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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8) 존 데이비슨 록펠러 

인생은 일과 놀이로 가득 찬 길고 행복한 휴가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자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현대사에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이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록펠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록펠러는 인류사를 통틀어 한 개인이 소유했던 재산 중 최고액을 소유했던 부자였다. 그러면서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 중앙포토·채인택
포브스에 따르면 록펠러가 최대 재산을 보유했던 시기는 1913년이었다. 그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7년 가치를 기준으로 3360억 달러나 된다. 1913년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의 1.5~2%에 이른다. 이 금액은 미국 역사에서는 물론 인류사를 통틀어 한 개인이 소유했던 재산 중 최고로 통한다.

아버지는 떠돌이 사기꾼 약장수에다 난봉꾼

눈여겨봐야 할 점은 록펠러가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은 드물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존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1810~1906)는 나무꾼으로 일하다 만병통치약 행상으로 전업했다. 전국을 떠돌면서 자신을 ‘생약으로 치료하는 의사 레빙스턴 박사’로 자칭하며 식물 엑기스로 만든 ‘만병통치약’을 팔았다. 한 마디로 번지르르한 말로 소비자를 속이면서 악덕상행위를 일삼는 떠돌이 사기꾼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의약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사기 행위와 검증되지 않은 자연요법을 결합한 이런 형태의 영업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은 10남매의 셋째로 태어나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 없이 이렇게 살았다. 본인은 자신이 파는 약의 효과를 제대로 봤는지 95세까지 장수했다. 존 록펠러가 97세까지 산 것으로 보면 유전적으로 장수집안으로 볼 수 있겠다.

윌리엄은 못 말리는 난봉꾼이었다. 심지어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여성과 다시 결혼하는 중혼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1837년 존의 어머니인 엘리자 데이비슨과 결혼해 여섯 아이를 낳았다. 윌리엄은 아이들이 10대이던 1855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런 뒤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1856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마거릿 엘런과 결혼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의 떠돌이 행상을 할 때 사용했던 윌리엄 레빙스턴 박사라는 이름으로 중혼을 한 것이다. 엘리자는 1889년 숨질 때까지 윌리엄과 계속 결혼을 유지했으며 마거릿도 19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윌리엄과 함께 살았다. 윌리엄의 중혼은 상당 기간 록펠러 가문의 비밀이자 수치로 남았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윌리엄이 엘리자와 사는 동안 가정부였던 낸시 브라운과 관계를 계속해 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엘리자와 결혼 전에 낸시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엘리자의 아버지가 지참금으로 500달러를 주자 엘리자와 결혼하고 가난한 낸시는 정부로 남겼다. 심지어 엘리자와 결혼한 이듬해인 1838년 본부인으로부터 첫 아이인 장녀 루시(1838~1878)를, 정부인 낸시로부터 또 다른 딸인 클로린다를 얻었다는 점이다.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1839년에는 미래의 세계 최고 부자인 장남 존 록펠러, 1841년에는 존의 평생 사업 파트너인 차남 윌리엄(1941~1922)이 태어났는데 그 사이인 1840년 낸시와의 사이에서 딸 코넬리아를 얻었다. 윌리엄은 “인생을 스마트하게 살려면 배워둬야 한다”며 자신의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속임수를 가르쳤다. 한번 장사를 나가면 오랫동안 떠돌다 돌아왔다. 집에는 부정기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록펠러는 이런 아버지보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 인생을 사는 방식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렵게 자식들을 키웠지만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정직과 근면, 절약을 가르쳤다. 록펠러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성실하고 총명한 젊은이로 자랐다. 어린 록펠러는 집에서 칠면조를 길러 용돈을 벌었으며 감자와 캔디도 팔았다. 이렇게 번 돈을 동네사람에게 빌려주는 사금융 장사까지 했다. 그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작은 접시를 큰 접시와 바꾸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뛰어난 장사수완을 보였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석유 시장의 90%를 통제한 트러스트로 부 축적


▎미국의 명문 사학인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1890년 내놓은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사진은 시카고대학 하퍼도서관. / 중앙포토·채인택
록펠러는 16살에 취업 전선에 나섰다. 당시로선 흔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한 일은 농산물 중개업체의 점원 보조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20세의 나이에 동생인 윌리엄과 모리스 클라크라는 인물과 동업을 하며 중개업소를 차렸다. 뒤이어 약사인 사무엘 앤드루스도 끌어들여 록펠러&앤드루스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록펠러의 중개업체는 1862년 당시 벤처와도 같았던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선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석유 붐이 일었다. 록펠러는 남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유전 탐사와 채굴에 열중할 때 부가가치가 더 큰 정제산업에 주목했다. 1867년 헨리 플래글러를 끌어들여 ‘록펠러, 앤드루스 & 플래글러’라는 회사를 차려 지역 정유소를 운영했다.

록펠러의 석유 사업이 날개를 단 것은 1870년 오하이오주에서 스탠더드 오일을 창업하면서부터다. 동생 윌리엄과 초기 사업 파트너였던 새무얼 앤드루스, 헨리 플래글러, 재베즈 보스트위크, 스티븐 하크니스 등이 힘을 모았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록펠러는 1911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명령으로 회사가 해산되기 전까지 스탠더드 오일을 운영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등유와 휘발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록펠러의 사업은 눈덩이처럼 성장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관련 기업의 수직, 수평적 결합을 통해 실질적인 시장독점을 이뤘다. 이를 경제사에서는 ‘트러스트’라고 부른다. 미국 석유 시장의 90%를 통제했다. 법률적·경제적으로 독립한 동종사업자들이 상호경쟁의 제한이나 시장통제를 위해 수평적으로결합해 상거래 조건 등에 대해 공동행위를 하는 ‘카르텔’보다 더욱 강력한 형태다. 트러스트는 독점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 경제적인 위력도 가장 강하다. 강력한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은 록펠러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줬다.

시운도 따랐다. 석유는 미국 전역에 걸쳐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석유를 사용한 등잔은 빠른 속도로 고래 기름 등잔을 대신하면서 새로운 조명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전기 조명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전기 시대가 열려 석유등이 하나씩 사라져도 석유 수요는 줄지 않았다. 석유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 걸쳐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서 자동차 연료로 석유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발전소에도 석탄과 함께 석유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석유는 현대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이런 산업의 발달은 미국 번영의 토대가 됐다.

록펠러는 미국의 철도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탠더드 오일의 석유를 미국 전역에 운반하기 위해서는 거미줄 같은 철도망과 원활한 철도 운용 시스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은 철도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잘 연결된 철도망은 석유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이런 철도망은 미국이 세계 최대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다. 석유산업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스탠더드 오일은 1899년 연방 반(反) 트러스트법 위반 혐의를 인정받아 트러스트를 해체했다. 이어 1911년 같은 이유로 미국 대법원에 의해 아예 기업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서로 다른 기업으로 분리됐다. 이렇게 분리된 기업 중 일부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기업인 엑손모빌(ExxonMobil)과 세브론(Chevron) 등으로 성장했다.

시카고 대학과 록펠러 재단 세운 기부왕

기업이 분리되면서 록펠러의 재산은 오히려 천문학적으로 팽창했다. 기업이 분사되면서 분사된 기업 가치가 올라 그 합이 원래 하나의 기업으로 존재할 때의 가치보다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해체되고 분사됐으나 각 사별 록펠러의 지분은 그대로였다. 분사 초기 그 합은 기존 스탠더드 오일의 가치보다 3~4배가 됐다. 덕분에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최초로 10억 달러를 넘었다. ‘기회의 땅’ 미국의 첫 억만장자가 탄생했다. 록펠러 재산은 스탠더드 오일이 분사된 지 2년이 지난 1913년 최대에 이르렀다. 록펠러의 나이 74세 때였다. 트러스트 덕분이 아니라 트러스트가 해산된 덕분에 재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석유왕’ 록펠러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더불어 미국의 현대 기부문화의 형태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뉴욕주 웨스트체스트 키쿠이트의 저택에 살았다. 그는 은퇴 뒤 삶의 좌표를 은둔 대신 사회 기여로 설정했다. 이전까지의 삶을 돈을 모으는 데 바쳤다면 이후의 삶은 돈을 쓰는 데 정열을 쏟았다. 1913년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기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기업인 출신답게 돈을 쓰는 데도 치밀하게 접근했다. 좋은 일에 쓰라며 돈을 무작정 기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사회복지사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관에 목적을 부여한 것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미국식 기부의 원조다. 목적 있는 사업을 위한 체계적인 기부를 함으로써 미국식 현대적 기부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각종 기관과 학교 등에 사업과 연구 자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뤄갔다. 이를 통해 의료, 교육, 과학기술 연구의 발전이라는 의도를 달성했다. 특히 당시 문제였던 황열병에 대처하는 연구에 많은 돈을 내놨다. 요즘 빌 게이츠 회장이 말라리아 퇴치 등 제3세계 풍토병 해결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00년초 미국이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하면서 현지 풍토병인 황열병으로 수많은 인부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회문제가 됐다. 운하 공사가 한동안 중단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병은 지독했고 전염은 광범위했다. 쿠바의 의사인 카를로스 핀레이가 모기에 전염원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국 군의관 월트 리드가 파나마 현지에서 방역활동을 통해 황열 발생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모기를 퇴치하면 황열병의 확신이 저지된다는 것을 연구로 알아낸 덕분이다. 월트 리드의 이름은 미국 수도 워싱턴 북부 베데스타에 있는 월트 리드 미육군병원에 남아있다. 미국 대통령이 아플 경우 가장 먼저 후송되는 곳이다.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

록펠러 기부 사업의 등뼈에 해당하는 것이 시카고 대학이다. 미국의 명문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1890년 내놓은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이 대학은 현재까지 총 8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시카고대학 출신이거나 이 대학의 교수를 지낸 인물로서 수상한 사람의 숫자다. 이는 세계 4위에 해당하는 숫자다. 시카고대학은 교수-학생 비율이 1대 5정도로 미국에서 상위권에 해당한다. 게다가 우수 교수를 확보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아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진을 확보한 대학의 하나로 평가 받는다. 이런 학구적인 교풍 덕분에 이 대학에서 학부를 마친 학생의 80% 이상이 졸업 뒤 5년 이내에 일반대학원이나 법과대학원·의과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의 법과대학원·의학대학원·경영대학원은 세계적인 전문대학원으로 이름 높다. 시카고 대학은 사회과학에서는 경제학, 자연과학에서는 물리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경제학은 시카고 학파의 산실로 이름이 높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이끄는 학파다. 이 대학 물리학과는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및 ‘아르곤 국립 연구소’와 손잡고 합동 연구를 통해 숱한 실적을 올려왔다. 기업인인 록펠러의 기부로 설립됐음에도 실용 학문보다는 순수 학문에 무게를 두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양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 대학에 학부생으로 입학하면 2년간 교양과목을 폭넓게 공부하는 ‘리버럴 아츠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미국에서 학생 공부시간이 가장 많은 대학의 하나다.

록펠러는 1901년에는 의학연구를 목적으로 자신의 성을 딴 록펠러의학연구소를 세웠는데 이 연구소는 1965년 록펠러 대학으로 발전했다. 독특하게도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만 받는다. 미국에서 의학·생명과학 부문에서 최고의 연구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이다. 생명과학과 관련된 노벨 생리의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출신자가 2016년까지 25명에 이른다. 이 대학 교수 중 학술원 회원이 30명이 넘는다. 필리핀의 센트럴 필리핀 대학의 설립에도 그의 기부가 큰 몫을 했다.

록펠러는 대표적인 기독교도 기업인이다. 그는 미국 침례교회 교단(ABCUSA)에 소속된 북장로교회의 열렬한 신자였다. 그는 일평생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결혼생활도 평탄했다. 청교도의 후손인 로라 스펠만(1839~1915)을 만나 1864년 결혼해 해로했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뒀다. 기독교 신앙은 록펠러의 일평생에 걸쳐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자신의 성공에 기독교 신앙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이 록펠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기업의 성장은 말 그대로 적자생존의 결과라며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성공도, 재산도, 기부도 살아남은 기업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록펠러는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인이었다.

록펠러는 1937년 플로리다주의 휴양지에서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4억 달러의 유산을 남겼는데, 대부분 가족들의 영구 트러스트로 묶인 돈이었다. 록펠러가 세상에 남긴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탓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간 젊은 벤처 기업인의 일생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을 준다. 더구나 그는 안정적인 곡물 거래 대신 위험성이 큰 석유 거래와 정제라는 벤처 산업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런 그는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에게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록펠러는 86세가 되던 해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나는 어려서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함께 배웠습니다. 내 일생은 일과 놀이로 가득 찬 하나의 길고 행복한 휴가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걱정이란 것을 길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매일 내게 잘해주셨습니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11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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