳이 동양이다. 반대로 서양은 철학을 원점으로 하면서 사상이 뒤를 받쳐주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 철학과 사상은 어떻게 다를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다. 필자의 기준이지만, 죽음이란 키워드로 보면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세상을 대하는 경우가 철학이고, 죽음이 아닌 현세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은 사상이다. 해골을 쳐다보는 벌거벗은 늙은이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방 그림의 주된 테마 중 하나다. 해골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장르의 그림 속 재료로, 종교화는 물론 세속적 초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라틴어로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 메멘토 모리의 문자적 해석이다. 동양 그림 속에서 해골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괴담이거나 요괴 수준으로 전락한다. 나폴레옹이 해골을 들고 있는 유화는 가능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해골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렵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신의 등장이다. 죽음, 신, 우주 그리고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이 바로 지(知)의 출발점이다. ‘지’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필로소피(Philosophy)’, 즉 철학의 탄생이다. 동양 사상은 ‘지’의 사랑과 멀리 떨어져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현세 삶에 도움이 되는 ‘지(知)’만 중시될 뿐이다. 따라서 현세와 무관한 죽음은 동양의 관심사가 아니다. 신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있기는 하지만, 목적 자체가 아니고 현세 삶을 지탱할 보호막이란 성격이 강하다. 신은 돈, 명예, 권력으로 상징되는 나의 복과 안전을 드높이기 위한 존재에 그친다. 한국 풍수지리에서 보듯 죽은 사람이나 조상의 무덤조차도 ‘후손 번성 좌표’로 활용된다. 사상은 살아가고 미래에 닥칠 시간에 대한 준비·자세·대안에 집중한다. 따라서 동양은 철학, 즉 죽음, 신, 우주 인간을 아우르는 문제 전부를 몰라도 된다. 지에 대한 사랑도 현세에 활용될 경우에 한해 중시된다. 오해하기 쉬운데, 공자는 철학자가 아닌 사상가다.

곤도 이사미가 이끈 도쿠가와 호위 군단


▎필자의 신센구미에 대한 관심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일본인 모두가 아는 사무라이 곤도 이사미의 모습이다. 자세와 표정만 봐도 가슴을 뒤흔들 강렬한 이미지다. 살기가 포함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듯한 비장한 모습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철학과 사상이란 관점에서 볼 때 오디세우스는 철학, 곤도는 사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의 평생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이자 도전이다. 오디세우스는 불로초를 찾거나 황금이나 실크를 위해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다. 왕으로 편안하게 살아도 되지만, 세상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여행에 나선다. 그렇다면 곤도가 철학이 아닌 사상의 세계에 살았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일까? 곤도는 원래 사무라이가 아닌 농민 출신으로, 막부 호위 무사가 된다.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후하게 대접해 준 요시노부를 최후의 순간까지 찬미한다. 곤도의 머릿속에는 상하수직 관계의 세계관이 펼쳐져 있다. 농민-사무라이-막부로 이어진 피라미드 파워 구도다. 모든 세상은 삼각형 피라미드 구도 속에서 움직이고, 정당성과 정통성도 삼각형 내부에서만 얻을 수 있다. 삼각형 밖 세상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의미나 가치가 없다. 오디세우스가 추구하는 피라미드 밖 세상과의 만남이 아닌, 이미 굳어진 삼각형 세상에 맞춰진 것이 곤도의 생각이다. 영원히 이어질 ‘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사랑과 무관한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 어울릴 생각이다. 오디세우스가 보면 눈물을 흘리는 곤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거꾸로 곤도가 보면 ‘세계로 향한 평생 여행자 오디세우스=정신 나간 기인’ 정도로 대할 듯하다.

일본 서브 컬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신센구미(新撰組)’에 관한 얘기를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부터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이르는 전방위 인기 스토리 중 하나가 신센구미다. ‘구미(組)’란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의미한다. 비즈니스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도 사용된다. 신센구미는 바로 곤도 이사미가 이끌던 도쿠가와 호위 군단이다. 최전성기 멤버는 300명 정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춘향전이 한국에서 사라졌다. 장년세대 기억으로 보면 춘향전은 거의 매년 새롭게 등장하던 드라마·영화 인기 소재였다. 20세기 흑백시대 상황이지만, 당대 최고 청춘남녀 인기 스타가 춘향전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이몽룡, 성춘향에 선정된다는 것 자체가 인기 최정상의 증거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사라진다. 빤한 춘향전 스토리가 모바일 세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일본은 다르다. 모두 알고 있는 고전이라도 드라마,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제작돼 새롭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매년 겨울이 되면 주군을 위해 47명 전원 할복하는 ‘추신쿠라(忠臣蔵)’ 스토리가, 여름에는 돈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독살한 ‘요쓰야가이당(四谷怪談)’이 새로운 시각으로 제작돼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같은 내용이지만, 관점을 조금씩 바꾸면서 고전들을 재해석하는 식이다. 신센구미는 그 같은 고전 중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인기 스토리다.

혼란 속에 등장한 막부 보호 구원투수


▎곤도 이사미는 할복이 아닌 참수형에 처해진다. 시신이 곳곳에 나눠졌기 때문에 정확한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사진:유민호
신센구미는 1863년 2월 27일,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京都) 치안 확보를 위한 자원봉사대 성격으로 데뷔한다. 원래 ‘로시타이(浪士隊)’란 이름으로 출발한다. 로시(浪士)란 로닌(浪人) 즉, 직업도 주군도 없는 실업자 사무라이를 의미한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흙수저 사무라이다. 로시타이는 곧바로 친(親)막부의 선봉에 선 정규군, 아이즈한(会津藩) 외곽부대로 활동한다. 자원봉사단 수준이 아닌, 교토를 지키는 공적 조직으로 진화한다. 마침내 매달 월급을 받는 사무라이로 성장한 셈이다. 19세기 교토는 전국에서 몰려온 로닌들로 어수선했다. 미국 흑선이 1853년 도쿄 앞바다에 나타난 이래 일본은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시 교토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실제 권력은 막부가 쥐고 있었다. 대부분의 로닌은 외국에 굴복한 막부를 국적(國賊)으로 생각했다. 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천황의 권위도 땅에 떨어뜨렸다고 비난한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외국 적들을 물리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세력들이 확산된다. 이들은 막부 요인을 암살하고 정변을 계획한다. 신센구미는 이 같은 혼란 속에 등장한 막부보호 구원투수다.

1864년 7월 8일 발생한 이케다야(池田屋) 사건은 신센구미의 실력을 만천하에 알린 당대 빅뉴스다. 곤도가 앞장서서 반(反)막부 사무라이 20여 명을 참살한 사건이다. 2층 좁은 공간에서 이뤄진 진검승부로, 4대 20의 사무라이 전사(戰史)에 남는 명승부다. 드라마나 영화 속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신센구미의 인기가 최고 절정에 달했던 실화다. 이어 교토 전체 치안이 신센구미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명성과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센구미는 이케다야 사건 33개월 뒤인 1867년 10월 14일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수세에 몰린 막부가 나라 권력을 천황에게 넘긴다. 신센구미는 곧바로 관군에서 반란군으로 추락한다. 곤도는 메이지 신정부에 반대하는 지방 세력과 함께 막부 부활 활동에 나선다. 한국에 알려진 일본 근현대사를 보면 ‘메이지 유신=무혈(無血) 정치개혁’으로 느껴진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비롯한 수많은 지사들의 살신성인을 통한 무혈평화 정치개혁이란 식이다. 전혀 반대다. 대정봉환이 이뤄진 뒤부터 천황파와 막부파 간 전면전이 시작된다. 1868년 1월부터 1869년 6월까지 계속된 이른바 ‘보신(戊辰)’ 전쟁으로, 일본 전역이 피로 물든다.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열도 내 피의 보복이 끝난 직후 이뤄진 메이지 신정부의 해외 제1호 전리품이다.

한국전쟁이 그러했듯 외부 적들보다 내부 분열이 한층 더 잔인하다. 곤도는 패잔병 괴수란 오명과 함께 저세상으로 떠난다.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곤도는 체포가 아니라 스스로 투항했다고 한다. 사무라이 예법에 따르면 투항할 경우 할복을 통한 죽음이 보장된다. 아무리 적이지만, 사무라이로서의 공통윤리가 있다. 그러나 곤도는 할복형이 아닌 참수형에 처해진다. 본인 스스로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손으로 살해되는 불명예 최후다. 농민 출신에다가 너무도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업보가 참수형이었다. 곤도는 처형되기 직전 면도기를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수염을 한 번도 안 깎아서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면도를 끝낸 뒤 곤도는 웃으면서 참수형에 응했다.

막부가 천황에 권력 넘기면서 반역자로


▎곤도와 더불어 신센구미 좌장 히지가타 도시조의 이름도 충혼탑에 새겨져 있다. 히지가타는 홋카이도까지 쫓겨나 싸우다 전사한다. / 사진:유민호
필자의 신센구미에 대한 관심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일본인 모두가 아는 사무라이 곤도 이사미의 모습이다. 자세와 표정만 봐도 가슴을 뒤흔들 강렬한 이미지다. 살기(殺気)가 포함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듯한 비장한 모습이다. 일본인이 신센구미에 환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곤도라는 특별한 캐릭터에서 시작된다. 농민 출신이지만, 사무라이 인생을 원하면서 15년 이상 개인 수련에 들어간다. 19세기 중엽 일본의 신분제도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실업자 사무라이가 넘치는 상황에서 농민, 상인, 사무라이의 벽이 사라진다. 곤도는 칼 하나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 29세 되던 때 막부 호위 부대에 들어가 신센구미 최고봉에 오른다. 신센구미는 기본적으로 사무라이와 무관한 흙수저 중심 실업자 군단이다. 대략 20대가 중심으로, 30대 중반 이후는 극히 드물었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신센구미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들이다. 돈, 가문, 배경은 물론 그럴듯한 스펙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 쓰러져가는 막부의 호위에 나선다. 이길 것이 빤한 조직에 들어가는 약삭빠른 엘리트식 행동이 아니다. 신념과 충절 하나로 살아가는 우직한 인생이 신센구미의 근본이다. 신센구미 스토리가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다. 잘나고 똑똑하며 머리가 좋은 엘리트가 아닌, 뭔가 모자라고 약하며 배경도 없는 사람들의 절규가 신센구미 스토리에 녹아 있다.

곤도의 신센구미는 최고의 규율·규범 속에서 탄생된다. 조금만 어긋나도 곧바로 할복이다. 규율 무시만이 아닌 탈퇴도 할복형이다. 일단 신센구미가 될 경우 죽어서 나가는 것이 암묵적 계약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神風)는 군부가 만든 인위적 허상이 아니다. 곤도의 신센구미에서 보듯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죽음이 일본인 유전자 속에 배어 있다.

이순신 장군 스토리를 보면 무용담만 있을 뿐 구체적 생활상이나 주변 인물이 안 보인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도와준 참모가 누구인지, 군 자금은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전무하다. 오직 영웅 충무공의 살신성인 충절만 돋보인다. 신센구미는 어떨까? 곤도 한 사람만이 아닌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너무 많아서 주연과 조연의 벽이 애매하다. 좌장 격인 참모 ‘히지가타 도시조(土方歲三)’, 검의 달인 ‘오키타 소지(沖田総司)’를 비롯해 10여 명의 필살 사무라이가 곤도와 동격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업무별 상하관계는 있지만, 평상시에는 친구이면서도 경쟁 관계에 서 있다. 규율에 어긋날 경우 가까운 친구라도 할복형에 처한다. 러브 스토리는 신센구미가 갖는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얘기지만, 20대 청년들의 마음을 녹여줄 수많은 러브 스토리가 신센구미 속에 녹아 있다. 항상 의문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은 하루 24시간 적을 물리칠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사랑하는 여성이 가까이 없었을까? 신센구미는 살인특공대인 동시에 젊은 피가 흐르는 청춘 러브 스토리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도쿄 긴자(銀座)에서 지하철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이타바시(板橋)역이 나온다. 곤도와 신센구미 대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일본 불교세계에 따르면 저 세상에 간 인간은 전부 신이 된다고 한다. 곤도와 신센구미 대원들을 신으로 모시는 공간이 이타바시역 바로 앞 작은 공원 안에 들어서 있다. 곤도 처형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곤도가 죽은 지 8년 뒤인 1876년 세워졌다. 곤도 시신은 참수형에 처해진 곳곳에 뿌려진다. 정확히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이타바시 충혼탑은 곤도를 비롯해 신센구미의 기상과 충절을 기리는, 명목상 신센구미 공동묘지 같은 곳이다. 역에서 내려 1분 정도 걸어가자 멀리 5m 높이의 충혼탑과 함께 칼을 찬 곤도 입상이 눈에 들어온다. 굳게 닫힌 입술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다. 뭔가 무겁고도 긴장된 분위기가 공원 전체에 표류한다. 바로 옆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지만,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5월 초 들렀지만, 충혼탑 주변에 동백꽃 몇 송이가 남아 있다. 붉은 동백꽃 수백 송이가 땅에 떨어져 있다. 한국인 대부분은 ‘동백꽃=추운 겨울을 이겨낸 인고(忍苦)의 상징’으로 대한다. 필자에게는 달리 보인다. 동백꽃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 한 송이 자체가 전부 잘려 떨어진다. 과장하자면 ‘참수형 꽃’으로 느껴진다. 충혼탑 정면에는 곤도와 함께 신센구미 2인자 ‘히지가타’ 이름도 실려 있다. 홋카이도(北海道)까지 쫓긴 뒤 정부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최후의 신센구미 대원이다. 지략과 함께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귀신 부대장(鬼の副長)’이란 별명을 가진 인물이다. 곤도처럼 농민 출신 흙수저 사무라이다.

스스로 투항해 참수될 때까지 절개 지켜

금수저와 갑에 대응되는 흙수저와 을. 일본에서는 가치구미(勝ち組)와 마케이누(負け犬)란 식으로 표현한다. 승자로서의 가치구미, 패자로서의 꼬리를 내린 개다. 일본이 자랑하는 19세기 메이지 유신은 천황과 도쿠가와 집안 사이 전쟁의 결과물이다. 신센구미는 마케이누 도쿠가와를 지킨, 마케이누 중에서도 최하위 마케이누에 속한다. 결과는 전원 죽음이다. 마케이누의 반란이라고 할까? 21세기 들어 과거 마케이누 역사가 새로 등장한 점령군의 훈장으로 이용되는 듯하다. 미국 건국 아버지들이 흑인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더니 100여 년 전 세워진 동상들도 파괴되는 판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근현대사의 패자, 희생자들을 앞세운 가짜 점령군들의 행진이 일상화하고 있다. 일본은 어떨까? 신센구미를 추앙하지만, 그렇다고 해 메이지 신정부를 학살자로 몰아세우며 현재의 천황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승자는 승자로서, 패자는 패자로서 기록되면서 후세에도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 마케이누가 바라는 것은 새삼스런 승리가 아닐 것이다. 비록 졌지만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진 충절과 자기확신이 후세 모두에 전해지질 원할 것이다.

잊지 않고 서로를 존경하며 추앙하는 것은 동양적 피라미드 세계관이 갖는 장점이다. 오디세우스가 실천한 미지 세계 속에서의 자아발견도 매력적이지만, 곤도가 죽음으로 증명한 집단 속의 신념도 아름답다. 만약 동시대에 태어났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인물. 바로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미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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