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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13)] 대항해시대의 본진, 포르투갈을 거닐다 

세상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지도를 확장한 모험의 땅 

‘해양왕’ 엔리케 시절 카보다호카와 리스본에 남겨진 식민지 개척의 역사와 탐험가들
‘둥근 지구’ 입증한 마젤란과 ‘포르투갈 기사단’의 탐험… 천주교 성지 파티마 대성당


▎항해 선원들을 보호해 달라며 수호성인에게 헌정한 제로니모스 수도원.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 가마와 시인 카몽이스 등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 사진:고혜련
끝이 보이지 않게 뻥 뚫린 대서양의 드넓은 바다가 거세게 출렁이며 말을 건다. 유럽대륙 서남부 이베리아반도 맨 끝자락에 자리한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카보다호카. 대서양 해안가 절벽에 서서 망망대해를 건너다 보면 궁금증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다. 지리적으로 유럽 최변방에 위치한 이 작은 나라(면적 9만2000㎢, 남한 면적의 90% 정도)가 저 거친 바다를 뚫고 나가 중세와 근대 약 500년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린 거대 해상제국으로 군림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전성기 ‘대(大)항해시대’에 자기네 본토의 수십 배가 넘는 수많은 식민지를 호령하던 그 저력은 도대체 어디서 솟아났으며, 어떻게 해서 오늘날 그 영광의 날들을 역사 속으로 흘려버렸는지 자못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현재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소박한 나라 중 하나가 된 포르투갈은 호기심과 열정, 투지로 충만했던 쟁쟁한 조상들이 일궜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여전히 절치부심하고 있다.

우선 포르투갈의 중심지이자 수도인 리스본의 테주 강변에 세워진 벨렘탑과 대항로 발견기념비는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혔던 이 나라가 ‘바다의 제왕’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대서양을 향해 출발하는 모든 탐험대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음을 증언한다. 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국가명 자체가 항구라는 의미의 라틴어 포르투스(Portus)와 서쪽을 뜻하는 칼레(Cale)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니 아주 제격이다.

‘항로 발견기념비’에 새겨진 정복자들

포르투갈인들은 ‘네모나고 평평한 지구의 끝’을 알 수 없어 두려웠던 그 시절, 아스라한 서쪽 바다를 향해 어떻게 죽음 불사의 모험을 하게 됐을까? 15세기 말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의 비단·향신료에 탐닉, 모두 동방으로 가는 항로 개척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든 옷감 비단과 인도의 후추·정향 등 각종 향신료는 재력과 지위의 상징물처럼 여겨져 동방과 서방세계의 왕족과 부호들이 저마다 눈독 들인 사치품이었다.

그 와중에 동·서양 교역로였던 실크로드가 한동안 폐쇄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위기감에 욕망은 더 커진다. 15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1453)하면서 육상교역로가 막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루트 개발을 위해, 서쪽 변방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력을 다해 바닷길 개척에 뛰어들었다. 이들 두 나라 정부의 경쟁적인 후원하에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을 위시해 바스쿠 다 가마,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이 선두주자로 뛰게 된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지도를 살펴보면, 오른쪽으로는 지중해를 면하고 있는 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터키 등이 포진해 있다. 대서양 위쪽으로는 프랑스·독일·영국 등 쟁쟁한 나라들이 자리하고 있어 운신의 폭이 매우 좁은 상태였다. 결국 동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쪽의 아프리카 대륙 해안을 빙 돌아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야 ‘천국의 알갱이’라 불릴 정도로 음식의 풍미를 더 해주는 후추 등 각종 향신료·실크·면화 등의 생산으로 막대한 국부를 형성한 인도와 중국 등의 아시아로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류 음식의 맛과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후추 한 알의 가격이 진주 한 알과 비견될 정도로 고가였다니 애가 탈 만했으리라.

대서양 위쪽에서 아래 방향으로, 즉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항해하면서 일부 국가를 식민지화하는데도 성공한다. 결국 포르투갈은 식민지들 덕분에 15세기부터 약 500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15세기, ‘해양왕’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 세계 집권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던 엔리케(Enrique, 1394~1460) 왕자의 사후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1960년 포르투갈 정부가 리스본에 세운 ‘항로 발견기념비’가 이를 말해준다. 설치 장소는 인도 항로를 개척해 나라의 국운을 흥하게 한 바스쿠 다 가마가 배를 띄워 떠난 자리다. 당시 항해했던 범선 캐러벨의 모습을 재현한 기념비 안에 해상제국을 만드는데 기여한 역사적 인물 10여 명의 석상을 배치해 눈길을 끈다.

우선 항해지도 개발 등 온갖 지략과 리더십으로 바다를 장악할 꿈을 실현한 엔리케가 기념 선박 선두에 서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인물들은 거친 바다의 남쪽으로 치달아 1488년 최초로 희망봉을 발견한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며 포르투갈과 바다를 주제로 한 서사시로 역사에 기록된 루이스 카몽이스 시인 등이 그들이다.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포르투갈이 최고조에 이를 때 지배했던 식민지들을 표시한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브롤터 해협부터 희망봉, 인도, 브라질까지


▎이곳이 땅끝임을 알리는 십자가 돌탑. 16세기 포르투갈 대표시인 카몽이스의 시구와 위도, 경도 등이 표기돼 있다. / 사진:고혜련
엔리케는 포르투갈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해양 탐사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1418년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 항로 개척에 힘썼다. 모두 육로만 바라볼 때, 그는 바다에 집중한 것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모로코를 잇는 세우타(지브롤터 해협)를 정복했고 서아프리카 연안과 대서양 탐험 및 개척을 주도하고 지원했다. 천문대와 항해연구소도 세웠다. 거센 풍랑에도 잘 버티는 장거리 항해 선박 캐러벨(Caravelle)과 항해 도구도 만들었고 항해사들을 양성, 곳곳에 꾸준히 파견했다.

원정 항해에 나섰던 ‘포르투갈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바스쿠 다 가마(1460~1524)는 유럽 최초로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해안 및 동해안의 몸바사를 거쳐 인도 캘리컷까지 항해한 인물이다.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선장이 1488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다 가마는 1차 진입 시 캘리컷의 영주가 홀대하자 되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2차 항해를 감행, 무력 진압 후 결국 인도와 무역을 하게 된다. 포르투갈의 숙원이던 인도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 이들 항해단은 1497년에 리스본을 출발해 귀환할 때까지 2년 여에 걸쳐 총 4만2000㎞를 항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나중에는 더 동쪽으로 전진해 향료의 집산지인 말레이반도 남부의 믈라카 제국을 1511년 침공, 향료무역을 독점했다. 믈라카는 15세기 인도·중국을 비롯해 아라비아·그리스 등과 활발한 교역을 한 무역 중심지였다. 이렇게 향료무역을 독점해 승승장구하던 포르투갈은 16세기 남미의 브라질 등을 포함해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린 거대제국으로 위상을 키운다. 포르투갈~인도를 오가던 당시 풍랑 속 길을 잘못 들어 브라질을 우연히 발견, 점령하게 된 것이다.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연유다.

리스본 항구 입구에 1502년 세워진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anastery)은 “네모난 지구의 끝에 가면 결국 절벽으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던 당시, 목숨을 불사하고 항해에 나선 이들을 보호해 달라며 수호성인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마누엘 왕이 지은 곳이다. 이 수도원에는 포르투갈의 해양제국시대를 대표하는 다 가마와 카몽이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항해 도중 죽은 다 가마의 시신은 돌아와 이곳에 묻혔다.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수도원은 조개껍데기 등 바다 생물과 동양 식물들을 장식용으로 활용해서 바다를 거쳐 다른 세계로 향하려 했던 항해사들의 마음을 표현했다.

리스본을 가로지르는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벨렘탑(Belem Tower)은 국가의 찬란했던 발전과 도약에 분수령을 이룬 바스쿠 다 가마의 위대한 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16세기 초 마누엘 1세가 건립한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대서양을 향해 출발하는 모든 탐험대의 전진기지이면서 이곳을 드나드는 선박과 사람들을 감시하는 요새 역할도 했다. 성 중앙에는 뱃사람들의 안녕을 수호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탑 상층부에는 멋진 테라스가 있는 왕족의 방, 예배당 등이 있다. 리스본을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테주강에 놓인 유럽 최장의 교량 이름도 바스쿠다 가마다. 총 길이 17.2㎞로 인도 항로 발견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합자해 1조원을 들여 1998년 완공했다.

칠레의 세계 최남단 마을에 세워진 마젤란 동상


▎‘해양왕’ 엔리케 왕자 사후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포르투갈 정부가 리스본에 건립한 항로발견 기념비. 범선의 모양을 재현한 기념비에는 대항해시대를 연 10여 명의 역사적 인물들의 석상이 배치돼 있다. / 사진:고혜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일주(1519~1522)에 성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한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역시 포르투갈인이며 한때 포르투갈 기사단 일원이었다.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향신료 무역을 하기 위해 새로운 뱃길을 찾아 헤맸던 그는 포르투갈 왕실이 지원을 거절하자 결국 에스파냐(지금의 스페인)왕국의 지원을 얻어내 귀화까지 한 끝에 역사적인 탐험을 성사시켰다. 당시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는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가져온 후추 등 향신료로 많은 돈을 벌자 이를 만회할 생각으로 마젤란과 의기투합했다.

마젤란은 콜럼버스(1450~ 1506)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고 아메리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섰다. 1519년 9월, 227명의 선원을 다섯 척의 배에 태워 출항했다. 항해 도중 선박 난파 등 우여곡절 끝에 1년 후인 1520년 11월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도착,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후 이 해협을 ‘마젤란해협’이라 명명했다. 이들 앞에 출현한 거대한 바다는 태평양이라고 이름 짓는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맨 아랫마을이면서 세계 최남단인 푼타아레나스에 마젤란의 동상이 지금도 현존하는 이유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북서쪽으로 전진한다. 식량 부족과 괴혈병 등으로 선원들을 잃어가면서도 4개월 만인 1521년 3월 육지를 발견한다. 지금의 마리아나 군도와 필리핀을 발견한 것. 원주민들과의 접전으로 이곳에서 마젤란은 사망한다. 온갖 고초 끝에 1522년 9월 6일 유일하게 빅토리아호 한 척만 귀향함으로써 세계 일주를 마친다. 277명 중 18명만이 돌아왔다니 3년여간의 항해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에스파냐 왕정은 상공업을 적극 장려하고, 해외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려 포르투갈과 함께 선두주자가 된다.

카보다호카,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세계 3대 성모 발현지인 파티마 대성당. 성모가 출현한 장소를 별도로 마련해 순례자들이 낮과 밤 상관없이 찾아와 기도하게 해놓았다. / 사진:고혜련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1506) 역시 1492년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항로 개척에 나섰다가 당시 유럽인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땅,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탐험한 곳을 죽을 때까지 아시아라고 믿었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존재임을 나중에 밝혀낸 사람은 포르투갈 정부의 지원을 받아 투입된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다. 결국 현재의 북·남미 대륙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진출로 인해 유럽은 막대한 이익을 얻어 번창 일로에 접어들었다. 또 콜럼버스의 탐험 이후 아메리카의 감자와 카사바 등의 작물이 유럽과 아시아 등에 보내지면서 인류는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인구가 그쪽으로 이동, 향후 역사는 무섭게 달라졌다. 리스본은 15세기 중엽부터 해외 식민지에서 얻은 소득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면서 16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혔다. 12세기 초인 1143년 레온 왕국으로 독립한 이 나라는 15~16세기 남미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등 5개국, 아시아의 동티모르와 마카오 등을 포함한 거대한 식민지를 개척했다.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 끝이라 해서 유명한 땅끝마을 카보다호카(Cabo da Roca, 호카곶)는 대서양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시발점이다. 수도 리스본에서 42㎞ 거리, 1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려 도착한 신트라(Sintra) 산맥의 서부 끝 해안 절벽이다. 카보는 곶, 호카는 바위라는 뜻이니 즉 ‘바위곶’이다. 호카곶은 포르투갈이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있는 ‘신트라·카스카이스(Sintra-Cascaes) 자연공원’으로 해발 140m 절벽에 펼쳐진 해안 풍경의 소박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흔든다.

땅끝임을 알리는 십자가 돌탑에는 16세기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루이스 카몽이스(1524~1580)의 시구,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 새겨져 있다. 1572년 그가 쓴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는 고대 이베리아 반도 서쪽에 살았던 용맹했던 고대 포르투갈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시는 인도 항로 발견과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을 축으로 하면서 포르투갈의 신화와 역사를 고루 엮어 그 위업을 기린 애국적 서사시다.

성모 발현지 파티마 대성당과 파두의 나라

바닷바람이 시원하고 한적한 이 시골 같은 마을은 예부터 영국과 스페인 귀족들의 휴양지로 주목받아 이들의 별장들이 전망 좋은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 1772년 세워져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등대가 마치 꽃다발인 양 푸른 바닷가 풍광을 예쁘게 장식한다. 빨간 등대와 희고 빨간 배색을 한 건물들이 휴양지 기분을 낸다.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포르투갈 전통가요인 파두(fado)의 여왕으로 불린 아말리아 로드리게스(1920~1999)의 ‘검은 돛배’(Barco negro)가 마음을 뒤흔들며 떠오른다. 바다로 떠나가 헤어져야 했던 연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숙명과 좌절, 고난 등을 강렬하게 노래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그녀가 작고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3일간의 국장을 선포했으며 그녀의 유해는 국립 판테온 묘지에 안치됐다. 그녀가 30년을 살았던 리스본의 주택은 작은 박물관이 돼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포르투갈 하면 우선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있다. 세계 3대 성모 발현지 중의 하나인 파티마(Fatima) 대성당이 그곳이다. 카보다호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다. 로마 교황청이 성지로 공식 인정, 선포한 곳이다. 나머지 성모 발현지 두 곳은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다. 파티마의 경우, 1917년 5월부터 5개월간 매달 13일에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성당을 1928년부터 짓기 시작, 1953년 10월 봉헌식을 거행했다.

포르투갈은 마누엘 1세(1495~1521) 때 최고의 황금시대를 열었으나 그 뒤를 이을 후손이 없어지고 왕권이 흔들리면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포르투갈은 결국 60년간의 스페인 신탁통치 시대, 왕위 탈환을 위한 두 나라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기에 1755년 11월, 수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지진과 화재가 리스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 19세기 초 프랑스의 침입,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시작으로 아프리카·동티모르·마카오 등 대부분의 식민지가 떨어져 나가면서 국력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한국과는 1961년 정식 수교했고 현재 200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2022년 기준 포르투갈의 1인당 명목 GDP는 2만3000달러. 2022년 기준 세계 181개국의 총생산액을 보면 포르투갈은 50위인 2500억 달러로 집계됐다. 참고로 미국이 1위로 25조4600억 달러, 한국은 13위인 1조6700억 달러다.

역사는 거대한 생물체처럼 부지런히 꿈틀거린다. 한 나라의 역사는 여러 국가 간 상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무한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오늘의 국제적 현실이 또 다른 내일을 어떻게 빚을지 포르투갈에서 새삼 되새겨본다.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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