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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경영 

한국 대기업 최고경영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지난 10여 년간 한국 기업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뜨거운 열정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젠 아니다.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려선 곤란하다. 냉정하게 뒤도 돌아봐야 한다. 계절이 변하듯 시장 환경이 급변했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진다. 기업가 정신이 충만했던 창업주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전면에 나서고 있는 2, 3세는 성공 경험은 물론 실패 경험도 없다. 한국 기업이 100년 기업의 터전을 닦으려면, 첫 번째가 큰 성공 뒤에 찾아오는 부작용을 경계하는 것이다. 포브스코리아가 ‘경영의 오만(Hubris)’을 10월호 커버스토리로 다룬 이유다.

“Why did nobody notice it?”

2008년 11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런던정치경제대 8층짜리 건물 오픈 행사에 참석했다. 영국 잉글랜드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사회과학 특화 공립대로 1990년 이후 8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여왕은 신축 건물 개관 축하 행사에서 덕담 대신 “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나?”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

여왕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가 있다. 2007년 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유럽에까지 영향을 주던 시기였다. 영국도 금융위기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 어느 누구도 금융위기를 예상하지 못했고, 금융위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상황이었다.

2011년 영국에서 오만학회 설립, ‘휴브리스’연구 본격화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소장은 “오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가 오만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면서 “모든 사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에피소드는 인도 출신 경제학자이자 ‘공식 통화 및 금융기관 포럼’ 의장으로 활동 중인 메그나드 데사이(Meghnad Desai)가 2015년 펴낸 『HUBRIS(오만)』라는 책을 통해 소개됐다. 그는 ‘경제학자는 왜 위기를 미리 예견하지 못했고, 우리는 다음에 올 위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라는 부제로 이 책을 쓴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휴브리스(오만)’를 꼽았다. 거시 경제학의 큰 흐름으로 꼽히는 케인스 학파와 신고전주의 학파는 자신들의 이론 안에서만 경제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자신들의 이론만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져 세상의 변화와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질문에 교수들이 다양한 해명을 했지만, 여왕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듣진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 질문은 휴브리스가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을 설명하는 데 잘 어울린다. 본지가 휴브리스를 주목하는 이유다.

휴브리스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자만 혹은 자부심이 큰 인간이 신을 화나게 해 신의 영역에 도전해 몰락을 자초하는 경우’를 뜻한다. 한국에는 오만으로 번역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창의경영 연구소 조관일 소장은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창조적 소수들이 빠지기 쉬운 대표적 오류로 휴브리스를 지적했다”고 설명했다.

휴브리스 연구는 ‘오만학회’라고 알려진 영국의 다이달루스 재단(Daedalus Trust, 2001년 설립)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만학회가 탄생한 것도 유럽의 금융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이유를 찾고자 함이었다. 이들은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휴브리스를 지목했다. 경제·경영에 집중했던 휴브리스 연구는 현재 심리학과 정치학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오만학회는 매년 다양한 주제의 콘퍼런스를 열고 있다. 2014년 11월에는 영국 심리학회와 함께 ‘리더십:스트레스와 휴브리스’라는 주제의 콘퍼런스를 열었다. 심리상담 기업에서 최고 심리학자로 일하는 있는 길리언 하이드(Gillian Hyde)는 휴브리스에 대해 “리더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들은 피드백을 원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임직원들도 그들의 리더를 비판하는 것을 더욱 꺼려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오너형 최고 경영자 휴브리스에 빠질 가능성 높아

한국에서도 기업경영 전문가나 경영학자들이 휴브리스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기업 문화가 휴브리스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 총수는 대부분 상속을 받아 그 자리에 오른 오너형 최고경영자가 많다. 이는 수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월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는 미국 포브스지가 공개한 주식 부자 중 한국·미국·중국·일본의 상위 40명 부자를 분석했다. 한국의 부자 40명 중 25명(62.5%)이 상속형 부자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상속형 부자는 10명(25%), 일본은 12명(30%), 중국은 1명(2.5%)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 왜 문제가 될까. 기업을 소유한 경영자가 휴브리스에 빠질 가능성이 다른 경우보다 높다는 것이 논문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2011년 8월 나온 ‘최고 경영자의 유형이 휴브리스 형성에 미치는 영향(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 강동수)’이라는 석사 논문이다. 논문 저자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73개 회사 최고경영자의 유형 및 휴브리스 등 개별 기업의 자료를 수집해 분석했다. 그는 최고경영자의 유형을 소유 경영자, 전문 경영자, 내부 승진 경영자, 외부 영입 경영자로 분류했다. 연구 결과 소유 경영자가 전문 경영자에 비해 더 큰 휴브리스를 보여줬다. 외부 영입 경영자도 내부 승진 경영자에 비해 더 큰 휴브리스를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이런 환경 탓에 한국 대기업에는 혁신과 변화가 더디다는 분석이 높다. 조순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2015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30대 기업 명단을 보면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바뀐 게 없다”면서 “혁신과 파괴가 없는 자본주의는 정말 위험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철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자의 휴브리스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사업전략→경쟁력 강화, 수익성 향상→경영자 자신이 최고라고 믿기 시작→성장을 관리하기 위한 강력한 보좌진 구축→외부적으로 자만 표출, 내부적으로 통제 치중→자기 결단과 혁신성 억제→현실 안주 상태로의 진입, 그리고 몰락’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업이 성공하면 경영자는 자신의 능력에 의해 가능했다고 생각하고, 그 성공을 지키기 위해 경영자가 모든 일을 결정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기업 내에 경영자에게 바른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조직 내 임직원들은 점차 리더에게 복종과 두려움만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조직의 혁신 분위기는 사라지고, 리더는 휴브리스에 빠지기 쉽다는 설명이다. 서강대 경영학과 박종훈 교수는 “대부분의 재벌 기업이 이제 2, 3세대로 넘어가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런 후계자에게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바른말을 잘 못한다”면서 “그런 환경에서 휴브리스가 생기고, 자신의 오만을 바깥에서 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곤 한다. 그게 재벌의 갑질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영자가 휴브리스에 빠지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영국 에그햄에 있는 로열 홀러웨이대에서 ‘리더십과 조직론’을 가르쳤던 데니스 투리시(Dennis Tourish) 교수는 리더들을 향해 “리더들은 자신이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소장도 “오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가 오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면서 “모든 사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 리더나 경영자는 위험의 조짐을 발견하면 판단 오류를 수정하고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공하는 기업과 실패하는 기업의 차이점은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나온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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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호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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