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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5)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라는 ‘망령’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kim.whanyung@joongang.co.kr
20세기는 카를 마르크스(1818~83)의 사상과 씨름한 세기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옛 소련·동구권이 1989~91년 붕괴했지만,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2017년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 2018년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불평등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다.

▎내년이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불평등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모두 마르크스주의자다”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영국 역사가·철학자·변호사·기자인 어니스트 벨퍼트 백스(1854~1926)다. 1893년에 한 말이다.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말이다. 단, ‘어떤 의미에서는(in a sense)’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1848)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료 공공 교육, 어린이 공장 노동의 폐지, 누진과세, 상속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들을 옹호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의 많은 주장이 보수의 어젠다로 수용됐다. 세계화를 말하는 사람들도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는 세계화의 초창기 이론가다.

2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이하드’ 마르크스주의자다. 의외의 인물도 있다. 달라이 라마는 2011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한다. 하지만 나는 레닌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2015년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간격이 확대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평등한 분배에 대한 강조가 있다. 내게 중대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서구인들에게 쿨(cool)하게 보이면 불교 전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중국을 향한 견제구를 던진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자 논란’은 심심하면 등장한다.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교황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이렇게 대꾸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이념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21세기 자본>(2013)로 세계 지성계의 샛별로 떠오른 토마 피케티에 대해서도 ‘그는 제2의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 보지도 않은 것 같다’와 같은 설왕설래가 있었다. 피케티는 “오늘의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로부터 영감을 받는 게 온당하다”고 말했다.

‘다이하드’ 마르크스주의자 지금도 여전히 많아


▎20세기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 씨름한 세기였다. 사진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벽화 속 마르크스.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다.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그를 둘러싼 ‘이슬람 신자 논란’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자 논란’이 골칫거리였다. 선거 운동과정에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몰고온 버니 샌더스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어떤 개인이나 조직에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기미가 보이면 ‘그는 빨갱이다’라는 공격이 들어온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빨갱이’에 대한 완곡어법(euphemism) 표현이다.

일면 허망하게도 마르크스 자신은 “한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은 마치 예수가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실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라는 견해가 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통치하는 이념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성경>이 무오류하듯, ‘노동자 계급의 성경’으로 불린 <자본론>(1867) 같은 마르크스의 저작이나 그의 삶마저도 오류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 ‘웃픈’ 일들이다. 냉전 시대 남미 좌파는 ‘남미의 조지 워싱턴’이라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1783~1830)를 그들 혁명에 동원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볼리바르의 대중적 인기를 감안하면 그를 혁명의 선조로 삼아야 했다.

문제는 마르크스가 볼리바르를 신통치 않게 평가했다는 점이었다. 마르크스는 1858년 쓴 글에서 볼리바르가 게으르고 무능력하며, 남미 해방도 볼리바르의 능력이 아니라 용병들 덕분이라며 보리바르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볼리바르에게는 상당한 보수성이 발견됐다. 좀 궁색하지만 변명하자면, 볼리바르의 보수성은 그가 ‘1830년에 사망해 마르크스의 저작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한편 옛 소련의 학자들은 무오류한 마르크스도 볼리바르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했다고 시인했다. 마르크스의 오해는 ‘볼리바르에 적대적인 2차 문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볼리바르는 동서 냉전기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로 내세워졌다.

정작 마르크스는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봤다. 역사적 필연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 가려면 우선 자본주의를 해야 하는데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1865년 링컨 대통령에게 “귀하가 큰 표 차로 재선에 성공한 데 대해 미국 국민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일화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가 활동했던 시대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간단치 않은 인물이다. 21세기는 마르크스를 좀더 편안하고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때다.

마르크스는 철학자·사회과학자·기자·혁명가였다. 독일의 관념론,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영국의 고전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융합해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 23페이지 분량인 그의 <공산당선언>(1848>은 유럽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파악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출생신고서’와 같은 문헌이다. 그에게 민족보다 계급이 더 중요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국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름으로 공산주의 정권들이 저지른 반인류적 만행으로 1억 명이 희생됐다. 마르크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부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텍스트에는 교조주의와 폭력성이 발견된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그의 사후에 일어났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확고한 생각을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폭력 혁명이 아니라 평화적인 개혁으로 공산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을 모색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동부유럽·인도·식민지 지역에서 공산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의회 민주주의에 적응하는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러시아·중국 혁명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 것이다.

마르크스의 조부·증조부는 랍비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하인리히는 반유대법을 피하려고 루터교로 개종했다. 마르크스도 6살 때 세례를 받았다. 네덜란드계 유대인인 어머니의 집안은 부유했다. 훗날 필립스를 창립했다. 외삼촌은 마르크스의 망명생활에 금전적인 도움을 줬다.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유대인들의 음모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대교 메시아 희구 사상의 세속적 표현이다’라는 주장도 유포됐다.

아내 예니와의 결혼은 ‘미녀와 야수’의 결합


▎마르크스가 태어난 곳. 독일 사민당이 1928년 구입해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법을 공부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철학을 선택했다. 본대학에 다닐 때에는 술과 결투로 소일했다.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에 대하여>(1841)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언론인이 됐다. 1852~1862년에는 뉴욕데일리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서 칼럼과 기사를 기고했다. 뉴욕데일리트리뷴은 20만 부를 발행하는 당시 세계 최대 신문이었다. 마르크스가 딱딱하지 않고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자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와 예니의 결혼은 ‘미녀와 야수’의 결합이었다. 예니는 마르크스보다 4년 연상이었다.
부인 예니는 엄청난 미인으로 소문났다. 마르크스는 추물로 인식됐다. 7년 약혼 끝에 결혼했다. ‘미녀와 야수’의 결합이었다. 예니는 마르크스보다 4년 연상이었다. 지참금도 받지 않았다. 당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이례적이었다.

그 자신이 상당히 교조주의적이었던 마르크스도 왔다갔다했다. 좋게 보면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융통성이 있었다. 1848년 한 연설에서 단일 계급에 의한 독재는 ‘난센스’라고 주장했다. <공산당선언> 이후 6개월 만에 한 말이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을 배경으로 파리코뮌이 등장하자 마르크스는 파리코뮌 또한 ‘난센스’라고 했다. 공산정권은 이런 사실들을 감췄다. 스탈린이 직접 마르크스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길 것을 지시했다.

마르크스 식구들은 가난했다. 그를 공격하기 위해 ‘사치 때문에 곤궁했다’, ‘자신이 공격하는 부르주아처럼 살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과 좀 거리가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경제’는 알았지만 ‘돈’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여유가 좀 있을 때와 극심한 빈궁 상태가 교차했다. 외투를 전당포에 저당 잡혔기 때문에 외출도 못한 적도, 자식이 죽었을 때 관을 살 돈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딸들에게 이탈리아어·프랑스어·음악·미술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엄청난 악필이었다. 가족과 엥겔스만 그의 글을 해독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경쟁자들과 싸우는데 지나치게 기운을 에너지를 낭비했다. 무자비한 필봉을 휘둘러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상당히 거만했다. 명령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휴머니스트였다. 남편·아버지로서는 지극히 순한 사람이었다. 담배도 하고 아편도 했다. 온 가족이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다. 항상 건강이 안 좋았다. 몸 곳곳이 아팠다. 불면증·편두통에 시달렸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 추도사에서 레닌은 “다윈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사족-최고경영자(CEO)가 다른 CEO와 환담할 때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사업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화제로 떠오를 수도 있다. 저쪽 CEO가 “마르크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요”라고 했다가는 다 된 밥에 코 빠트릴 수 있다. 상대편 CEO는 속으로 ‘이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자본가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눈치를 잘 봐야 한다. 눈치를 잘 보려면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그리고 인간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21세기야말로 마르크스를 살펴볼 때다.

[박스기사] 학술적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 홉스봄의 경우


마르크스는 세계 역사, 사회과학, 철학에 엄청난 자취를 남겼으나 그를 직접적으로 추종하는 정당이나 사람들의 수는 급속도로 줄고 있다. 2004년 50권으로 된 영문판 마르크스·엥겔스 전작집이 발간됐다. 학술적으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출간을 둘러싼 분위기는 침통했다.

영국 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이 2011년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How to Change the World: Tales of Marx and Marxism)』를 출간했다. 이 책의 핵심 테마는 ‘마르크스주의로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홉스봄 교수는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로 평가되며 최소한 영국 좌파에게 그는 ‘영국의 국보(國寶)’다.

1917년 출생한 홉스봄 교수는 30년대에 공산당원이 됐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오류와 단점에 대해선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의 추종자로 남았다. 홉스봄 교수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역사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 충실하며 역사의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홉스봄 교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공산권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유럽 좌파 정당 지도자는 없으며, 그나마 주저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공적 인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홉스봄 교수는 “다시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하며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마무리한다.

홉스봄 같은 세계적인 석학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많다. 그들의 학문 업적과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 를 분리할 수 없다. 분명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마르크스의 학문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역사의 진보를 위한 담론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박스기사] 마르크스 가라사대

● 너무나 많은 쓸모 있는 물건을 생산하면, 그 결과는 너무나 많은 쓸모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사람을 위해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를 그에게 팔 수 있다. 그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놀라운 비즈니스 기회를 망치는 것이다.

● 지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수확하는 것을 좋아한다.

●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는 신체적인 고통이다.

● 때가 되면 자연과학은 인간과학을, 인간과학은 자연과학을 흡수할 것이다. 한가지 과학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유재산 폐지’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

● 글 쓰는 사람은 먹고살고 글을 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는 절대 돈 벌기 위해 먹고살고 글 쓰면 안 된다.

● 관료에게 세상은 그저 그가 조작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 철학자들은 그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를 스스로 만든다.

마르크스의 인생

1818년: 프로이센 라인주 트리어시에서 출생
1835~36년: 본대학에서 공부
1836~41년: 베를린대에서 공부
1841년: 예나대에서 철학 박사학위
1842년: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됨
1843년: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 파리로 이주
1847년: 런던으로 이주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의 지도자가 됨
1867년: 『자본론 I』 출간
1883년: 런던에서 사망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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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호 (201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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