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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대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1) 삼성그룹 - 사업보국과 인재경영으로 ‘초일류 기업’ 우뚝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포브스코리아는 한국경영사학회와 공동으로 ‘한국 10대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라는 주제의 특집기사를 연재한다. 사업보국과 인재경영의 목표를 안고 도전과 열정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창업 1세대들의 기업가정신을 돌아보고 후대 경영인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기업가정신의 핵심 DNA를 재조명해보는 특별기획이다. 그 첫 번째는 재계 서열 1위 삼성그룹이다.

▎지금의 글로벌 삼성은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과 제2창업자 이건희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리더십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중앙포토
장면 하나.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일이다. 1971년 1월의 어느 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다. 1910년생이니 그의 나이 만 61세. 인간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으니 이제 그룹의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들 셋과 딸 다섯이 있었다. 유학을 공부한 가풍이 몸에 배어 그는 오래 전부터 아들 상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장남 맹희가 있고, 차남 창희, 3남 건희가 있었다.

후계자 문제는 부자간 감정의 호오(好惡)를 떠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였다. 뼛속까지 경영자인 호암에게 후계자가 장남인지 차남인지 3남인지의 여부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누가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이끌어갈 변혁적 리더십의 자질과 능력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호암이 보기에 그동안 장남은 주위와 불화가 잦았다. 차남은 어딘가 모르게 유약한 모습이 보였다. 경영에도 뜻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건희인데…’ 3남 건희는 와세다대학 상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기업 일선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호암은 글로벌 기업인 미국의 GE나 일본의 SONY가 후계자를 장남이 아닌 차남이나 3남, 또는 사위, 나아가서는 경영능력이 출중한 평사원 중에서 발탁한 사례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더라도 어느 정도 잡음이 있으리란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고뇌는 깊어졌다. 자식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창업 공신부터 계열사의 신입 사원에 이르기까지 임직원들 불만도 최소화해야만 했다. 하루 하루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래도 그 길이 최선이라면.... 마침내 결심을 굳힌 이병철 회장이 직접 펜을 들어 유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장남 맹희는 경영에 흥미가 없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며, 차남 창희는 경영에 뜻이 없다. 이러한 뜻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3남 건희도 당초에는 본인이 사양했으나 마지막에는 ‘역량은 부족하나 맡아보겠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위로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이건희로 정한 만큼 그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갈 것이며…”

재계서열 1위인 삼성그룹의 차기 계승자를 명시한 호암의 공식 유언장은 이렇게 작성되었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던 호암은 고문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후, 금고 속에 유언장을 보관했다. 타계하기 16년 전의 일이었다.

공개된 호암의 유언장


▎호암의 타계 후 유언대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장남 이맹희 씨는 CJ그룹, 차남 고 이창희 씨는 새한미디어그룹, 장녀 이인희 씨는 한솔그룹, 5녀 이명희 씨는 신세계그룹의 창업자가 되어 지금의 범 삼성가를 이루고 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76년 9월,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에 갔다가 게이오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던 중 위암이 발견된다. 재검 결과 위암이 확실하자 도쿄의 암연구소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출국 전날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부인 박두을 여사, 장남 이맹희씨 부부, 그리고 장녀 이인희 씨를 비롯한 딸들도 모두 참석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

호암의 폭탄 선언이었다. 3남 이건희는 아버지의 수술을 위해 조운해 박사, 이동희 원장과 함께 도쿄에 체류하고 있다가 뒤늦게 그 소식을 들었다. 당시 재계 초미의 관심사였던 삼성의 후계자는 이렇게 결정됐다.

호암은 이후 3남 이건희를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1987년 타계하기 전까지 자신의 기업가정신 DNA를 물려주었다. 그 10년 동안 이건희 회장은 최고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혹독한 경영수업과 훈련을 받았다. 호암의 타계 후 유언대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장남 이맹희 씨는 CJ그룹, 장녀 이인희 씨는 한솔그룹, 5녀 이명희 씨는 신세계그룹의 창업자가 되어 지금의 범 삼성가를 이루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래 가계도 참조)

왜 호암은 당시 장남도 차남도 아닌 3남을 후계자로 정했을까? 이는 호암의 경영철학과 기업가정신이라는 DNA를 얘기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호암과 이건희 회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한국기업경영종합연구원장)는 “호암이 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춘 변혁적 리더십의 기준에 3남 이건희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선정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암은 3남 건희가 변화와 혁신, 기업 보호와 유지의 균형감각을 동시에 갖춘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호암의 기업가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을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호암은 이건희 회장에게 평생의 경영철학으로 ‘경청’과 ‘목계경영’을 주문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해석이다. ( 70쪽 인터뷰 기사 참조)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선대회장이 타계하자 삼성그룹 사장단은 오후에 긴급회의를 열어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건희 회장의 나이 45세 때였다.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이건희 회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취임식을 갖고 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이 회장은 선대회장인 호암으로부터 창업의 효를 이어 받아 호암의 경영철학을 내면화시키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경영에 대한 소신을 밝힌 당시 취임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본인은 삼성이 지금까지 쌓아 온 훌륭한 전통과 창업주의 유지를 계승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개인의 독선 보다는 다수의 의견과 조직을 우선하고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둘째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첨단 기술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의 활성화로 그룹의 국제화를 가속시킬 것이며 새로운 기술개발과 신경영 기법의 도입 또한 적극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재를 더욱 아끼고 키우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개성과 창의를 존중하고,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키며 그들에게 최선의 인간관계와 최고의 능률이 보장되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삼성이 50년의 맥을 이어 온 엄격한 신상필벌과 학연, 지연, 혈연을 철저히 배제한 공정한 인사의 전통은 영원 불변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입니다.

끝으로 삼성은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사회에 공급하고 건실한 경영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지금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제2창업’ 선언


▎호암은 삼성상회 등을 통해 구축한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고 국가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업인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한 지 3개월이 지난 1988년 3월, 삼성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제2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21세기를 앞두고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제2창업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의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여 5대양 6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혀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삼성의 비전으로 ‘글로벌 진출’을 선언했다.

최고경영자(CEO)는 외로운 자리다. 실제 밤잠을 설칠 정도로 이건희 회장의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원로 기업인들에 따르면, 70~80년대 한국 재계 주변에서는 삼성가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태종조 장자 양녕대군, 둘째아들 효령대군, 셋째아들 충녕대군에 빗대어 수군대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학문에만 전념해 유약하다는 말을 들어온 충녕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뒤 성군이 되어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듯이 이건희 회장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지난 27년 동안 삼성그룹의 제 2의 창업을 지휘해 세계적 기업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지금의 글로벌 삼성은, 사실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과 제2창업자 이건희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리더십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그룹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계 서열 1위의 대기업으로 우뚝 서 있다. 삼성은 2013년, 그룹 전체에서 390조 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같은 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428조 원이다. 삼성의 매출액이 한국 GDP의 26.6%나 차지하고 있다. 삼성의 2013년 수출액은 1572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 6171억 달러의 25%다. 단순 지표로도 한국 경제의 1/4을 책임지고 있다. 규모나 영향력에서 한 국가와 맞먹을 만한 힘을 갖추고 있는 만큼 삼성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온 국민의 관심대상이다.

이건희 회장은 국내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으로 수차례 선정됐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지난해 10월 2~29일 만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기업인’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가 이건희 회장을 꼽았다. 10년 전인 지난 2004년 1728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도 1위를 차지했다.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지난 2월 발표한 ‘2015 글로벌 500 연례 보고서’를 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작년보다 4% 증가한 817억16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애플에 이어 세계 2위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보다도 순위가 높다. 이건희 회장은 이제 세기의 경영인이자 글로벌 억만장자로 전 세계에 그 이름이 회자되는 거인이 되었다.

이병철과 이건희. 두 거인의 삶속에 내재된 삼성그룹의 기업가정신 DNA는 실제 경영현장에서 어떻게 발현됐을까? 우선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정신으로 집약되었고 이는 삼성그룹의 지도원리가 되었다.

첫째, 사업보국은 호암이 특히 강조한 기업가정신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황폐해진 국민 경제회복과 국가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적인 제조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당시 기업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제조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1969년의 삼성전자 설립에 이어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과 반도체산업, 항공산업 등 국가 기간분야의 기업들을 창설했다. 호암은 그가 삼성상회 등을 통해 구축한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 국가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1988년 제2창업선언 뒤 호암의 경영철학인 사업보국은 이건희 회장체제에서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이라는 덕목으로 심화되어 나타난다. 특히 기술중시 덕목은 이건희 회장 특유의 기업가정신 DNA로 발휘됐는데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74년 일이다. “미국·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할 수 있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나온 주위의 반응들이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주장에 국내에서는 ‘자본, 기술,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안된다는 3불가론의 공격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삼성반도체 신화의 시작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하는 이건희 회장. 그는 선대회장인 호암으로부터 창업의 효를 이어 받아 호암의 경영철학을 내면화시키는데 주력했고, 이는 삼성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반도체 미래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던 이건희 회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일본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일본의 사정에 밝은 그는 거의 매주 일본으로가서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것을 배웠다.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스스로 자료를 분석해 나갔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새로운 기술적 난관에 부딪쳐 있던 상태였다. 바로 ‘4메가 D램의 엄청나게 늘어난 용량을 어떻게 칩에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스택이냐, 트렌치냐’하는 두 가지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해외 선진 기업들은 아래로 파고 내려가는 트렌치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결과는 적중했다. 당시 선진 기업들이 고집했던 트렌치 방식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술을 수용해 나가지 못했다. “트렌치로 했으면 지금쯤 반도체는 망했고, 그룹까지도 흔들렸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 이후 이 회장의 과감한 두 번째 결단이 이어졌다. “모두가 하는 6인치로는 일본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삼성은 8인치에 승부를 겁니다.” 1993년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생산량으로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복안이었다. 이 회장의 전략은 적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랐다. 반도체로 일군 휴대폰 사업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 이룬 글로벌 삼성과 사업 보국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세계 일류를 추구하는 정신도 호암과 이건희 회장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영철학이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헌법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우선 삼성 내에서만이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뀌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1993년 6월 7일 독일에서 가진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중대선언을 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해진 신경영 선언이다.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올림픽 100m 달리기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는 불과 0.01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1등과 2등은 엄청나게 다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삼성은 지금 이류인 것이다. 더구나 가만히 놔두면 삼류, 사류 회사가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삼성이 과거의 모든 폐습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아울러 나도 잘되지만, 나라도 잘되고, 국민도 잘되고, 내 자식도 잘되고, 후손에게도 잘해주자는 것이 목적이다. 삼성이 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 나부터 변할 것을 다짐하자.”

세계 초일류가 되자는 비전 제시


이같은 일류기업 추구는 사실 그 뿌리가 호암의 제일주의 정신을 잇는 DNA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삼성이라는 기업 이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철저하게 제일이 되기를 바랐었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에도 1등주의, 최고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때 호암은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세가지 소망을 담아 100년 기업의 꿈을 심었다. 이같은 제일주의, 최고를 추구하는 정신은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변화하려는 진취적 사상의 표현이다. 무한경쟁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기업은 끊임없이 변신하지 않으면 남아 있을 수 없고, 새로운 제품일수록 끊임없이 품질을 개선하여 혁신적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암의 제일주의와 최고주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이 세계 일류를 추구했던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불량 휴대폰 화형식이다. 이건희 회장은 일찍부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그는 말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

모토로라가 국내 휴대폰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1990년대 초반에 삼성은 휴대폰 기술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1994년 10월, 삼성은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해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애니콜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에서 가진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중대선언을 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해진 신경영 선언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초일류로 가기엔 한참 멀었다고 판단했다. 뭔가 충격이 필요했다. 1995년 3월 9일 오전 10시, 삼성전자의 구미사업장. 흐린 날씨임에도 2천여 명의 직원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품질 확보’라고 쓰인 띠를 두르고 있었다. 직원들 앞에는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임직원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운동장 중앙에는 무선전화기를 포함해 키폰, 팩시밀리, 휴대폰 등 15만 대의 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갑자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직원 몇몇이 손에 든 해머로 휴대폰과 전화 기기들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퍼퍽-!” 돈으로 치면 무려 500억 원에 해당하는 비싼 기기들이 순식간에 쓸모 없는 플라스틱 조각으로 변했다. 부서진 조각들은 시뻘건 불 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양(量)이 아닌 질(質) 경영’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그룹 전 직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일종의 극약처방인 셈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해 설을 맞아 삼성이 개발한 휴대폰 2천여 대를 임직원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잖아.” “에이, 잔뜩 기대했는데… 속았네.”

이건희 회장은 대로(大怒)했다. “고객이 두렵지도 않나. 돈 받고 불량품을 팔다니.”

반도체에 이어 휴대폰이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사업이라 여겼던 이 회장의 실망은 상상이상이었다. “휴대폰과 관련된 모든 제품을 회수해서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우시오.”

화형식 이후 7년 반이 지난 2002년에 삼성이 만든 휴대폰은 세계시장 점유율 3위에 올랐다. 당시 삼성전자 총이익의 5.3%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던 불 속으로 사라진 500억 원도 7년 반이 지나 60배에 달하는 3조 원으로 되돌아왔다.

업그레이드 된 인재제일주의


▎이건희 회장이 하루 빨리 병상에서 일어나 기업경영의 지혜를 나라발전에 써주길 바라는 국민들이 많다. / 중앙포토
세 번째, 호암과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특징짓는 또다른 경영철학은 인재제일주의로 요약되는 인재경영이다. 삼성 신화를 일궈낸 기업가정신의 밑바탕에는 인재경영이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호암은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일년지계(一年之計)는 곡식을 심는 일이요, 십년지계(十年之計)는 나무를 심는 일이며,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동양의 격언을 자주 인용하였다. 하나를 심어서 하나나 열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백이 생산된다는 중국적 투자효율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인재제일주의를 경영이념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이같은 인재활용의 리더십은 현재까지 승계되고 있다. 삼성 그룹이 선구적으로 채택한 사원 공채제도와 연수제도, 인사고과제도는 호암의 인재제일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삼성이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종합연수원을 개설하여 인간개발과 인력개발에 노력한 것도 호암의 뜻이다.

호암의 인재제일주의 DNA는 이건희 회장에게 발전적으로 이어진다. 1995년, 이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했고, 삼성은 이를 받아들여 ‘공채 학력제한 폐지’를 선언했다. 삼성은 이때부터 연공 서열식 인사 기조가 아닌 능력급제를 전격 시행했다.

이건희 회장은 또 인재제일의 철학을 바탕으로 ‘창의적 핵심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데 매달렸다. 그래서 2002년 전 관계사 사장단 회의에서 CEO가 직접 핵심인재 확보를 위해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때부터 ‘S급 인재’로 불리는 핵심인재 확보는 CEO가 직접수행하는 주요 경영활동 목표로 자리 잡았다. ‘S급 인재’는 삼성이 매년 미래를 위해 수십명 씩 스카우트하는 초특급 인물이다. 앞서 호암이 그랬듯이 하나를 심어서 하나나 열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백이 생산된다는 중국적 투자효율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인재중시주의를 넘어 천재중시주의라고 이름붙일만하다. 삼성은 세계 각국에서 확보한 핵심인재들을 통해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일궈왔다. 호암의 인재제일주의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3월 1일, 삼성전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컨벤션센터(CCIB)에서 삼성전자의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 시리즈의 여섯번째 모델인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를 공개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는 삼성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폰”이라고 평했고,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슬래시기어는 “삼성이 드디어 우리가 원하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SNS 이용자들도 “디자인이 너무 멋있다”, “역시 한국은 스마트폰 최강국”이라는 칭찬을 쏟아냈다. 그런 반응에 가장 기뻐할 사람이 다름 아닌 이건희 회장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22년 전인 1993년, 이 회장은 유럽주재원 간담회에서 다가올 시대에는 “디자인이 가장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으로 상징되는 소프트 파워가 21세기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2005년에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삼성은 기술과 창의력을 결합한 고유의 디자인 경쟁력을 축적하면서 세계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하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는 상당부분 이건희 회장에게 빚을 진 셈이다.

3세 경영인들 창업주의 기업가정신 이어 받아야


▎이건희 회장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부터 사실상 회장을 대신해 그룹 전면에 나서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를 안내하는 이재용 부회장.
이제 100년 기업을 향해 가고 있는 삼성은 3세 경영 시대를 맞고 있다. 이건희(73) 회장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부터 그룹 전면에 나서고 있다. 삼성의 대표 자격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빌 게이츠 회장 등을 만나는 등 대외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고, 주요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과 계열사 매각, 그룹 구조조정 등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과 재계 총수의 오찬자리에 삼성을 대표해 참석해 “전자제품만 팔기보다 문화나 국가 브랜드 가치가 함께 해야 세계시장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재용 부회장의 활동에 비례해 동생인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의 보폭도 커지고 있다.

기업의 생사소멸은 그 기업의 가치관, 즉 기업 DNA에 달려있다. 100년 기업을 꿈꾼다면 이들 3세 경영인들이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 제2의 창업을 주도해 지금의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세운 이건희 회장 등 두 거인의 기업가정신의 핵심 DNA를 제대로 이어받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 갑시다.” 21년 전인 1994년, 이건희 회장 자신이 했던 말처럼 이 회장이 병상에서 일어나 기업경영의 지혜를 나라발전에 써주길 바라는 국민들이 많다. 그만큼 기업가정신으로 똘똘뭉친 거인들의 DNA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4호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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